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이후의 이순신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은 이유

<허핑턴 포스트> 한국판의 8월 6일 기사, “‘명량’ 이전의 이순신 영화들 : 이순신 때문에 전 재산을 투자한 배우는 누굴까?” 에 따르면 우리나라 이순신 영화는

등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1977년 이후 제대로 된 이순신을 영화관에서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저위에 천군같은 뭐 이상한 코메디 영화들 말고 …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나타나듯이 한국에는 거의 하늘이 내린 기적과 같은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이란 인물을 제대로 표현만 하면 대박이 난다.

김훈의 소설(2001년)이 “명량”의 원작인데 당시 얼마나 세상이 뜨거웠는가를 생각해 보면 왜 13년이나 지난 지금 굳이 “명량”이 제작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칼의 노래”를 원작으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아주 잘 만든 TV드라마가 이미 그 분위기를 다 가져가 버리기는 했다.

그러다보니 “명량”에서의 해전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해전이 더 좋다는 사람도 많다.

어찌됐든 이순신 영화를 제대로 만들면 대박이 난다는 것은 거의 잘 알려진 수학공식과 같다. 게다가 “칼의 노래”라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시나리오도 이미 존재하고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 “명량”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해 보자면 그 원인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는데,

1. 제작비: 굉장히 많이 든다. 게다가 어설프게 돈쓰면 이건 죽도 밥도 안되기 때문에 엄청나게 써야 한다.

2. 배  우: 사실 이순신 장군 역할을 제대로 해 낼 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다. 김명민은 연기가 좋긴 하지만 너무 젊다.

3. 감  독: 마땅한 감독이 없었다. 사극을 잘 만든다는 감독이 있었지만 전쟁씬을 잘한다는 감독이 그동안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최종병기 활”이라는 조선식 액션영화가 나오고, 게다가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나름의 역사관이 표출된다. “조선은 백성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내 누이는 내가 구한다.” …

“명량”은 이 세 가지 측면이 해결되었을뿐만 아니라 “칼의 노래”에서 글로 보았던 이순신 장군을 영화관의 큰화면으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게 만든 사회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열망은 실로 대단했다. “소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말과 함께 명량해전으로 사실상 나라를 구원한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던 열망이 13년 만에 터져 나온 것이다. 게다가 최민식의 이순신 역할이었으니.

이건 이미 천 만 관객이 들 조건을 갖추고 시작한 것이다. 개봉 시 CGV가 상영관을 많이 깔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 만으로 천 만이 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 한국 역사에서 이순신은 거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인물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이 전쟁에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했던 짓은 절로 한숨 나고 몸둘바를 모를 정도이다.

사실상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조정은 정규군을 궤멸시키고 명나라 군대에게 나라를 되찾아 달라며 떼쓰는 것말고는 했거나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 와중에서 정규 군대가 왜를 물리친것은 이순신 장군의 전투 밖에는 없었다. 행주산성 전투는 실은 민초들이 힘겹게 싸워서 이긴 전공이고 말이다.

그러고도 조선은 과거의 잘못을 거울 삼아 발전은 커녕 극복조차 하지 못하고 다시 병자호란으로 또 한 방에 한양이 털리게 되고, 나중에는 전쟁조차 하지 않고 종이에 싸인하고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는 허망한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그런 역사 속에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거대한 자존심이고 가슴 벅차게 만드는 인물이기에 우리는 비록 극장 안에서나마 그에게 열광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명량”에서 이순신 영화는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량 이후 정유재란은 너무나도 비참했고 왜와 강화를 맺으려고만 하는 명나라와

임진왜란이 난지 7년이 다 되어서도 제대로 된 육군도 없는 조선이 명나라 뒤에서 찌질하게 구는 모습을 봐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적의 전투선 450여 척을 깨부순 노량해전이라지만 거기에서 이순신장군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영진공 기적

영화의 흥행성적과 모에 요소

<명량>과 같은 시기에 개봉한 신작 중에 재미있는 제목의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 재미있는 제목이란 다름 아닌 …

두둥!

<옹녀뎐>

너무나도 참해보이는 <옹녀>입니다.

습관처럼 검색이란걸 해봅니다.

8월에 개봉을 했다곤 하는데 여러분 중에 이 영화개봉한 거 들어보신 분이라도 계신지 궁금합니다.

찾다 보니 이렇게 배우를 모집하는 블로그도 눈에 띕니다.

음 출연료가 너무 짜다.

