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 파랑새 설화의 SF 버전



 


 


 


 



 


 


 


 


 


* 스포일러 잔뜩 … 주의 요망 *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세부사항에서 빈틈이 많긴 하지만, “프로메테우스 (Prometeus)


는 여운이 깊게 남는 영화다.


 


그 이유는 이 영화의 정서적인 구조가 아주 간결하고 두툼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믿음과 배신의 과정, 선망과 환멸의 과정, 그리고 원망과 복수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3가지 과정은 우리가 성장하며 겪었던, 그 중에서도 가장 뇌리 깊숙이 남았던 정서적 경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영화는 외계인과 인간, 탐사대와 데이빗 이라는 구도를 사용한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관객들은 한 인간형 외계인이 웅대한 지구의 자연 속에서 정체불명의 물질을 섭취하고 분해되는 장면을 본다. 배경음악이나 주변 환경, 그리고 그 사건의 결과를 보며 대개의 관객들은 그것이 진화를 촉발하기 위한 일종의 희생이라고 해석한다.


 


그로부터 수억 년 후, 인류는 고대 벽화들 속에서 그 외계인의 자취를 찾아내고 흔적을 따라 우주탐사여행을 떠난다. 이 프로젝트의 발제자인 두 고고학자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들은 그 픽토그램을 부모가 남겨놓은 초청장이라고 해석하고, 자신들이 부모를 찾아가는 첫 번째 자녀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이 외계인들에 대해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 기대와 희망은 행성에 도착한 이후 그들이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헬멧을 벗고 무모한 탐사를 벌였는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전적으로 자신들의 창조주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분들이 우리에게 해롭거나 나쁜 것을 주실 리가 없어.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두신 거야!”


 


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인류가 만들어낸 새로운 종, 안드로이드 데이빗에 대해서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적극적인 차별을 한다. 데이빗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들이 그렇게 만든 것에 불과하며, 데이빗에게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즉 영혼이 결여되어 있다고 믿는다(사실 데이빗에게 결여된 유일한 능력은 아마도 생식능력 뿐이리라). 그래서 그들은 데이빗이 인간을 흉내낼수록 더 거부감을 보인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그 데이빗은 찰리 박사에게 질문한다. “인간은 왜 자기를 창조했을까?”


 


사실 이것은 인류가 외계인에게 묻고자 하는 질문이다. 찰리는 “그냥 그저 그럴 수 있으니까.”라고 답한다. 별다른 이유도 없고, 큰 뜻도 없고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해 본거지 라는 얘기다. 이 대답에 대한 데이빗의 반응은 저릿하다. “만약 (니들) 창조주로부터 그런 대답을 듣게 된다면 (너는) 어떤 기분일까?”


 


이 두 가지의 태도, 자기들의 창조주에 대해서는 원대한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자기들의 창조물에 대해서는 비하와 경멸적 태도를 보이는 인간의 이중성은 사실 복선이다. 그 복선은 외계인의 DNA가 인류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사실 과학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단서를 통해 결말을 암시한다.


 


그네들도 결국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들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냥 할 수 있으니까 만들어 본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애들이 ‘왜 우릴 만드셨나요’ 따위의 질문을 하러 1조 달러를 들여 수조킬로를 건너왔다고 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영화의 결말은 여기서 이미 결정되었다. 인간이라면 데이빗을 어떤 곳에 “인간 대신” 보낼까? 안락하고 친절한 환경? 아니면 인간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험하고 독한 환경? 자기들은 하지 않을 것을 남에게는 기대하는 자가당착.


 


 


하지만 너는 웨일랜드 제품이야 ...



 


 


데이빗이 인간에게 가지는 감정. 여기서 잠깐, 감정은 합리적인 정보처리의 결과물이다. 아무리 인조인간이라 해도 정보처리능력으로는 인류 상위 1%에 해당할 데이빗에게 감정이 없을 리 없다. 물론 그 감정의 양상은 아마도 빅뱅이론의 셀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지만. 어쨌든 데이빗이 인간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비커스가 웨일랜드 회장에게 가지는 감정을 통해 드러난다.


