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5K는 살인 병기가 맞고 활인은 사람이 하는 거다.


1.
내 고등학교 시절 학교 앞 도서 대여점에서 가장 불티나게 인기 있었던 밀리터리 소설은 단연 ‘데프콘’ 시리즈였다. 이 좁디 좁고 외세의 침략만 받아온 나라가 중국과 맞짱뜨고, 일본과 맞짱뜨고. 나중엔 미국 본토까지 진격한다.

김구 선생을 근대의 민족 최고 지도자로 생각하던, ‘민족주의자’이던 내게 그 소설들은 질풍노도 청년의 심장을 4기통 모터바이크 엔진 피스톤 뛰듯 뛰게 만들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데프콘 시리즈를 쓴 사람 중 김경진 氏와 진병관 氏는 ‘동해’라는 잠수함 전투 소설을 써내었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 해군의 ‘저력’이 어디서 나와야 하는지 국민들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난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자취용 독서실 TV방에서 담요 위에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50년만에 정권 교체를 이루는 역사적 사건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전 정권이 만들어낸 IMF위기 덕분에 더욱 더 추운 겨울을 보내며 고3을 맞이했다.

2.
진로 따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수능 400점 만점을 맞아 국립대를 들어가 4년 장학금을 받는다 하더라도 주거비와 생활비가 감당이 안 된다. 그 IMF 시기에 어디에 담보를 잡히고 어디에 돈을 빌려서 ‘대학 따위’를 간단 말인가.

수능 모의고사 수학을 80점 만점에 평균 45점을 유지하는 실력으로 경찰대 시험을 봤다가 떨어졌다. 1차 시험 통과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다.

덕분에 내 고3 여름은 얇은 수학 문제집 2권과 낮잠으로 가득 채웠다. 독하게 공부하기엔 허연 여백의 검은 글씨가 너무도 눈을 아프게 하여 감는 것이 좋았다.

그나마 수학의 정석 집합 부분처럼 때만 태우지 않고 2권을 끝까지 잘 푼 덕분에. 수능에서는 67점을 맞는 쾌거를 이룩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높은 점수를 맞고도 담임 선생에게 들은 것은 칭찬도 아니었다.

“사관학교 갈 늠이 점수가 이리 잘 나오면 너보다 낮은 애들이 고생하잖아 임마.”

그렇다. 더군다나 5공화국 시절도 아니니 ‘육사’를 나온다고 좋은 대우 받는 세상도 아니었다.

3.
내가 해군사관학교를 택한 이유는 순전히 위에 언급한 ‘데프콘’ 시리즈와 ‘동해’라는 밀리터리 소설 때문이었다. 물론 IMF가 아니었다면 난 ‘사관학교’를 선택할 이유조차도 없었다.

내가 조국의 미래와 안녕, 끓어오르는 애국심으로 사관학교를 택했다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개그다.

내 학창시절의 애국심을 일깨워주는 것은 ‘애국조회’도 아니었거니와,
오히려 성조기를 앞세워 ‘미국 만세’를 외치는 헐리우드 영화에 내 조국을 투영시켜 얻어낸 ‘만들어진 애국심’이었다.

경찰대 입시에 떨어지자 3개 사관학교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공군은 시력 때문에 제외.  육군과 해군 중에 해군을 선택하게 만든 것이 고작 두 종류의 ‘밀리터리 소설’이었다.

[고작이란 표현을 썼음에도 난 여전히 ‘데프콘’과 ‘동해’, ‘남해’를 쓴 진병관 氏와 김경진 氏의 팬이다. 아마 내가 TV 드라마를 만든다면 이우혁 氏의 ‘퇴마록’과 함께 위의 소설들을 원작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니까.]

