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 발보아, “과욕이 부른 주책” <영진공 70호>

상벌위원회
2007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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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y is Back!
과욕의 주책인가, 아름다운 투혼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드는 당혹스러움은 아마도 내가 아주 젊은 나이도 그렇다고 4, 50대의 장년층도 아닌 나이이기 때문이리라. 한 인간으로서,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 안에 열정과 야수를 품고있고, 그렇기에 그 열정을 좇아 분투하는 인간의 이야기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추락하는 남자와는 또다른, 건강한 땀냄새와 활활 타오르는 열정, 더욱이 그것이 인생의 비애와 슬픔과 고통, 좌절과 소중한 순간의 고귀함과 기쁨을 아는 자가 신중하게 태워나가는 열정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내가 록키를 보며, 씨네21에 실린 한겨레 김은형 기자의 ‘노추’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내내 곰씹고 당황했던 건, 록키의 크루(crew)에 속해있던 록키의 아들, 록키 주니어와, 마리의 아들 스텝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미리 말해두자. <록키 발보아>는 아주 잘 만든 영화이다. 영화에는 이제 안정된 삶을 누리는, 그러나 점점 메인 무대에서 밀려나가는 사람이 그 안정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자신 안의 열정을 발산하기 위해 새삼 성실하게 노력하고, 다시 한번 도약하는 이야기이다. 벌써 여섯번째에 달하는 속편이 이 정도의 완성도를 가지고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경이롭다. 속편답게 전편들의 화면을 매우 유효적절하게 이용하면서도, ‘우려먹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아주 짧은 커트로만 삽입되어 있는데, 이는 적재적소에서 과거 록키 시리즈의 팬들에게 충분히 향수를 제공하는 기능을 하는 한편, 세월이 가져온 변화와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본질을 매우 훌륭하게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클래이맥스인 메이슨과 록키의 경기 장면은 복싱영화들 중 그 어떤 작품에도 뒤지지 않을 명장면으로 매우 스타일리시하게 연출되어 있다. 일단 경기 시작을 위해 양 선수가 입장하고, 인사를 나누는 장면들을 마치 TV를 통해 중계 화면을 보듯 연출하면서 이 경기에 열광하는 관중들(실제 경기장의 관중들뿐 아니라 TV 앞에 모여있는 시청자들까지)의 모습을 하나로 연결한 것은 곧 세대와 장소의 구분, 세월이 가져온 변화의 장벽을 무너뜨리며 과거와 현재를 공존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이는 스크린 밖에서 16년만에 록키 시리즈의 새 속편이 개봉하면서 옛 팬들과 새로운 젊은 영화관객들이 한 스크린 앞에 앉는 현실의 모습과도 그대로 겹친다. CG 효과와 카메라 앵글의 시점을 적절한, 이러한 TV 중계화면과 같은 효과는 경기의 2라운드까지 계속되는데, 여기까지는 물론 경기를 지켜보는 구경꾼으로서의 시점이며, 두 선수의 전력을 가늠하게 해주는 매우 객관적 위치에서의 시점이다. 그러나 3라운드로 가서부터는 카메라가 본격적으로 링 안에서 록키와 메이슨을 따라잡으면서 복싱 메인 경기의 박진감과 파워풀한 힘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 장면들에서 쓰인 여러 가지 화면 트릭들은 깔끔한 편집과 함께 대단히 효과적인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고, 그러면서도 관객을 아주 빠르게 경기에 몰입시키는 한편 록키의 관점으로 감정이입하도록 만든다. 카메라는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분명 외부에 존재하는데도, 철저하게 록키의 시점샷인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록키에게 감정이입하도록 만든다. 이는 단지 내레이션의 사용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내레이션은 거의 마지막 라운드, 록키가 쓰러질 무렵 단 한 번 삽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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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왜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졌는가? 노익장이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과정에 있어 자신의 친아들 및 아들뻘(혹은 손자뻘)의 인물을 철저히 자신의 응원자 위치로 내려보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잔뜩 주눅들어있었던 록키 쥬니어가 아버지와 화해하는 방식이라는 게, 심지어 직장도 때려치고는 (관중석이 아니라) 록키 바로 뒤에서 팀원으로 등장하는 것이라니? 게다가 마리의 아들 스텝마저 이 꼴로 등장한다. 젊은 아이들이 각자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뒤에서 수발들고 응원하는 자리로 기어들어오게 만드는 아버지란, 아무리 겉으로 친절하고 다정할지 몰라도 자식의 인생을 끝까지 틀어쥐고 흔드려는 과욕과 폭압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록키 발보아가 김은형 기자의 지적대로 ‘노추’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책’같은 말로도 부족하다. 스탤론도 조금은 쪽팔리는 게 뭔지 알았던지 경기의 승패를 판정에서 결국 록키가 지는 걸로 설정해놓긴 했지만, 만약 경기마저 이기는 것으로 설정했다면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집어다 스크린을 향해 던졌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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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싶냔 말이지... 왼쪽이 스텝, 오른쪽이 록키 주니어.


