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스퍼의 추억


밴쿠버에 내리는 비행기가 4시간 연착을 했기에 당연히 갈아탈 비행기에 웨이팅을 걸어 놓아야 했다. 다행히도 토론토까지 가는 비행기는 3시간 뒤에 탈 수 있었다. 문제는 토론토에서도 있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삼각대가 도착하지 않았다. 세관에 신고를 하고 입국 심사대를 통과한 것이 새벽 2시. 낮은 기압에서 세균은 제세상을 만났다. 숙소로 들어가 짐을 풀고 신발을 벗는 순간,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고약한 냄새가 났다.

맡지 않고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가죽이 썩어도 이런 냄새는 나지 않는다.

차마, 객실에 신발을 둘 자신이 없었기에 비상계단 창문을 열고 걸쳐 놓았다. 다음날 없어진 신발을 프론트에서 찾았는데 비닐 네 겹으로 꽁꽁 묶여 있었다.

미스 **일보이자 잘 나가는 리포터였던 그녀는 내 옆에 잘 오지 않으려고 했다.

비즈니스룸에는 모뎀밖에 없었다. 프론트에서는 ‘트웨니원 센츄리 컴퓨러 센터’ 찌라시를 줬다. 낯익은 느낌이라 뒤돌려보니 21세기 피씨방이라고 친절히 한글로 적혀있었다.

토론토, 나이아가라, 노바스코샤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캘거리로 넘어갔다. 밴프, 쟈스퍼에는 호수가 2천개라고 했다.
“이 동네는 웅덩이도 호수라고 하냐?”라고 되물었다.
가이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180km로 이틀을 밟고 나서야 쟈스퍼 끝단 콜롬비아 아이스필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국립공원이 우리나라 남북한 땅떵이보다 넓었다.

이미지 출처: http://www.pdphoto.org/PictureDetail.php?mat=&pg=8201

만년설.

설상차를 타고 대빙원 위로 올라갔다. 30분 남짓.

관광 가이드는 절대로 크랙 쪽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 떨어지면 꺼낼 수도 없고 깊이가 자그마치 200미터가 넘는다고 했다.

대자연. 황량한 만년설 얼음위에 작은 존재가 하나 서 있구나…

허나, 한국의 아주머니들은 예외였다.
예외 없이 석유 말통 같은 것들을 하나씩 들고 온 그녀들은 가이드가 목숨을 걸고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크랙 밑에 엎드려 만년설 물을 받았다.
“암도 고치는 만년설 물”
“지방간도 고치는 만년설 물”
“위염에 좋은 만년설 물”

캐나다에 있는 무안단물이었다. 고장난 세탁기도 고칠 것 같은 믿음이었다.

나도 받아서 그 물을 신발에 넣으면 냄새가 좀 가실까? 생각했다. 하지만 만년설 따위로 없어질 냄새가 아니었다.

타카카우 폭포를 지나서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한 라찌로 들어갔다. 리퀴어샵에서 사온 캐나디언 클럽 750ml 두 병과, 크라운로얄 500ml 세 병으로 일행 5명이 충분할거라 생각했다.

쟈스퍼의 밤은 황홀했다.
레이크루이스 호텔에서 본 전경도 아름다웠고, 머레인 호수의 섬뜩한 투명함도 놀랐고, 에메랄드 호수 바닥에 석회화된 나무들이 하얗게 가라앉은 것도 무서웠지만, 쟈스퍼의 밤은 예술이었다. 늑대가 짖으면 뻐꾸기가 울고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비가 내리고~ 우산이 없으면”
술에 취해서 조연출 녀석이 그 좋은 노래를 개그로 만들었다.

나는 중학교 때 배운 은하철도 999로 화답했다.
“버스가~ 어둠을 헤치고 건널목을 건너면, 버스 정류장엔 사람이 쏟아지네, 자리 찾는 할머니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앉아있는 소녀의 가슴엔 두려움이 솟아오르네~”

9월의 쟈스퍼는 추웠다. 술김에 우리는 빤스만 입은 채로 대자연에 그렇게 고함을 질렀다. 미스 **일보의 그녀는 미스코리아의 품위 때문에 우리와 같이 빤스만 입지는 않았다. 와코르라는 브라자 브랜드를 그 때 처음 알았다.

술을 다 비우고 라찌로 들어가 쟁여놓은 소주까지 다 마시고서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대자연은 숙취도 남겨주지 않았다.
어슴프레한 새벽. 오줌이 마려웠던 나는 물을 한 컵 들이키고 화장실로 향했다.
문득, 대자연에 내 영역 표시를 하고 싶어졌다.

“그래! 침엽수림이 울창한 이곳 쟈스퍼에 내 흔적을 남기자.”

터질듯한 방광을 움켜쥐고 라찌 밖으로 나갔다. 라찌 바로 앞에 있는 나무로 다섯 걸음 걸어나가 오줌보를 터뜨렸다.

“딸각”
“아차”

현관문이 잠겼다.
자동으로 잠기는 문은 카드키가 있어야 했다.

“새벽에 사람을 또 깨워야 하나?”
순간, 문득 누군가 날 쳐다보는 날것의 느낌을 받았다.

이미지 출처: http://jasperjournal.com/hiking/avoiding-bear-attacks-in-jasper-national-park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3미터쯤 되는 불곰이 쓰레기통을 뒤지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ㅈ됐다…..

손바닥이 내 머리통보다 큰, 얼굴이 등산가방만한, 불곰이었다.

분수처럼 흩어지던 오줌이 오뉴월 마른 논바닥에 물 댄 것처럼 흔적도 없이 끊겼다.
오줌이 멈추자 정적이 찾아왔다.

불곰이 나를 쳐다봤다.

몸을 더듬어 봤지만 제임수딘 삼각빤스에 주머니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죽은 척을 할까?”
맨발바닥으로 올라오는 한기가 차가웠다. 입이 돌아갈 것 같았다.

한발을 조용히 뒤로 뻗어 내밀었다.
“우주주죽”
세상에서 가장 큰 낙엽소리가 났다.

불곰이 다시 나를 봤다.

문 앞에는 코를 녹여버릴듯한 기세의 랜드로버 신발이 보였다.

밖에서 혼자 자신의 존재를 냄새로 알리고 있던 랜드로버 신발을 잡았다.
“이 냄새로 유인을 하자.”

신발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불곰이 관심을 보였다.
신발을 쓰레기통 너머로 던지자 불곰이 쫒아갔다. 냅다 뛰어 라찌 사무실쪽으로 달렸다.

그날 오전, 라찌 주인에게 신발값을 변상 받았다. 신발은 걸레가 되어 있었고 깔창이 없어졌다. 영국 랜드로버사에서 자동차를 사면 주는 한정품이라고 구라를 쳤다. 400달러. 우리돈 30만원쯤 됐다. 방송 후 출연료를 지불하자 그녀는 연락을 끊었다. 목숨을 하나 살리고 미녀를 하나 떠나보낸 냄새였다.

라찌를 벗어날 때 즈음, 동물 구호센터라고 적힌 앰블런스 한대가 급히 라찌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끗.


영진공 그럴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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