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 “꿈엔들 잊힐리야” (원제 : 미망), 15년 만에 다시 읽기


고등학교 때 읽었던 느낌하고는 천양지차다. 전처만, 머릿방아씨, 태임이, 종상이, 태남이, 여란이 등 등장인물들 이름의 어감이 익숙하다는 것만이 내가 예전에 읽었었다는 증거가 될 뿐. 세월을 지나 읽는 그 느낌은 새로운 것을 읽는 것이나 다름 없다.

줄여서 얘기하자면, 지금 읽은 것이 예전에 읽었던 것보다 훨씬 더 좋다. 그때는 이 소설이 이렇게 좋은, 그리고 대단한 작품인지 몰랐다.

다르게 보이는 등장인물들
이해할 수 없었던 머릿방아씨의 자기방기(自己放棄), 그런 사람으로 부터 나온 신비할 정도의 놀라운 열망. 고등학교 때 읽을 때는 너무나 모순되어 보였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제 삼십대 중반이 되어 다시 읽으니, 머릿방아씨가 자기방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를 포기할 수 없어서 생활을 방기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활을 풀어놓을 대로 풀어 놓아, 그 힘으로 자기를 지키다가 결국 그 풍선효과로 또 강렬한 생존본능에 사로잡히게 되는 강력한 길항작용을 견디어 내는 삶. 가슴이 아프고 아팠다.

머릿방아씨에 대한 이해가 바뀜에 따라, 전처만의 처(妻) 홍씨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 홍씨에게 남아있는 인상이란, 하루 종일 엉덩이 붙이고 있지를 못해 쓸고 닦고 만들고 먹는 살림에 목숨 걸어 domestic goddess가 되고자 하는 psycho 혹은 그악스러운 시어머니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본 홍씨는 그렇지 않다. 심성이 바르고, 차분히 자기 앞의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일상의 부조리를 원망삼지 않고, 그 안에서 작은 기쁨과 성취를 찾아나가는 사람이다. 여러모로 맑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자기 앞의 부조리(며느리의 부정)를 원망삼은 단 한번의 댓가로 홍씨가 치르는 대가는 사실 가혹하다 할 만하다.


전처만의 세째아들인 이성이는 고등학교 때 읽은 경험으로 ‘천하에 약삭 빠르고 상도의에 어긋나는 야차 같은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아있는데, 읽고보니 그렇지 않다. 그저 시대의 흐름을 반보 앞서 보고, 되도 않는 뚝심이나 불도저 정신같은거 없이 착실하게 자기 장사를 해 나가는 사람이다. 대단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차분히 시대의 큰 파도를 탈 뿐이다. (라고 평가하는 걸 보면 내가 그 동안 닳고 닳은 것인지도)


주인공 부부라 할 수 있는 전태임, 김종상에 대한 느낌도 예전과는 참 달랐다. 고등학교 시절, 태임이가 거상(巨商), 거목(巨木)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완벽한 판단 오류였다. 고등학교 시절, 읽으면서 이런 거상(巨商)에게 사임당을 닮으라는 “태임”이라는 이름은 너무 스케일이 작은 것이 아닌가 했었는데, 집안을 꾸려나가는 배포에 있어서는 거목인지 몰라도,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당찬 상속녀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어릴 때 읽을 때는 태임이의 이미지에 가려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종상이의 그릇이 보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진보적 가족 – 콩가루 집안? 아니,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가정
읽으면서 놀랐던 건, 이 소설 면면히 흐르는 ‘가족해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문제없이 흘러가는 ‘대안 가족’의 얘기가 깔려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가부장제에 얽매인) 가족해체를 두려워하고 개탄하는 촌스러운 작금의 현실을 생각할 때, 100년전 개성을 그리는 박완서 할머니의 발상에는 혁명적인데가 있다. 세간의 잣대로 보면 콩가루 집안일지 모르나 진정 진보적이고 인간적이다. 청상이 된 며느리가 가진 아이를 거두고 손수 이름을 지어주는 전처만 – 그 핏줄에 대한 인정이, 최초의 가부장의 인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논의는 차치해두자-을 비롯하여, 이부제(異夫弟)와 서자 삼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이종상-전태임 커플또한 녹록치 않다.

시집와서 시댁 귀신이 되지 않는 다면 스스로 부끄럽다 여기는 것이 마땅한 시대에, 남편옆에 있는 여란에게 보란 듯이 쿨하게 민적을 갈라나가고, 일본 유학 후 재혼을 하는 상철이 댁. 시집와 밥상머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식구들이 먹고남긴 잔반을 허겁지겁 입에 주워넣던 승재네 며느리가, 남편 살해범을 자처 한 후 당당히 이혼을 요구한 뒤,’혜정이’라는 이름을 새삼스럽게 찾아 갖는 그 장면은 또 어떠한가. 그 혜정은 또 추후에 태남과 재혼하여 사실상 동해랑의 안주인이 되니, 신기하고 신묘한 가족사다. 2006년작 ‘가족의 탄생’이 생각나는 대목이니, ‘미망’이 이 얼마나 앞서간 것인가.

전태임, 김종상의 부부 관계가 모던한 점 또한 주목할만하다. 이부제(異夫弟)와 서자 삼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시작된 결혼생활이니, 모던하다못해 황당(?)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재산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의 사업에 관여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여필종부의 관계도, 처갓집 뜯어먹고 사는 관계도 아닌, 그저 인생의 동반자 관계. 서로가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관계다. (물론 이 와중에 둘 사이의 소생인 두 아이의 출산과 육아는 전적으로 전태임의 몫이긴 하다.)

박완서는 초기작과 말년작만 읽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왕성하게 필력이 뻗치던 시절. 그 시절의 글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영진공 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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