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스 본”, 미국의 우울한 현실을 드러내다





미스테리라고 하면 이것도 분명 미스테리이고 그것을 골격으로 삼고 있는 영화이긴 하다. 마약 제조/판매 혐의로 재판을 앞둔 상태에서 보석금을 내고 빠져나왔다가 종적을 감춰버린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가 죽은 것인지 어딘가에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 만약 죽었다면 어떻게 죽게된 것이며 아버지의 시체는 어디에 숨겨져 있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알아나가야만 하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실종을 둘러싼 의문들은 <윈터스 본>의 내러티브를 채워주는 소재는 되어줄지언정 연출이 의도하고 있는 핵심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미스테리 드라마라고 할 때 기대하게 되는 서스펜스나 신비감의 수위는 이 영화에서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윈터스 본>은 17살 소녀 가장이 맞부딪혀야만 하는 황폐한 현실 자체를 묘사하는 일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뼈 채 드러나버린 듯한 겨울 날씨의 살풍경은 차라리 눈이라도 내려 뒤덮힌 모습이라면 나아보이련만, 시종일관 1년 전의 개봉영화 <더 로드>(2009)에서 인류 문명이 멸망해버린 이후의 지구와 별다를 것이 없어보일 지경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그러나 <윈터스 본>의 겨울 풍경 보다 더욱 황폐한 것은 주인공 리(제니퍼 로렌스)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만나게 되는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다. 물론 보통의 마을 주민들이 아닌 마약 제조와 상습 복용의 커뮤니티로 전락해버린 – 그것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아메리칸 드림의 어두운 그늘 속 마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영화는 아버지의 실종이 결국 의문의 죽음으로 바뀌고, 그 죽음을 어떻게든 증명해야만 하는 – 그렇지 않으면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담보로 제공했던 집과 땅을 빼앗기고 넋 나간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까지 모두 길바닥으로 내쫓기게 되니까 – 상황으로 한 단계씩 바뀌어 가는 과정을 묵묵히 따라가기는 하되 섣불리 관객들의 감정을 자극하려 하지 않고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도 하지 않는 의연함을 선택한다.

덕분에 어릴 적 TV에서 <분노의 포도>(1940)를 보고 느낄 수 있었던 한 편의 영화로서 가져볼 수 있는 일종의 기품이랄까 – 상당히 고전적인 뒷맛을 남겨주는 작품이 되었다.



영화는 결국 황폐한 삶의 벼랑 끝까지 가고난 이후에야 문제가 해결되고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주기까지 하면서 – 나름 희망적인 분위기를 조성해보며 – 마무리가 되는데, 세 남매가 집 앞에 앉아 죽은 아버지의 유품인 벤조로 불협화음을 튕기고 있는 마지막 컷은 차이밍 량 감독의 <애정만세>(1994)가 그랬듯이 다시 한번 먹먹해진 가슴을 끌어안고 엔딩 크리딧을 응시하게 만든다. 살아남은 자들은 결국 다시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건만, 이걸 잘 되었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분간조차 하기 힘들 만큼의 암담함이라니.



즐거움으로만 가득 채워도 부족할 황금 같은 두 시간을 왜 이렇게까지 극우울 모드의 영화에 허비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달리 해줄 만한 말이 없겠으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영화를 보아온 오랜 이력에 비추어 보았을 때 <윈터스 본>는 상당히 수준 높은 작가의식을 보여주는 값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데브라 그래닉 감독이 매서운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과 스스로에 대한 자의식의 발현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황해>(2010)에서 묘사된 연변과 한국이 각자의 전부가 결코 아니듯이 <윈터스 본> 역시 미국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는 불편한 진실의 일부인 것만은 틀림이 없을테니까.

<윈터스 본>은 옷을 벗고 살을 도려낸 뒤에 마지막 남겨진 누군가의 황폐한 자화상이다. 자, 이제 팔을 잘라내야 하니까 단단히 잡고 있으렴. 울어버리거나 도망쳐서는 안될 일이라는 사실을 소녀가 잘 알고 있었다는 바로 그 점이 <윈터스 본>에서 가장 희망적인 부분이었다.



영진공 신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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