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앙 슈나벨, <잠수종과 나비>

잠수종과


이런 류의 인간승리 드라마가 지치지도 않고 만들어지고 사람들을 모으는 데에는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그럼에도 열심히 사는 모습을 확인하는 데에서 안도와 자극을 받으려는, 분명 음험하고 고약한 이기적 심리가 큰 몫을 하기 때문일 거다. 물론 그건 별로 우아하지도 기품있지도 않지만, 어쩌랴, 그게 인간의 본능이기도 한 것을.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유,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힘을 추스르는 데에, 나보다 더 불행한 상황에 빠져있는 사람(물론 이건 철저히 보는 사람 입장 기준이다)이 그럼에도 생을 낙관하고 끝까지 삶에의 의지를 불태우는 것을 목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한 방도 없다. 물론 이 약효는 매우 단기적 처방이지만, 어차피 이 한 방을 원하는 사람들 역시 다른 식의 기쁘고 좋은 일을 맞아 어둡고 씁씁한 기억 따위 금방 지워버릴 수 있는, 단지 그 짧은 기간동안 약효가 지속될 만한 한 방을 원해서 이런 얘기를 탐하는 거니까. 그렇기에 이런 이야기들은 반드시 ‘실화’여만 한다. 이런 식의 글이 매우 냉소적으로 보일 것이라는 건 잘 알고있지만, 나는 여기에 어떤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는 것도, 그걸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장-도 보비의 유족들이 그의 책이 영화화되는 것을 허락했을 때도 바로 그런 식으로 그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가장 컸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꿔 말하면, 자기 인생에 대략적으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이런 이야기 한 방으로 도저히 구제되지 않을 장기적인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에겐 이런 식의 이야기가 그닥 약효를 발휘하지 못할 수 있다. 나 역시 이런 부류인데(‘대체로 만족’과 ‘장기우울증’ 중 어느 쪽인지는 묻지 말 것), 대신 내가 감동을 받은 것은, 한쪽 눈꺼풀을 제외하고 온몸의 신경이 마비된 장-도가 세상을 보고 느꼈던 방식을 어떻게든 함께 경험해보고자,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다른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카메라였다. 사람의 눈과 마음은 그렇게까지 다르지는 않은 법이라, 아마도 깐느영화제가 이 영화에게 다른 상이 아닌 감독상과 기술상(촬영을 맡은 야누스 카민스키가 수상했다)을 주었던 것도, 아카데미상이 외국어영화인 이 영화를 촬영상 후보에 올려놓은 것도, 그래놓고 다른 데에서 외면한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챙겨준답시고 냉큼 촬영상을 줘버렸을 때 많은 이들이 불평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진정으로 좋은 영화인 것은, 사지가 마비된 채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던 장-도를 그저 감독 마음대로 대상화하고 착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장-도를 최대한 이해하고 그의 눈이 보는 방식대로 세상을 보고자 했던 노력,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보는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그 노력이 화면에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이다.




잠수종과

잠수복 안에 갇힌 나비.


이는 단순히 한쪽 눈을 꼬매버릴 때 카메라가 취한 트릭이나 영화의 전반부 반을 흐릿한 초점과 카메라의 상후좌우 화각을 제한해버린 트릭, 혹은 단순히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가 들고 있었던 물리적 의미의 그 카메라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이런 영화를 찾는 사람들의 기대를 정면에서 배신한다. 불행한 상황에 빠진 인간의 실화를 보러 눈물을 흘릴 만반의 준비를 한 채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뜻밖에 이 영화가 그 장르 영화들이 흔히 취하는 방식의 대상화가 아닌, 영화라는 2차원 그림 매체가 취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최대한 장-도와의 동일시를 시도하는 영화의 방식에 일단 당황하게 된다. 또한 한없이 불쌍하고 연민이 가는 초라한 사내가 아닌, 자신의 사고를 놓고도 농담따먹기를 하며 잔뜩 긴장해 있는 의사나 다른 간호사를 놀려먹는 낙천적인 유머쟁이 남자에게 또다시 당황하고 만다.



잠수종과

굳은 몸 안에 갇힌 보비에게 유일한 세상과의 통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 쓰인 내레이션들이다. 대체로 내레이션은 영화가 사용하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요소들 중 가장 비-영화적인 것(혹자들에겐 반-영화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인데, 이 영화에서 내레이션은 주인공의 외모와 심리를 정면으로 충돌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게 영화적인 역할을 한다. 화면 안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아무 말도, 표정도 제스추어도 취할 수 없는, 그저 한쪽 눈꺼풀만 꿈뻑대는 한 사내의 모습이다. 그나마도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동안은 그가 보는 세상만 따라가는 카메라 덕에 우리는 그의 모습을 영화가 시작한지 한참이 지나서야 확인할 수 있다. 잠수복 안에 갇힌 꼼짝 못하는 몸과 사람 사이를, 병원 곳곳을 가볍게 날아다니는 영혼(나비)의 대조는 이렇게 화면과 사운드의 대조로 형상화된다. 장-도가 갑자기 뇌졸중을 일으키는 장면은 영화의 처음이 아니라 맨 마지막에 배치됨으로써, 우리는 실상 잠수복 속의 몸보다는 그의 가벼운 영혼을 훨씬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신파의 감동에 눈물 흘리는 대신 그 자유로움에 대한 경외, 그럼에도 그 자유로움을 붙잡는 육체의 한계를 함께 느끼며 답답해하는 것. 그럼에도 잡지 편집장답게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내려 하고, 이를 위해 마지막 투쟁을 벌이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것. 아마도 줄리앙 슈나벨 감독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잠수종과

보비의 아버지로 출연한 막스 폰 시도우. 나이가 드셔도 섹시하시다… ㅠ.


영진공 노바리

ps. 프랑스 원제의 ‘잠수복’이 어쩌다가 영어제목, 한글제목에서 ‘잠수종’이 된 것일까.


ps2. 큐피트의 부인인 프시케(psyche, 영어권에서는 사이키라 발음하기도)의 이름은 ‘영혼’을 뜻하기도 하지만 ‘나비’의 어원이기도 하다. 나비가 영혼을 상징하는 건 아주 오래된 얘기. 참고로 심리학과 관련된 무수한 용어들(psycho-로 시작하는) 역시 모두 프시케에서 유래한 것.


ps3. 요즘 내가 보는 프랑스 영화에는 거의 마티유 아말릭이 나오는 듯. 그만큼 국내에 프랑스 영화가 안 들어온다는 얘기…? 엠마뉘엘 세이녀, 오랜만에 보니 반갑구려.


ps4. 줄리앙 슈나벨도 그러고보면 엄청 과작 감독이라는. 대체 <바스키아>가 언제적 영화인데… <비포 나잇 폴스>도 2000년작 아닌가. (이 영화는 결국 놓쳤다. 조니 뎁이! 여장을 하고 나오는데!!)

ps5. 위에서도 썼듯 장-도 보비의 아버지로 나오는 배우는 막스 폰 시도우, 그리고 루시앙 신부로 나오는 잘 생긴 할아버지는 바로 작년에 타계한 장-피에르 카셀이다. 뱅상 카셀의 아버지이자, 내게는 1969년작인 장-피에르 멜빌 감독의 <그림자 군단>에서 한눈에 꽃미남 포스로 넉다운을 안겨주신 분. 정확히 말하자면 ‘뱅상 카셀이 장-피에르 카셀의 아들’이라고 해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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