그래도 뉴스도 몇건 있고 개봉을 하긴 했나 봅니다.

아니군요. 1건이네요. ㅠㅠ

naver_com_20140821_225914.jpg개봉관은 ……

naver_com_20140821_230051.jpg

무려 1개입니다. 이거 보려면 시흥까지 갔어야해요. ㅠㅠ 이런 작은 영화는 정말 어디 상영관 구하기조차 어렵나봅니다.

이런 검색과정 도중에 문득,

관객은 어떤 것에 이끌려 영화를 보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물량과 개봉관 수로만 관객의 수가 좌우되는 걸까? 라는 생각 말이죠.

마이클 베이 감독의 경우 영화 자체로 돈을 벌었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심형래 거장이나 서세원 거장보다는 무언가를 좀 아시는 분 같습니다. 최소한 영화로 제작사를 말아먹는 짓은 하지 않았으니 말이죠.

그런데 솔직히 <트랜스포머> 4편은 확실히 망했을거라고 모두들 짐작했는데, 역시 중국에는 인구가 참 많았드랬습니다.

그다지 잘 만든 영화도 아닌데 왜 팔릴까?

마이클 베이 류라고 할 수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 감정과잉에 오버액션을 보고 있노라면 치가 떨리고 닭살이 돋아서 정~말 보기 힘들더군요. <트랜스포머>는 정말 감정이입이 안되는 주인공이었고 말이죠.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인데 <모에 요소>가 바로 그런 작품들은 흥행시키는 요소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사람들이 흥분하는게 뭔지 아는거죠.

전에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란 책에 나온 내용인데 말입니다.

일본의 만화에는 아주 체계적으로 매 시기별로 사람들을 흥분 시키는 모에 요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가령 메이드복, 고양이 귀, 튀어나온 머리카락, 커다란 눈, 고양이 양말과 장갑 등등,

이제는 각 캐릭터가 구분이 안될 정도로 규격화된 모에요소가 있고, 이것을 소비하는 것이 오타쿠들인거죠.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오타쿠는 일반화되었고요.

소녀시대의 경우 남성이 좋아하는 모에 요소를 단 한 명에게 모두 모이는게 어려우니까 캐릭터별로 나눈 걸테고요,

분명 <트랜스포머>에도 이런 모에 요소가 있습니다.

거대 로봇, 외계인, 장엄함 등등. 사람들에게 이런 모에 요소를 충족시켜주는 것만으로도 표를 사게 만드는 거죠. 일종의 공식화된 흥행요소가 된 겁니다.

전 솔직히 <전우치>가 참 보기 불편했는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멋있어 보이는 그럴듯한 대사를 총집합 시켜 놓았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거의 모든 대사가 마치 공식화되어 있는듯한 느낌? 그래서 혹시라도 예전에 시나리오 공부한답시고 읽은 시나리오집들 때문에 그런가? 뭐 그런 생각도 다 들었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모에요소를 활용하는 집단이 있죠.

바로 박근혜 대통령과 우리나라 꼴통 우익들이죠.

아니 어쩌면 박근혜 대통령이야 말로 꼴통 우익들이 좋아하는 모에 요소를 갖춘 캐릭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드는군요.

육영수 여사의 얼굴,

박정희 전대통령의 이미지,

과거 회귀적 말투와 행동들,

그런데 그런 캐릭터가 어느날 갑자기 노무현 전대통령이나 김대중 전대통령처럼 행동한다면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모에가 파괴된 것처럼 충격을 먹을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그래서 철저히 사람들의 마음을 툭 건드는 그 모에 요소를 끊지 못하고, 매 선거때마다 계속 활용하는 거 같습니다.

정치조차 오타쿠화 된 모에 요소의 총집합이 된 셈이죠.

어쨌든, 스토리로 승부한다거나 실질적인 내용으로 승부하지 않고 사람들의 모에 요소를 건드려서 흥행하는 작품들의 특징은, 그걸 보고나서 인간적인 성장을 하게 되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끝없이 그 모에 요소를 찾아다니게 만든다는 거라 느껴집니다.

소비하고 바로 끝나버리면 좋을텐데, 저 모에요소라는건 마치 끝없이 찾아다니게 만드는 <욕망>같은거죠. 질리지도 않아요. 마약처럼 더 많은 자극을 원하는거죠.

그래서 자극의 크기만 자꾸 커져가고요. 일본 교복 컨셉의 AV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교복을 입은 배우를 소비하는게 아니라 교복 자체를 소비하고 있다고 말이죠. 그래서 끝없이 그런걸 찾고, 그 욕망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고 말이죠.

