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웨이”, 부패와 숙성의 차이





와인의 일생을 생각하곤 해요.

그 포도들이 자라던 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햇볕은 어땠을까…비는 내렸을까…
포도를 가꾼 사람들… 그 포도를 따서 와인을 담근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들 중 몇 명은 이미 이 세상에 없고 와인만 남아있겠죠…

와인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이 좋아요
같은 와인이라도 오늘의 맛은 다른 어느 날의 맛과도 다르죠.
왜냐면 와인은 살아있거든요.
병 속에서 와인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숙성되죠
절정에 도달할 때까지…
그러다가 절정이 지나면,
피할 수 없는 타락이 시작되죠
끝내주는 맛을 남겨주고 말예요.

– “사이드웨이” 중에서 –

두남자


여기 두 남자가 있다.

한 남자는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성인기 초반을 아주 안정된 직장으로 시작했고, 40이 넘어간 지금도 여전히 그 안정된 직장에서 안정된 일을 하고 있다. 몇 년 전 결혼에 실패한 이후 독수공방을 계속하는 그는 조심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출판을 해보려 하고 있다.

겁쟁이 소심꾼 마일즈


다른 남자는 한때 잘나가던 드라마 배우였다. 하지만 지금은 광고에 목소리 출연이나 하면서 지낸다. 그래도 먹고사는데 지장은 별로 없고, 늘 새로운 여자를 만나 즐기며 살다가 이제 결혼을 해보려 한다.

발랄한 난봉꾼 잭

이 둘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다.
교육자와 연예인, 고독한 솔로족과 희희낙락 싱글족, 이혼한 남자와 이제 막 결혼하려는 남자 ……

하지만 이들의 삶은 어떤 면에서 아주 비슷하다. 그것은 이들의 삶이 고여서 썩고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남자에 대해서는 이 말이 맞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여자를 갈아치우는 두 번째 남자에게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느냐고? 그는 그 갈아치우는 패턴을 바꾸지 못한다는 점에서 고여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똑같이 고여서 썩어가지만 전혀 다른 용어가 사용되는 존재도 등장한다.

바로 와인이다. 예전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와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적이 있다.

“와인 그거 뭐 결국 썩은 포도주스 잖아?”

무지막지한 표현이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봐서 부패현상이나 발효현상, 숙성현상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어떤 것은 숙성이라 불리고 어떤 것은 부패라 불린다.

그건 단지 이름의 차이만이 아니다.

어떤 썩은 포도주스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지만,
다른 것은 오래 썩었다는 이유로 수 십만원에서 수백 수 천만원짜리 물건이 된다.

전자가 풍기는 냄새는 악취고, 후자가 풍기는 냄새는 향기다.

전자는 사람이 먹으면 배탈이 나고 병원신세를 지게 만들지만,
후자는 입맛을 돋워주고 건강에 도움이 되며
심지어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황홀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했다.

변치 않는다는 것이 자랑이 아님을,
늙어가면서 부패가 아니라 숙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 갈림길에서 숙성의 길로 걸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영진공 짱가

“패밀리 맨”, 제 2의 길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






대니얼 레빈슨의 책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에 의하면,
우리의 인생은 전환기와 안정기의 시소게임이다.

최초의 전환기는 사춘기에 찾아온다.
2차 성징으로 몸이 아이에서 남자 혹은 여자로 바뀌고, 그 결과 매일 보는 거울 속의 내가 어느 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을 보는 관점도 바뀐다. 숨겨진 달의 뒷면을 발견한 천문학자처럼,
이 세상이 내가 예전부터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 정체성의 위기가 찾아오면서 모든 것을 재정립하게 된다.
정체성의 정립은 마음을 정리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무슨 직업을 선택하고 누구와 친구관계를 맺고 얼마나 잘 연애를 하는지로 확인받는 일종의 과제다.

청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취직해서 나름 경력도 쌓고, 친구들도 생기고, 연애도 몇 번 해서 결혼을 하기도 한다.

이제 안정기에 접어드는 것이다.



모든 것이 안정되었으니 정체성이 정립된 것 같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딴생각을 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토록 바라던 안정기에 도달했건만, 사람들은 만족하기는커녕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선택한 것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더 좋은 선택은 없었을까?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30여년 남았는데 그 30년을 지금 하는 이 일을 하면서 보내는 게 맞을까? 내가 평생 저 사람과 같이 살 수 있을까? 그동안 목표 달성하느라 버려두었던 자신의 내면에 눈을 돌리며 갑자기 억눌러두었던 내향성이 치솟아 오른다.

의문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공포로 다가온다.
만약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정답이 아니라면, 과거의 어디에서부터 잘못 접어든 것이었단 말인가? 이제 정녕 돌이킬 수는 없단 말인가? 다행히, 현대인들의 건강상태는 매우 좋기 때문에 우리에겐 제2, 제3의 전환기를 감당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혀 새로운 일을 하거나, 결혼해서 아이만 키우던 주부가 어느 날 전문인으로 새로운 경력을 만들어가는 일이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누구는 이 시기에 이혼을 하기도 하고,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역시 잘 봐주자면 대안의 탐색이다. 이런 위기는 그 사람이 지금 현재 얼마나 잘 나가는지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온다. 오히려 확실하게 성공한 사람일수록 더욱 더 딴생각을 많이 할 수도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등이 따실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대안을 포기하고 지금 주어진 그 삶을 계속하기로 한다.
약간 불만은 있지만 그건 누구나 겪는 거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좋을까? 그대로 계속 사는 게 나을까, 아니면 바꿀 수 있을 때 바꾸는 것이 더 나을까?

