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셔니스트>, “예술 – 테크네와 프시케 사이” <영진공 71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2007년 4월 2일

예전에 이야기한 대로 일루셔니스트 감상평 올릴게. 물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어서 이번에도 영화를 보지 못한 횽아들은 백스페이스를
누르라고 말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의외로 일루셔니스트가 재미없다고 말하는 횽아들이 좀 많아서 차라리 메타포들을 알고 보면 훨씬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 사실 이 영화의 반전이라 봤자, 유주얼 서스팩트를 답습하는 정도니 오히려
반전을 기대했다면 별로 영화가 재미없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어? 그래서 반전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는 한에서 메타포에 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뤘으니 봐도 좋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버네버 작은 스포일러도 싫은 횽아들은 요기까지~

1.기술과 예술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 알지? 히포크라테스가 한 유명한 말.

근데 왜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가 하필이면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 했던걸까? 사실 히포크라테스는 예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의술이었어.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 이게 왜 예술이라고 번역이 되었냐 하면 근대 이전에는 예술과 기술의 구분이 딱히
없었거든. 요즘에야 그런 구분이 명확하지만, 예전에는 어떤 사람이 도끼 한 자루를 만들어도 쓰기 좋게 잘 만들면 그건 예술품
취급을 받았어. 그리스어로 그런 예술과 기술을 아우르는 말이 테크네(techne)야. 정확히 말하면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술(術:techne)는 길다”였어. 히포크라테스에게는 의술이 곧 예술이었던 거지.

그런데 근대에 와서 사물끼리의 모든 질적 차이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수량과 금전적 가치에 의해서만 판단되면서 예술과 기술은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맞이하게 되는 거야. 맥도날드 햄버거를 생각해봐. 다른 패스트푸드도 마찬가지고. 어떤 음식도 잘 만들면
예술의 경지가 될 수 있지? 하지만 속도와 수량, 그리고 이윤의 크기를 고려해서 철저하게 제작되는 음식들은 절대로 그런 예술성을
획득할 수 없어. 그냥 어떤 이미지의 복제품일 뿐이지. 그건 오리지널 햄버거가 아냐. 오리지널 햄버거를 모사한 햄버거 비슷한 그
어떤 것일 뿐이지. 요즘 모든 음식들이 그렇잖아?  비니니 우유에는 바나나 과즙이 없어. 바나나 맛을 내는 향료가 있을 뿐이지.
이게 바로 현대의 조건이야. 진짜가 없는 가짜의 세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는 복제의 세계(이건 프레스티지에서도 한 번
언급했었지?) 엔디워홀의 통조림 그림 같은 팝아트는 현대의 이러한 속성에 주목한 예술이야. 키치말야.

2. 영화의 위치

그런데 현대의 그런 예술과 기술의 괴리 속에서 한 특별한 예술의 형태가 태어났어. 처음에는 단순히 기술에 불과했고 또, 그
기술을 이용해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저급한 상업수단에 불과했지만 곧 대중예술의 총아가 되어버린 것. 바로 영화였지.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것처럼, 영화는 예술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곧 대중예술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지. 일루셔니스트는 처음 아이젠하임의
유년기를 무성영화 초기의 질감으로 표현하는데서 암시하듯이. 이런 근대 이후의 예술, 특히 영화의 존재조건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어.

3.근대의 조건

프레스티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는 근대화의 시대였어. 영화에서는 근대화의 화신 같은 인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가
나오는데, 영화 속에서 그의 말과 행동은 모더니티의 특징들을 아주 잘 드러내주고 있지. 1.봉건적 관습과 사고 방식을
경멸하고(황제에 대한 반란획책), 2.세상에 존제하는 모든 현상을 과학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 매우
지적이고 지배욕도 강하지. 그의 방으로 통하는 길은 수많은 사슴과 동물들의 박제로 장식되어 있어. 한때는 살아있었던 생명들을,
죽은 것으로, 자기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재화로 만들려는 노력. 마술의 신비를 과학적 설명으로 치환하여 죽어있는, 생기를
잃어버린 따분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이 장면을 떠올려, 설마 영화를 위해서
진짜 박제를 동원한건 아니겠지? 후덜덜) 바벨에서도 일본인 소녀의 집에 있었던 사슴 박제가 기억나지? 이런 사냥꾼과 박제의
이미지야 말로 조금은 상투적이 되어버린 근대 탐험가, 정복자의 이미지지. 이것이 바로 소유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진 근대, 자본과
제국주의의 논리였어. 황태자는 황제가 이끌던 늙은 봉건제국을 전복시키고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근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에 차
있었지. 그가 단순히 자신의 권력강화의 일환으로 폰테쉔을 아내로 맞이하려 했듯이, 그에게는 사랑도 신비의 대상이 아니었어.  