4.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군대’를 갈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
긴 시간 동안 사회와 단절되어야 하며, 남들이 무언가 ‘발전’하고 있을 때 자신이 동떨어진 사회에서 기존에 살아오던 사회의 시스템에 ‘정체’되어야 한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그 얼마나 두려웠던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첫 취업’을 할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
아무 데나 공채 자리가 날 때마다 되는 대로 꾸역 꾸역 자기소개서와 원서를 써 넣진 않았던가? 그러면서 막상 자신이 ‘찝찝해 하던’ 직장에서 덜컥 합격 고지가 들어오고 그리 내키지 않는 직장에서 첫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앞으로 ‘이 바닥’에서 살아야하는 그 숨막히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사관학교란 곳은 그 두가지를 동시에 체험하는 곳이다.
채 고등학교 졸업식도 하기 전에 ‘가입교’를 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입교와 동시에 4학년의 소위 임관식에 내려올 ‘국가 원수’를 맞이하려고 분열 연습만 하다보면 어느 새 일상 생활은 군인이며, 꽃피는 봄이 와서 학과 수업이 시작 되더라도 취미 생활 수준이 되기 쉽다.

육군은 ‘육사’, ‘3사’, ‘학사장교(OCS)’, ‘ROTC’까지, 임관 경로가 많다보니 육사 졸업 후 의무 복무 기간 후에 잘릴 것을 대비해서 3학년 정도 되면 다른 자격증 공부하는 애들도 많았었다.

공사야 ‘Pilot’이 되면 취업 걱정은 안 한다고 봤을 정도였으니 당연히 농땡이도 많았겠지만. 내부야 어쨌든 외부인의 시각으로 ‘날라리’라고 폄하하기도 했으나 그건 그만큼 개방적인 동네라는 표현으로 보아야겠다.

해사는 말 그대로 군대였다. 육사나 공사는 아예 자체 캠퍼스였지만 해사는 출입구 자체도 행정학교와 **전대를 같이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해사출신 90%이상이 20년 이상 근속을 하는 곳이 바로 해군이었다.

사관학교에 들어서는 ‘아이들’은 대한민국의 ‘주입식 교육체제’ 속에서 살다가 어느 새 갑자기, 막 성년이 된 나이에 덜컥 크게 룰을 어기지만 않으면 평생 직장이 될 법한 자리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5.
현재 군대를 갔다 온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 취업 연령은 27~29세가 될 것이다. 이 중에 미래에 대한 고민, 자기 설계 등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믿고 싶다. 나도 이제 어렴풋이 그 속에 들어갈 수 있으려나 속으로 자문할 정도니까.

하지만 사관생도들은 이미 20대 초반에 자신의 미래 직종과 직장이 결정되어 버린다. 물론 그 속에서도 병과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걸 지원할 수는 있지만.

나는 늘 살아가면서 ‘계속 변하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들은 ‘초심’을 잃지 말자고 얘기하는 데 나에게 있어서 ‘초심’은 늘 ‘깨어있는 채로 변하고 또 변하자’로 표현된다.  그러니까 ‘늘 처음처럼 나를 지켜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 같다.

당장에 나를 보면 그렇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민족주의자’던이 내가 현재는 ‘민족주의자’들을 혐오하고, 심지어 ‘국가주의자’들까지도 혐오한다. 그러나 나는 ‘애국자’다. 내가 가진 경제력으로 이 나라를 벗어나서 이러한 삶을 누리기란 어렵기 때문에 나는 이 나라가 ‘건전한 방향’으로 잘 되길 바라므로, 나는 애국자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옳다거나 내가 믿는 바가 절대적이라는 생각 자체가 글러먹은 거다. 얼마나 인간의 ‘이성’에 합치하는가라는 ‘원칙’조차 없는 맹신은 썩을대로 썩은 종교와 무엇이 다르던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대부분 아집이다.

6.
고작  몇 년의 시간 동안 나는 국가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인간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뭔지 고민하는 인간에 이르렀다. 그리고 난 아직 20대다.

내가 해사를 떠날 때 중대 훈육관님이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어쩌면 사관학교를 나와 줄곧 군에만 있던 자신이야말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고.

