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 조금 실망스럽지만 여전히 유쾌한 영화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 사랑을 믿고 있는 – 그러니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낭만과이다 – 부류 중 하나인 나는, 연애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

남남이든 여여든 남녀든 유시진이 어느 만화에서 말했던 대로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사랑하는 것은 우주적 차원에서 기적이라 믿고 있는데, 그 사랑을 서로 확인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의 시작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러니까, 잘 생기고 진국이고 성품도 좋고 능력도 있고 게다가 ‘인권 변호사’라는 그럴 듯한 직업도 가진 남자와 사랑을 확인을 하긴 했는데, 그걸 과연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브리짓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고난은 그의 무뚝뚝한 성격이 아니라, 그와 그의 세계가 가진 허위의 속물의식이고, 이것은 그 둘의 명확한 계급 차에서 출발한다. 하긴,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고, 그래서 살고 있는 세계가 기초적으로 생겨먹은 모양도 다른데 말이다.

브리짓 – 과 나, 그리고 내 주변 친구들 – 에게 있어 “가난한 사람은 게을러서 그런 거고 도와줄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은 상류층의 극우 또라이들이나 내뱉는 말이지만, 그의 세계에선 그게 절대적 믿음인 것이다. 마돈나가 영국에서 발표한 최초의 싱글이 영국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론 “럭키 스타” 라 해도, 그냥 일반적으로 알려진 “홀리데이”가 정답이 되는 그런 세계가 마크 다아시가 속한 세계이다.

브리짓은 이 세계에서 계속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 마크 다아시와 브리짓이 상반된 두 세계를 능숙하게 오가게 되지 않는 한 말이다.

둘이 그럼에도 사랑을 재확인하게 되는 건 브리짓이 처했던 곤경이지만 –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는 리지 동생의 정분난 야반도주 – 그래서 둘은 사랑을 고백하고 약혼을 하고 해피엔딩을 맞게 되지만, 글쎄, 과연 결혼을 한다고 둘의 사랑이 ‘잘’ 유지될 수 있을까.

영화가 정말로 실패한 지점은 이것이다. 즉,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이 야심차게 시도한 것은, “사랑의 확인까진 갔는데 유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지만, 이 영화는 또다시 사랑의 확인만 할 뿐, 유지를 위해서 정작 보여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한 가지, 있긴 하다. 그건 우리의 브리짓의 자신감 결여와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다.

‘출렁이는 뱃살이 당신의 매력’이라고 말해주는 애인 앞에서 당당하게 뱃살을 내밀지만 예쁘고 늘씬하고 똑똑하고 상류층 출신 가문의 동료 변호사가 애인 곁에 자주 출몰하자 당장 의부증이 발동하는 브리짓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 앞에 당당하자는, 그리고 사랑의 필요조건은 믿음과 신뢰라는 쓸 만한 교훈을 얻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둘의 사이를 정말로 힘들게 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원작소설에서 마크 다아시가 브리짓과 헤어진 뒤 정말로 레베카와 잠깐 사귀고 – 그래서 섹스도 한 번 하고 – 브리짓과 다시 연결되기 위해 그토록 혐오했던 자기계발서들을 몰래 읽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통나는 건, 관계의 유지를 위해 마크 다아시가 변하고 노력했던 부분들이다.

하지만 영화엔, 그게 없다. 오로지 브리짓 탓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이유있고, 공감할 만한 브리짓의 일련의 행동들은 정말로 “주책”이 되고 만다.

이것은, 속편 제작팀이 전편이었던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성공 요인이 무엇이었나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브리짓은, 평범하고 결점 많고 적당히 영악하려 하지만 별 수 없이 어리숙하고 사회적 성공의 위치는 그리 높지 않은, 그러나 끝없이 자신을 긍정하고자 노력하며 낙천적인, 우리 시대 여자들의 모습을 솔직하고 가감없이 보여주었다.

관객들은 그저, 브리짓이 뚱뚱한 몸으로 벌이는 일련의 해프닝에 웃느라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술고래에 줄담배에 통통하고 민망한 실수들만 줄줄이 저지르면서 예쁜 척, 귀여운 척하곤 거리가 먼 나이먹은 노처녀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통상 사람들이 주책이라 생각하는 한 여성의 어떤 면도 충분히 사랑스러울 수 있음을 보여준 게, 그런 여성이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게 전편 “브리짓 존스의 일기”이다.

마크 다아시가 반한 브리짓도 마찬가지고, 그는 그렇기에 “당신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했던 것이다. 전작에서 원작소설에는 없는 ‘두남자 유치싸움씬’이 굳이 들어간 것도, 그렇게 (사회적 편견의 눈으로 보면)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여자를 위해 두 남자가 치고받고 투다닥을 할 수 있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점잖은 척하는 남자들의 후까시란 게 실은 그렇게 유치하고 웃기는 것임을, 실은 그것이야말로 ‘내숭’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기 위해 두 남자의 격투씬은 유치함이 더욱 과장되었고, 이것은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매력을 단단히 살려준 씬이 되었다.)

