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아버지의 초상

『파송송 계란탁』을 보면서 내내 절 울게 했던 것은 ‘전인권'(“이인성”)이란 아이가 처해진 슬픈 소아암도, ‘대규'(임창정)가 살아가고 있는 슬픈 삶의 현실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무식한 아버지’의 자식의 병에 대한 ‘무식한 태도’가 얼마나 스스로에게 좌절감을 주는가가 영화내내 동화되어 슬픔을 자아냈습니다.

제 부모님은 아마 상당수의 제 또래 부모님이 그러하듯, 그리 좋은 학력을 가지고 계시진 않습니다. 허나 부모의 마음은 학력의 고저를 불문하고 인간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일이기에. 전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행운아입니다. 한때 부모님의 실수로 제가 큰 병을 얻어 몸져 누었을때, 제 아버지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모란게 무식해서 아를 이꼴로 만들었으니 이를 우짜면 좋으냐…’

나는 내가 태어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지만. 부모님은 제가 안쓰러워 어찌할 줄 모르고 계셨더랬습니다. 무엇을 어찌 할줄도 모른채 의사만 바라보아야 했던 부모님은 얼마나 답답하고 힘드셨을까요.

영화 『존 큐』는 비록 무식해도 착하게 살아왔던 아버지의 절박한 상황을 충분히 공감이 가도록 그려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돈이 없다’는 이유로, 한 생명이 사라져 가는 절박한 상황을 타파할 수 없는 ‘삶의 한계’는 무식한 아버지의 절규를 불러냅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이고, 그 생명은 나로 인해 만들어진 생명이며, 나의 정서와 내 사상, 나의 철학을 이어 받고 자란 아이이기 때문일겁니다.

지금의 저는 비록, 사회에서의 교육으로 인해 자꾸 변해가고 있지만, 아버지와의 대화로 부터 받아온 아버지가 깨달은 삶의 정수들은 벌써 저의 원칙이 되어가고 있고 철학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실없는 이야기라며 웃을 일일지도 모릅니다만, 제 아버지는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와 달리, ‘사람목숨을 파리목숨으로 여기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 하셨고, 당신께선 늘상 즐기시는 ‘바둑’을 사람을 속이는 기술이라 배우지 않길 권하셨고, 배운사람을 믿는 방법보다 솔직한 사람을 믿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네, 삼국지를 본다고 생명경시풍조가 생기는 것도 아니며, ‘바둑’을 배운다고 ‘권모술수’에 능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허나 비록 저런 말씀들이 타인에겐 ‘무식한 아버지’로 보일지 몰라도, 지금까지 제가 지켜야 할 원칙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그런 가르침은 저의 논리 전개과정에 늘 합당한 이유를 부여했습니다.

<1992년 영화 '로렌조 오일' 영화 포스터>

영화『로렌조 오일』은 어찌 보면 모든 아버지의 로망일지도 모릅니다. 자식의 아픔을 낫게 하기 위해 자신의 논리적 역량을 다하고, 없는 지식을 긁어 모으고,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그로 인해 결국 “로렌조”를 구해내는 이 실화는, 아마 지구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자식이 아플때 진정 원하는 바를 표현해준 이상에 가깝지 않을까요. (물론 자식이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걸 보는게 가장 큰 이상이겠지요 …)

영화의 모티브인 로렌조와 아버지. 로렌조는 서른 살이 되던 2008년에 운명하였다.

자식이 육체적 병을 얻어 아프던, 심리적 압박으로 괴로워 하던. 같이 아파해줄 사람, 같은 시각으로 이해해 줄 사람은 부모입니다. 그 누구도 제 아픔을 같이 아파할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없을 테니까요.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현실의 한계로, 아는 것 없음의 한계로.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는 슬픔은 그 무엇보다 억울하고 괴로울 겁니다. 그런 마음을 늘 갖고, 가족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우리네 아버지.

하루에 한번.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전화 한통화 하세요.
효도는 해도해도 모자랍니다.

영진공 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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