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맨”, 우리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Yes해야 하는가.


부엉이의 입을 틀어막아도 진실을 감출 수는 없다.
“미네르바”를 석방하라.


“예스맨”이 생각보단 흥행이 별론가보다. 나는 영화 볼 여건이 좋지 않은 아줌마지만 그래도 짐캐리께서 나오신다는 데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짐 캐리 작품의 경우, 남들이 범작이라 하더라도 나는 늘 기대이상의 만족감을 가져왔다.)

짐캐리의 코메디는 젠체하지 않으면서, 잘난척 하지 않으면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코메디와 철학적 질문이 따로 놀아서 영화의 톤(Tone:어조, 분위기)이 왔다리 갔다리 중구난방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은 질문대로, 코메디는 코메디대로 서로 조화되어 일관된 톤을 유지한다.

이번 예스맨도 나는 정말 좋았다. 절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짐캐리는 계속해서 성장하는 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아주 미량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 *




1.
우리는 원래부터 예스맨인걸

사람들이 예스맨에 땡겨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누군가 “과속스캔들은 제목이 안티”라고 하던데, 사실 예스맨도 제목이 안티다.
어느 질문에 대해서도 다 예스라고 대답해야 한다니. 그게 뭐 대한민국 살면서 특별한 상황이겠는가. 도저히 이게 코메디의 소재가 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총체적 예스맨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응애응애 하고 태어나서, 겨우 5세 이하일 때만 “시져~ 안대~”를 외쳐보다가,(허긴 요샌 조기교육 열풍으로 5세 이전에도 ‘싫어’와 ‘안돼’를 외칠 자유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학교가선 사랑의 매를 맞으며 일제고사에 yes,
대학다니면서는 높은 등록금에도 yes,
시위 현장에 나가서는 물대포를 맞으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도 yes,
방송법이 날치기 통과되어도 yes,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 예스를 외쳐야 하는 비운의 예스맨들이 아니던가.

아니, 그냥 아주 미시적으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춰봐도 그렇다.
직장인들, 가기싫은 회식도 yes, 생산성 없는 야근도 yes, ‘까라면 까’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Yes라고 말하면 세상살이가 즐거워진다”는 영화의 컨셉을 보면 질리는 게 먼저지, 절대 땡기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No라고 말하면 세상살이가 즐거워진다”는 “노맨(No Man)”이라는 영화가 나오면 누구든지 보러가게 될지도 모른다.

2.
짐 캐리는 누구에게 Yes라고 하는가

하지만, 짐캐리가 억지로 “yes”를 하게 되면서, 누구에게, 어떤 사람들에게 “yes”를 하게 되는지를 보면 “그 예스”와 “이 예스”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짐 캐리의 yes는 소수자를 향해있다. (영화의 배경이 소수자들의 집합소인 LA라는 것도 눈여겨볼만하다.)

그가 첫번째 “Yes”라고 말하게 되는 상대는 노숙자다. 남에게 yes라는 말을 거의 듣지 못할 사람. 그런 소수자에게 yes를 할 수 밖에 없음으로 해서, 차를 태워주고, 핸드폰을 빌려주게 된다. 그 이후, 그가 “yes”라고 말하게 되는 상대들도 거의 대부분 사회의 소수자들이다.

후에 여자친구가 되는 앨리스는 제도권의 금융맨이 상대할 리 없었을 폭주족 히피이며, 옆집 할머니는 성적인 농담이 가미되어 약간 희화화 되긴 했지만 하루종일 말상대 할 사람 없는 독거노인이며, 그가 소액대출을 해주게 되는 이들은 작은 자영업을 하는 신용등급이 낮은 자들이다. 심지어 맘에 없는 휴일 근무 요구에 대해 “yes”라고 말하게 하는 상대인 노먼역시 보스의 외피를 입긴 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면 ‘불쌍한 독거 중년’이다.

그의 yes는 효율과 효용을 떠나 (아놔~ 왜 갑자기 ‘실용’이라는 말이 떠오르냐) 누구에게나, 어떤 질문에나 동등하다. 그래서 효용,효율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라면 절대하지 않을 ‘한국말 배우기’와 휴일을 ‘네브라스카 링컨에서 보내기’에 기꺼에 yes라고 한다. 그래서 그 덕에 틱틱거리는 한국인 노처녀에게도, 자살을 시도하려는 히스패닉에게도 마음을 열고 그들의 삶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마이너들에 대한 편견 없는 yes.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3.
예스맨이 기부천사보다 아름다운 이유

예스맨의 러닝타임 2/3쯤 이르러 칼(짐 캐리)의 행보를 보면, 히피인 여자친구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노숙자 쉼터에 가서 무료배식 봉사를 하며, 대출 허가 도장을 쾅쾅 찍어대며, 북한과 내통하는 간첩이 아닌 담에는 쓸모도 없는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인이라는 소수인종과 더 가까운 소통에 성공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짐 캐리의 표정이다.

이때 짐 캐리는 결연하지도 않고, 성스러운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즐겁게 임한다. 그가 하는 yes는 자동에 가까운 yes이기 때문에, 자신의 yes가 소수자들을 돕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생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우월감 또한 찾아볼 수도 없다. 소수자에 대한 ‘yes’를 ‘베푼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위’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숙자인 닉과도, 한국 노처녀 수미와도 그는 대등한 친구의 위치일 뿐 제공자와 수혜자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의 칼은 몇백억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훌륭해 보인다.

강요된 Yes Man


예스맨의 막바지에 이르면 꼭 No해야하는 일에는 No를 해야한다는 것이 예스맨의 철학이라는 것도 볼 수 있다. 나의 편견이 다른 이들과의 의사소통을 가로막는가? 그런 생각이 들 땐 스스로에게 No Man~ No Man~ 야유를 보내본다. 꼭 No라고 대답해야 할 때인가? 그렇다면 자신있게 No라고 외쳐보련다.


Yes해야 할 때와 No해야 할 때를 알고 외치는 자의 앞뒷옆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영진공 라이

““예스맨”, 우리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Yes해야 하는가.”의 2개의 생각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