막장 드라마도 그렇습니다.

배우와 장소만 바뀌고 기본적인 모에 요소는 유지합니다. 사람들은 남이야 욕하든 말든 자기도 욕하든 말든 그 <막장>을 즐깁니다. 휴가 때 고향집에가서 요즘 하는 그 <뻐꾸기 둥지> 보다가 제가 “미친년의 남자 꼬시기”라고 평하는 인터넷 댓글을 어머니께 읽어드렸는데요,

어머니 말씀이 “아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지. 그런걸 써둔대니?” 그러시는 겁니다.

아마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를 말씀드려도 똑같은 반응이 올 것 같았습니다.

영진공 신샘

“슈퍼 히어로의 정치학”, “킥 애스”가 보여주는 시민의식


 

 

 

“보수”란 당대의 사회 시스템을 인정한다는 말이며 지배체제를 인정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옳다’, ‘그르다’로 재단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한 시스템은 적어도 그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한 질서의 유지 측면에서 이해되고, 이 ‘질서’는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의 안정성을 담보해주는 것이기에 큰 의미를 가집니다.

 

한국 사회에서 살인은 5년 이상 ~ 무기, 또는 사형의 처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살인을 최대한 꺼리게 되겠죠. 하지만 사회가 자신을 지속가능할 정도의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이런 규칙을 슬금슬금 어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회체계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회구성원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최대한 잘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보수는 과연 그럴까요? 대한민국 형법 31조는 살인교사를 살인 행위자와 같게 처벌할 것을 요구하지만, 20명 이상을 죽인 유영철은 잡힌 즉시 신속하게 사형 판결이 나온데 비해, 어떤 이들은 십 수 년이 지난 후에야 가까스로 사형을 언도받고 결국 사면받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나오는 것일까요?

 

 

 

 

국가가 자신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야만 합니다. 그 중 하나가 피치자들에게 권선징악의 이데올로기를 심어놓는 것이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착한 일을 한다고 꼭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한다고 꼭 벌을 받는 것도 아닌 게 현실입니다.

이 때 지배자가 등장합니다. 지배자는 “하늘을 대신하여” 처벌을 내립니다. “하늘을 대신”한다고는 하지만 까놓고 보면 이는 자신의 지배 시스템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죠.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늘을 대신한다”는 증명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죠. 이 때문에 지배자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냅니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하늘”에서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늘”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눈을 빌면, 그들에게는 모르는 것이 없겠죠.

그래서 그들은 “하늘을 대신한 응징”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응징”은 일정 정도의 홍보효과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태고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처형은 하나의 축제, 혹은 구경거리와도 같은 성격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런 ‘일벌백계’를 통해 시스템의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런 관행을 수퍼맨과 배트맨에서 봅니다. 수퍼맨과 배트맨은 악당을 죽이기도 하지만, 피치못한 경우가 아니라면 악당을 경찰서나 교도소에(재판도 없이!) 쳐 넣습니다. 담벼락이나 기둥에 묶기도 하지요.(사실 제대로 그들을 넣었다 해도 현실이라면, 입증문제로 인해 영화에서처럼 간단하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군요. 비합법적 수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게 슈퍼 히어로 무비의 세계니까요.)

 

조용하게 해결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상징하는 코스튬과 온갖 퍼포먼스를 이용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홍보”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는 보이지 않지요. 그들의 정체는 ‘시스템’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최소화합니다.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그들의 탐지를 피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정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비난받을 일도 없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인데 수퍼맨은 뭐 하는 것이냐?”라는 푸념에도 클라크 켄트는 어디에도 없지요.

결국 수퍼히어로란 계몽주의의 산물인 셈입니다. 그들은 완벽하며 강하고 인간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진리가 되었죠. 마치 성서의 모든 문구가 진리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 논파의 방법에 불과합니다. 고대에는 국왕이 신의 아들임을 역설함으로써 지배이데올로기를 공고화했다면, 근대는 지식을 통해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형식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지배체제를 강화했습니다. “계몽”은 개인을 위한 것이기 전에 국가를 위한 것이었고, 이는 한글의 필요성과 용비어천가를 통해서도 매우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죠.

 

 

 

허나 아무리 영웅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한 사람의 영웅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수퍼맨이 지구를 사랑한 것은 지구가 그나마 그럭저럭 돌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시민사회의 단결이 흐트러지지 않은 세상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재미있는 히어로가 있는데 바로 “킥 애스”와 “스파이더맨”입니다.

