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스프레이>, 춤과 노래에 묻혀버린 사회사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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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62년의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풍자 정신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메시지, 춤 좋고 노래 좋고, 유머 감각도 훌륭해서 보는 동안 낄낄거리며 잘 봤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 별로 할 말이 없다는게 고민입니다. 뮤지컬 영화와 나는 왜 이토록 궁합이 잘 맞지를 않는 건지 계속 생각했습니다. 88년 존 워터스 감독의 영화가 2002년에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다시 태어나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것을 다시 영화화한 것이 지금의 <헤어스프레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단순히 20년만의 리메이크가 아니라 <시카고>(2002)의 성공 사례와 같이 기존의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흥행성이 이미 입증된 좋은 뮤지컬을 보다 많은 관객들이 보고 즐길 수 있게 해주는 ‘복제 생산과 동시 감상 매체’로의 전환 작업의 결과물이란 거죠.

지금은 거의 못가보고 있습니다만 한때는 연극도 보러 많이 다녔습니다. 특히 소극장 연극은 지척거리에 있는 배우들의 숨소리와 미세한 표정들까지 놓치지 않고 관람할 수 있는 꽤 특별한 자리죠. 지금 한창 자기 역할에 몰두하고 있는 내 앞의 저 배우가 진행 중이던 극 중의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와 평범한 목소리로 말을 건내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러나 그런 가능의 영역을 옆에 두고 계속 극 중의 상황과 자기 배역 안에 머물기로 약속하면서 형성되는 묘한 긴장 같은 것이 연극 무대의 매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뮤지컬이나 오페라도 실제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이라면 그런 현장감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을텐데, 이상하게도 뮤지컬 영화라고 하면 뭔가 맥이 빠지고 시시하다는 생각부터 앞서곤 하니 이거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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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던 <물랑 루즈>(2001)는 뮤지컬 영화이면서도 왠만한 멜러 드라마 이상의 감흥을 얻을 수 있었던, 저에게는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 물론 노래와 춤도 많이 좋아했었죠. 뮤지컬 영화 중에 좋았던 또 다른 예는 존 카메론 미첼의 <헤드윅>(2001)이 있습니다. <헤드윅>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먼저 선을 보이고 영화로 다시 찍은 작품이었잖습니까. 하지만 <시카고>나 <드림걸즈>(2006)는 노래 참 잘하네 하는 것 이상의 감흥은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 차이는 결국 뮤지컬이냐 아니냐 하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러티브가 충분하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춤과 노래를 강조하느라 지나치게 단순화시켜버린 내러티브의 많은 뮤지컬 영화를 통해 ‘뮤지컬 영화는 그저 그렇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는 거죠. 물론 대사를 하다말고 갑자기 춤 추고 노래하는 뮤지컬 장르 본래의 특성 자체가 드라마에 몰입하기 힘들게 만드는 부분도 있을테고요.

<헤어스프레이>는 뮤지컬 영화인 동시에 코미디물입니다. 인종 차별, 외모 지상주의, 상업화된 대중 매체 등 시대적으로 상당한 갈등이 빚어질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영화는 그런 문제에 골몰하지 않습니다. 백인들은 록앤롤과 빅밴드 풍의 노래를 부르며 스윙 댄스를 추고 흑인들은 펑키한 리듬 앤 블루스와 소울 풍의 춤과 노래로 재능을 뽐냅니다. 젊은 출연진들 뿐만 아니라 엽기적인 특수 분장을 한 존 트라볼타를 비롯해 미셸 파이퍼, 크리스토퍼 워큰, 퀸 라이파, 제임스 마스덴(아니, 이 친구는 원래 이렇게 노래를 잘 했던 건가요? 깜짝 놀랐습니다) 등 잘 알려진 배우들도 지루해질 틈을 주지 않고 멋진 노래와 웃음을 선사합니다. 좋게 말하자면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 낙관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며 시종일관 잘 달리는 것이지만 그런 만큼 쉽게 잊혀지고 마는 단순한 내러티브의 단점은 명백합니다. 악인은 망하고 새로운 희망의 물결은 승리한다는 거죠. 하지만 세상이 어디 뮤지컬 무대처럼 술술 굴러가 주던가요. 기술적으로는 흠 잡을 데가 없는 완벽하지만 “그리하여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식으로 끝나는 디즈니 명작만화 같은 판타지의 허전한 뒷맛을 저는 <헤어스프레이>에서 경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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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원작 뮤지컬에서 그대로 가져온 훌륭한 곡들이 참 많은 영화인데요, 특히 여주인공이 ‘사회적 편견을 내재화하고 있는’ 자기 엄마에게 들려주는 Welcome to 60’s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곡입니다. 헤어 스프레이가 처음 세상에 선을 보인 62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미국에 의해 냉전 체제가 자리를 잡고 50년대의 반공주의와 매카시즘이라는 극보수주의의 광풍이 한 차례 몰아닥친 시기 이후의 미국 중산층 사회를 지칭합니다. 인종 차별 철폐 등의 인권 운동과 자유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 시기이면 60년대 후반의 히피 운동과 베트남전 반대 시위로 이어지는 사회사적 맥락을 끌어안고 있는 작품이 <헤어스프레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포레스트 검프>(1994)가 어린 시절을 너무 깡시골에서 보내느라 놓쳤던 부분을 <헤어스프레이>는 볼티모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상당히 잘 다뤄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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