가뜩이나 사회가 무한경쟁화 하면서 젊은 아이들이 취직을 못 하고 그 결과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채 부모와 기성세대에게 의존해야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그런 사회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도저히 자립할 수 없는 여건을 만들어놓고는 자립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향해 그 나약함을 성토하고 꾸짖는 것까지야 기성세대의 특권이라 인정해준다 쳐도, 자식 길을 틀어막고는 기어코 자신의 들러리 세우는 부모라니, 젊은세대를 자기 기리 가도록 응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영광에 봉사하고 응원을 바칠 것을, 그것도 ‘자발적으로’ 할 것을 요구하는 기성세대라니, 내가 <록키 발보아>를 보면서 결코 감동하지 못한 이유이다. 이건 보수를 넘어서 ‘수구’라고 부를 만하다. 아무리 그게 ‘아버지들의 판타지’라 해도. 이제 겨우 30대 중반인 나도 지금의 20대를 위해 내가 어떤 롤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무얼 남겨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과연 나는 록키를 보며, ‘나도 록키처럼 나이 먹어도 내 꿈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며 희망을 가져야 하는가, 내 앞에 길을 막고 서서 자신에게 영광을 바칠 것을 강요하는 기성세대의 가랑이 밑을 언제까지 기고 있어야 할지를 걱정을 해야 하는가. 그게, 내가 <록키 발보아>를 보면서 느낀 당혹스러움의 정체다.


ps. 영화에 대한 불쾌감과는 별개로, 엔딩타이틀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을 뛰어올라 섀도 복싱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클립은 30년에 걸친 한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장면으로 아주 적절하고도 감동적이다.


상벌위 선도부 위원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록키 발보아, “과욕이 부른 주책” <영진공 70호>”의 6개의 생각

  1. 공감가는 글입니다 제가 불편했던 이유를 설명해주시는군요

  2. 웃기삼 아버지의 명성때문에
    직장내에서 자꾸만들려오는 아버지의이름을 불편해하고 지우고싶어했지만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열정을 존중해주는 의미에서 세컨을 본거지
    직장을그만둔것은 자신이 하고싶었던 원래자아를 찾아냈다는 의미고
    다시시작하는 시발점에서 아버지의 열정을 존중해준다는 의미인거다
    중요한건 세컨을봤다는것이아니라 그이후가 중요한거지
    영화에서는 충분히 그 뒤를 예측할만한 단서를 주고있어
    바보야

  3. “경제적으로 도저히 자립할 수 없는 여건을 만들어놓고는 자립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향해 그 나약함을 성토하고 꾸짖는 것까지야 기성세대의 특권”

    글쎄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은 그저 열심히 일했을뿐입니다.

  4. 징글징글하네요.
    잘 되면 내탓 못되면 기성세대 탓입니까?
    록키의 인생의 1/10000이라도 치열하게 살아보셨는지. ㅉㅉ

  5. 이 글 몇번을 다시 봐도..공감이 안되네요.. 영화를 보기 전에는 실베스타스텔론이 돈이 궁해서 드디어 하지말하야 할것을 파는것인가 했는데.. 결과는 최고였습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그의 인생과 우리들 삶속에 누구나가 느끼고 생각하고 돌아가고 싶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집에 쌓여서 함부로 논할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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