 


데이빗을 만든 것은 인간이나 데이빗이 인류 전체에게 신세를 진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데이빗이 그나마 가장 큰 신세를 진 사람은 자본을 댄 웨일랜드 회장이다. 하지만 나머지 인간들은? 그들과 데이빗은 사실 동격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데이빗을 차별하려 든다. 비커스가 특히 그렇다. 웨일랜드의 인정을 향해 투구하는 그녀는 서자 앞에서 적통을 인정받기를 바라는 적자다. 그리고 그녀가 웨일랜드에게 가지는 감정은 바로 원망과 복수심이다.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줄 것 처럼 폼은 다 잡으면서도 결코 주지 않는 존재에 대해 느끼는 감정. 데이빗은 인간들에게 거의 비슷한 감정을 경험한다. 그 감정은 나중에 엘리자베스가 외계인에게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가 종반을 향해 가면서 관객들은 더 이상 영화의 첫 장면을 숭고하고 거룩한 희생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 장면은 처형이거나, 그들만의 종교적 의식이거나, 아니면 그저 치기 넘치는 도박이었을수도 있다. 이 장면이 인류 창조를 묘사한다고 봤을 때, 결국 이런 해석과 감정은 창조 자체에 대한 것이 된다.


 


 




 



 


굳이 영화 프로메테우스가 말해주는 인류 창조의 비밀을 이야기하라면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나 의미 따위는 아예 없는 것이다. 우리를 만든 애들도 아무 개념 없이 저지른 짓이고, 당연히 우리가 그네들에게 고마워하거나 그네들을 숭배할 이유 따위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네들에게 무슨 대단한 대답이 있으리라 기대하기 보다는 지금 여기 나 자신에게서 인생의 답을 찾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이건 인류 공용의 진리라기 보다는 그저 리들리 스콧 개인의 이야기겠지만, 그렇게 보자면 “프로메테우스”는 전 인류가 공유하는 ‘파랑새’ 설화의 SF 버전인 셈이다.


 



 



영진공 짱가


 


 


 


 


 


 


 


 


 



 


 


 


 


 


 


 


 


 


 


 


 


 


 


 


 


 


 


 


 


 


 


 


 


 

“익스트림 OPS”, 실감나기 위해서 연출이 필요한 이유

 



 


 



 


재미있고 멋질 것 같지?



 


우리는 가끔 ‘아, 내 경험은 드라마 그 자체야!’ 라고 말하곤 한다. 정말 자기 경험을 드라마로 옮기면 모두들 재미있어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모두들 그런 드라마 한 두개씩은 가지고 산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정말 대단한 드라마 같지만, 그게 실제로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나면 정말 재미없고 진부한 얘기로 변신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것이 영화든 드라마든 게임이든지 간에 모든 매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아이러니는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하면 오히려 현실감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극무대 라는 매체에서 배우들은 우리가 평소에 하듯 말하고 행동해서는 관객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연극무대에 적절한 연기법이 따로 있다. 그리고 이런 연극배우들이 TV나 영화라는 다른 매체로 옮겼을 때 적응에 애를 먹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는 영상 기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시청자들이 TV를 보면서 실감을 느끼는 화면색은 실제 색깔보다 더 선명하다.


 


 



얼굴도 마찬가지다. 그냥 보면 아주 예쁜 얼굴이 사진으로 보면 달덩이로 보이는 경우도 있고, TV 브라운관에서는 멀쩡해 보이던 사람이 실제로 보면 외계인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사진빨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물론 요즘은 그 사진빨도 찍히는 각도조절과 포토샵으로 조작해내는 시대지만 실제로 사진을 잘 받는 얼굴, 카메라를 잘 받는 얼굴이 따로 있다.

이건 표정 연기 같은 것에도 적용되는 원칙이다. 미소를 예로 들어보자. 내가 진짜 즐겁게 웃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으면 이게 웃는 건지 우느라 일그러진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영화나 TV 브라운관 속에서 보는 진짜 미소같은 미소는 그렇게 해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유명 연예인들이 미소짓는 장면을 잘 살펴보고 한번 따라해 보라. 그러면 그들의 웃음은 진짜 웃음이 아니라는 걸 알게된다. 얼굴에서 눈 아래부터 뺨 윗부분까지는 긴장을 풀고 입가와 눈가에만 힘을 줘야 포토제닉한 미소가 만들어지는데, 진짜 즐거울 때는 그렇게 웃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포토제닉한 미소 짓기는 포기했다. 그냥 웃고 말지 …


 



 


소위 말하는 포토제닉한 미소를 짓는 효리양


진정한 웃음, 파안대소를 짓는 효리양. 이런 사진 올려서 미안해요


진짜 웃음과 전형적 미소 사이의 미묘한 지점에서 소탈하지만 보기 좋은 웃음을 연출한 효리양


 



액션영화의 장면들도 마찬가지다.
스크린 속에서는 엄청 위험하고 박진감 나게 보이던 장면을 실제로 찍는 모습을 보면 스릴은커녕, 무슨 애들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당연하다. 실제 촬영이 그렇게 박진감 넘치면 위험해서 누가 영화 찍겠나… 그러면 그 박진감은 어디서 올까?