스파이더맨 2편의 피터 파커는 지하철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정신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어린 아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하철의 시민들은 모두 그를 구하기 위해 모여들고, 심지어는 악당에게 도전하기도 합니다. 영화가 영화니만큼 폭력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킥애스라는 영화를 보면 얘기가 좀 달라지게 됩니다.

 

킥애스의 주인공은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냐”라는 탄식에서 별 능력도 없는 주제에 수퍼히어로 짓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진짜 수퍼히어로를 만나게 되죠. 하지만 세상을 바꾼 것은 힛걸 한 사람이 아니라, 수퍼히어로 모임이었습니다. 사회에서는 그저 평범한 혹은 평범 이하의 힘을 가진 Loser들이었지만, 그들이 힘을 모으자 그들은 더 강해졌습니다. 아픔과 피해도 있었지만, 승리를 쟁취한 것은 ‘시민들’이었죠.

 

 

 

 

이렇게 “연대의 승리”라는 면을 잘 보여준 게, “반지의 제왕” 2편입니다. 각 종족들은 처음에는 “나완 상관없다.”는 식으로 연대를 거부하지만, 이웃의 피해를 보고 그 피해가 자신들의 일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연대해서 승리하지요. 그래서 반지의 제왕은 멋진 정치 드라마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현실로 돌아와보면, 우리는 삶의 주체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주변부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엘리트도 중심부의 인물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주변인일까요? 주변인인가 아닌가는 주체가 서는 곳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나의 삶은 나에게 있어서 중심입니다. 아무리 ‘그들’의 수퍼웨펀이 나를 한순간에 제거할 수 있다 할 지라도, 내 삶의 주체는 결국 ‘나’이지요.

프랑스 혁명 이후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여러 부침을 거쳐 그들이 갖는 권위는 신분적 권위가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권위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주님’에게 절하는 사람들도 없고, ‘악수’를 거절하는 정치가도 없습니다. 사회의 자원을 많이 가진 자들에게는 오히려 의무만이 있을 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스템은 잘 굴러가며, 오히려 여러 국가들의 모범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그 동력이 ‘시민의식’에 있다고 봅니다. 그게 아주 대단한 것이 아닌, 규칙을 지키려 애쓰고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식하는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챙기는 의식이죠.

 

최근의 영웅물 중 이 ‘시민사회’ 부활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라면 저는 “스파이더 맨”과 “킥 애스”를 꼽습니다. 옳지 않은 자들에게 옳은 자들의 연대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의 수퍼히어로가 가지는 의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슈퍼 히어로가 대개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존재임에도 인기가 있는 이유는 매우 당연하게도 그들이 “제대로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강하지만 자신의 힘을 타인을 억압한다거나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남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자칭 타칭 “보수”라 불리는 이들의 모습은 과연 어떤가요?

 

 

 

영진공 바보아찌

 

 

 

 

 

 

 

 

 

 

 

 

 

 

 

 

 

 

 

 

 

맥용 만화뷰어 Mangao Kai를 공개합니다

 



 


 


 



 


 


 


Mangao 는 일본의 미나미 료타 씨가 개발해 배포하는 MacOS X용 오픈소스 만화 뷰어 앱입니다. 만화를 보는 데 최적화된 동시에 굉장히 단순한 뷰어입니다. 그만큼 경쾌하지만, cooviewer 같은 앱에 비하면 조금 부족해 보이는 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또 오랫만에 직접 삽질을 하게 됐습니다. 공개된 Mangao 소스를 기반으로 많은 부분을 뜯어고치고 기능을 추가한 Mangao Kai 버전을 개발, 공개하는 바입니다.


 


 




Mangao Kai 다운로드 (최신 버전 : 1.5)


                        <- 링크를 클릭하면 다운로드가 시작됩니다.




 



기존 Mangao 대비 변경, 추가된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5 업데이트 내용
1. 루페 기능의 버그 픽스

>>1.4 업데이트 내용



1. 자동 업데이트 지원
– 향후를 위해 Sparkle framework을 도입해 자동 업데이트 기능을 탑재했습니다. 환경설정 메뉴에서 ‘업데이트 확인’으로 수동 업데이트를 할 수도 있는데, 현재는 업데이트 서버에 정보가 없는 관계로 업데이트가 fail될 겁니다. 향후에 업데이트 버전이 릴리즈되면 정상적으로 업데이트가 될 예정입니다.


