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얀(Vinyan)” (2008), 어머니 자연은 때로 무섭고 잔인하다.

태국 푸켓에서 6개월 전 쓰나미로 어린 아들을 잃은 벨머 부부는 푸켓을 떠나지 못한 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자선파티에
참석한 도중 부부는 우연히 버마의 깊은 숲 속 바닷마을을 찍어온 영상에서 자신의 아이처럼 보이는 어린아이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아들을 찾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확신이 없는 남편 폴은 여행 내내 회의에 시달리지만, 아내의 믿음은 굳건하며, 이 여행을 계속
추동한다. 심지어는 남편을 속여 사기꾼에게 거액의 돈을 넘기면서까지 말이다. 이들의 여행길은 점차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버마의 원시림으로 향하고, 얀은 점차 집착과 광기로, 폴은 공포로 빠져든다.

엠마뉘엘 베아르 언니의 무시무시한 얼굴 ...

영화는 오프닝 크레딧부터 매우 강렬하고 압도적인 비주얼과 사운드로 시작한다. 화면을 꽉 채우는 타이포그라피의 오픈 크레딧,
아마도 바닷속의, 수많은 물방울 기포 사이로 철렁대는 긴 머리카락, 점차 핏빛으로 변하는 물방울들, 그리고 처음엔 찰싹대는
잔잔한 파도소리에서 점차 소리가 커지며 불쾌하게 귀를 긁어대는 사운드까지. 마침내 도저히 이 소리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가 돼서야, 영화의 스탭롤이 끝나고 소리도 멈춘 뒤 본 화면으로 전환된다. 쉰이 다 돼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20대적 젊음과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엠마뉘엘 베아르의 비키니 수영복 씬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Vinayn

종종 자연과 등치되는 모성애는 원래 무섭고 잔인하고 눈 먼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이 중 하나로 조셉 콘라드를 꼽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지옥의 묵시록>을 강하게 연상케 한다. (<지옥의 묵시록>은 조셉 콘라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일부 영화정보에서는 그래서 [암흑의 핵심]이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이라 표기하고 있기도
하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인물이 모종의 임무를 띄고 다른 인물들 혹은 사회와 동떨어진 곳, 즉 정글 속으로 여행하며 점차
광기에 물들어간다는 설정은, 확실히 <지옥의 묵시록>을 꼭 빼닮은 구석이 있다. 말론 브란도의 커츠 대령이 이미
그랬던 존재고, 그 뒤를 주인공인 마틴 쉰의 윌라드 대위가 쫓는 것이다. 윌라드 대위의 임무는 커츠 대령을 제거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 임무에 성공하지만, 한편으로 그 자신이 또 다른 면에서 커츠 대령을 닮아가며 광기의 중심으로 빠져드는 것 역시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커츠와 달리 그 광기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게 차이점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 영화, <빈얀>도
그렇다.

<지옥의 묵시록>에서처럼 <빈얀>에서도 벨머 부부가 여행을 계속하면서 정글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자연은 인간이 잘 통제하고 다듬은, 인간을 위로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돼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을 압도하고 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잔혹하고 공포스러운 공간이 된다. 제멋대로 자란 무성한 나뭇가지들, 더럽고 탁한 강물과 발목까지 빠져 걸음을 어렵게
하는 진창, 거기에 쏟아지는 비까지. <지옥의 묵시록>에서처럼 <빈얀>의 공간은, 서구인들이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매혹과 공포를 함께 느끼는, 그들 입장에서 소위 ‘원시림’이라 여겨지는 동양의 깊은 밀림이다. 그런데 벨머 부부가
푸켓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빈얀>의 이런 밀림에 또 다른 의미 하나를 더 부여한다. 즉, 이들의 여행이 계속될수록
카메라에 잡히는 야생의 압도적인 자연의 풍경은, ‘여름 휴가를 온 백인들을 위해 아름답게 손질된 동양의 휴양지 해변’인 푸켓과
극명한 대비가 된다는 것이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는 휴양지에서 종종 마주치는, 잠시 지나는 상쾌한 스콜이 아니라, 마치 배우의
몸을 연달아 찌르기라도 하듯,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불쾌한 비다. (배우들이 정말 고생했겠더라.)
그렇다면 6개월 전 벨머 부부의 아이를 앗아간 쓰나미는, 말하자면 잘 통제된 인간의 영역과 야생의 자연이 인간을 압도하는 영역
사이의 어떤 틈새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연을 ‘발견하고 탐험하며 지배하고 정복하기를’ 꿈꾸지만, 결코 인간에게
정복되지 않는 자연은 종종 틈새를 찢고 그 사이로 인간이 정복했다고 믿는 어떤 영역을 순식간에 덮치고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다.

