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성통곡을 해야 한다





서울시 초,중,고에서의 체벌금지가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일선 학교에선 학생지도 방식에 대해 일시적 혼란이 벌어진 듯하다. 쏟아진 관련기사만 보더라도 하나같이 무너진 교권과 학교 타령 뿐이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아이들의 인성과 선생님들의 교권에 이토록 애정어린 관심이 있었는지 몰라도 만약 그들이 진정 우리의 교육현실을 걱정 했다면 오늘 교권의 추락이 아닌 우리 교육의 비극을 이야기 했어야 옳다. 오늘의 이 혼란은 지금까지 학교 시스템을 유지시켜 온 것이 사제지간의 예의나 존경심이 아니라 체벌이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입시를 교육으로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미 학교와 교권은 무너진지 오래였다. 학교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한 곳으로 전락했고 그 시스템 안에서 학생과 선생님 사이를 메워주는 것은 존경심이 아니라 성적과 입시였다. 그래서 힘들게 아이들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것 보단 그저 관리하고 통제하고 말 안들으면 후려치는 것이 쉽고 편했다.



체벌이 인성을 길러준다면 삼청교육대에서는 부처와 예수가 나왔다는 말인가

그래서 선생님 역시 피해자다. 학교란 국영수를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부모와 사회 속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의 인성까지 책임지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요구다. 게다가 족벌사학들이 학교를 움켜쥐고 그저 좋은 돈벌이로 생각하는 곳에서 말단의 선생님들에게 진정한 ‘교육’을 요구하는 것은 독립군과 같은 용기와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기사에서는 체벌이 없어져서 사제지간의 신뢰가 무너졌다고 한탄했다. 사제간의 신뢰가 고작 체벌이라는 공포로 유지되었다면 우린 교육을 붙들고 대성통곡을 해야 한다. 정말 우리 어른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고개를 들지 못해야 한다.



 



영진공 self_fish



 


 

어찌 이리도 구질구질하단 말인가 …



금번 개각과 관련한 인사청문회를 보았다.

나라의 일꾼들에 대한 소중한 검증의 자리를,
하루나 이틀에 걸쳐 후딱 치르는 바람에 무엇 하나 제대로 살펴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확인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어쩌면 그리도 구질구질하냐는 것이다.

“죄송하다”
“부덕의 소치다”
“잘 몰라서 그랬다”
“나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었다”
“사과하겠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언젠가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지 않겠나”
“앞으로 잘 하겠다”
등등 …

이런 말들이 과연,
국민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몸바쳐 일하고자 하는 고위관리 후보자들이,

자신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겨달라고 요청하고 검증받는 자리에서 나올 말들인가.
이건 흡사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관대함을 구할 때 하는 읍소에 다름아니지 않은가.

능력은 검증할 생각도 않고 과거의 일을 들춰 흠집내기에 열중한 검증인들의 탓이 크다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물어보자. 개인의 능력은 대개 어떻게 평가하는 건지를.

적어도 내가 알기로 개인의 능력은 그동안 해온 일을 놓고 평가하는 걸로 시작한다.
그리고나서 그걸 기준으로 삼아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얼마나 잘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과 비전을 검증하게 된다.

헌데 후보자가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의 대부분이 죄송하고 송구할 따름이며 잘 몰라서 그랬던 것들일 때, 과연 그 후보자가 앞으로 얼마나 잘 할 것인지에 대해 묻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고위관리 인사청문회라는 것이 회개와 갱생의 자리도 아니고 말이다.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묻자. 우리 나라에 정말 인재가 그리도 없는 것인가.

