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oS 단상

요즘 디도스(DDos: Distributed Denial of Service) 공격 보도들을 보면 광우병파동 때가 생각난다.  미국쇠고기 수입문제가 처음 제기되었던 노통때 조중동의 보도와 요즘 디도스 보도가 거의 판박이다.

MBC 피디수첩 보도때는 물론 조중동께서는 모두 잠잠해지신 다음이었지만 눈치없게도(?) 피디수첩은 예전에 조중동께서 하시던 말씀을 조금 차분한 분위기로 다시 하셨지.

그러자 농림부 장관님께서 명예훼손으로 고발을 하셨고…

요즘 DDoS 보도도 끝내준다.

안기부에서는 바이러스 걸린 PC를 분해해서 조사하시는 모습을 연출하시고,
부트섹터의 소프트웨어적 손상을 “자폭”이라 표현해주시고,
어디서도 인정하지 않는 북한 공격설을 전세계에 퍼트려주신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이런 분위기니까 아직도 사람들이 초능력따위나 믿고,
인체투시를 해준다는 학원에 수백 만원을 쳐바치는 의사들까지 나오는 거다.

합리적인 사고를 막는 세상. 중세의 암흑기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놈의 협박 분위기에 편승해서 듣보잡 프로그램회사들이 오묘한 마케팅을 펼쳐 겁먹은 사용자들로 하여금 지들 프로그램(거의 스파이웨어에 해당하는)을 다운로드하게 만들고 그걸 빌미로 삥뜯으려고 난리다.

내 PC에도 어느새 리얼스캔이라는 듣보잡이 깔렸는데, 겁을 주더니 더 알려면 돈을 내거나 회원가입을 하란다.

골때리는게 이 프로그램은 오른쪽 위 귀퉁이에 있어야 할 나가기 버튼이 없다는 거 …
오로지 돈을 내거나 회원가입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거지 …

자, 이제는 인재과학부 장관이나 국정원장이 언론을,
그리고 부당이득을 취하는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고발하셔야 할 때가 아닌가?

뭐 그럴리야 없겠지만.

영진공 짱가

2009년 그리고 1968년


[문화일보] 발길 돌리는 수문장 (2009.6.5)

[문화일보] 대한문 앞은 아직도 ‘무법지대’ (2009.6.22)

그리고 6월 24일.
대한문 앞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보수단체의 기습을 받더니 철거됐다.


1968 년 1월 18일. 서베를린 쿠프퓌르스텐담 광장에서는 약 2만명의 시민들이 ‘불법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체게바라’와 ‘호치민’을 연호하며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비판했다.  이 시위에는 독일 학생 운동 지도자 루디 두취케가 있었다.

‘ 빌트 차이퉁’을 비롯 여러 신문들을 소유한 당시 독일의 언론 귀족 악셀 슈프링거는 미국의 세계 정책에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독일의 산업귀족 대부분은 독일 제 3제국의 후원자였고, 과거에 히틀러를 공격하지 않은 것처럼 패망 후에는 그들의 새로운 보호자 미국을 섬기려고 애썼다.

악셀 슈프링거의 신문들은 그래서 두취케를 ‘빨갱이’라고 공격했으며 심지어 ‘더러운 일을 경찰에게만 맡기지 마라’라는 제목까지 붙였다.

루디 두취케

뮌헨 출신으로 실직 상태에 있던 요제프 바크만은 매일 이런 신문을 읽었다. 자신의 처지에 낙담해 있던 그는, 학생들을 공격하는 ‘빌트 차이퉁’을 읽고 만족감을 얻었다.

1968년 4월 11일. 루디 두취케는 어린 아들의 약을 짓기 위해 서베를린의 약국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요제프 바크만은 두취케에게 다가가 세 발의 총을 쏘았다. 한 발은 가슴에, 한 발은 얼굴에, 한 발은 머리에.

