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공 61호]희망

재외공관소식
2006년 10월 19일

내게는 그저 수치와 상처로만 이미지화돼 있는 시대가 조선시대부터 80년대까지다. “당파싸움만 일삼”으며 여성을 비하하던 조선,그러다 홀랑 바보같이 나라를 빼앗겨 버린 조선, 폭력과 억압의 식민지 시대, 다른 강대국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며 치른 분단과 전쟁, 과거 청산 없이 식민지 시대의 근간을 그대로 해서 세워진 공화국, 타락과 부패, 군사 쿠데타, 숨조차 쉴 수 없었던 독재시대, 밀실야합으로 이루어진 ‘말로만’ 문민정부, 그리고 곧이어 터진 IMF. 자부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나의 초라한 뿌리, 결코 내 것이라 말하고 싶지 않은 내가 속한 공동체의 역사. 어릴 적 우리들은 “문화는 당연히 미국이 최고,물건은 일제가 최고”인 줄 알고 자랐다. 여전히 내가 미국소설과 미국영화, 미국음악에 그토록 큰 호감을 느끼는 건 그 때문인지 모른다. 70년대와 80년대의 소위 근대화란, 남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라 내 것을 부정하고 남이 되고 싶어 노력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얼마전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책을 정리하다 보니 [경성기담], [조선 왕 독살사건], [조선 선비 살해사건],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등 일제시대에서 근대까지를 배경으로 한 사회/문화사, 혹은 풍속사 책들이 눈에 띈다. (특히 이 책들은 최근 <CSI>등 범죄수사물의 인기와도 연계되는 듯.) 이 책들은 현재 베스트셀러로 올라 있고, 이러한 현상은 비단 요 근래 반짝 현상이 아니라 몇 년 전부터 꾸준히 계속된 현상으로 알고 있다. 한편 영화쪽에서는 한창 7,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한참 제작되고 있는 듯. 다소 우회적으로 그 시대의 분위기를 조심스럽게 그려냈던 <품행제로> 등을 생각해 본다면, 그 시대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입을 여는 영화들이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듯 보인다. 이미 그 시대를 직설법으로 다루는 영화 <잘 살아보세>가 이번 추석에 개봉했고, 줄줄이 제작중인 것으로 안다. 강풀의 <26년>도 곧 영화화될 것이라 한다.

조선 왕 독살사건 이덕일, 다산초당

우린 말하자면 <황비홍>과 같은 영화, 즉 고난과 굴욕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액션 코미디” 영화를 만들 정도의 심적 여유를 아직 갖추고 있지 못하다. <미트 페어런츠>에서는 초 꼴보수의 자식과 히피의 자식이 결혼소동을 벌이며 그 상처를 보듬어안고 화해를 하는데, 우리에겐 여전히 극복 안 되는 상처가 너무나 많다는 것. 하지만 저 시대를 배경으로, 정사가 아닌 풍속사와 야사들이 나온다는 것, 보다 ‘대중적인 재미’의 분야가 활발해진다는 것은 그 상처를 극복할 힘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다모>의 유행 때 합리적이고 체계를 갖춘, 엉성하지 않은 조선을 그려내는 것이 바로 역사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시대의 특징이라고 문유님께서 적절히 지적하셨던 것처럼. 나는 그것이 결국, 90년대 이루어낸 민주화의 결실이라고 굳게 믿는다. (노무현이 희망이 아니라, 노무현같은 새파란 – 준비 안 된 – 정치가를 심지어 대통령으로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의 힘”이 희망인 거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하며 그 공을 엉뚱하게 노무현에게 다 돌리고 그리고 다시 노무현에게 실망하고 있는 것같지만.)

비정규직 대량화나 신자유주의화와 같은, 물적 뿌리를 통째로 흔들어 버리는 거센 폭풍을 맞으면서도,  이 사회가 실은 아주 빠른 속도로 나아지고 있다고 느끼는 건,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느끼는건, 이런 커다란 흐름이, 숲의 그림이 어느 순간 또렷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에 일희일비하고 한숨을 쉬면서도, 오히려 ‘절망’을 하지 않는다. 나는 20년 후, 30년 후의 이 사회가 너무나 궁금하다. 그렇기에 오늘을 더 열심히 살아야지, 라고 다짐한다. 싸우거나, 열심히 싸우는 사람 열심히 응원하거나. 나의 희망은 사실, 오늘도, 지금도, 싸우고 있는 사람들 덕에 가능하다.

재외공관 독서권장위원회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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