그래서 저렇게나 죄송해야 할 일이 많고 재테크 등에는 범법을 저지를 용의가 있었거나 몰랐거나 하는 사람들을 굳이 저런 자리를 통해 면죄부를 주어서라도 막중한 일을 맡겨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나라에 편법과 무지를 용인해서라도 해결해야 할 급박한 변괴라도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나도 알고 있고 그들도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허나,
그들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음에도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그래서 더는 할 말이 없긴 하나,
한 가지 엉뚱한 이유로 아쉬웠던 건 저 많은 후보자들 중 어느 하나도 자신의 행위와 생각에 대해 당당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 하나 과거 발언과 행동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이루어진 거라고 얘기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임명권자에 충성하는 것이 곧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는 길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신이라도 펼쳐보인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예외가 있긴 했다.
선출직이면서 임명직이고 그래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장관자리의 후보자가 “지금 단계에선 4대강 사업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사람을, 반대하는 사람이 찬성하는 사람을 서로 이해할 수 없다”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는데, 재밌게도 그 장관자리가 말하자면 찬성하는 사람들, 반대하는 사람들과 잘 소통하여 원활한 국정에 보탬이 되게 하라는 임무를 띄고 있는 걸 보면 저 발언은 제대로 에러이다.

어쨌든,
국회에서의 검증내용이 어떠하든 임명권자는 그냥 밀어 붙이거나 체면치레 정도로 막아보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에서 더 이상 지적하는 것이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부디,
후보자들 모두 청문회에서 자신의 입으로 하였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잊지말고 가슴에 새겨 국정에 임하기를, 그리고 행여나 소나기만 피하고 보자는 나쁜 생각은 모두 버려주기를 바란다.


“This country needs more than a building right now.
It needs
hope
.”


영화 ‘V for Vendetta’ 대사 중에서

영진공 이규훈

 

우리의 자본주의는 얼마나 더 천박해지려는 걸까 …




토니 키틀러도 얘기했다. 마샬 맥루한이 진지하게 얘기한 ‘미디어는 메세지다’라는 말보다는 농담으로 얘기한 ‘미디어는 마사지다’라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이어 그는 얘기한다. ‘미디어의 진실은 은폐됐다’라고.

인간은 경험으로 구성된다. 경험의 도구는 감각이다. 기존의 인간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으로 자신의 외부 세계를 경험했다. 하지만 이제 한 가지 더 있다. 미디어와의 접촉이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 하나가 더 추가됐다. 그것이 미디어다. 도시 생활을 영위하는 현대인은 미디어라는 환경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미디어는 ‘접하는’ 게 아니라 ‘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로 도시에 사는 현대인을 구성하는 외부세계의 중요한 한 축이 미디어라는 거다. 문제는 미디어가 맥루한의 말처럼 단순하게 ‘메시지’ 곧 정보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대인은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기보다는 ‘감각의 만족’을 더 얻는다. 더 직접적으로는 새로운 욕망을 얻고, 그 욕망의 만족을 얻으며 산다. 그래서 미디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욕망을 불어넣는다.

살아본 적도 없는 타워팰리스에 대한 욕망, 들어본 적도 없는 뉴칼레도니아 여행에 대한 욕망, 맛본 적도 없는 푸와그라에 대한 욕망은 기존의 오감이 준 것이 아니다. 미디어가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욕망의 배후에는 언제나 자본이 숨어 있다.

모든 욕망이 다 채워질 수는 없다. 건강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장기매매를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천박해질 때는 어김없이 ‘시장’이라는 만병통치약을 통해 채워져서는 안되는 욕망이 채워질 때다. 미디어가 이 음험한 욕망을 부추길 때 우리는 미디어를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 절제되지 않는 욕망을 전파하는 미디어는 위험하다.

미성년자를 성적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사회의 합의다.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는 그래서 화간이든 뭐든 간에 ‘청소년보호법’에 저촉된다. 미성년자를 욕망할 수야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 합의에서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남몰래 집구석에 숨어 혼자 해야 한다.

미성년 아이돌들이 미디어에 나와 섹시한 춤을 춰대는 것이 나는 그래서 음험해 보인다. 가져서는 안 되는 욕망을 부추기는 뒤에는 그래서 거대 기획사라는 자본이 숨어 있고 이 자본은 어김없이 채워져서는 안 되는 욕망을 시장에 유통시키는 거다. 미성년 아이돌이 살을 드러내고 엉덩이와 가슴을 흔드는 것에 열광하는 짓이 이제 더 이상 창피하고 불온한 짓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미성년 성폭행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미수다에서였나? 프랑스 패널이 나와서 얘기했다. 프랑스에서 성인 남성이 미성년 아이돌 이름을 줄줄이 외우다가는 손가락질 받는다고.