 


아는 친구 하나가 소리를 죽인 상태에서 성룡 영화 비디오를 본 경험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그 친구 왈, 소리를 들으면서 볼 때는 그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느껴지던 타격장면들이 소리를 없애고 나니까 그냥 대강 팔을 휘젓고 저 혼자 나가떨어지는 장면으로 보이더란 거다.


 


모든 성룡 영화가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내게도 한때 성룡은 우상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게 사실이다. 음향 효과, 조명, 앵글, 편집 등이 촬영장에서는 아주 밋밋하던 움직임을 박진감 넘치는 장면으로 변신시킨다.

반대로 실제로는 정말 박진감 넘치고 위험한 활동인데도 정작 스크린에 옮기고 나면 이게 영 밋밋해지기도 한다. “익스트림 OPS”(2002)가 바로 그런 영화다. 이 영화의 홍보용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178명의 스턴트맨들과 함께 만들어 낸 익스트림 드림팀!
“이 영화는 위험을 무릅쓰는 걸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진정한 즐거움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크리스찬 드과이” 감독이 말하는 영화의 의도는 명확하다. 하지만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장면을 실제로 찍어야 했다. 고공 케이블카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장면들뿐만 아니라 카약을 타고 폭포로 떨어지거나 수직에 가까운 산에서 스노우보드 묘기를 펼치는 등의 장면들도 블루스크린이나 별도의 합성작업을 고려하지 않았다. 제작진은 이 모든 장면들의 실제 촬영을 위해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미국, 영국,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홍콩 등 전세계에서 총 178명의 스턴트맨을 고용했고, 『스타워즈 에피소드2』의 스턴드 코디네이터를 맡았던 탐 델마가 이들의 지휘를 맡았다. 거기에 몸을 아끼지 않는 배우들부터, 자신의 몸을 직접 내던지는 열성적인 감독까지 가세한 제작진은 말 그대로 최상의 익스트림 드림팀으로 꾸려진 것이다. (씨네 서울 기사에서)

 




이 기사에서도 말해주듯 이 영화는 거의 스턴트맨들에 의한, 스턴트맨들을 위한 영화다.
그래서 온갖 스턴트 장면들로 넘쳐난다. 스카이다이빙에서 래프팅으로 이어지는 처음 장면부터, 헬기에서 뛰어내리고 케이블카에서 뛰어내리고, 눈사태 앞에서 스노보드와 스키를 타고 … 자기 장기를 자랑하고 싶어 안달하는 스턴트맨들로 꽉꽉 채워진 함량 110% 액션 영화다. 보다 보면 감독이 한 일 보다는 스턴트 코디네이터가 한 일이 더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재미는 없다.



 


액션만 있는건 아니다


나름대로 미녀도 있고


나름대로 악당도 나온다



 


 



이 영화의 기획단계에서 이들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영화의 짜릿한 장면들은 다 우리가 만들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아예 그런 짜릿한 장면들만으로 구성된 영화를 만들면 진짜 끝내줄 것 같지 않냐?”

 


 


이거 진짜로 해봐라, 짜릿함이 한 이틀간은 갈거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는 거라면



 


근데 어쩌랴… 그게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광고 카피와는 달리, 이 영화는 “버티칼 리미트”보다 짜릿하지도 못하고, “트리플 엑스” 보다 강력하지도 못했다. 개별 요소들은 그런거 같지만 정작 그것들을 모아놓은 전체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영화에 어울리는 연기와 연극에 어울리는 연기, TV 브라운관에 어울리는 연기는 따로 있다. 매체의 특성에 따라서 같은 움직임이나 표정도 전혀 다른 이미지로 전달된다. 연극 무대에서 배우는 얼굴 뿐만 아니라 몸 전체의 움직임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자기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반면, 클로즈업이 많은 TV 브라운관에서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어울린다. 그래서 연극무대에서 하던 방식으로 TV에서 연기하다간 오버액션이 되기 딱 좋다.


 


영화는 두가지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어떤 때는 연극처럼, 어떤 때는 TV처럼 …

중요한 것은 실제 어떤 장면이 아무리 위험하고 빠르고 격렬하더라도 어떤 매체를 통해서 어떻게 연출되느냐에 따라서 전혀 그 이미지로 전달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영화나 TV에서 리얼하게 맞고 때린다는 느낌을 관객들에게 주기 위해서 진짜로 맞고 때려야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연출을 해야 하는 거다.


