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리더쉽과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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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인간 일반에 해당되는 것이든, 아니면 민족주의적 사고든 간에 한국인 혹은 한국문화 고유의 특성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국인의 장단점을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한 인물, 이순신 장군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순신 장군은 한국인을 움직여서 불멸의 업적을 남긴 최고의 리더라 할 수 있다. 그는 17번의 주요 해전에서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 그 해전 중에는 12척 대 300여척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명랑대첩도 포함된다.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적이었고, 동시대의 그 어떤 해군조직보다도 강력했다. 그런 그가 한국인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는 한국인의 전통적 특성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인은 원거리 대면을 선호한다.

이순신은 절대로 부하들이 직접 적과 마주치치 않게 했다. 실제로 당시 전투기록을 보면 조선군은 성안에서 활을 쏠때는 강했으나 직접 적과 마주치는 전투에서는 거의 언제나 졌다. 조선군의 무기체제에는 활만 있을뿐 창이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았다. 즉, 조선군은 먼거리에서 쏘기에 능했고, 적과 마주보고 육박전을 펼칠 각오는 절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이순신 역시 거의 모든 해전을 원거리 포격전으로 해결했다. 일본의 해전은 육박전을 지향하는데, 그들의 장기인 육박전을 할 기회를 아예 주지 않은 것이다.

둘째, 한국인은 카리스마에 약하다.

임진왜란때 전사를 보면 앞서 말했듯 전면 격투전을 벌이면 조선군은 대부분 졌으나, 신기하게도 사상자는 별로 없다. 말 그대로 그저 사라져버렸다. 즉, 조선군은 직접 적과 대면하면 싸우기 보다는 그냥 도망쳤다. 예외는 곽재우나 권율같은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휘관이 있을때 뿐이다. 이런 명장의 지휘하에서 조선군은 그 누구보다도 악착같이 싸워 이겼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만약 지휘관이 죽으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모두 도망쳤다. 원균이 죽었다는 칠천량 전투에서도 사실 주요 장수들은 모두 죽지 않고 도망쳤다가 이순신이 부임하자 다시 기어나왔다. 이순신은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노량해전에서도 자신의 전사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천하무적 조선수군이 순식간에 종이호랑이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히딩크가 사라진 한국축구의 무기력 처럼 말이다.

셋째, 한국인은 이기적이고 실리적이다.

앞서 조선군이 질 것 같으면 다 도망가버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랬을까? 그들은 어쩌면 전쟁의 목적 같은 것을 공유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에서처럼) 그들은 자기들이 내세우는 깃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체면은 중시했으나 명분은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명분이고 명예고 내가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이것이 그들의 모토였다. 한국인은 애초부터 이기주의자이자 실리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이순신은 자기 부하들이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가족의 안전을 자기 군의 안전이나 승리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부하를 믿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부하들을 늘 닦달했다. 그는 부하를 엄하게 처벌하고, 확실하게 포상했다. 훈련만큼이나 이 상벌체계의 유지에 최선을 다했다. 이 시스템을 통해서 이기적이고 실리적인 부하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덧붙여, 이 시스템을 거꾸로 이용한 이들도 많다. 선조가 대표적인 인물. 그가 임진왜란 내내 저지른 일이라고는 몰래 도망가기와 전공을 세운 이들 역적으로 몰아 죽이기 뿐이었다. 그 덕분에 단 한번도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는 원균이 수군통제사까지 되는 말도 안되는 일도 벌어지고, 그 원균이 당대 최강 조선수군을 단 한큐에 말아먹어버리는 블랙코미디가 벌어졌다. 어쩌면 이런 인간들이 위에서 오래 오래 군림한 탓에 한국인이 더 실리적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 유성룡이 선조의 미친 짓을 어느 정도라도 제어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그때 끝장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한국인의 성격이 디지털 매체로 인해서 변화했을까?
그렇지 않은 듯 하다.

1. 한국인은 원거리 대면을 선호한다:
디지털 매체는 원거리/간접 대면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한국인은 그걸 매우 좋아한다.

