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핑 베토벤>, 위대한 영화란 바로 이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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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핑 베토벤>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루드비히 반 베토벤과 그의 필사가였던 안나 홀츠의 이야기입니다. 청력을 상실한 말년의 베토벤이 9번 합창 교향곡을 완성할 무렵, 연주용 악보를 써주는 유능한 카피스트가 필요했는데 작곡가의 꿈을 가진 젊은 여인 안나 홀츠가 그 일을 맡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안나 홀츠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좀 더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창조된 가공의 인물입니다. 그리고 베토벤과 안나 홀츠 사이에 있었던 일 역시 가공의 에피소드들입니다. 따라서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의 전기 영화가 아니라 베토벤의 삶을 소재로 예술 자체와 그외의 많은 주제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만들어진 영화라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럼에도 <카핑 베토벤>은 전기 영화로서의 요소가 가장 우선입니다. 오늘날 음악의 성인으로까지 불리우는 고독한 천재 음악가의 삶과 내면을 이처럼 선명하게 투영시켜준 영화도 없었지 않나 싶습니다.1) 무엇보다 영화의 플롯으로서 작용하는 뛰어난 음악 자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베토벤의 것이니까요. 여기에 예술과 신앙, 여성과 사랑 등에 관한 묵직한 주제들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는 영화가 <카핑 베토벤>입니다. 물론 많은 주제들을 다루기만 하고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한다면 그리 성공적인 영화라고 할 수가 없을테지요. <카핑 베토벤>이 놀라운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다양하고 깊이 있는 주제들을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형상화하여 전달하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영화를 완성하는 데에 필요한 구성 요소들이 완벽하게 짜여져 있는 데다가 그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 또한 다른 어떤 곳에서도 얻기 힘든 엄청난 힘과 감동이 있으니, 이런 영화야 말로 완전한 영화, 위대한 영화라고 불러줘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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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핑 베토벤>에서는 신에게 선택된 자의 영광과 고통을 체현해낸 에드 해리스의 연기를 가장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냉정한 인상의 외모로 많은 액션 영화에 등장해왔지만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잭슨 폴락의 전기 영화 <폴락>(2000)과 마이클 커닝햄 원작,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 아워스>(2002)에서의 면모를 기억한다면 베토벤을 연기하는 에드 해리스가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입니다. 포스터에서의 사진과 달리 <카핑 베토벤>에서 에드 해리스는 모세와 같은 성인이자 한 인간이었던 베토벤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2) 에드 해리스의 존재감에 다소 가려지기는 했지만 <트로이>를 통해 널리 알려졌던 다이앤 크루거의 미모와 연기도 이 영화 속에는 잘 녹아들었다는 생각입니다.3) 물론 다른 어느 배우들도 이상하게 튀거나 쳐지는 일은 없었지만요.

<카핑 베토벤>은 폴란드 출신의 여성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유로파 유로파>(1990)와 <올리비에 올리비에>(1992)를 직접 쓰고 연출했던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93년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블루>(1993)의 공동 각본으로 참여해 이름을 올리기도 했었더군요. 그외 <비밀의 화원>(1993)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프랑스 시인 랭보를 연기했던 <토탈 이클립스>(1995) 또한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주요 연출작입니다. 99년작 <세번째 기적>에서는 에드 해리스가 주연이었으니 <카핑 베토벤>이 이들에게는 두번째 만남이었던 셈입니다. 체코의 영화 학교에서는 밀로스 포먼의 학생이었으며 고국에 돌아와서는 크쥐시토프 자누시의 조감독을 지냈던 그녀 자신이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안나 홀츠와 같은 욕망과 고민을 경험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 아그네츠카 홀란드에게 <카핑 베토벤>의 연출을 맡긴 일부터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술’ 영화가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의미있는 작품이 된다면 그것처럼 아쉬운 일이 없을 겁니다. 예술가의 삶을 소재로 삼는 영화가 위대한 영화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예술을 직접 하는 사람과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평소 예술 분야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사람들에게까지 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카핑 베토벤>이 취하고 있는 플롯 상의 전략은 영화 중반에 일찌감치 합창 교향곡의 초연 장면을 통해 관객들을 일단 넉다운시킨 다음, 그와같이 ‘자기 영혼이 담긴 작품’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를 천천히 들려주는 방식입니다.4) 이런 영화의 플롯을 미리 알고 본다고 한들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가 의도하는 바를 따라가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이 영화 자체가 스스로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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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게리 올드먼 주연 주연의 <불멸의 연인>(1994) 또한 멜러 요소를 가미한 픽션이면서도 베토벤의 삶과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작품이죠. <불멸의 연인>이 베토벤의 유년 시절에서 중년까지의 삶을 다뤄주고 있다면 <카핑 베토벤>은 그의 말년과 죽음의 순간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바꿔 말하면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을 연기하는 에드 해리스를 보고 나면 그를 대신했을 만한 다른 배우들의 얼굴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합창 교향곡을 지휘할 때의 모습은 오랜만에 배우의 연기 자체만으로도 큰 감동을 얻는 경험이 되었고 후반부 직접 바이얼린과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모습에서는 정말 보통 배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찌기 안소니 홉킨스가 <광란의 시간>(1990)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미국 출신 배우 중에 안소니 홉킨스와 견줄 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는 에드 해리스 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3) 음악에 관해서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대접받던 마에스트로 베토벤이 자신의 천사요 뮤즈라고 부르며 무릎을 꿇거나 괴팍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관객들에게 납득시키려면 상대역 캐릭터의 재능도 재능이지만 아무래도 당장 눈에 보이는 부분에서부터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트로이>에서는 참 마네킹 같은 배우가 다 있구나 했었는데 다이앤 크루거에게 <카핑 베토벤>은 배우로서의 경력을 완전히 새롭게 해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4) 때문에 합창 교향곡이 초연되는 장면까지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고 완성도 역시 뛰어난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정말 그걸로 영화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러닝 타임은 이후로 3분의 1이나 5분의 2 정도가 더 진행됩니다.

ps. <카핑 베토벤>은 앞으로 <아마데우스>(1984)와 좋은 비교가 될만한 작품입니다. 베토벤과 모짜르트의 이야기라서 뿐만 아니라 두 음악가처럼 되고자 했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이면서 그 결말은 전혀 상반되니까요. 물론 안나 홀츠가 가공 인물인 반면 살리에르는 실존 인물이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카핑 베토벤> 속에서 살리에르에 대한 언급이 직접적으로 나온다는 점 또한 흥미롭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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