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프리어즈 - 더 퀸> <영진공 71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7년 3월 26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영화는 영국의 여왕, 특히 지금도 영국에서 왕으로 존재하면서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에 있는 엘리자베스
2세를 중심으로, 다이애나가 죽은 직후 1주일간을 그리며 영국의 군주제라는 정치 시스템이 현재 처한 상황을 분석한다. 큰 줄기를
보자면, 다이애나가 죽고 아무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던 영국왕실이 여론의 뭇매를 맞다가 노동당 블레어 총리의 설득에 결국 대국민
생방송 추도사를 발표하고 모든 왕궁에 조기를 게양하며 장례식에 참석한다는 게 스토리의 다다. 대통령제의 공화정이 마치 정치
시스템의 다인 듯 느끼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그저 다이애나의 죽음을 둘러싼 남의 나라 가십거리를 다룬 영화 정도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독재체제를 경험했고 여전히 그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우리에게 이 영화가 던져주는 의미는 그렇게 가벼운
것만이 아니다.

다이애나 생전에 엘리자베스 여왕과 사이가 그닥 좋지 않았음은 전세계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렇기에 영국 왕실이 보인
‘냉담한’ 태도는 아주 쉽게 왕실의 ‘쪼잔한 완고함’으로 비난받곤 한다. 하지만 영화가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군주의 내적
갈등이란, 다이애나에 대한 사적 감정 차원이 결코 아니다. 애초에 영국 여왕이란 존재 자체가 사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려니와
– 그녀는 영국 그 자체를 표상하는 인물이다 – , 그녀의 갈등은 자신, 나아가 영국 전체가 기반하는 엄격한 전통과 법도를 어느
선까지 수호해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이다. 물론 국민의 집단적 감정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게 민주주의라지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국민의, 혹은 국민의 대리자들의 승인을 거쳐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그 누구든 엄격하게 준수하는 데
있다. 입헌군주정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군주조차 헌법 아래에 있다는 얘기고, 군주조차(아니 군주부터) 법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다이애너’라는 존재가 갖는 특별한 위치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다이애너는 왕족의 친모이지만
이혼을 통해 공식적으로 왕가를 떠난 사람이다. 이 사람을 왕족으로 예우해야 하는가, 아닌가?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자의든
타의든) 평민의 신분이 된 남자는 평민인가, 왕족인가?

이것은 매우 소소한 물음 같지만, 법으로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례는 어떻게 해석하여 처리해야 하는가? 라는,
민주주의 / 법치국가에서 상존하는 어려운 물음의 매우 구체적인 버전이다. 왕실이 취한 입장은 엄격한 규범의 준수인데, 이것이
‘인정머리 없다’고 도의적 비난을 받거나, 해석상의 문제에서 이견과 반박을 받을 순 있을지라도, 절차적 / 규범적 측면에서는
하자가 없으며 충분히 이유가 있는 선택이다. 왕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엄격한 법도와 규칙을,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사람이라 하여
예외로 치는 건 과연 합당할까? 왕실과 영국 전체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이애너의 존재가 이제껏 내려온 왕실의 법과
규칙에서 예외적인, 전례가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고, 여기에는, ‘다이애나’라는 개인이기에 예외를 허락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이애나’의 특수한 위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따라 왕실의 법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단지 ‘다이애나’ 이기에 예외를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은, 법과 규범의 존재 이유를 무색하게 만드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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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완고함이 더 나쁜가, 법질서의 침해가 더 나쁜가?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막 신임 총리로 선출된 토니 블레어의 행보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토니 블레어의 정치 감각을
균형있는 것으로 그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가 포퓰리즘에 영합한 마마보이에 불과하다며 조롱하고 있다. 스티븐 프리어즈는 이
영화에서, 선거 당시까지는 영국 내 개혁세력의 최선두였고 노동당 출신의 최연소 수상 피선출자였음에도 임무를 시작하자마자 지독하게
보수화해버린 토니 블레어의 근원적 한계를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조의를 표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개혁의 최선두로 격식을 지양하던 그가 한편으로는 여왕의 존재에 경도되어 여왕을 한껏 방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여왕에게 ‘왕위 자리가 위험하다’는 일종의 ‘협박’을 통해 (규범 해석상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서) 다이애나 한 사람에게 왕실
법도의 예외를 구하는 내용을 ‘권고’한다. 영화에서도 언급되지만 왕이 버킹검 궁에 거하고 있지 않는 경우 그 어떤 상황이든 –
심지어 왕의 친부모가 죽었다 하더라도 – 버킹검 궁에 왕기가 게양될 수 없다. 국민들은 왕궁에 조기가 게양되지 않았다며 분노하고
왕실을 비난하지만,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해 왕실은 설사 버킹검 궁에 조기를 게양하고 싶어도 게양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토니 블레어의 요구 중에는 다이애너를 당연히 왕족으로 예우할 것은 물론 “모든 왕궁에서의 조기 게양”까지 포함되어 있다.
토니 블레어의 행보의 근원은 뛰어난 균형감각과 타협이 아니라, 포퓰리즘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민주주의의
적이다. 다이애너의 죽음에 대한 왕실의 대응이 결코 합리적이었다 할 수는 없지만, 왕실을 설득하는 근거는 포퓰리즘에 기댄 정치가
아니라 법과 규범의 가치를 인정하는 전제 하에서 이의 해석과 적용의 범위에 근거해야 했다.