한국문화는 직면해서는 대화나 토론을 하는 일과 잘 맞지 않는다. 누군가는 조선시대의 활발한 당쟁이나 상소들을 예로 들면서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그때의 논쟁도 서로 자신의 입장을 견고히하는 논쟁이었지, 관심사를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토론은 아니었다. 성에 들어가서 원거리 전투를 해야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나,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서 간접적인 논쟁에 실력이 발휘되는 것이나 어쩌면 비슷하다. 그리고 이런 특성은 보다 확실한 원거리 활동을 보장하는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에서 더 잘 발휘되었을수도 있다. 한국인은 애초부터 대면 만남보다는 원거리 만남을 선호하는 것이다.

2. 한국인은 대세와 카리스마에 약하다:
한국인은 주류를 매우 중시한다. 디지털매체에서도 결국 주류만 남기를 바란다.
멱함수의 법칙은 한국에서 더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

한국의 3대일간지 점유율이 외국에 비해서 독과점수준임에도 아무도 그것을 문제시 하지 않는 이유, 이동통신이 결국 4자에서 3자로 조만간 2자 체제로 변화해가는 현상, 어떤 분야에서든 2개 이상의 강자가 남지 못하는 현상도 아마 이런 특성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한국은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확실한 강자와 그 라이벌 체제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오히려 불안해 한다. 한국인은 선택의 여지가 많아지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선택을 해야 하면 대부분 그냥 도망치고 만다.

3. 한국인은 이기적이다:
한국인의 유일한 신념은 자기 자신이다.
대부분의 매체는 결국 사적인 연결을 위해 사용된다.
공적인 의사소통은 매체 사용의 주류가 아니다.

한국인은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시한다. 개인이 조금 확산된 가족 이상을 원치 않는다.
또한 한국인은 명분을 내세울지는 몰라도 절대로 그 명분을 믿지는 않는다.
집단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수 있을만큼 신념이 강한 사람은 한국문화에서 결코 정상이 아니다. 노사모가 완전히 수용되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런 지점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핵심은 결코 공적인 메시지나 학술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 배후에 깔린, 혹은 그 메시지의 사적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책이나 어떤 선언이 발표되면, 그 선언의 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 공유자(가족, 친지)와 이를 공유하는 활동이 작동한다. 그것은 80대 20의 비율이상일 것이다.

4. 한국인은 이기적이되, 개인적이지는 않다:
언제나 대세를 따르기를 바라고, 대세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한다.
모든 정보기관의 촉각은 거기로 향한다.

개인주의는 신념을 필요로한다. 하지만 한국인은 신념을 믿지 않는다. 고로 이기주의자이지만 개인주의자는 아니다. 한국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 신념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대세이냐이다. 왜 한국 부자들이 한국에서는 돈을 쓰지 못하고 외국에 나가서 돈을 쓸까? 튀고 싶어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제대로 튈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취향이 없다. 그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 취향을 집단의 눈총속에서도 주장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자기의 취향이 소수인 곳에서 자기를 주장하기 보다는, 그것이 대세인 곳을 찾는다. 아니 대부분은 개인취향 자체가 없으므로 그냥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하는대로 따라서 외국으로 갈 뿐이다.

5. 한국인은 실리적이다:
질 보다는 양이 우선이다. 적은 비용은 카리스마 다음으로 중요하다.

명품바람이나 고급소비성향들이 부각되면서 사람들이 착각하게 된 것이 한국인의 소비취향이 고급화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양을 우선시한다. 같은 조건이면 가장 싸게 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짝퉁을 선호하는 것, 공짜를 선호하는 것, 불법복제가 일상화되어 있는 것이 한국문화의 기본이다. 명품을 찾고, 프리미엄 서비스를 선호하고, 저작권에 예민한 것은 한국문화가 절대로 아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중국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제품의 소구지점은 결국 카리스마와 가격 뿐임을 의미한다.


영진공 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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