 


 




 



진짜라고 해도 그게 반드시 진짜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짜스러우려면 연출이 필요하다.

영화 “익스트림 OPS”는 바로 이런 교훈을 떠올리게 해준다.


영진공 짱가


 


 


 


 


 


 


 


 


 


 


 


 


 


 


 


 


 


 


 


 


 


 


 


 


 


 


 


 


 


 


 


 

“슈퍼맨 리턴즈”, 세상이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







“슈퍼맨 리턴즈”(Superman Returns, 2006)



이 영화에서 로이스 레인이 “세상은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는 칼럼을 쓰는데, 그녀의 기사를 제가 대신 써봤습니다.

이 영화 “슈퍼맨 리턴즈”에서 로이스레인은 ‘세상에 슈퍼맨은 필요없다’ 는 기사로 퓰리쳐상을 타는 것으로 나온다. 그녀는 틀렸다. 세상은 단순히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사실 슈퍼맨은 문제 덩어리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든 영화든 <슈퍼맨>의 세계는 너무나도 순진하고 착하다.

이 세상에 슈퍼맨 같은 존재가 있을 때 벌어질 일은 이전에 재기컴치는 슈퍼히어로물 『인크레더블』이 이미 쫙 리뷰한 바 있다. 세상에는 매순간 사건사고가 벌어진다. 매초마다 범죄에 희생되는 사람이 있다. 슈퍼맨이 그들을 다 구할 수 있겠나. 당연히 선택할 것이고 그러면 그때부터 문제다. 누구는 구하고 누구는 무시하느냐. 이건 정치와 경제와 철학이 얽힌 문제다. 그리고 이런 문제로 싸움이 붙으면 결코 끝장이 안나듯, 슈퍼맨의 선택은 결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만약 그가 로이스 레인하고 인터뷰(?)하며 둥둥 떠다니는 장면이 사람들에게 목격된다면, 누가 죽어갈 때 슈퍼맨은 한가하게 여자랑 노닥거리고 있었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영화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박물관이 털렸어요. 슈퍼맨이 이 창녀와 노는 동안 말이죠!” 로이스 레인의 대사다)

사실 슈퍼맨은 MMOG에서 운영자와 거의 비슷한 존재다. 운영자가 어디든 순간이동 해서 중재하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 처럼 슈퍼맨도 그렇다. 운영자가 투명인간도 되고 엄청난 파워를 발휘해 게임세계의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것 처럼 슈퍼맨도 그렇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운영자들은 게임이용자들을 위해 일을 하는데, 역시 슈퍼맨도 그렇다. 하지만 MMOG 세계에서 게이머들에게 추앙받는 운영자는 별로 많지 않다. 게이머들에게 ‘영자’ 라고 불리며 하인취급을 받거나, 심지어는 공공의 적 취급을 받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들의 잘못 때문일까? 물론 어떤 운영자는 실제로 잘못을 저지른다. 게임 세계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특정한 팀의 편을 들거나, 심지어 사리사욕을 채우기도 한다. 하지만 운영자가 욕을 먹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잘못을 해서가 아니다. 그저 그들에게 초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이고, 사람들의 기대를 결코 만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슈퍼맨이 존재할 때 생기는 가장 심각한 큰 문제는 세상의 규칙이 이 슈퍼맨 때문에 바뀐다는 것이다. 그 어떤 사고도 슈퍼맨은 막을 수 있다면, 사람들의 안전에 대한 개념도 바뀐다. 그 어떤 심각한 범죄도 슈퍼맨이 막을 수 있다면 치안에 관한 시스템이 바뀐다. 그러다보면 또 문제가 생긴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는데 제대로 수습이 안 되면 책임이 슈퍼맨에게 돌아간다. 원래 이 세상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에게 그 책임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이 모든 게 슈퍼맨 때문이다.”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데는 아마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의 문제의 원인도 따져보면 슈퍼맨 때문이 아니던가. 그가 없었더라면 문제의 ‘슈퍼 수정’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초반의 재난도 클라이맥스의 재난도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안티 슈퍼맨 패거리가 등장하고, 인터넷은 슈퍼맨빠와 슈퍼맨까 들의 전쟁터로 변할 것이다.

