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텔, 헤어젤 그리고 C군의 희망사항” <영진공 68호>

재외공관소식
2007년 2월 2일

요 얘기는, 아는 사람들만 알듯이 없다가 대학시절 친구들과 자취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러고 산다는 말이 절대 아님을 알려 드립니다. ^.~

남자 넷이 사는 집엔 아무리 사다 날라도 언제나 충분치 않은 물품들이 있기 마련이다.

담배 – 넷중 셋이 흡연자, 그 셋중 둘이 줄담배, 그 둘중 하나가 타고난 빈대였기에, 우린 언제나 담배 기근현상에 시달렸다. 커다란 공동 재떨이는 월말이 되면 한번씩 뒤집어지기 일쑤였고 자신의 몸을 꼼꼼하게 불사르지 못한 장초들은 다시한번 화형을 당해야 했다.

면도날 – 지 피울 담배도 안 사는 놈이 면도날는 사겠는가? 목숨을 건 “목욕탕에서 일회용 면도날 한박스 뽀리기 작전”이 성공할때까지 우리는 언제나 피를 섞어야 했다. 얼굴에 난 피. 윽.

– 단순히 식탐이라는 단어로 메우기엔 위장의 크기가 너무나 거대한 B군이 있는 한, 우리의 쌀통은 언제나 바닥을 쳤다. B군은 새벽 3시에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기상,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다 된 밥을 다시 볶아 만든 김치볶음밥을 한 후라이팬 가득 꾸역꾸역 먹고 나서 새벽 4시쯤 다시 잠들곤 했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던 남성용품은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헤어젤이었다. (그냥 젤이라고 쓰려다가.. 다른 젤도 있으니..)

대부분의 예비역 복학생 – 또는 퍼머나 삭발,장발이 아니면서 머리에 돈 쓰기 아까워하는 남자들 – 들이 그렇듯 우리 넷 모두는 아침에 감은 짧은 머리에 젤을 떡칠, 초등학생 찰흙 만지든 주물럭거려 만든 헤어스타일을 유지했는데, 약속이나 한 듯 머리 사이즈들 또한 만만치 않아
아침마다 엄청난 양의 헤어젤이 머리에 발라지고, 굳어졌으며, 저녁이면 씻겨져 나가는 일을 반복했고
당연히 엄청난 양의 젤이 필요했으며 당연히 엄청난 사이즈의 제품도 일주일을 못 버티고 빈 통이 되어버리곤 했다. (분리수거통에 4,5개씩 쌓여나가는 젤 통을 보고 이것들이 젤을 이용해 뭔가를 제조하고 있는것이 아는가, 하는 오해도 누군가에게 한번쯤은 받아 봤지 싶다.)

근데 요 젤이라는 놈이, 자기것만 딱 사다놓고 쓰기도 좀 그렇고, 급하면 남의 것이라도 꼭 써야하며, 남이 좀 썼다고 뭐라고 따지기도 그렇고, 또 남이 쓰는것에 초연하자니 아깝기 짝이 없고, 그렇다고 일일이 같은 양을 나누어 쓰기도 상당히 난해한 물건이라, 우리 넷은 언제나 공급과 분배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자친구와 외박을 하고 들어온 H군이 지금 막 카이사르를 담구고 온 부르투스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보급이다!”
그리고, 가방을 열어 꺼냈다.
무엇을?