4. 예술, 혹은 영화의 역할

그에 비해 아이젠하임은 전통 가구공의 자식이었어. 그들은 아직 산업화되기 이전의 장인들로 예술과 기술이 분리되기 이전의
사람들이야. 장인은 기술자와 예술가를 모두 아우르는 호칭이었어. 아이젠하임이 마술을 접하게 된 이야기가 영화에서도 그려지고
있는데, 의미심장한데가 있어. 노인은 일정한 주거가 없는 떠돌이 마술사였고, 나무의 환상도 같이 가지고 다녀. 그가 사라지자
나무도 같이 사라지지. 나무는 보통 신화에서 옴팔로스, 즉 세계의 중심에서 신비나 천계로 통하는 관문을 상징(재크와 콩나무,
단군신화, 싯달타의 보리수 등등)하는데, 사실 세계의 모든 부분이 신비가 머물 구석 없이 격자화 된 근대에서는 그런 나무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거든. 이미 근대에서 그런 나무는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만 가능한 대상이 되어버렸어. 노인이 아이젠하임에게
가르쳐준 것은 바로 가슴속에 심을 수 있는 환상을 만드는 방법이었어.

근대에 어울리지 않는 장인, 혹은 일루셔니스트가 세상의 모든 신비를 몰살해버린 근대의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또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 있었을까?

아이젠 하임은 공녀를 만나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신분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헤어지게 되지. 그 이후 오랜
떠돌이생활에서 돌아와서 성공한 마술사가 돼. 마스터(장인)이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눈부신 테크네를 가진
아이젠하임이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제국의 지배에 미묘한 균열을 만드는 작업이었어.
아이젠하임이 길을 가다가 어린 아이들에게 동전을 나누어주는 장면 기억 나? 사실 이 장면은 영화의 표면적인 줄거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불필요한 장면이지. 아이젠하임의 재능은 이미 마술쇼를 통해서 알려졌고, 따뜻한 마음씨는 공녀와의 로맨스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인식이 되었으니까 말야.

이 장면은 환상을 통한 제국의 전복이라는 메타포가 깔려 있어. 사실 화폐라는 것은 자본-제국주의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한
필수요소야. 이러한 화폐경제가 호황-활황-불경기-공황 싸이클을 되풀이하면서 자본의 지배력을 공고하게 해 나가는 거지. 여기서
화폐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어. 그건 바로 제국의 지배력 자체에 반기를 드는 행위가 되니까 말이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위폐범을 거의 살인죄와 같은 정도의 중범죄로 다스리는 전통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생겨난 거야.  아이젠하임은
아이들에게 마술을 보여줌으로서 환상을 심어주는 동시에 무한하게 증식되는 화폐도 선물하는데, 이것은 바로 그의 예술이 근대제국에
대한 반란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거지.

아이젠하임은 한 발 더 나아가 제국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까지 해. 황태자가 주최한 마술쇼에서 아이젠하임은 아서왕의 신화를
원용한 검 뽑기 마술을 선보이지. 황제의 권력이 정말 하늘에서 주어지는 천부의 것이라면, 지상의 가장 절대적인 권력자는 황제여야
하고, 황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칼을 뽑을 수 있어야 해. 하지만 실제적으로 황제의 검 뽑기, 즉 절대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건 아이젠하임이지. 황제는 안색이 변해. 황제는 처음부터 아이젠 하임이 보여주는 마술의 신비가 자신의
근대적 마인드에 의해서 정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마술을 마술(완전히 해석되지 않는
신비를 간직한 예술)로 즐기고 싶어할 때도 고집스럽게 해석(정복)을 시도하지.  하지만 그런 시도가 좌절되고 반대로 자신의
권위가 농락당하자, 황제는 아이젠하임을 끌어내리려고 음모를 꾸미게 되는 거야. 마치 장미의 이름에서 호르헤 수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웃음의 시학을 없에 버리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지.

5. 기술로서의 영화는 어떡게 에술이 되는가?-영혼찾기

그런데 과연 아이젠하임은 어떻게 마술의 기술들을 예술, 신비로움이 없어진 근대에서 신비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예술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연금술의 비밀은 무엇일까?

바로 이 비밀의 메타포를 간직한 영화 속의 소품이 폰테쉔에게 아이젠하임이 선물한 목걸이야. 그 목걸이는 정교하게 제작된 기술의
산물이지. 하지만 그 기술 안에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메타포가 표현이 되어 있어. 나무조각에 놋쇠로 모양을 낸 나비 문양이
보이지? 나비를 그리스어로 psyche라고 하지. 그런데 프쉬케에는 영혼이라는 개념도 있어. 그 나비는 바로 절대로 물화될 수도
없고 측정도 불가능한, 그래서 절대로 근대적으로 해석될 수 없는 영혼을 상징하는 거야.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영혼이 머리가 아닌
심장에 머문다고 생각했어. 영혼이 열정을 가지면 심장이 타오르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 말이지. 아리스토텔레스도 뇌는 단지 심장에서
나오는 피를 식히는 역할을 할 뿐, 사람의 마음은 심장에 있다고 생리학에서 설명했지.