“브라이언 싱어”는 이번 영화 『슈퍼맨 리턴즈』에서 거의 노골적으로 기독교 구세주를 인용 한다. 슈퍼맨은 예수처럼 고난을 당하다가 옆구리를 찔리고, 지구의 문제거리를 날려버리기 위해 치명적인 크립토나이트에 매달려 죽는다. 마치 인류의 죄를 대신 짋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처럼 말이다.

물론 당연히 그 역시 예수처럼 부활하되 부활의 흔적은 역시 예수처럼 그를 덮었던 침대시트가 치워진 것 뿐이다. 게다가 부활 후 그는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여인에게 제일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다빈치코드』의 인용인가?)

그러나 감독은 신약의 구세주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인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를 죽인 것은 악당이 아니라 바로 그가 구원하려던 민중이었다는 점이다. 세상은 구세주를 원하지 않는다. 만약 구세주가 등장하면 결국에는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슈퍼맨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틀렸다.

슈퍼맨은 이 세상의 적이다.

영진공 짱가

“인크레더블”, 멍청하고 게으르고 착한 영화에서 벗어나기


나는 착하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통 우리가 착하게 굴 때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하게 행동하는 경우를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착하다는 건 멍청하다는 뜻이다.
착하다는 말에는 또 다른 뜻도 있다. 그건 자기와 주변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원칙을 강요한다는 뜻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악당의 간계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장금이에게 남을 탓하지 말고 네가 계속 참고 노력하라는 착한 요구를 하는 연생이 같은 경우다.

이 드라마에서는 연생이의 착한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좋게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만약 당신이 부당한 대우에 좌절하고 분노하는데 누가 친구랍시고 그 옆에 들러붙어 이따위 말을 지껄인다면 당신의 기분이 어떨지. 나는 그런 잔소리에 복장 터지느니 차라리 그를 친구로 간주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

정리하면, 착하다는 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에 대해서 섣부른 지식만이 있는 상태이거나 현실적으로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한 행동규범을 따르려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이 두 가지 증상이 함께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대안이나 규범을 내놓고 그걸 따르려는 거다.

디즈니의 영화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착하다.

첫째, 이들 영화에서 묘사되는 현실은 아주 단순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세상에 고통받는 무고한 사람들이나 동물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들을 괴롭히는 어떤 악당 때문이다. 혹은 돈이 많고 유능한 사람들은 그뿐만 아니라 착하고 성실하기까지 하고, 그들보다 덜떨어지고 불행한 사람들은 고약하고 게으르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보자. 이 영화 속 세상은 단순무식하기 그지없다. 주인공(“앤 해서웨이”)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들은 약간 경박하긴 하지만 순수한 선생님들이고 학생들 역시 눈에 띄지 않던 동료가 공주가 되어도 아무 생각 없는 순수한 학생들이다.

주인공의 친구(“헤더 마타라조”)도 공주가 된 주인공이 자기 프로그램의 출연약속을 어겼을 때 실망하지만, 금방 마음을 풀고 화해하는 순수한 친구이다. 뭐 아버지의 결혼을 반대했다던 여왕(“줄리 앤드루스”) 역시 손녀를 사랑하는 착하고 순수하기 그지없는 할머니라서 손녀의 복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여기에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는 오로지 성질 고약한 친구(“맨디 무어”)와 매스미디어, 그리고 이 미디어를 이용해 잠깐 좀 유명해져 보려던 학교 킹카 뿐이다. 영화에 따르면 그저 저런 잡것들만 없으면 우리의 주인공 공주님은 아무 걱정 없이 공주생활로 입문하실 수 있을 터였다.

순수하고 착하기 그지없는 친구와 미소만 봐도 착하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 여왕님, 그리고 그 자태부터 싹수가 노란 맨디무어 ...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성질 고약하게 굴던 친구는 그저 성질이 고약해서 주인공을 괴롭혔을 뿐일까? 주인공이 공주임이 밝혀진 다음 그 고약한 친구의 마음 속에는 아무런 놀라움이나 고민이나 갈등이 없었을까? 공주님의 마음 속에 생겨난 갈등은 그저 유명인으로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뿐이었을까? 자기가 공주가 된 다음, 유명인으로서의 권력을 누리고픈 마음은 없었을까?

‘평범한 아이가 공주 되네’ 라는 컨셉 자체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가 가진 어떤 희망의 핵심을 건드리는 아주 좋은 아이디어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발전시켜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착한 것만으론 부족하단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똑같은 컨셉을 다룬 1956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영화 『시집가는 날(일명, 맹진사댁 경사)』보다 훨씬 게으르고 무사 안일한 영화였다. 물론 관객들은 이런 게 다 빠졌어도 그저 안경 벗으면 미인 되어버리는 공주 이야기의 환상에 젖어 행복해 했겠지만 말이다.

