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종과 나비>, 감동과 교훈을 강요하는 자막 테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도미니끄 보비(1952 ~ 1997)의 동명 자서전에 기초한 전기 영화로 갑작스런 뇌졸중 때문에 한쪽 눈 밖에 움직일 수가 없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병실에서 처음 의식을 되찾는 장면으로 시작해 치료사들과 대필가의 도움으로 책 한 권을 완성하고 마침내 세상을 떠나기까지, 주인공의 기억과 상상, 투병 생활과 다양한 감정 상태들이 섬세하게 직조되는 꼴라쥬를 선보입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물의 이야기는 하지만 작품을 통해서 직접적인 인생의 교훈이나 감동을 섣불리 강요하지 않으려는 줄리안 슈나벨의 연출도 좋지만 <잠수종과 나비>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약간 색이 바랜 옛날 사진들과 같은 느낌의 화면들입니다. 깐느와 골든글로브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니 만큼 연출자가 누구인지는 미리 알고 봤지만 야누스 카민스키가 촬영 감독이었다는 사실은 오프닝 타이틀에 뜬 이름을 봤을 때에야 알았습니다. 장-도미니끄(마띠유 아말릭)의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자연스럽게 오고가는 편집은 <수면의 과학>(2005)에 참여했던 줄리엣 웰필링의 솜씨이고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결정하고 어떤 장면들을 넣을 것인지를 선택한 것은 줄리안 슈나벨 감독이지만, 미동조차 할 수 없는 주인공의 눈동자가 되기도 하고 그런 주인공의 모습을 하나의 풍경으로 담아낸 카메라는 야누스 카민스키의 것이었습니다.1) <잠수종과 나비>는 정말, 아, 그 화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각별한 경험이 되는 작품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명한 패션 잡지 “엘르”의 편집장이었다길래 호사스러운 패션계의 이면이 상당 부분 다뤄질 것으로 내심 기대했으나 안타깝게도 저의 길티 플레저를 충족시켜주는 장면은 거의 없더군요. 영화 초반에 주인공이 화보 촬영 장소에 들르는 장면이 잠깐 나오는데 그나마도 아주 짧습니다.2) 병상의 주인공을 돕는 두 명의 미녀 치료사가 스크린 정면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때는 쓰리썸 쪽 보다는 유아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전달해줍니다.3)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비해 영화가 그다지 무겁지만은 않습니다. 잠수종을 입고 심해에 갖힌 절망적인 심정도 묘사되지만 그런 와중에도 고치 속에서 빠져나온 나비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주인공의 자유로운 영혼이 <잠수종과 나비>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웃음을 유발하는 주인공의 나레이션도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적절하게 조율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책이 출간된 후 10일 후에 장-도미니끄가 사망했고 그의 아버지 또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짤막한 자막으로 전달하는데, 그러나 국내 상영 버전에 삽입된 마지막 자막은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느껴야 할 교훈과 감동을 강요합니다. 홍보 찌라시에 들어가는 것으로 충분했을 산술적인 배경 지식을 한글 자막으로 구구절절히 부가 설명하고 그런 주인공의 피나는 노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자막으로 해설하는 행위는 한마디로 영화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비예술적인 테러 행위라고 생각됩니다. 좋은 영화를 통해 기왕이면 더 좋은 영화 관람으로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영화 수입/배급사의 바램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자막으로 그런 부가 해설을 넣는 건 정말 무식한 짓거리에 불과합니다. 작품과 관객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야 할 정반합의 과정에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끼어들 생각을 한 건지 묻고 싶습니다. 역경을 이겨낸 감동 드라마로 기억하든 2시간 내내 휠체어에 앉아 침 흘리는 재미없는 불구자 영화로 생각하든 그건 보는 사람의 몫이지 당신들이 나서서 간섭할 부분은 절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들을 줄곧 촬영해온 야누스 카민스키의 카메라가 정말 특별하다는 것은 <뮌헨>(2005)을 보고 확실히 알았습니다. 영화의 관점 자체는 그다지 탐탁치 않은 작품이었지만 그가 찍어낸 장면들은 마치 고려상감청자를 마주하고 있을 때 전해오는 신묘한 기운을 느끼게 해주더군요. 눈에 보기에 너무 아름다운 것은 결국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까. 영화를 보면서 그런 심정을 느껴본 건 <뮌헨>이 처음이었어요. <잠수종과 나비>는 <뮌헨>과는 또 다르게 많은 것을 덜어낸 듯 하면서도 그 색감만으로도 영화의 기본적인 정서를 적절하게 조율해주고 있는 장인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참고로 <잠수종과 나비>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마띠유 아말릭과 언어 치료사로 출연한 마리-호세 크로즈는 모두 <뮌헨>에도 출연했던 배우들입니다.

2) 그 와중에 발견한 인물은 카메오로 등장한 국제적인 껄떡쇠 레니 크레비츠였어요. 순간적으로 길티 플레저가 아니라 질투심만 자극하다 사라졌습니다. 그외 패션 디자이너와 사진 작가, 모델들이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3) 장-도미니끄는 약간 그을린 피부의 물리 치료사(올라츠 로페즈 가르멘디아, 줄리안 슈나벨 감독의 실제 부인)가 이쁘다고 하는데 저는 역시 언어 치료사(마리-호세 크로즈) 쪽이 훨씬 좋더군요.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매력적인 눈을 가진 배우입니다.

영진공 신어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