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죄의식과 부채의식 그리고 상실과 두려움의 4중주

광포하고 매력적인 치정극으로 홍보되는 이 영화.
치정극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 영화를 다 보고나서 … 인생이란게 … 전체가 욕망과 두려움이 뒤얽힌 한편의 치정극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가련한 두 남녀의 몸부림이 너무 안쓰럽고, 두 사람의 노력에 비해 삶이 너무 아이러니해서 보기에 많이 아렸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영화는 시작부터 죄의식을 자극하며 시작한다.
8년 전 수배 중이던 중식은 짝사랑하던 선배의 집에서 기거를 하고 있다. 선배의 남편도 함께 운동하던 선배이며 구속되어 있는 상태다.

그 상황만 하더라도 중식의 마음엔 이미 부채의식과 죄의식이 깔려있었을 것이다. 선배는 구속되었는데 자기는 피신을 해 가며 구속되지 않았다는 부채의식. 그리고 선배가 부재중인 상태에서 그 아내인 여선배를 사랑하고 있다는 죄의식.

그런데 영화는 그 죄의식에 기름을 퍼붓는다. 그저 사랑하는 선배를 한번 안아보려는 인간적인 욕망은, 한 순간 방치된 아이에게 화상을 입히게 되고 중식에게는 그 화상만큼의 트라우마와 죄의식을 남긴다.

미친듯이 갚으려고 해서, 자꾸만 빚지는 남자 중식

그날 이후로, 중식은 그 죄의식을 감당하기 위해 자꾸만 부채를 갚으려 하고,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그 버거운 짐을 갚는데 쓰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마 은수와 결혼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상환자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성욕으로 인해 아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트라우마 때문에 은수와의 부부관계도 원만치 아니하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어느정도 죄의식을 취기로 덮은 후에 다시 아내를 찾았을 때 은수의 등에 확연하던 화상자국. 그 화상에 미친듯이 매달리며 외치는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는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자신의 부채를 갚듯이 시작했던 결혼생활은 결국 ‘언니를 제대로 사랑해 주지 못했어’라는 고백으로 끝나고, 속죄를 하려는 목적은 전혀 달성되지 못한다. 게다가 그런 그녀를 가스 폭발로 인해 잃게 됨으로써 중식은 더 심한 죄책감을 집어 안게 된다.

철거대책위원회의 시위가 막바지에 다다른 때, 화염병 사용을 망설이는 철거민들에게 중식은 자신이 화염병 사용에 관한 혐의는 모두 뒤집어 쓸테니 쓰자고 말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보험사기혐의로 연행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려던 중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시 빚지게 됨으로써 죄의 부채를 늘려 나가기만 한다.

영화 말미 쯤에 ‘이런 일들(운동) 왜 해요. 무슨 의미에요’라고 하는 말에 중식은 ‘자꾸만 할일이 생긴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 말은 ‘자꾸만 빚이 생기고, 자꾸만 속죄할 일이 생긴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애초에 한가지 죄의식이 지배할때 그것을 갚지 않으려 했다면 점점 더 부채가 불어나지는 않았을텐데, 죄를 짓고 갚으며 중식은 시지프스처럼 계속해서 그 삶을 살아간다.

잃고 싶지 않아 떠나기 때문에, 자꾸만 잃는 여자 은모

중식을 대표하는 말이 ‘속죄’라면 은모를 대표하는 말은 ‘상실’이다. 은모의 삶은 잃고, 또 잃고, 잃지 않으려고 떠나는 것으로 요약된다.

첫 등장부터 은모는 부모를 상실한 상태이며, 집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있다. 가진 것, 기댈 것이라고는 언니 은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중식의 등장으로 은모는 언니 은수를 상실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두렵지만 결국 그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 중식은 형부가 된다.

언니 은수가 중식과의 행복한 관계를 갈구하면 할 수록 은모의 두려움이 커져 나가는 가운데, 부부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언니 은수가 중식과 원만한 밤(?)을 보낸 후 은모를 제외한 둘만의 아침상을 차리는 순간 그 두려움은 극대화가 되고 은모는 또 다시 잃는 것이 두려워 떠난다.

가족사진에서 형부의 얼굴을 오려내고 친구와 며칠 밤 집을 나갔다 온 그 때, 은모는 자신이 두려워했던것 보다 훨씬 더 무섭게. 언니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다. 애초에 잃을까봐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잃지 않았을 일이었는데.

그래도 형부한테 맘 붙이고 잘 살고 있던 은모에게 또 다시 상실의 두려움이 찾아온다. 바로 자신이 중학생이고 형부가 공부방 교사이던 시절 수업시간에 전해들었던 형부의 첫사랑의 등장. 든든한 보호자였던 형부가, 아기 사진을 들고 온 어떤 낯선 여자 앞에서 엎드려 속절없이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고3이고, 바로 며칠 사이에 어른이라는 ‘선고’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감옥에 갇힌 형부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 다시 혼자가 되게 될까봐 은모는 떠난다. 그리고 그 떠남이 결국 중식을 잃게 되는 전조가 된다.



속죄할 권리도, 떠날 권리도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는가

자신의 죄의 댓가를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발버둥쳐도,
잃지 않기 위해 자기가 먼저 떠나도,
자꾸만 더 깊은 늪으로 빨려들어가는 두 사람의 엇갈리는 삶을 보면 삶은 허무를 넘어 덫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과 똑같은 죄의식과 부채의식을 은모에게 지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그 진실을 부여잡고 지키려고 하는 중식.

대체 그 한가닥 진실을 지켜낸다는 것이 얼마나 은모를 지켜줄 수 있으랴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가 들어앉는 중식과 나이트클럽/용역깡패 사장의 차창을 스쳐가는 은모.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때 그 진실하나를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삶의 힘이라는 것이 참으로 풀잎처럼 얇기만 하다.

영화를 다 보고,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영화 참 … 독하다.’

어쩌면,
중식은 그토록 처절하게 속죄하려고 노력하는데도 죄의 짐을 조금씩 덜기는 커녕 물에 젖어가는 목화솜을 진 당나귀처럼 점점 그 짐이 더 무거워지기만 한다.

은모는 훌훌 털고 떠나려고 하는데도 삶이 가진 잔인한 힘은 은모를 ‘상실’과 대면하도록 자꾸만 끌어다 꿇어 앉힌다.

정확히 옮길 순 없지만 중식이 영화 막바지에 교도소 면회실에 앉아서 했던 대사가 마음에 자꾸 걸린다.
‘내가 교만했던 것 같아. 내가 얼마나 미욱한 놈인지’ 하는 말이 들어가 있던 그 대사.

그래,
사람은 다 미욱하지.
그렇다고 몸부림 치는 것 조차 ‘교만’인 것인지.
어쩌라고 … 대체 사람보고 어쩌라고.

영화 참, 독하다.

영진공 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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