어느 해사 동기생의 결혼식 날 만났던 동기는 내가 사관학교를 때려칠 때 같이 때려쳤어야 했다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반면에 어떤 동기생은 오늘도 국가의 안녕을 위해 늘 ‘패기에 찬 이정재’처럼 열심히 살고 있다.

우린 모두 스무 살에 그토록 함께 뒹굴며, 전우애를 외치며 이 나라의 ‘A few good men’이 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엔 스스로가 가진 직장에 대해 만족하거나 괴로워하는 ‘똑같은 많은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있다.

7.
조선일보에서 2004년에 언급되고 그 뒤에 동아일보에서 근래에 ‘재탕’을 해먹은 ‘2004년 육사 가입교 생도 34%가 미국을 주적으로 생각한다’는 칼럼은 역겨울 따름이다.

그 가입 생도들이 현재의 4학년일텐데, 이들이 저 생각을 사관학교 4년의 커리큘럼을 통해 바꾸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는 저 질문에서 ‘잘린 부분’이 ‘미래의 주적’이든 ‘현재의 주적’이든 간에 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가장 안도할 수 있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나랑 내기해도 좋은데 저 생도들이 저 질문에 저렇게 답한 이유는 ‘전교조’ 교사는 커녕 내가 위에 언급한 ‘데프콘’ 때문이라는 게 더 설득력 있다.

[참고로 ‘데프콘’의 저자이자 ‘동해’, ‘남해’의 저자인 진병관 氏와 김경진 氏는 해군의 초대로 내 동기들 4학년 원양 실습 때 함께 동행 취재가 허락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8.
모든 건 교육과 사회의 시스템 문제다. 현재의 초등교육과 중등교육 과정에서 아이들이 얼마나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건지. 이 아이들이 ‘대학’을 갈지, 아니면 성인이 되면서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지 고민할 수 있는 여건이 없다.

그 뿐인가? 학력 인플레가 만든 ‘대학=취업학원’ 시스템은 이 사회 전체를 갉아 먹으며 대한민국호를 침몰시키고 있다.

그나마 재수에, 삼수, 거기에 해외 어학 연수, 군대, 졸업하면 서른인 대학생이 늘어가는 데도 이 나라의 취업 문제는 해결의 기미가 안 보인다. 경제 인구에 편입되는 것이 늦어질수록 나라는 약체로 굳어져만 간다.

그런 여건에서. 공사 4학년이면 고작 스물 셋, 재수에 삼수를 했다 해도 스물 다섯.

그 나이에 군대와 같은 커리큘럼에서, F-15K가 살인 기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에서 희망을 보는 건 나 뿐인가?  오히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똥인지 된장인지 뭣도 모르고 진보와 보수조차 구분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청년들이 더욱 늘어가는 세상에서.

엉뚱한 데서 튀어나온 희망이 더 우울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 뿐인가?

* 관련기사

출처: Joins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0&Total_ID=3134814)

F-15K가 전쟁을 억제하여 ‘활인’을 하는 게 아니다.
평화에 대한 의지를 가진 ‘진정한 정치력’이 ‘활인’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 진정한 정치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건 ‘깨어있는 시민’만이 할 수 있다.

저런 생도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더욱 더 키우지 못 하고 퇴출시킨 꼰대들을 보니 앞으로도 갈 길은 멀다.

