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 현실 세계로 밀려들어온 인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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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의 세계는 무한하다고 말들 하지만 프로젝트 기획서를 내밀면 늘 ‘왜 애니메이션이지?’라는 대답만 돌아왔다”고 곤 사토시(今敏) 감독이 말했더군요.1) 저 역시 새로운 애니메이션 작품을 접할 때 마다 ‘이 작품은 왜 애니메이션이어야만 했을까’라는 질문을 꺼내들곤 합니다. CG가 아무리 발달했어도 여전히 실사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에서는 표현하기 힘든 영역이 분명히 있고, 그런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방식이 바로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그 버릇을 여태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을 보면 ‘이 정도라면 실사로 했어도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2) 실사로 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실사로만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아무래도 실사 영화에 비해 애니메이션 장르 자체를 한 수 낮게 취급하는 고약한 선입견이 있는 듯 합니다.

츠츠이 야스타카 원작의 <파프리카>는 ‘곤 사토시의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법한 작품들 뿐’이라는 편견에 대응하는 역작이라 할만 합니다. 어쩌면 기획자들로부터 ‘왜 애니메이션이어야 하지?’라는 질문 받는 일이 지긋지긋했던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파프리카>는 실사 영화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SF 판타지의 본때를 보여줍니다. 이 정도라면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1988)나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1995)와 <이노센스>(2004)에도 필적할 수 있는 기록적인 성취라 하겠습니다. 특수 장치를 이용해 타인의 꿈 또는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는 설정은 타셈 싱 감독의 실사 영화 <더 셀>(2000)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더 셀>이 <양들의 침묵>(1991)과 같은 범죄 수사극으로서의 장르적 한계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파프리카>는 SF 범죄 스릴러로 출발하여 인간의 꿈, 그리고 꿈과 등가 관계에 있는 과대망상이나 신화, 그리고 영화와 인터넷 세상과 같은 매체들이 현실 세계와 맞물리고 있는 형이상학적 경계선을 적극적으로 탐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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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을 통해 ‘애니메이션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보여주겠다는 작가의 자의식은 <파프리카>의 도입부를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토나카와 형사의 꿈 장면으로 시작하게 했습니다.3) 이어서 화려한 주제 음악이 함께 하는 타이틀롤을 연결시키니 여느 액션 블럭버스터의 도입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확실히 <파프리카>의 외형은 국제적인 흥행을 고려한 장르의 양식을 잘 따라가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도난 당한 DC-미니의 행방을 추적하며 범인을 밝혀내는 범죄 스릴러로서의 내러티브를 기본으로 기존의 유명 애니메이션들에서 본 듯한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기시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미리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나, 특히 영화 팬들과 인터넷 사용자들을 위한 주제의 확장과 현대적 재해석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기에 관객의 뒷통수를 어루만져주는 뜻밖의 멜러 요소까지 가미되니 한 편의 성인용 애니메이션으로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하겠습니다.

<파프리카>라는 제목은 작품 속 중심 캐릭터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피망과 비슷한 고추 품종의 향신료이기도 하죠. 인간 욕망과 좌절의 발현이기도 한 꿈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가장 인간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파프리카는 아츠코가 만들어낸 꿈 속의 자아이기도 하지만 파프리카가 없는 아츠코란 역시 “뭔가 부족한”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대로 나쁘지는 않지만 양념 한 가지가 빠진 심심한 요리 한 접시와 같다고나 할까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전복적인 상상력으로 허물어뜨리면서도 양 측면을 모두 끌어안고자 하는 <파프리카>의 결말은 가장 영화적인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삶의 길을 보여주는 데에 성공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서브 스토리를 위한 조연이면서도 중심 내러티브와 맞물려 중요한 역할을 해준 토나카와 형사가 극장 매표구에서 “어른 한 장”이라며 수미쌍관을 이루는 마지막 장면까지, <파프리카>는 애니메이션의 한계를 넘어 완전 영화의 경지에 도달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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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름2.0 365호 p.73 “애니메이션이 다루지 않은 것을 하고 싶다”

2) 2001년작 <천년여우>(千年女優)가 특히 그랬습니다. 시대를 넘나드는 장면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기만 한다면 실제 배우들이 연기를 했더라도 별다른 무리 없이 만들 수 있었을 법한 작품이었습니다.

3)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며 맞물리는 꿈 속 세계야말로 애니메이션의 효율성을 가장 쉽게 보여줄 수 있는 장면 아니겠습니까. 토나카와 형사의 꿈 속에 등장해 신경증 치료를 돕는 10대 소녀 파프리카가 사실은 DC-미니를 통해 창조된 정신과 박사 아츠코의 또 다른 자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까지가 <파프리카>의 인트로입니다.


영진공 신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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