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 - 아버지의 깃발> <영진공 71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7년 3월 24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한 장의 사진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미국으로서는 진주만을 기습당한 이상 전쟁에 개입하지 않기가 어려웠겠지만, 일단 한번 개입한 이상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는 건 정책결정자가 아니라, 자신의 꿈을 위해 한발짝씩 준비하던 어린 소년들이었다. 전쟁은
언제나, 그 사회에서 “가장 어린 성인들”의 목숨을, 그리고 그외 다른이들의 사회적 목숨을 대규모로 담보로 잡는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전쟁회의론이 확산되던 시점, 막 상륙작전에 성공한 이오지마에서 날아온 조 로젠탈의 사진 한 장은, AP통신을 타고
전세계에 퍼져나갔고, 꺼져가던 전쟁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붙였다. 사진 속 인물들 – ‘우리의 살아돌아온 아들들’ – 이 본토로
송환되어 전쟁기금 모금 캠페인에 동원됐고, 사람들은 타지에서 죽어나간 자신의 아들을 눈물 속에 묻으며 다시 한번 지갑을 열어
전쟁기금을 낸다. (그러고도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은 일본에 원폭을 투하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소문난 공화당 골수 지지자이자 보수주의자. 그러나 이제껏 이스트우드가 걸어온 길은 우리가 보통 ‘공화당
골수 지지자’라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를 배반한다. 그는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가정을 보듬어 안으며, 젊고 어린 생명들을
염려한다. 이스트우드가 보여주는 아버지의 깃발은, 젊은 아이들의 존경과 관심을 억지로 뺏고 아이들을 협박하기 위해 호화롭게
채색되어 있지 않다. 그가 창고의 상자 구석에서 주섬주섬 꺼내 내미는 깃발은 세월의 먼지와 그간의 상처의 더께가 얹고 여기저기
닳아빠진, 초라하고 더러우며 색이 바랜 빛깔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별로 높지 않은 목소리로, 그 깃발에 있는
얼룩과 더께와 먼지의 사연을 조용히 들려준다. 그리하여 원색의 황홀한 색감과 막 찍어낸 석유냄새가 진동하는 새 깃발이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과 먼지의 때로 찌든 낡은 깃발을 그대로 드러내고, 이것의 아름다움, 즉 진실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전쟁의 참혹상은 단지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머리가 떨어져나가는 참혹한 상륙 전투에 대한 묘사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영화를
제작한 이가 스필버그여서인지 많은 평론가들은 이 상륙작전 씬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빚지고 있다고 너무 쉽게 쓰고
있지만, 글쎄올씨다다. 상륙작전을 마스타샷으로 보여주고 팔다리 머리 떨어져나가는 걸 묘사하면 다 스필버그란 말인가. 무엇보다도
나는 두 화면의 정조가 매우 달랐다고 생각한다. 굳이 말하자면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액션 영화고,
<아버지의 깃발>은 전쟁드라마이며, 두 상륙작전은 각 장르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찍혔다(고 생각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주 정조가 긴박감과 어떤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잔혹한 통과단계와 같은 느낌이었다면, <아버지의
깃발>에서는 철모르는 아이들이 별 대비없이 공포의 세계와 마주친 느낌과 같은. 비슷하면서도 꽤 다르다. 그 장면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기능 때문이기도 하고, 접근 방식 자체가 조금 달랐다는 느낌도 든다. 오히려, 찍힌 방식 자체가 현격히 달라도
<아버지의 깃발>에서의 상륙작전은 <씬 레드라인>에서의 전투씬과 더 비교할 만하다.

그 이오지마에서, 적들은 눈에 잘 띄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공포에 떨던 아이들은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조차 못한 채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영화에서 일본군의 복장과 헬멧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아군과 별 구분 없이 그려진다. 우리는 닥이 죽인
공격자가 흑인인 미군임을 어렴풋하게 알아챌 수 있고, 아이라가, 또다른 미군들이 죽인 이가 정말 몰래 살금살금 다가온 일본군인지
적과 아군이 구분 못한 채 패닉 상태에서 총칼을 휘두르는 아군-미군인지 확신할 수 없다. 살떨리는 전투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최고의 해병’ 마이크마저도 아군 폭격기에 죽는다.  위생병! 위생병!을 부르는 소리는 노년이 되어서도 닥의 귓가를 맴돈다.
영광과 영웅담의 배경이 아닌, 잔혹하고 처참한 전쟁터. 가까스로 세운 승리의 성조기를 과시하기 좋아하는 장관이 가져가자,
병사들은 깃발을 다시 세우란 명령을 그저 로봇처럼 그대로 수행할 수밖에 없고, 이 장면을 찍은 사진은 영광과 감격의 승리의
장면으로 기록된다. 이들의 사진은 계속 형태를 달리해 재현되어 영웅신화가 만들어지고, 평범한 아이들에 불과했던 그들은 자신에
부여된 호칭 ‘영웅’이 사기극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고(혹은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누구도 의도치 않았겠지만 그렇게
캠페인은 ‘사기극’이 된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있다.

비극은 그것이다. 일개 병사의 입장에서, 이미 달리고 있는 전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다는 것. 알면서 동원되고, 알면서도
사기극을 함께 진행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캠페인에 알면서도, 속으면서도 지갑을 여는 것. 그것은 영광의 행동이 아니다.
모두가 치는 박수와 환호 소리에 잠깐 그 순간은 웃으며 영웅의 포즈를 취해주더라도, 그들에게 그 경험은 영원한 상처로 남는다.
그것이 전쟁. 그리고 사회가 전쟁을 받아들이는 방식. 그러나 원작자 존 브래들리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말한다. 진짜 영웅을
기리는 방식은, 그런 식의 신화화가 아니라 오히려 신화를 해체하고 그 안에서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간’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이것이, 보통 권위와 신화화의 방식에 기대어 젊은 세대를 협박하고 속이는 기성세대에 속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젊은
아이들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일 때, 그 진정성과 감동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임종을 앞에 두고 아들을 향해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고,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아버지 앞에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하고, 당신이 나의 최고의 아버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난 존경으로 권위를 얻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진정 좋은 아버지인 것이다. 모든 전쟁을 반대하는 나와, 일단 발생한 전쟁에 대해서 자기가 할 일은 할 수밖에 없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정치적 입장은 현격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아버지라면, 믿고 존경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식 세대들의 ‘전쟁 반대’에 대한 소신과 활동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지켜보고 도와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버지일
테니까.

ps1.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또 깊어진다. 우리같은 젊은 세대들은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그
깊이. 그러나, 노인이 되었다고 모두가 그 깊이를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터이다. 이 이상 걸작을 만들어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 때, 그 정정한 노인네가 들고 오는 다음 영화는 거기에서 더 나아간 걸작을 가지고 다시 내 곁을 찾아온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ps2. 워너 코리아여, 제발제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단 한 관만이라도 개봉해 주세요. ㅠ.ㅠ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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