요제프는 자신을 붙잡은 경찰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는 마틴 루터 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공산주의자를 미워하기 시작한 뒤로 내내 두취케를 내가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분노한 학생들이 독일 전역에서 슈프링거의 사무실을 공격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어느 우익 목사가 집회하는 교회로 들어가 마지막 찬송가를 ‘인터내셔널가’로 바꾸어 버렸다.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중에서)


1968년 4월 11일, 수 천명의 학생들이 슈프링거 신문 베를린 본부 앞에서 루디 두취케 저녁 사건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이고있다.

총격으로 인해 루디 두취케는 뇌에 심한 손상을 입어 말하기를 다시 배워야했고, 이후 영국과 덴마크를 전전하다가 1979년 12월 24일에 덴마크 거주지에서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저격 사건은 독일의 학생운동을 과격일변도로 치닫게하여 바더마인호프가 만들어지는 계기를 제공하였지만, 정작 루디 두취케는 합법적이고 점진적인 학생운동을 주창하였다.

요제프 바크만은 저격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중 1970년 2월 24일에 자살하였다.


바다에서 낙조의 화폭은 하늘 만이 아니다. 해는 자신이 잠겨가는 바다까지 색색의 노을로 물들여 놓는데 그 순간에는 바다에 금빛 찬란한 들판이 생기고 하늘에 석양 짙은 섬들이 생긴다. 바다의 포말은 추수 전 벼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황금빛이고, 하늘의 구름은 땅거미 지는 섬처럼 그림자를 내민다. 낙조의 바다는 들판과 바다와 하늘과 섬을 모두 합쳐놓은 거대한 어울림이다.

유년은 모두 바닷가에서 보냈다. 내 유년의 노을은 그렇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논이 없는 동네에서 난 해지는 바다를 통해 논을 보았고, 다도해가 아닌 동네에서 난 해지는 바다를 통해 섬을 보았다. 뭍의 노을은 그보다 훨씬 소박했다. 열기가 느껴지는 이글거림도 없었고, 모든 걸 다 섞어버리는 어울림도 없었다. 고운 주황과 고운 붉음을 입김처럼 호호 파란 하늘에 내뱉다가 산등성이로 어둠을 뿜고 조촐히 식어 버렸다. 싱거웠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고속도로. 차 왼편으로 그 싱겁고 조촐한 노을이 걸렸는데 수많은 타워크레인이 공성병기처럼 노을 앞에 서 있다. 아산 혹은 오산 근처였을 것이다. 타워크레인이 사라지면 그 자리를 대규모 고층 아파트가 대신할 테니 그 싱겁고 조촐한 노을마저 찾아보기 어려워 질 것이다. 노을이 본시 싱겁고 조촐했을까? 인간의 손이 닿지 못하는 바다에서 인간의 손이 닿는 뭍으로 옮아오면서 노을은 싱겁고 조촐해진 것 아닐까?

김훈은 일산을 가르켜 ’10만년의 수평을 30년의 수직이 대신하게 된 동네’라고 했다. 어디 일산 뿐이고, 10만년밖이랴. 이 갸날픈 ‘자연보호 정신’조차 창피할 정도로 도시의 속도는 가파르니 기껏 노을이나 보고 상념이나 찍어내는 일까지 구태의연하고 촌스럽다. ‘디자인 서울’은 그 사이에도 무럭무럭 잘 자라날 것이고.

영진공 철구

정동영 혹시 트라우마?

트라우마라고 하지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그러니까 큰 사고를 당한 후 나타나는 정신적 질병이라는데 정동영이 아마도 이 병을 앓고 있는 것 같네요. 사고를 당했지요, 정동영도. 지난 대선후보 경선 때 선거인단 박스떼기라는 창의력을 발휘했으나 이명박 가카께 500만표로 지고 말았지요. 충격 좀 받았겠죠. 몇 개월 후 총선 때는 정몽준한테도 발리고 말았지요.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국회의원도 못 된 겁니다. 그러니 선거만 생각하면 얼마나 손발이 오그라들겠어요.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죠. 무섭고 두렵겠죠. 이번에 또 떨어지면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나 잠도 안 오고 밥도 안 넘어가겠죠. 하지만 해결책을 마련한 것 같네요. 이번엔 최대한 안전빵으로 자기 집 안마당에서 출마한답니다. 전주 덕진을.