둘째, 이들 디즈니 영화들은 비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가르치려고 든다.

착하지만은 않으려 노력한, 퀸카로 살아남는 법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나름대로 이전의 그 단순무지한 세계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원 제목부터 ‘썅년들(Mean Girls)’ 이라니, 착해지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은 제작진의 마음이 보인다. 이를 위해 아프리카 정글의 법칙을 습득했다는 주인공(“린지 로한”)을 등장시켜서 나름대로 미국 고등학교 세계를 생태학적으로 분석해보려고 한다.

주인공의 비주류 친구들이 보여주는 고등학교 학생식당의 자리 배치도는 이런 가상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악당과 싸우다 보니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악당이 되어버리더라 하는 니체의 아이러니도 묘사한다. 악당 역시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고 아주 영악한 복수 방법을 생각해내는 놀라움도 보여준다.

그런데 그 디즈니의 착함은 결국 마무리에 가서 본색을 드러낸다. 주인공과 이전 퀸카 사이의 세력전쟁의 후폭풍으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학교를 다잡기 위해 교장선생님이하 교사들이 선택한 방법은 학생들을 학교체육관에 모아놓고 집단상담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집단상담을 통해서 학생들이 서로 각자 반성하고(!) 그 결과 학교는 다시 평온을 되찾아버린다는 결말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런 혼란이 생기면 결국 각자 반성하고 잘못을 고치도록 노력하면 된다고 가르친 거다.

나름대로 참신했던, 학생식당 생태계

나 역시 심리학자로서 집단상담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는 수퍼울트라 상담가라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다. 사실 심리학적 접근이 종종 비판받는 이유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켜버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아이가 있다. 그러면 심리학자들은 왕따 당하는 아이에게 문제가 있거나, 왕따시키고 학대하는 가해자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왕따 당하는 아이에게는 왕따 당하지 않는 법(예를 들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나 기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사교기술)을 가르치고, 왕따시킨 아이들에게는 도덕교육이나 공격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감정표현 기술 같은 걸 가르친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거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왕따는 아이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누군가 왕따 당하는 이유는 그 아이가 머리가 나쁘거나 사회성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남들과 지나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잘생겼다는 이유로, 어떤경우에는 지나치게 선생님에게 주목받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한다.

이렇게 튀는 아이를 왕따 시킴으로써 뭘 얻을까? 집단적 자기 정체성(이걸 집단정체성:Group Identity이라고 한다)을 확인한다. 쉽게 말해서 왕따 당하는 아이와 나머지 아이들은 명확하게 구분이 된다. 이 명확한 구분을 통해서 나머지 아이들은 자기가 최소한 저 왕따 당하는 애처럼 건방지거나, 분위기 파악 못하거나, 함부로 나대거나, 잘난 척 하는 아이는 아니라는 확인을 받는 거다.

나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부족한 청소년기에는 그런 확인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결국 아이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의할 필요를 느끼는 한, 어디에서나 왕따 현상은 나타난다. 집단상담으로 아이들을 모두 착하게 만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란 거다.

요약하면, 디즈니 영화는 문제의 원인을 선과 악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분법으로 보여주고, 그 문제의 해결책도 결국 “악당을 없애고 나머지는 모두 착하게 마음먹으면 된다” 는 아주 단순한 교훈으로 정리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일단 문제가 단순해서 머릿속이 편하고, 해결책도 단순하면서 깔끔하게 끝나서 마음이 편하니까 좋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영화 속에서 끝날 때만 안전하다. 사실 나는 이 세상을 정말 위험하게 하는 영화가 있다면, 그건 난잡하고 폭력적인 영화가 아니라 바로 이런 착하디 착한 영화일거라고 생각한다.

예전 부시 같은 친구의 사고방식이 바로 이런 이분법이다. 그래서 그 친구와 추종자들은 이 세상의 테러리즘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하면 된다는 아주 단순 무식한 결론을 철석같이 믿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죽이는 전쟁이다.

아, 인크레더블...

그런 면에서 디즈니 영화인 『인크레더블』은 이런 디즈니 영화의 착한 한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선의로 똘똘 뭉친 착한 영웅이 있다고 해서 그 결과가 반드시 착하게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 결국 이 복잡하게 물려 돌아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수퍼 영웅은 그저 기물을 파괴하고 소송거리를 몰고 다니는 골칫덩이에 불과하다는 현실인식이 있다. 수퍼 영웅은 수퍼 악당이 있어야 그 존재 의미가 있다는 존재의 양면성은 이 현실인식의 덤으로 따라온다.

