2주 간의 분노와 화해

2006년 9월 13일
공화국 교시

8월 13일 도쿄에서 야스쿠니 참배 반대 집회에서 시작되어 8월 25일 홋카이도 최북단 사르후츠무라에서 강제징용 노동자 유해발굴로 마무리된 2006년 8월의 2주일은 내리쬐는 햇살보다 더 뜨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동아시아 공동 워크샵 참가자들은 이 시간의 의미와 감동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니, 동아시아의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만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고민의 시작에는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공유하지만 매듭짓지 못했던 하나의 슬픈 역사가 놓여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일본이 아시아를 침탈했던 사건입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의 선량한 국민들은 물론, 홋카이도, 오키나와, 조선, 대만, 중국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혼란으로 몰아갔습니다. 원치 않는 전쟁으로 내몰린 아시아의 사람들,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억지로 끌려가야 했던 노동, 성(性)유린, 민족 파괴, …..

강제연행된 조선인의 사무친 낙서

강제연행 조선인의 모습

1997년도 워크샵 유해발굴 ⓒ김성용, 1997

아시아를 재앙으로 몰아갔던 제국주의 일본은 미군의 원폭투하 이후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원폭으로 인한 피해를 내세우며 자신들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였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아시아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갔던 제국주의의 핵심 세력(전범)들을 일본 수호 전쟁신으로 모시며 국가 지도자들이 나서서 참배하고 받들고 있습니다. 더욱 경악할 것은 억울하게 끌려갔던 아시아 사람들의 유해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일본의 책임이 아니라며 보상과 유해 반환을 거부하면서, 전쟁에 내몰렸던 아시아 각국의 전사자들의 영혼은 ‘일본인(식민지 일본의 주민)’인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일본의 전쟁신으로 만들어버린 사실입니다. 일본 전쟁신을 모시는 제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에는 수 천명의 아시아인들이 유가족의 동의나 허락 없이 무단으로 합사되었있습니다. 이는 제국주의의 망령 속에 억울한 영혼마저 얽혀놓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2006년 8월 한국, 일본, 대만, 오키나와 시민들은 도쿄 시내에 모여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정치지도자들에게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반대와 아시아인들의 무단 합사를 반대하는 뜻을 강력하게 전달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항의의 몸짓이 아닙니다. 일본의 우경화와 제국주의화를 그대로 두고보지 않겠다는 아시아 시민들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땀이 줄줄 흐르는 8월 중순의 도쿄를 아시아의 시민 천 여명이 함께 촛불을 들고 거리를 걷는 것은 일본 역사 상 보기드문 강력하고 힘찬 모임이었습니다.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은 일본 언론들이 이 행동에 주목한 것도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얼마나 아시아 각국의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는지를 일본 언론들도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촛불로 동아시아 평화의 연대를 꿈꾼다

천여명의 함성이 도쿄의 거리를 삼켰다

거리에 나서기 전 모습 ⓒ김두진, 2006

어둠의 야스쿠니에 ⓒ강현진, 2006

촛불로 밝힌 야스쿠니 NO! ⓒ조현상, 2006

8월 15일 저녁, 동아시아 공동워크샵 참가자들은 도쿄를 떠나 일본 최북단의 작은 마을 사르후츠로 향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분노했던 그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되어 일본군 비행장을 짓다가 쓰러져간 조선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발굴을 위해 한국과 중국 뿐 아니라 150여 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발굴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발굴이 진행되고 몇 점의 뼈조각으로 남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찾아가면서 분노를 가라앉히고 화해하는 법을 배워갔습니다. 일본의 건전한 사고를 갖는 시민들과 함께 삽질을 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노동자들에게 제사를 올리고, 한, 중, 일의 과거에 대해 토론을 하며 함께 미래를 향할 것을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발굴 전 교육 ⓒ김하늬, 2006

출토된 유해를 앞에두고 제를 올리는 스님들 ⓒ김하늬, 2006

출토된 갈비뼈와 엉덩이뼈 ⓒ한양대학교 박물관 유골발굴단, 2006

노출된 유골조각, 사발, 병 ⓒ김성용, 2006

수습된 유골조각 ⓒ김성용, 2006

수습된 유골조각 ⓒ김성용, 2006

출토된 유해 ⓒ박재현, 2006

감식소로 옮겨진 유해 ⓒ김하늬, 2006

출토된 유해분석 ⓒ충북대 유해발굴센터, 2006

정치적 노선, 이념, 사고방식을 떠나 순수한 인간에 대한 존중과 예의! 우리는 같은 아픔의 역사를 가졌던 아이누들을 만나 고통을 나누고 기쁨을 키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과거에 대해 냉철히 고민하는 젊은 일본 대학생들을 만나 역사의 매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더 철저하고 엄밀하게 과거에 대한 진상을 밝힐 때, 더 큰 화해와 진정한 동반자로서의 신뢰가 시작됨을 함께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노 뿐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함도 알았습니다.

비가 오는 가운데 발굴 준비

일본 참가자 ⓒ김하늬, 2006

토론 모습 ⓒ김하늬, 2006

헌화하는 일본 참가자 ⓒ김하늬, 2006

정말 무더운 8월이었습니다만, 우리는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더 뜨겁게 고민하고, 더 치열하게 싸우며 서로를 보담을 방법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좀 더 정교하게 동아시아의 과거를 발굴할 상시 운영 기구를 한, 중, 일 정부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오르는 가슴을 가진 동아시아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공식적이고 항구적으로 일제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찾아내고 보상하는 기구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8월이, 그 아름다운 기억이 한 번의 지나가는 타오름으로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들이 동아시아의 더 크고 환한 미래를 비추는 횃불의 첫 심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느 유족분의 말씀이 생각합니다. “이렇게 학생들이 나서서 우리 아버지를 찾는데, 정부는 무얼했나?” 그렇습니다. 이제, 이 일에는 정부가 나서야 합니다.

현지주민과 유족의 만남 ⓒ김하늬, 2006

사찰로 옮겨지는 유해 ⓒ김하늬, 2006

마지막으로 우리의 블로그와 다음 미디어 기사에 놀랄만큼 뜨거운 반응을 보여준 네티즌 여러분과 미디어 다음 측에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우리의 기사에 호응을 보내주실 때마다 우리는 더 힘을 내서 삽을 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참가자들의 감동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이 느낌은 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한 기름진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헤비죠 그리고 평화마을 블로거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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