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젬마, 그리고 포털, <공연윤리위원회>, <영진공 67호>

공연윤리위원회
2007년 1월 23일

<그림 읽어주는 여자>로 스타가 된 한젬마의 대필 의혹은 정지영
아나운서의 마시멜로 파문을 닮았다. 본인이 강력하게 부인을 하고, 그럴수록 의혹이 더 커져만 갔다는 사실이. 출판사에서 내놓은
한젬마의 초고를 읽어보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투박할지언정 묶어놓으면 그래도 책 한권을 만들 수 있는 게 초고일진대,
한젬마의 그것은 거의 메모 수준으로, 출판사에서 작가에게 제시한 기획안 정도에 불과했다. 서둘러 닫아버린 한젬마의 홈페이지를
가본 사람이라면, 그녀가 별반 글쓰기에 소질이 없다는 걸 대번에 알아차렸을 거다. 정지영 파문이 출판사의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한젬마 사건은 저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더 큰 배신감을 준다. 물론 초고 자체를 아예 내놓지
못한 정지영에게 더 큰 죄를 물을 수도 있지만, 마시멜로가 번역서라 누가 해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데 비해 한젬마의 책은
저자가 자신의 지식과 감성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라는 점에서 죄질이 더 나쁘다고 할 것이다.

비록 제대로 된 사과는 하지 않았지만, 정지영 아나운서는 자신이 맡고 있던 프로그램에서 물러남으로써 간접적이나마 잘못을
시인했다. 하지만 한젬마에게 그런 일을 기대하는 건 어려울 듯하다. 언론에서 더 이상 파문이 확산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현대 사회는 언론의 시대며, 아무리 큰 사건도 언론에서 보도를 해주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되어 버린다. 예전의 종이신문이 갖고
있던 의제 설정권이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로 넘어온 건 이미 오래 전의 일, 한젬마 사건을 나같은 사람이 알게 된 것도 그게
24일 밤 네이버의 주요 기사란에 떴기 때문이다. 수백개의 댓글이 달리는 걸 보면서 “이거 문제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었는데, 그 다음날 아침 한젬마의 대필 의혹은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일제히 사라져 버렸다. 이 사건을 처음 보도했고
네티즌의 댓글에 일일이 답을 해주며 의욕을 보였던 한국일보 기자 역시 ‘초고비교’ 이후 후속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댓글을 달고
싶어도 기사가 없는데 어떡하나? 나를 비롯한 네티즌들은 닭 쫓던 개가 된 심정으로 나무 위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정지영 사건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의혹이 확산되자 네이버에서 댓글을 차단해 버린 것. 그뿐이 아니었다. 정지영 아나운서는 2005년 12월, 한경 비즈니스와의 인터뷰 도중 이런 말을 했었다.

“(번역하는 동안) 몸은 고단했지만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번역을 하면서 몇 번이나 읽었고 지금도 틈나는 대로
다시 읽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가르침을 주는 책이에요. 방송에서도 여러 번 읽어 준 적이 있는데 청취자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이제는 어떤 이야기가 몇 페이지에 있는지 알 정도가 됐어요.”

이 인터뷰는 “자기 번역본과 다른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물음에 정지영 옹호자들이 했던 “바빠서 책을 안읽어봤을
것”란 변명을 무색하게 만든다. 정지영 의혹에 달린 수많은 댓글들 중엔 이 기사가 실린 사이트를 링크시킨 게 몇 개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네이버 측에서 원 기사를 삭제해버려, 해당 주소로 들어가도 기사를 찾을 수가 없게 된 것. 그래서
난 네이버는 왜 정지영을 이렇게 감싸는지 의아했었는데, 한젬마 대필의혹을 보니 할말을 잃게 된다. 댓글차단이 네티즌의 공분을
사서 더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유치한 전략이라면, 기사 자체를 빼는 건 아예 사건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고도의
전략이 아닌가.

그 결과 정지영은 갔지만, 한젬마는 살아남을 것이다. 한젬마가 TV에 나올 때마다, 혹은 책을 새로 낼 때마다 일부
네티즌들은 “저거저거 대필이래”라며 볼멘소리를 하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즐거운 마음으로 한젬마의 지식과 미모를 감상할 것이다.
한젬마의 대필의혹을 신경쓰기엔 사람들이 너무도 바쁘고, 대필과는 비교도 안되는 사건사고는 날이면 날마다 일어난다. 한젬마 사건을
계기로 출판계에서 암암리에 벌어지던 대필이 자취를 감춘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는다 해도 뭐가 문제인가? 당장 내 밥먹고 사는
데 하등 영향을 주지 않는데 말이다. 포털에 모든 것을 빼앗긴 나라, 그 나라에도 새해가 왔다. 새해라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겠지만.

공연윤리위원회 부국장
서민(bbbenji@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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