모양새도 재밌습니다. 지난 대선, 총선 끝나고 정동영, 창피해서인지 아니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심해서인지 그냥 해외로 나갔습니다. 나가서 민주당에 어떤 도움을 줬는지는 찾아볼 수 없네요. 비슷하게 물 먹었던 김근태는 작년 촛불 정국 때 길바닥에서 초라도 들었지요. 대체 어디서 뭐하는지도 모르게 지내더니 보궐선거 기간에 딱 나타나서 한 마디 합니다. “나 전주 덕진을에 나갈래.” 정당이라면 선거구에 후보를 내놓을 때 누구를 내놓을지 논의를 하기 마련인데 그런 논의과정도 없이 다짜고짜 “나 국회의원 배지 줘”라고 한 거죠.  


듣자하니 민주당이 공천을 안 주려고 했던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대신 땅 짚고 헤엄치며 텔미 출 수 있는 전주 말고 부평 같은 데 나가라는 것이죠. 당대표를 두 번이나 했고, 당의 대선후보였던 사람입니다. 체급에 맞게 노는 게 맞지요. 게다가 지금 한나라당이 아무리 삽질한다고 해도 민주당 지지율 오르지 않고 있거든요. 당대표를 두 번이나 했고, 대선후보였던 정동영에게 그 책임이 없을까요? 그리고 그 책임이 1 년 해외에 나가 있으면 사라지나요? 희생이나 양보하는 모습도 보여줘야죠. 그리고 그것이 자기 정치경력에도 도움이 될 테고요.
 


정동영은 사실 컨텐츠가 없어 보입니다. 지난 대선 때도 실용이니 거시기니 한참 떠들었죠. 이명박이 선점한 단어였던 ‘실용’. 이명박 당선되고 그 맛을 보니 알맹이가 있던가요? 알맹이도 없는 실용을 정동영도 떠들었던 이유는 그렇습니다.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다 나한테 표 주세요. 우걱우걱’이라는 말을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죠. 그러니 알맹이가 있을 리 있나. 대신 대통령 혹은 금배지와 같이 ‘권력자’가 되는 데에는 집중력을 발휘하네요.
 


예측컨대 앞으로 정동영이 컨텐츠를 채우지 않는 이상 정동영의 봄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컨텐츠 없는 이명박도 가카가 됐는데 나라고 못 될쏘냐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다르거든요. 한나라당이야 공허한 컨텐츠를 포장할 포장지와 데코레이션이 여기저기 널려있지만 민주당은 있는 컨텐츠도 빨간 칠 당하잖아요. 그러니 민주당에서 정치 계속하려면 권력을 놓고 이전투구하기보다는 컨텐츠 개발해야 해요.

또 하나. 한국 정치, 엄청나게 드라마틱합니다. 유시민 보세요. 지금 드라마 제작하고 있잖아요. 시나리오도 괜찮고 연기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정동영은 드라마가 없어요. 양지만 좇았으니 드라마가 있을 리 없죠. 어쩌면 지금이 부족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에게는 너무 커다란 요구같지만 말이죠.

”]

민주당은 그래서 전주 덕진을에 전략공천 방침을 정했습니다. 정동영을 배제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인데 상향식 공천을 포기하고 전략공천을 하는 것은 당원과 지지자를 배반하는 일이라는 비판이 있네요. 옳은 말씀입니다. 그동안 민주당이 얼마나 철저히 상향식 공천을 지켜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진공 철구






‘패떴’ 대본 공개 논란- 리얼과 이미지 사이

“미네르바”를 석방하라.
Free “Minerva”

‘패밀리가 떴다 (이하 ‘패떴’)’ 대본 공개 논란이 아주 재미있다.

꽤나 많은 시청자들은 ‘리얼 버라이어티’이니까 ‘리얼’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리얼’이 아니라 대본을 ‘재현’해낸 것일 따름이어서 화가 난 듯하다. 그러니까 ‘리얼 버라이어티’ 안에서 ‘리얼’은 사라져 버린 거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미디어는 갈수록 ‘리얼’을 없애고, 그 자리에 자신들이 재현해 낸 ‘리얼’을 담아 넣는다. 그 가장 극적인 사건이 KBS 보신각 타종 행사 때 삽입된 ‘박수 소리’다.