“모텔 토마토” 라는 대문짝만한 글씨와, “훔쳐가지 마세요. 훔쳐가면 천벌 받습니다.”라는 소문짝만한 글씨가 매직으로 새겨진 초록색 젤 한통. 오오오.. 부라보!!!
H군은 우리의 영웅이 되었다. 최초로 공동 소유 물품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으며, 누구도 부담없이 사용가능한 헤어젤의 탄생. 그 동안 헤어젤의 소유권 다툼과 배분 문제들로 인해 야기되었던 갈등, 분노, 기타 쓰잘데기없는 등등이 한번에 뚜레뻥 뚫리듯  뚫리는 순… 이건 좀 오바고.
어쨌건간에 우리는 일용할 마약을 손에 쥔 약쟁이같은 심정으로 H군을 칭찬해 마지 않았다.
역시나 해결책은 가까운 곳에 있는것. 여자친구와 즐떡라이프를 즐기는 H군과 모텔을 지 집처럼 드나드는(그러면서 지 돈으론 담배한갑 사본적이 없는)B군을 보유한 우리가 아닌가. 모텔에 있는 것들이 또 뭐가 있더라?  헤어 스프레이?  면봉? 비누? 오호라 생활용품 한방에 해결이구나.
대체 우리가 왜 그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우리 넷 모두는 법학과 재학생이었고, 고소당하지 않은 범죄는 범죄가 아니라는 매우 기술적인 측면의 형법적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아파트엔 생활용품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B군은 평생 다시 만나지 않을 여인네와 평생 다시 가지 않을 동네에 있는 평생 다시 가지 않을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체크아웃 시간에 빈방들을 순회하며 무려 4통의 젤을 확보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려 기립박수를 받았으며
꼼꼼스런 성격의 H군은 챙겨오는 양은 많지 않았으나 언제나 부족했던 물품들을 적제적소에서 공급하는 센스를 발휘해 부동의 왕좌 자리를 지켜냈다. 특히 가정용 상비약 세트가 그의 가방에서 나왔을 때 우리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표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소독약이 없어 상처가 생기면 소주로 소독하던 우리에게 소독용 알코올과 과산화수소수의 2종 소독약은 문명생활 입문시절의 타잔과도 비슷한 기쁨을 우리에게 안겨주기 충분한 것이었다.
뒤늦게 여자친구가 생겼던 본인 역시 친구들의 기뻐하는 표정을 상상하며 여자친구님의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에 임했다. (구체적인 진술회피.. 무슨일 생겨도 난 살아 남을란다. 훗)

그러나 24년의 외길인생을 걸어온 우리의 C군, 그는 친구들이 마치 떡치고 왔다는 훈장마냥 쌓아놓는 생활용품들을 보면서 남들은 모를 열등감에 시달렸으니, 당체 그는 모텔에 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친구들을 위해 뭔가를 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다 하더라도, 혼자서 모텔에 갈 수는 없지 않은가. C군은 언제나 이 점을 아쉬워했다.
뭐, 사실은 떡이 치고 싶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월은 길고, 살다 보면 절대 이성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일들이 생기기도 하는 법이다.
이를테면, C군에게 멀쩡하게 생긴, 아니 꽤나 예쁘고 착한 여자친구가 생기는 일 따위 말이다.
또 살다 보면 정말 천인공노할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를 테면 C군이 드디어 아리따운 여자친구와 합방에 성공하는 그런, 우주적 기적이면서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노와 의문과 불만과 짜증을 동시다발적으로 뱉어낼수밖에 없는 그런 일 말이다. 

C군 본인에게나 주변사람들에게나 믿을 수 없는 밤이 지나가고 다음날 오전.
현관문짝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C군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이미 우리사이에 약속된 언어이자, 자랑질의 또다른 표현인 단어를 외쳤다.

“보급이다!!”
우리는 감동해 마지 않았다. 우리가 C군한테 보급을 다 받는구나. 오래살고 볼 일이다. 흐흐흐.
그래, 뭘 가져 오셨나?

“너희들이 상상도 못할 물건이다!!”
떡을 친 것이 자랑스러운 건지, 모텔방에 미치된 물건을 슬쩍 해 온것이 자랑스러운 건지 전혀 구분을 두지 않은 목소리로 C군이 소리쳤다.
그래그래. 어제밤에도 그랬겠지만, 그렇게 극적으로 희번덕댈 필요 없다구. 친구.
모두의 기대 속에서 C군이 자랑스러운 동작으로 가방을 열어 졎혔다. 우리 셋의 주둥이도 함께 최대한으로 벌어지고 말았다. C군은 정말 어마어마한 것을 챙겨왔는데, 그것은…

VCR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게 맞다. VCR하면 젤 먼저 떠오르는 그거...

“우하하하하!!! 이제 우리도 비디오를 빌려다 볼 수 있다구!! 어때?”
“……”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우린 그 VCR을 딱 삼일만 사용하고 모텔에 돌려 주었다. 진짜다.
만약 모텔 주인 아저씨가 이 글을 본다고 해도.. 이미 늦었슴다. C군은 지금 미국에 있거든요.

사는 게 뭐 다 그런 거지
거의 없다.(http://sinerg.ddanzimovie.com)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