사랑 혹은 결혼도 교환가치가 돼 버렸다. 여자는 남자에게 섹스를 제공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좋은 차와 넓은 집을 제공한다. 그래서 남자의 중요한 스펙은 직업과 연봉이고 여자의 중요한 스펙은 미모다. 그래서 여자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성형과 다이어트다. 조건을 갖춘 남자들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언젠가부터 아름답다는 것에 기준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아름다움이 존재하지만 그런 다양한 아름다움은 자본에게는 불리하다. 모든 제품에는 규격이 있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내다팔아야 하는 자본에게는 규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규격은 미디어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이 만들어내고 성형외과는 그 규격을 전파한다. 성형으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스타워즈의 씨스리피오(C-3PO) 같은 얼굴이 언젠가부터 아름다운 얼굴이 되어 있다.

문제는 생존이다. 생존이 해결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랑 혹은 결혼이 교환가치가 되어 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교환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내다 팔아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인데, 최근 뉴스를 보면 OECD 최고 남녀 임금 격차가 우리나라였다.

우리의 자본주의가 끝없이 천박해지고 있다.

영진공 철구

아직은 기회가 남아있기를 소망하며

지구는 멸망한 듯 보인다. 동물은 사라졌고 작물은 자라나지 않으니 사람은 먹을 게 없다. 남은 먹이는 사람 뿐이다. 코맥 맥카시가 창조한 지옥 ‘더 로드’의 풍경이다.

아비와 아들이 남았다. 자신들을 먹이로 삼으려는 사람 앞에서 아비는 한 알 남은 총을 겨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굶주림을 짐작하는
아들은 남은 통조림을 건넨다. 아비의 총과 아들의 통조림. 코맥 멕카시의 지옥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비의 총과 아들의 통조림 사이에 있다.




진보’와 ‘보수’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동물들이 사는
세상은 아비의 총처럼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지배한다. 그것이 동물 세계의 규칙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여야 하고 이겨야 한다.
인간은 동물이기에 그것은 인간의 규칙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이기만 한 것일까?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진화론에서 나왔지만 다윈은 인간에게는 적자생존을 넘어선 ‘사회적 본능’이 있다고 말했다. 동류에게 건네는
통조림과 같은 본능. 그것은 동물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인간만의 감정이다. 동물이지만 동물과는 또 다른 감정을 지닌 인간.
‘진보’와 ‘보수’는 여기서 갈린다. 인간은 동물일 뿐이라며 동물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보수’이며 인간은 동물의 규칙을
넘어선 인간만의 규칙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진보’인 것이다. 하지만 ‘감정’이나 ‘믿음’은 과학이 아니다. 다시 말해
불확실한 것이다. 인간은 이 믿음을 변하지 않는 ‘진리’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더 로드’는 인간의 본능은 ‘진보’에 가깝다며 결론 맺는다. 하지만 내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 다행히 ‘더 로드’와 같은 지옥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에게는 여전히 기회가 남아 있다.

영진공 철구

현실과 포르노


머리에 뇌라는 것이 제대로 자리잡고 있는 남자라면 포르노가 현실이 아닌 판타지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포르노를 안 본 남자를 찾지 못해 연구를 접어야 했다는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 연구팀의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도 여성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다.

포르노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것은 슈퍼맨 영화를 보고서 스판바지를 입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짓과 같으며 우린 이런 부류를 일컬어 변태라고 일컫는데에 남녀모두 사회적 합의를 보고있다. 그래서 누구도 바바리맨이나 강간범, 성추행범을 향해 나의 꿈을 이뤄줘서 고마워라고 만세 삼창하지 않으며, 그 놈을 호되게 처벌하는 것에 모두가 동의한다.
  


나이 80을 먹어도 야동에 끌리는건 어쩔 수 없다지만 …
포르노는 포르노일 뿐 환타지에서 그쳐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나라의 격이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했다지만 이런 사회적 합의를 깨고 바바리맨을 상상력의 총아로 덧칠하는 일들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얼마 전에 광화문 중앙분리대에서 펼쳐진 스노보드 경기를 놓고선 자신의 좁디좁았던 상상력을 한탄한다든지 하는 등의 일이다.