<출처: 디씨인사이드>

그뿐일까? ‘패떴’을 보면서 많은 시청자들은 거기에서 보여주는 출연자들 캐릭터가 그간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것과는 다른 실제 자신의 캐릭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역시 대본에 의한 재현일 뿐, 실제와는 거리가 있었다. 엉성한 이천희도, 계모 김수로도 다 대본이 만들어 낸 캐릭터일 뿐이다.

그런데 비슷한 상황이 예능 버라이어티를 넘어서서 벌어진다. 지난 대선 때 미디어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캐릭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1년을 통해 깨달아 간다. 대본이 만들어 낸 캐릭터로 출연자들이 인기를 얻듯, 미디어가 만들어 낸 가상의 캐릭터로 누군가는 표를 얻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리얼이 사라지는 순간에 발생한 일이다.

현대 사회는 이미지를 소비한다. 이 이미지는 굳이 리얼할 필요가 없다. 섹시한 여성과 따뜻한 남성이 필요한 시청자와 관객과 독자가 존재하는 한 미디어는 이효리와 배용준의 이미지를 꾸준히 상품화 할 수 있다. 문제는 리얼이 제거된 가상의 이미지가 통용될 수 있는 공간과 리얼이 절대적으로 지배해야 하는 공간이 서로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리얼을 좇아야 하는 언론보도에서마저 리얼이 사라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KBS가 보신각 타종 행사는 현장 중계가 아니라 쇼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한 것은 그 현장이 리얼의 공간이 아니라 이미지의 공간이었다는 변명이었다.

<대통령 선거 광고의 한 장면>

개인적으로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싫어한다. 이미지와 리얼을 가장 혼란스럽게 넘나드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뉴스 보도를 통해 그들은 리얼을 얘기하다가 어느 순간 쇼 프로그램에서 이미지화 돼서 나타난다. 그들의 어디까지가 리얼이고, 어디까지가 이미지인지 불분명해질수록, 살아 있어야 하는 ‘리얼’은 희미해진다.

연예인 성형 문제도 비슷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희생해 가며 가상의 만들어진 이미지로 자신을 바꾼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성형외과 의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고, 그 이미지가 대중에게 많이 소비될수록 문제는 심각해진다. 우리가 열광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가치 뒤에는 성형외과 의사의 신기술이 존재하는 것이고 같은 논리로 우리가 지지했던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 뒤에는 미디어 데스크들이 존재하는 것이니까. 마치 네오가 살았던 메트릭스 뒤에는 컴퓨터가 존재하듯이. 아쉽게도 우리에겐 빨간 약도 파란 약도 없다.

현대를 살면서 미디어를 통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우리의 의식을 구성하는 언어도 미디어를 통해 입력된다. 미디어는 선호하는 언어 습관마저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리고 이 미디어는 끊임없이 가상의 이미지를 제공할 것이다. 리얼이 제거된 이 이미지에 둘러쌓인 현대인은 메트릭스 안의 네오다. 이 메트릭스를 벗어나려면 현대인은 피곤하다. 주어지는 이미지 뒤에 있는 것들까지 투시할 수 있는 시각을 스스로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잃어버린 리얼을 돌려받는 길이고 현대인의 빨간 약이다.

영진공 철구

[대안 교과서] 이런 걸 교과서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현 집권세력의 핵심 지지기반이라는 ‘뉴라이트’가 주도하여 출간했다는 대안교과서.
나온지 꽤 되었다는데 최근에야 그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일단 몇 대목을 살펴보자.

“일제의 한국 지배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 체제였다.
국내외의 한국인들은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의 권리를 끝내 쟁취하였다.
그 시기는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게 뭔 소리냐?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에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의 권리를 끝내 쟁취했다고?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었으면 우리 스스로는 근대국가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없었다는 거냐?
게다가 “근대국민국가”는 어디서 나온 용어냐? 
내용은 둘째 치고라도 글이 앞뒤가 안 맞고 한 쪽의 논리에 지나치게 편향되어있다.