Apocalypse Now

마침내 그에게 다가간다. 그를 죽이기 위하여.

<빈얀>은 그러나, <지옥의 묵시록>과 다르다. <빈얀>의 벨머 부부는 커츠 대령이
아니라, 커츠 대령과 똑 닮은, 그러나 그런 식의 ‘절대적 아버지’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들을 죽이는’ 무수한 어린아이들을
만난다. 옷은 모두 팽개친 채 사타구니에 두건만 두르고 얼굴에 온통 허연 회칠을 하고 눈과 입 주위를 붉게 칠한 이 아이들은
처음엔 한둘, 그 다음엔 서넛, 그 다음엔 대여섯이 벨머 부부의 눈에 띄고, 그 때까지만 해도 부부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이 수백이 한꺼번에 모여들 때, 그것은 확실히 충격과 공포가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의 충격은 마치 <지옥의 묵시록>의 엔딩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양상이 된다. 아마도 식인을 하는 듯한,
‘원시인’이라는 다소 차별적인 말이 딱 떨어지는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흉폭한 자연에 적응하고 그 일부가 돼버린 아이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쩌면 ‘산 채로 귀신이 돼버린’ 존재들인지 모른다. 사회와 상징계를 떠나 그저 실재로만 존재하는 아이들이라니,
사실 이거야말로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아닌가. 그러니 상징계에 속한 인간의 눈에는 이들이야말로 귀신이 아닌가.

아이들에게 남자 어른들이 차례로 죽음을 당할 때, 우리는 어쩐지 그 죽음에서 공포와 함께 일종의 경외감과 슬픔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나 그 아이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얀을 향해서는 끝없이 손을 내밀며 그녀의 몸을, 특히 가슴을 쓰다듬기에 더욱
그러하다. 물론 이 아이들이 여자를 살려두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다. (벨머 부부가 아이들과 처음 마주쳤을 때
아이들과 함께 있던 노부부는 둘 다 아이들 앞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겁에 질려있었고, 아이들은 노부부 중 남자 쪽을
죽인다.) 말하자면 아이들의 살인은, 인간의 ‘사회’의 룰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자연의 법칙의 일부이면서, 아이들에게 위해를
가한 존재들에 대한 응징과 처벌의 뉘앙스를 띄고, 상대적으로 자신을 돌보아줄 모성 – 자연은 종종 모성과 등치된다 – 에 경외와
복종을 바치는 것이다. 자연을 ‘정복’하고, 아이들을 ‘착취’하며,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즉 자신의
피와 살을 이은 존재만을 중시했던 남자어른들은 (중간에 도망쳐 버린 선장을 제외하고) 이 영화에서 모두 죽음의 처단을 당한다.

 

Vinyan

이 장면에서 아이들은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 천진난만한, 유독 사운드로 강조되는 ‘깔깔깔’ 웃는 소리는 충분히 소름끼쳤다.

다만 뭔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버마의 밀림 속 아이들이 원시림 속 야생적인 식인종 원시인으로 그려진 것, 그리고 절대적
공포의 공간이 푸켓에서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간 버마의 깊은 산골짜기라는 것, 아마도 감독이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자기
생각에 ‘그저 먼 곳’이었을 뿐이 정치적 격변으로 몸살을 앓는 버마의 숲속이란 게, 차마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얄팍하고 오래된 오리엔탈리즘의 잔재를 보는 것 같다.

한 가지 더, ‘빈얀’이 정말로 태국의 귀신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말인가 싶어 인터넷을 뒤지다가, 이 영화를 어둠의
경로를 통해 보고 쓴 이들의 감상문을 대거 읽었다. 미안한데 이 영화는 그렇게 보면, 그 감상문들이 하나같이 전하는 대로 “대체
뭐하자는 영화인지 알 수 없는” 영화가 돼버린다. 이 영화에서 비주얼만큼이나 중요한 게 사운드다. 이 글 두 번째 문단에서도
묘사했지만, 종종 초현실적인 장면과 함께 귀에 거슬리며 불쾌감을 주도록 연출된 사운드가 영화의 공포와 긴장의 분위기를 쥐었다
놨다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파일로 집에서 싸구려 컴퓨터 스피커를 통해 듣는 사운드는 이 영화의 원래 의도된
분위기, 사운드의 강약과 리듬으로 전달되는 그 공포를 결코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한다.

[부천영화제 상영작. 7/19 일요일 오후 5시, 부천시청.]

영진공 노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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