여러분들도 『마징가 제트』나 『에반게리온』을 보면서 왜 저 헬 박사 이하 악당들은 악당 로봇을 한 주에 한 마리씩만 보내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 있을 것이다. 한 두 달쯤 모아뒀다가 한꺼번에 보내면 마징가 제트 하나 쯤은 쉽게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들이 그래야 하는 이유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아주 간단하다. 매주 한 마리씩 보내야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악당 로봇이 있으니까 마징가제트도 에반겔리온도 존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대 로봇인 적이 없다면 거대로봇인 우리 편도 애물단지일 뿐이다. 그게 모든 나라의 정보기관이 적국의 힘을 과장하려는 이유이기도 하고, 주적이 있어야 안보가 성립할 것이라는 황당한 믿음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다양한 수퍼 영웅들이 어떻게 협력해야 더 신나는 얘기가 될 지에만 골몰한다. 이 영화의 감독은 수퍼 영웅이라는 단순한 설정을 가지고 뽑아낼 수 있는 가능성들을 아낌없이 뽑아낸다. 엄마가 보트가 되고 아들네미가 모터가 되는 장면 같은 것도 그렇고, 영웅을 위해 존재하는 맨 인 블랙에서부터, 영웅의 옷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 영웅 가족이 있다면 뭐가 문제가 될지 … 같은 기발한 상상은 그래서 나온다.

이렇게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의 기반은 수퍼 영웅이야기의 즐거움이 뭔지 알고 그 즐거움을 더 키우고 싶어하는 순수한 유희정신이다. 사실 앞서 얘기한 나름대로 치밀하게 현실적인 도입부 역시 바로 이 수퍼영웅 이야기의 온갖 가능성을 탐색한 결과에서 얻어진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은 착한데, 이들이 착한 이유는 원래 수퍼 영웅은 착하기 때문이지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니다.

선의가 반드시 선의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천하무적 수퍼 영웅 가족은 그 나름의 애환이 있다.

수퍼 액션의 조화

수퍼 디자이너...최고!!


인크레더블을 본 어떤 관객들은 이 영화가 뻔한 얘기를 하면서 아무런 결론도 없다는 점이 불만인 거 같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미덕이다. 이 영화는 뻔한 이야기가 가진 가능성을 즐거운 마음으로 탐색하고 발전시켰으며, 뭘 가르치려 들지 않고 오로지 즐기자는 정신에 투철했던 것이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착한 마음보다는 즐기는 마음이 이 세상을 더 밝게 만들며 그리고 착하게 살려는 마음보다는 삶을 즐기려는 태도가 이 세상을 훨씬 현명하게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영진공 짱가

“에일리언 2”, 쓸데 없는 짓의 의미


영화를 보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정말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는 걸 보곤 한다.

예를 들어 영화 “스크림”에서 “웨스 크레이븐”이 하나하나 지적하기도 했지만, 공포영화에서 여자희생자들은 꼭 2층 3층으로 도망친다.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안전할 텐데 말이다. 그 높은 곳에서 밖으로 뛰어내릴 것도 아니면서 자꾸 위로 위로 올라간다. 그 결과 그들은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해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질질 짜다가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열지 않아도 될 문을 열거나,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물건을 건드려서 일을 그르치는 것도 영화 속에서 종종 벌어지는 쓸데없는 짓이다. 그런 장면을 벌인 당사자는 또 얼마나 민망할까.

예를 들어, 영화 “반지의 제왕” 1편에서 폐허가 된 드워프 왕국에 들어가서는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는 괜히 해골을 건드려 우물에 빠트리는 바람에 잠들어 있던 오크들을 죄다 깨워버린 피핀을 생각해보라. 그를 지켜보는 내가 대신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 한심이가 3편에서는 멋진 모습도 보여준다 ...

사실 이런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우연히 영화 『에일리언 2』를 다시 봤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리플리(“시고니 위버”)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 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범이다.

그녀는 그 잘 훈련된 공수부대원 전부가 패닉에 빠져 있을 때도 냉철하게 상황판단을 하고, 팀원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면서 살 길을 찾아나간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는 능숙하게 기계를 다룰 줄도 안다. ‘파워로더’를 다루는 그녀를 보라.

57년간 냉동되어 있던 그녀가 어떻게 그 첨단 기계를 조종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년 전 컴퓨터의 인터페이스와 지금 컴퓨터 인터페이스는 거의 석기시대와 철기시대만큼의 차이가 있는데 건설용 중장비들은 안 그런 모양이다.) 어쨌든 그녀는 훌륭한 리더일 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밝은 현장요원이다.