지금의 영국 여왕이
‘역사상 최장 재위기간’을 자랑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헌법에 근거해서다. 입헌군주정 하에서는 왕의 자리를 두고 더이상
피비린내나는 전투가 일어날 수 없다. 반면 이것은, 시스템이 만약 민주적 절차에 의해 군주정을 포기한다면, 지금의 왕실은 그
즉시 평민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토니 블레어가 여왕에게 내민 카드는 바로 이 사실을 들어 협박하는 것이었다. 여왕의 입장에서,
물론 그 자신의 안위도 달려있는 문제고 이를 고려하지 않지는 않았겠지만, 이는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는 혁명의 순간이자 영국
최대의 위기가 될 터이다. 여왕은 존재 자체로 영국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결국 여왕은 블레어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만, 이는
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포퓰리즘에 법과 전통이 항복한 예에 속할 것이다. 물론 외면적으로는 ‘시대가 달라졌으니 왕실도 달라져야
한다’는 허울좋은 말로 포장이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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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여우주연상은 당연히 헬렌 미렌 거였다. 그러나 스티븐 프리어즈도 훌륭했다

ps1. 요즘 [키노] 생각이 많이 난다. 아마도 [키노]였다면 몇 달 전부터 <더 퀸> 같은 영화의 사진이
실렸을 것이고, 개봉월 호에는 <더 퀸>과 <아버지의 깃발>의 스틸과 빽빽한 글이 족히 20페이지는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두들 다이애나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만 얘기하지 이 영화의 감독이 바로 그 스티븐 프리어즈라는 사실은
얘기하지 않는다. 90년대 후반만 해도 <더 밴>과 같은 자그마한 영화도 비디오를 통해서나마 소개가 됐지만, 지금은
<미시즈 헨더슨> 같은 영화는 주디 덴치가 나온다 해도 소개되지 못한다.

ps2. 공화국으로 건설된 건 1948년이지만 한국은 실질적으로는 준-군주제였다. (박정희 체제와 김일성 체제,
둘 다 실은 군주제와 대통령 공화제의 과도기적 형태가 아닌가.) 공화정을 당연하게 여기고 태국이나 영국의 군주정을 무시하면서도
추진성과 돌파력 어쩌고 하며 이명박이 대세라는 놈들이나 ‘강력한 대통령’ 어쩌고 하는 놈들 보면 한국에 실질적으로 군주정을
바라는 놈들이 정말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왕도 노예도 아닌 동등한 인간이다, 라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그러니 (서민 출신인) 나도 왕 할 수 있다’로 오해하는 놈들 정말 많다. 민주주의가 뭔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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