2. 화질 향상
– 레티나 디스플레이가 아닌 기종의 경우, Mangao는 cooviewer나 xee 에 비해 이미지가 흐릿해 보이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 단점을 드디어 개선하였습니다. 이제는 비 레티나 디스플레이에서 이미지가 좀 더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일 겁니다. 특히 작은 텍스트에서 향상된 정도를 절감할 수 있습니다. 단점이라면 인지하기 힘들 정도로 속도가 아주 약간 느려졌다는 거죠.
단, 레티나 디스플레이에선 이 루틴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3.X 버전 -> 1.4 이후 버전과의 화질 차이)




 




3. 사운드 입력으로 페이지 넘기기 


– [환경설정>사운드 입력으로 페이지 넘기기] 기능이 생겼습니다. 내장 마이크 등을 통해 입력되는 음량이 사용자가 설정한 한계치 이상을 넘어가는 경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기능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4. 항상 처음부터 읽기 옵션


– [환경설정>항상 처음부터 읽기] 옵션을 켜면 마지막 페이지가 저장된 만화라도 다시 열면 1페이지부터 표시합니다.


 



>>1.3.1까지의 추가/변경점



1. Open recent 메뉴 추가



2. 독 아이콘에 현재 페이지/총 페이지 표시



3. 풀스크린 표시시 현재 페이지 번호를 좌우에 표시

– 읽기 방향에 따라 좌/우 페이지 번호를 표시

– 1페이지짜리는 좌 또는 우측 읽기 방향에 따라 한쪽에만 표시

– 화면 전환시 애니메이션 효과



4. 이미지 효과 추가

– 자동 착색 기능(Command + A) 외에 자동 콘트라스트 조절 / 세피아 톤 ((Command + E) / 그레이스케일 변환 ((Command + G)/ 자동 색상 보정(느림) 기능 추가

– 특히 자동 콘트라스트 조절은 밝기/대비가 조절되지 않은 스캔본을 볼 때 편리함.

– 자동 콘트라스트 (보통) (Command + C ) / 자동 콘트라스트 조절 (강하게) (Command + Shift + C) 등, 화질에 따라 적절한 값을 적용해 볼 수 있음

– 각각의 이미지 효과는 1번에 1개만 적용 가능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동 콘트라스트 조절 기능을 사용한 예제)



 



5. 밝기 / 대비 조절 가능
– 밝기 기본(/) / 어둡게(,) / 밝게 (.)
– 대비 기본(Shift + / )대비 약하게 (Shift + ,) / 대비 강하게 (Shift + .)



6. XADMaster 프레임웍 도입

– XADMaster 프레임웍 도입으로 ZIP 파일의 자동 인코딩 디텍팅 가능.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등 대부분의 zip 파일을 열어볼 수 있음



* 단, 자동 디텍팅이 되지 않는 파일을 열려고 할 때, Mangao Kai가 죽을 수 있습니다. 해당 파일을 발견한 경우 댓글 등을 통해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7zip, lha 아카이브 파일을 열어볼 수 있음

– 패스워드가 걸린 아카이브 파일을 열어볼 수 있음



7. 압축 파일 안의 압축 파일에도 대응

– 압축 파일 안의 압축 파일도 열어볼 수 있습니다.



8. 썸네일 뷰 스타일 변경

– 썸네일 뷰를 하단에 표시하도록 변경, 좌/우 읽기 방향에 따라 표시 방향이 반전됨

– 현재 선택된 썸네일 / 전체 이미지 개수 표시

– 스크롤 휠 또는 J/K 키로 썸네일 이동시 포커스가 항상 가운데 맞춰짐



사용자 삽입 이미지

9. 타이틀 바에서 파일 경로 접근

– Command 키를 누르고 타이틀 바 클릭시 현재 파일의 경로 탐색 가능

* 2014/01/29

– 1.3.1 업데이트 : 버그 픽스 / 10.7 이전 스타일의 풀스크린 (화면 채우기) 기능 추가

그리고 소스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기존의 맥용 만화 뷰어에 만족하지 못하셨다면, 한 번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버그 리포트, 기능 제안 등은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영진공 DJ Han


 


 


 


 


 


 


 


 


 


 


 


 


 


 


 


 


 


 


 


 


 


 


 


 


 


 


 


 


 


 


 


 


 


 

해파리? 젤리 피쉬? 좀 알아보고 쓰자!