게다가 그녀는 용감하고 희생적이기까지 하다. 에일리언에게 납치된 어린아이 ‘뉴트’를 구출하기 위해서 홀홀단신 에일리언의 소굴까지 찾아 들어가는 그녀의 그 강인한 이미지는 이후에 등장하는 여자 영웅 영화의 원형이라 할 만큼 멋졌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그녀조차도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도 바로 그녀가 영웅의 모습을 한껏 드러낸 뉴트 구출장면에서 말이다.

그 상황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자. 원자로 냉각기가 손상되어서 몇 분내에 공장시설 전체가 핵폭발을 일으킬 예정이다. 리플리는 천신만고 끝에 뉴트를 찾아냈고, 눈앞에 펼쳐진 에일리언 알 무더기를 볼모로 퀸 에일리언을 협박해서 퇴로를 확보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합리적인 선택은 간단하다. 뉴트를 데리고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시설이 폭발하는 순간 퀸 에일리언도, 나머지 에일리언 떼거리들도, 그 괴물이 낳아놓은 수많은 알들도 모두 한줌 재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쓸데없이 알들에 총질을 하고, 화염방사기를 쏘고, 그것도 모자라서 퀸 에일리언의 알집에 유탄을 쏘아댄다. 그 결과, 쓸데없이 분풀이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한 리플리는 시설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탈출하지 못하는데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퀸 에일리언까지 들이닥치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연출하고야 만다.

죽음을 예감한 그녀가 어린 뉴트를 끌어않고 ‘눈 감으라’고 중얼거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가 저지른 짓은 정말 아무런 쓸데가 없었다. 그건 에일리언들에 대한 복수도 아니었고, 뉴트를 구출하는 데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그 만용은 결국 아무 죄도 없는 뉴트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이다.

후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간신히 탈출한 모선에까지 퀸 에일리언이 쫒아온 덕분에 충직한 사이보그 비숍은 반동강이가 나고, 결국 모선 전체가 위기에 처하고 만다. 물론 어찌어찌 리플리가 파워로더로 퀸 에일리언을 쫓아내면서 일이 마무리된 것 같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음은 『에일리언 3』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리플리?

이렇게 정리해보니 리플리가 저지른 그 만용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쓸데없는 짓 Top 10 리스트에 올릴 만큼 엄청난 과오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종종 이런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곤 한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 것일까?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그래야만 영화가 재미있어지기 때문이다.

리플리가 얌전하게 소굴에서 빠져나와 모선으로 탈출했다면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겠지만, 위기일발 탈출도 없었을 것이고 영화사상 가장 멋진 결투로 손꼽히는 퀸에일리언과 파워로더 대결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쓸데없는 짓은 사실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진행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 애한테서 손떼, 이 ㅆㄴ아!!!

파워로더 미니어쳐 ...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 아니, 사실 따져보면 쓸데없는 짓으로 점철된 곳이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쓸데없는 짓 덕분에 세상을 사람을 더 잘 알게된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벌인 덕분에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그런 깨달음이 나중에 진짜 중요한 일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자기 할 일도 바쁘니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게 가장 깔끔할 것 같은 사람들끼리 눈이 맞아서 쓸데없이 연애질을 벌인 결과, 자기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냥 얌전히 헤어져도 되는데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고 나면 후회가 든다. 그냥 서로 좋게 헤어져도 되는 거였는데 왜 쓸데없이 원한을 남겼을까 …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고, 그와 다시 마주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마치 쓸데없이 퀸 에일리언을 화나게 한 덕분에 그 괴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인지를 확실하게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미있으면 다 용서된다니까 ...

어쨌든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들 덕분에 우리는 인생을 매끈하게 흘려보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대끼며 고생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기계처럼 효율적이지만 무미건조한 활동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생명체의 그 변화무쌍함을 체험하며 살수 있게 된다.

요약하면, 영화 속에서 쓸데없는 짓은 영화를 재미있게 하고, 현실에서 벌이는 쓸데없는 짓은 우리에게 진정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뭐 아무리 그렇더라도 결국 중요한 건 결과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쓸데없는 짓을 저질렀는데 그 결과는 그저 한심할 뿐이라면 관객들이 짜증을 낼 것이고, 현실에서 쓸데없는 짓의 결과가 그저 고생뿐이라면 후회만이 남을 뿐 일테니 말이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