자 이제 그 목걸이를 정교하게 비틀어보자. 뭐가 되지? 바로 심장이야. 폰테쉔이 마음속으로 항상 간직했던 아이젠하임의 얼굴,
그것이 바로 심장에 있었던 거야.(난 어째서 평론가들조차 이렇게 노골적인 은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대부분 평들을
보면, 평론가들조차 감상이 반전이나 마술자체에 맞춰져 있는데, 정말 그게 안보이는건가? 일반 관객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평론가들은 당연히 그런 훈련이 되어 있을꺼라고 생각했는데;;)

영혼이 없는 기술은 절대로 예술이 될 수 없어. 황제의 일급 과학자들이 아이젠하임의 기술을 흉내 냈지만 그것이 예술이라기보다는
조잡한 흉내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들의 기술에는 프쉬케가 머물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거든. 그래서 철저한 자본논리에 의해
제작된 블록버스터 무비나 선전영화들은 예술이 아니라 역겨운 맥도널드 햄버거일 수밖에 없는 거지.

반면 사람들은 그 기술 안에서 영혼을 발견할 때, 그것이 한낫 꾸며진 트릭인줄 알면서도 감동받고 사실로 믿게 되는 거야.  방금
말한 나비문양의 펜던트를 조금 생각해보자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장치라는 걸 금방알 수 있어. 4조각으로 나뉜 펜던트를 그런식으로
비틀고 반으로 나누어 열어볼 수는 없잖아. 그러려면 최초의 접점이 2개가 필요한데 꺽이면서 그 접점이 유지될 수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거든 마법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마법은 그걸 가능하게 하지. 바로 상사력과 믿음의 힘으로. 조니 뎁 주연의 “네버랜드를 찾아서”본 횽들은 알거야. 예술과
마법은 신화적 상상력과 믿음에 있지 분석과 비판안에서는 생명력을 잃고 만다는걸. 그래서 아이젠하임이 사기죄를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마술이 모조리 트릭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때도 사람들은 아이젠하임의 마술이 현실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나 근대적 마인드에 경도된 사람들은 그런 영혼의 가치를 잘 파악하지 못해. 아이젠하임을 추적하는 경감이 전혀
추측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수건을 물어다준 나비(프쉬케)였는데도 불구하고 경감은 더욱 화려한 오렌지나무의 비밀에만
몰두하지. 사실 경감이 폰태쉔의 목걸이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오렌지 나무의 비밀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지. 아마도 현대의
영화작가들은 기술이 근대의식에 경도된 일반 대중을 예술로 이끌 수이는 당의정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봐. 결국 경감은 간직했던
목걸이(프쉬케)가 사라지는 지도 모르고 소년이 배달한 오랜지나무에 마음을 빼앗기게되는거야.

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도 같은 함정에 걸려들었어. 사실 이 영화에서는 은유와 상징을 통해서 마음을 적셔야 하는 영화인데,
어떤 관객들은 당시 기술수준으로는 불가능한 현실성 없는 고증을 탓하지. 이미 그 순간 그 관객들은 황태자처럼 “너무 똑똑해서
탈”이 되는 헛똑똑이가 되는 거거든.

반면 아이젠하임은 오렌지나무를 경감에게 주고라도 자신의 프쉬케를 찾으려고 했던 거지.

멋지게 속아 넘어간 경감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 희대의 사기꾼이자 예술가인 “더 일루셔니스트” 아이젠하임에게 탄복하지. 그러면서
아이젠하임이 떠난 이 행복한 “처 푸른 초원 위의 집”을 상상하는 거야. 이 장면이 유치해보인 사람은 과연 나뿐이었을까?
당연하지. 현실이 아닌 마음속의 상투적인 환상을 그렸기 때문에 유치해보일 수밖에 없어. 계속 말하지만 그런 목가의 풍경은
근대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잖아? 아마 아이젠하임은 사람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커다란 도시에 숨어서 비밀경찰의 추적을 피했겠지.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그런 목가에 대한 환상이 필요해.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 말이지. 처음에 소년 아이젠하임의 마음을
빼앗았던, 노인이 나무라고는 없는 농경지에 환상의 나무를 심었듯이 말야.

이 영화는 프레스티지와 시대적 배경과 소제를 공유하는 쌍둥이 같은 영화야. 근대성에 대한 비판의식이 있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영화에서 마술사들이 상징하는 의미는 전혀 달라. 참 신기한게 이런 비슷한 영화들이 전혀 다른 주제의식을 가지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완성도를 가지고 나온게 참 신기해. 그래서 아마 이 영화는 나한테 프레스티지와 이란썽 쌍둥이처럼 느껴지는 영화로 기억될
꺼야.

언제나처럼 긴글 읽어줘서 고마워.

사족: 듀나가 일루셔니스트 발음 문제를가지고 트집을 잡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더라. illusionist에서
s의 발음기호는 우리나라로 치면 ㅅ과 ㅈ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발음인데 그걸 어떻게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겠어. 지 하고 싶은대로
하느거지.–;; 사실 s발음 하나만 잘해도 영어가 얼마나 부드러워지는 건데.ㄲㄲ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특수 2팀
Rockid(rocki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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