 


 


 



 


 








 


이건 경향 만의 문제가 아니다. 온라인 뉴스 기사를 제공하는 업체가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신문사들은 기사를 읽어보지도 않는 것인가?!  바다 한가운데서 투명한 생명체를 발견한 이 뉴질랜드 어부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이 기사를 보며 든 생각은 “대체 이런 병신 같은 기사를 어디서 누가 만들었지?!” 였다. 젤리피쉬(jellyfish)의 뜻을 모르고 있는 듯한 느낌의 이 쓰다만 기사는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 생물은 물고기(fish)란 소린가, 아니면 젤리 피시(jelly fish)란 소린가, 해파리(jellyfish)란 소린가?


 


도대체 무엇이 이 멍청한 기사를 낳은 건지에 대한 궁금증이 내 존재의 근원 깊숙한 곳에서부터 일어났다. 그래서 원문 기사를 뒤졌다. 뉴질랜드 어부가 저 생물을 젤리피시라고 했는지, 아니면 그걸 다룬 외국 신문에서 젤리 피시라고 했는지, 아니면 우리 기자가 그냥 바보인지를 알아보려고.




검색 결과 이것에 관한 기사가 최초로 실린 곳은 영국 일간지 MailOnline 으로 보인다.




 





“Now that’s a jelly fish! Stunned fisherman catches wobbly shrimp-like creature that’s completely see-through”, MailOnline, Jan 21, 2014.


(http://www.dailymail.co.uk/news/article-2543194/Fisherman-plucks-bizarre-shrimp-like-creature-water-New-Zealand-thats-completely-through.html)


 


 


이 기사는 지극히 정상적인 과학기사의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 첫 자에서 jelly fish를 언급할 뿐 본문에서는 투명한 새우 같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우리 입장에선 놀랍게도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 그 생물체의 정체는, 살파류salps이며 Salpa Maggiore (Salpa Maxima)라는 이름까지 밝히고 있다.


 


혹시나 해서 같은 내용을 다룬 New zealand Herald 기사를 보았다.


 






“Fisherman left baffled by see-through marine creature”, New zealand Herald , Jan 22, 2014.(http://www.dailymail.co.uk/news/article-2543194/Fisherman-plucks-bizarre-shrimp-like-creature-water-New-Zealand-thats-completely-through.html)


 


 


젤리피시 이야기는 없다. 그저 투명한 새우같이 보였다고만 말할 뿐 여기서도 전문가의 의견을 첨부하여 그 생물체에 관해 정확히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도대체 외국에서 이 기사를 퍼 온 녀석은 뭘 보고 기사를 쓴 건가. 제목에 비유적으로 한 번 언급된 jelly fish를 전체인냥 ‘젤리 피시’라고 떠벌리고 있다. 내용도 충실히 가져온 것도 아니고, 이 생물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우리나라 기사엔 제대로 적혀있지도 않다.


 


그나마 번역도 틀려서 이 생물이 남쪽 바다에 살고 있다고 적혀있는데 얼핏 읽어서는 따뜻한 남쪽 나라 바다인 듯한 느낌이다. 근데 얘네들 추운 바다에 살거덩! 아..정말..얘는 이렇게 기사를 써놓고도 돈을 받겠지?!


 


이하 내용은 위의 두 외국 기사에서 이 생물체를 소개하고 있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얘네들의 과학 기사를 대하는 자세 정말 부럽다.


 


 


 



 


 


 


이 생물은 살파류salps로서 Salpa maggiore (Salpa maxima)라고 한다. 젤라틴 같은 몸으로 물을 펌핑하여 바닷속을 움직이고 추운 바다, 특히 남극해 Southern Ocean에 풍부하게 서식한다고 한다. 햇볕이 드는 바다의 상층부에서 가장 작은 식물성 플랑크톤을 내부 필터internal filters로 포획해서 먹으며 심지어 박테리아조차 먹는다.


 


그래서 이들은 먹이 사슬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며 물고기, 거북, 물개에게 중요한 먹이 공급원으로 해파리보다 훨씬 더 영양가가 많다. 이들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희귀하지 않으며, 놀랍도록 빠른 번식률을 자랑한다.


 


 


 




 


 


그들은 홑 개체나 긴 체인을 형성하며 일부 살파류는 하루 만에 그들 개체군의 두 배가 될 수도 있다. 이들은 투명한 몸 때문에 발견하기가 힘들다.


 


 


 




 


영상 주소 http://youtu.be/kQ3g_8oJOcg




* 20초부터 보시면 살파류의 멋진 강강술래(?)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