난 그런 거 상상도 못했다능, 그래서 내심 걱정했지만 해놓고 보니 내 졸렬했던 상상력이 부끄러웠다능, 우리 모두 마음을 열고 편견을 버리자능 … 등등 …

아 … 정말 상상력은 안드로메다에 두고 국영수만 열심히 들고파야만 했던 주입식 교육의 병폐가 뼈져리게 느껴진다. 고작 그런 상상조차 못하고 살았다니. 지금도 애들 상상력을 홍어 거시기 마냥 만들어놓는 교육부는 정말 줄빠따 맞아야 쓰겠다.


광장의 의미가 무언가. 요즘 언제 광장이 ‘광장’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촛불시위 이후 광화문에 급조되어 광장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중앙분리대가 실은 시민의 의사표현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 광장도 아닌 곳에 스노보드 대회를 하든 스키 대회를 하든 물을 채워서 요트 경기를 하든 놀랄 일은 아니다. 저 곳은 그렇게 쓸려고 만든 거니까.
 
그런데 그 곳이 정말 광장이라면,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인시위조차 강제연행 하면서 카드회사의 마케팅에는 얼씨구나 통째로 내주는 건 상상력이 아니라 그냥 횡포일 뿐이다.

게다가 저 저렴한 상상력은 이미 아랍의 졸부들이 두바이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 사막 위의 스키장? 인공섬? … 그 막대한 에너지들은 그 졸부들 만의 것도 아닌데, 그들이 안 그래도 피곤한 지구를 쥐어짜서 한다는 짓이 고작 사막에서 스키를 타기 위함이라니 이건 재앙에 가깝다.

 

사막에선 낙타를 타고 스키는 스키장 가서 타라.

근데 그런 아랍 졸부를 보고 우리도 그 뒤를 따르잔다. 그러니  4대강에 콘크리트 부어서 유람선 띄우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머릿 속에서 끝내야 할 일과 현실로 끌고 나와도 될 일들을 구분을 못하고 있다.

포르노는 그냥 포르노에서 끝내야 하는데 현실로 가져와 재현을 하려고 하면 변태가 되듯 두바이에서 벌어지는 저 돈지랄이나 4대강 살리기나, 펌프로 물 끌어다가 수도물 쏟아붙는 ‘하천’ 을 만든 것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게 아니라 현실을 재앙으로 만드는 행위다. 이래선 남극대륙에 사파리를 건설하겠다는 놈이 나와도 하등 이상할게 없는 현실이 되어버릴 지경이다.

이대통령은 그의 변태스런 삽질 정책을 녹색성장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녹색 삽으로 삽질할 건지 녹색 시멘트를 바를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녹색성장’ 만큼이나 모순적인 제목이 붙은 ‘그린 포르노(Green Porno)’라는 단편영화가 있다.




이 단편영화는 여배우 출신인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각본, 감독, 출연한 영화다. 자연보호와 생태를 주제로 담고 있는 이 짧막한 영상들은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직접 곤충이나 생물들로 분장하여 교미장면을 코믹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짝짓기 행위는 정확한 고증을 통해 묘사하였다고 한다.

선댄스 영화제 측의 지원으로 모바일 동영상 플레이어 포맷으로 제작되었으며 링크를 따라가면 전편을 볼 수 있다. 재밌으니 한번 보시길.

이런게 포르노와 그린이라는 모순적인 단어를 접목시켜 만들어낸 ‘상상력’이란거다. 녹색 삽으로 삽질하는게 녹색 성장이 아니라.

각설하고, 상상력타령 따위의 설레발은 서울 시장이 광화문 광장에 제대로 된 공원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고 차량 통행은 획기적인 방법으로 개선할 때나 경기도 의회에서 당론에 개의치않고 상큼한 모습으로 초등생 전원 무료급식을 통과시키거나 할 때에 쳐주시기 바란다.

할 수 있으니까 하고 싶은대로 다 하는 걸 상상력이라든가 신념이라든가라는 말로 포장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의 모든 패륜이 용납되어지고, 모든 횡포와 배신에 대한 비판이 편견으로 인한 오해로 해석되고 말터이니.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