영진공 함장

“F-15K는 살인 병기가 맞고 활인은 사람이 하는 거다.”의 13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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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머하러,진보와 보수를 꼭 구분해야 하는데???국책사업도 추진하다보면 진보주의자라 자처하는 자도 보수의 의견에 같이해야할 때가 있고 보수 또한 진보주의자라 자처하는 자의 의견에 동조해야 할 일이 있을 수 있다.나는 보수요ㅡ저자는 진보요 나눠놓고 편가르다 보면 자신의 행동반경에 제약을 가져올 수 있고 국민이든 금뱃지를 단 사람이든 옳고 그른 것을 떠나 국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에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된다. A와B중에 A가 국익과 국민에 도움이 되는데 난 보수인데 A는 진보주의자들의 주장과 노선이란말여? 그럼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사관학교씩이나 나오신 분이 그런 것도 모르시는가? 아시는가?공군들의 전투기만 살인무기고 해군의 염원이던 이지스세종대왕함의 함대지 순항미사일은 살인무기가 아니란 말인가? 깨어라…지금의 국익에 부합되어 행동하는 결정들도 인류가 한걸음 더 진보하여 민족,종교,자원을 뛰어넘어 국가주의까지 뛰어넘게 되는 날…인류는 공생과 공영을 위하여 머리를 맞대고 과학기술을 의논하고 생명공학에 힘을 쏟아붇는 날이 오리라…한꺼풀 더 벗고자 하는 신인류들이 출연하리라…그러한 의식의 공유와 의식의 수준이 비슷해지는 날까지는 전쟁무기가 살인병기인 줄 알면서도 방어용이나 국익을 위해 보유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하리라…도서출판 좋은 땅…영애누나 좋아해요…한 여인과 인류를 위해 던지는 한인간의 메시지…각권 6000원…데프콘이나 동해보다 짧지만 인생을 바꿀만한 한권의 책…각서점 절찬판매중

    1. 싸워야 할 때는 ‘구분’을 먼저 해야 ‘피아’가 갈리고 적을 규명해서 싸울 수 있지요^^

  4. 핑백: ego + ing
  5. 박력있는 멋진 글 잘 봤습니다. 생도 출신으로 느끼는 바가 남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6. 꿈 깨세요. 평화에 대한 의지를 가진 ‘진정한 정치력’?? ㅎㅎㅎ
    그짓거리하다가 얻어맞은게 2차세계대전이에요…..
    6.25전쟁은 설마 같은 민족이 총부리를 겨눌까하다가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에게 얻어맞은 것이고…….
    전쟁억지력은 님과 같은 공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F-15K도 없는 영공에 전쟁이 발발하면 님은 어떻게 하겠어요?
    전쟁은 우리의 진정으로만 억지되는 것이 아니지요.
    아직은 상대를 믿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글쓴이 같은 나이브한 사상을 가진 사람을 그래서 레닌은
    “Useful Idiot’ 즉 ‘쓸모있는 바보들’이라고 조소를 보냈지요…
    물론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소련의 정치국에서는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의 ‘쓸모있는 바보들’을 간첩으로 또는 여론을
    소련에게 유리하게 하게끔 적절하게 이용하였지요..

    평화에의 의지가 우리는 확고하더라도 상대방도 그렇게 확고할까요?
    티베트를 짓밟고 있는 이웃을 가진 우리에게는
    F-15K가 전쟁억지력인 것 맞습니다.

    글쓴이같은 나이브한 감정 또는 명분은 우리 자신을
    또하나의 티베트로 만들기 딱 좋은 것이지요.
    더 이상 ‘Useful Idiot’는 되지 마세요…

    1. 꼬마 아이에게 ‘살인 병기’를 쥐어주지 말자는 의도로 글이 읽혀지긴 어렵나보군요?

  7. 해군출신임에도 “군사력이 평화가 아닐수도 있다.” 라는글을 쓰시는것이 인상깊네요,.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강한군사력과 경제력을가진 “강성대국” 을 꿈꾸는 자들이 많습니다. 반전주의자보고 “비현실주의자라 칭하며..” 근데 동북아상황에서 한반도 강성대국이 도리어 비현실적인것을 …근데 바이크타시네요,,S&T 650이신가요?ㅜㅜ저도 미라쥬탑니다.ㅋ .그리고 궁금해서그러는데 해군그만두시고 뭘로 먹고사세요,,

    1. 군사대국을 꿈꾸는 것 보다 군사효율국을 꿈꿔야 하는 데 말이죠^^

      2006년식 GT250R 탑니다^^ 연비가 좋아서 ㅎㅎ

      해군 그만두고 IT 쪽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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