또한 이 격투씬이야말로, 치사스럽고 능글맞은 대니얼 클리버와 진지하고 속 깊으며 겉으론 무뚝뚝해도 속으론 열정으로 들끓고 있는 마크 다아시의 성격을 몸으로, 단적으로 드러낸 씬이다.

속편에서도 두 남자의 결투씬은 반복된다. 물론 상체를 바짝 위로 세운 채 종종걸음으로 도망가는 대니얼 클리버의 ‘왠지 치사스럽고 웃긴’ 도망치기와 큰 보폭으로 열심히 쫓아가는 마크 다아시의 ‘폼만큼은 멋진’ 추척이 코믹한 건 사실이지만, 두 남자의 대조적인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한다. “난 유부녀가 더 땡겨”는 충분히 대니얼 클리버다운 밉살스러운 ‘매 벌기’ 발언이지만, 치사스럽진 않다. (전편에서 대니얼 클리버의 치사스러움은, 마크 다아시 뒷통수 가격과 브리짓한테 엄살 부리기 등으로 딱 표현된다.)

뭇 여성들이 열광한 마크 다아시 캐릭터 분석도, 좀 잘못되어 있다. 전편에서 콜린 퍼스가 보여준 마크 다아시의 매력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오만함’으로 오해되곤 하지만 실제론 소심하고 – 언제나 브리짓을 따라다니던 그의 눈빛! – 속깊고 진지하면서도 따뜻한, 그리고 나뭇토막처럼 뻣뻣해 보이지만 실은 그 속에 펄펄 들끓고 있는 열정이다.

속편 원작소설에서 이런 마크 다아시의 모습은 약간 변하기는 하지만 – 조금 더 인간적이고 연약한 면을 드러낸다 – 속편 영화에서의 마크 다아시는 그저 주변 사람들의 평에 의해 설명될 뿐 (“당신은 오만해” “난 그 녀석 잘난 척해서 밥맛이었어”)이다. 마크 다아시는, 겉으로 표나게 두드러지진 않지만 사랑을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노력하는 캐릭터이다.

물론 콜린 퍼스는 태국 교도소 면회씬이나, 스피커폰 전화통화나 미팅 같은 ‘브리짓 실수연발’ 씬에서 마크 다아시 특유의 무뚝뚝한 자기방어적 성격을 훌륭하게 드러내고, 그러면서도 열정적인 애인의 모습을 드러낸다…만, 정작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변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완벽한 남자’일 뿐이다.

영화는 그래서, 둘이 행복해지려면, 전적으로 브리짓이 그의 세계에 맞춰 (서민적인) 자신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그닥 유쾌하지 않은 결론을 전제해두고 있다. 결국, 각본과 연출의 방향에서 이미 캐릭터가 잘못 잡힌 것이다. 얄미운 대니얼 클리버의 유들유들한 매력도 지나치게 단순해졌고. (그저 섹스광으로만 묘사되다니.)

하지만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은, 그래도 유쾌하다. 그것은, 좀스럽고 치사한 나쁜 남자 대니얼 클리버, 알고보니 진국 마크 다아시의 매력을, 한계가 명확한 각본 내에서도 최대한 드러내 주고자 노력한 “휴 그랜트”와 “콜린 퍼스”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제 브리짓 존스라 하면 더이상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없는, 완벽한 브리짓 그 자체의 “르네 젤웨거” 때문이기도 하다.

르네 젤웨거는 침대에서 아직 나오지 않는 마크 다아시를 그 또랑또랑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서, 그리고 어떻게든 사랑을 지키고자 온몸을 던지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에서 – 정말 온몸으로 연기한다 – 브리짓의 당당한 용기를 보여준다. (그것이, 각본에 의해 결국은 “주책”이 되고 말아버리긴 하지만.)

전편에서 All by Myself에 맞추어 처절한 외로움을 이쁜 척 하지 않고 완전히 막 가게 드러내 내 눈에서 눈물을 뽑아냈던 “르네 젤웨거”는(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그 장면에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이번에는 태국의 교도소에 날아왔지만 자신에게 무뚝뚝하게 대하는 마크 다아시를 보며 상처를 받는 씬에서 진정성을 전달하며 또 한 번 사람을 울린다. – 정말로 그 장면에서 나는 눈물이 났다. 브리짓의 상처와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서.

자고로, 주인공이 엉엉 울 때보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어떻게든 참으며 웃으려 애쓸 때 관객은 더 슬픈 법이다. 천하의 브리짓을 그토록 아프게 울게 만드는 그 슬픔의 결을, 참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진공 노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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