우리가 근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기르고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로 인해 빼앗기고 폭력으로 지체되어 근대국가의 형성이 왜곡되고 더뎌졌다는 걸 부인하자는 것인가. 







“한편 일본군은 한국, 만주, 중국, 동남아, 남양군도에 이르는 전 주둔지에서 군 시설의 일부로 위안소를 설치하였다. 그곳에 한국, 일본, 중국, 동남아 출신의 여인들이 위안부로 노예처럼 수용되어 일본군에 성적 위안을 제공하였다. 일본군은 노예제를 금한 국제 협약을 위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한국 여성이 위안부가 된 사정에 관해 당시 심문을 맡았던 미국군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942년 5월 상순 일본인 대리업자가 ‘위안봉사’를 시킬 한국인 여성을 모집할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이 대리업자가 여인들에게 제시한 것은 큰 돈벌이, 가족의 빚 갚기, 쉬운 일,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새로운 삶 등이었다. 이러한 꾐에 빠져 많은 여성이 해외 취업에 지원하고, 몇 백 엔의 전대금을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무지했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이었다. 대개 800여 명이 이렇게 모집되어 1942년 8월 20일까지 랑군에 도착하였다.””


위 내용에 분개하기 이전에 지은이들에게 묻는다.  저렇게 기술하게된 근거가 뭐냐?

여전히 형언하기 힘든 고통을 겪고 계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당시 단순히 민간업자의 꾐에 빠져 자발적으로 나선 거라고 판단하게 된 근거가 있으면 제시해 달라.  그리고 이러한 범죄가 그저 민간 대리업자에 의해 저질러지고 일본군과 정부는 노예처럼 수용한 죄만 있다고 기술하게 된 근거도 있으면 함께 제시해 달라.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영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하였다.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여진 사례가 많이 있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다. 또한, 위안서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 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

이 인용문은 1993년 8월 4일 일본국 고노 요헤이 내각관방장관이 발표한 담화 중 일부이다.
소위 “대안교과서”에 따르자면 저 담화문의 내용은 사실을 왜곡한 거다.  그리고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나 미국 하원본회의 위안부 결의안 등도 잘못된 거라는 결론이 나온다. (참고 링크)

이 교과서의 지은이들과 지지자들은 그걸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대답해보라. 





“김구(1876~1949), 황해 해주 출생, 호는 백범(白凡) … 1896년 민왕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상인을 군인으로 오인하여 살해하였다. 체포되어 복역 중에 탈출하였다 …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테러활동을 시작하였다. (중략)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수많은 후진국의 정치적 지도자 가운데 이승만처럼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의 비타협적 반공주의는 신생 대한민국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동질적 국민의식을 배양하는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반공의 이름으로 반대파가 탄압되거나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인권이 부정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그의 반공주의는 보통사람의 의식속에서 두려움으로 내면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2차 세계대전후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 공산주의 국제세력의 공세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고,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올바로 잡는데 동시대 어느 느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 여러 시각이 존재한다는 건 인정하는 바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과서는 여느 단체의 조직원 교육자료가 아니다.  적어도 기술방식의 형평성은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에게는 미사여구와 변명거리를 덕지덕지 덧붙이고 그렇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시각만 단정지어 제시하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 식의 기술방식을 보통 윤색, 왜곡, 편향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런 내용과 기술방식의 서적을 정녕 교과서라고 해야 하는 건지 참으로 당혹스럽다.

앞서 말했듯이 역사와 인물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존재할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하다.  그러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보여줄 “교과서”에는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근거가 희박한 주장, 일부의 극단적 시각, 정치적 의도, 편향과 왜곡 등은 특히나 피해야 할 것들이다.

역사 교과서는 우리의 아이들이 역사를 배우고 익혀 스스로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행동방식을 결정하는 걸 돕는 책이어야 한다.  어느 특정 세력이나 단체의 일방적 시각을 호도하고 이를 주입시키고자 하는 도구로 쓰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들과 지지자들이 혹여라도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거라면 당장 중단하고 범사회적 협의와 합의에 의한 교과서 저술 및 발간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라고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