같은 저자가 쓴 '여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도 있습니다

영화 『패밀리맨』은 바로 이런 대안탐색 시기, 인생의 제 2 전환기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잭(“니콜라스 케이지”)은 13년 전에는 뉴욕근교 소도시에서 지냈지만 기회를 잘 잡은 덕분에 지금은 뉴욕의 잘 나가는 투자전문가가 되어 있다. 물론 독신으로서 환락을 만끽하며 흥청망청 잘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우연히 들른 잡화점에서 그는 예사롭지 않은 강도를 만난다. 그리고는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 다음날부터 그는 13년 전에 기회를 잡지 못하고 소도시에 눌러앉아야 했던 제2의 잭으로 살게 된다. 처음에는 하루하루가 당혹과 좌절의 연속이다. 그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는 벌써 둘이나 있고, 장인의 타이어 가계를 이어받아 나름 안정되었지만 꿈이나 희망도 없는 일상 속에서 서랍 속에 숨겨둔 술이나 홀짝대면서 지내고 있었다.

낮에는 사장님의 인정을 받고,

밤에는 미녀들의 환대를 받으며 살던 사람이...

어느날 깨어 보니 옥닥복닥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버렸더란...

그러니까 예쁜 마누라가 다정하게 팔짱을 껴줘도 이렇게 똥 씹은 표정이지...

이렇게 끔찍한 삶이라니… 진저리를 치던 그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기자기한 일상의 가치와 즐거움에 눈을 뜬다. 아내를 아끼는 남편,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의 변신은 처음에 자신을 경계하던 큰 딸의 인증을 받으며 완성된다.




물론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더 알고 싶으면 영화를 보시길 …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제 2의 인생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우화이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은 영화속의 진짜 잭이 아니라 제2의 잭에 더 가까우며, 그들이 꿈꾸는 제2의 인생은 진짜 잭의 인생이라는 점이다(사실, 제2의 잭만 해도 대단한거 아닌가? 작지만 안정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경영자에다가 예쁜 마누라에 귀여운 자식들까지 있는 단란한 가정의 가장 아닌가.)

하지만 실상은 그게 이 영화가 존재하는 의미다. 영화는 제2의 평범한 잭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봐. 저렇게 잘나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행복을 모른다고. 만약에 저들이 그걸 알기만 하면 휘황찬란한 자기 삶을 포기하고 우리 같은 삶을 선택할거라니까? 그러니까 딴 생각 하지 말고 지금 주어진 삶에 만족하면서 열심히 살라구.”

굳이 영화의 메시지에 반대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정말 그럴 수도 있으니까.
누구든 남의 떡을 더 크게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평범한 제2의 인생을 부러워할 자격을 갖추려면 휘황찬란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역설은 여전히 남는다.

레빈슨의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인생의 제2 전환기에서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주어진 삶을 계속 하는 것이 좋을까?
답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남은 시간이 많고 여력이 많을수록, 다른 길로 과감하게 전환한 사람들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주어진 삶에 집착하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후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현대사회가 특히 그렇다.

현대인의 예상 평균수명은 85세 이상이라던데, 계산해보자면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정년퇴직까지 한 다음에도 최소한 30여년을 뭔가 하면서 보내야 한다는 얘기다. 이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는 얘기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텅빈 30년을 견뎌내야 한다는 얘기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삶의 전환도 많이 해본 사람들이 더 잘한다. 그러니 말인데, 『패밀리 맨』 같은 영화나 보면서 위안을 삼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기회가 오면 잡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적어도 당신의 나이가 40 이전이라면 말이다.

“밑져야 본전” 이라는 말을 호기롭게 내뱉을 수 있는 인생의 마지노선이 그쯤일 테니 ……

그나저나 자기만 그러면 되지 왜 잘 나가려는 옛날 여자친구 발목을 잡는거냐?


영진공 짱가

“왕의 남자”, 전달과 공유




기업체와 프로젝트를 할 때 종종 듣는 조언이 있다. 우리나라 기업 사람들은 설명하는 걸 싫어한다는 거다. 왜 그런 결론을 얻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지 말고 결론만 얘기해줘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거다. 사실 나도 별로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왔지만, 기업 사람들 앞에서 설명을 하다가 “그래서 결론이 뭐냐?” 는 반응을 받아보면서 느끼는 건 역시 나도 설명에 의존하는 쪽이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안 그래도 여러 가지 일로 바쁜 사람들이니 일일이 설명을 듣기 보다는 간단히 정리된 결론을 듣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기업은 빠른 의사결정을 생명으로 하는 곳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후에 여기저기서 들은 바에 의하면 이런 분위기는 우리나라 기업들에게서 특히 심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외국에서 컨설팅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설명을 줄이는 거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긴 했다. 결론이 타당한지 판단하려면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설명을 들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딱 결론만 듣고 그걸 쓸지 말지를 결정한단 말인가.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애초부터 컨설팅 같은 건 맡길 필요가 없는 수준의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보면 이런 기업 문화는 ‘커뮤니케이션’ 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나온다.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은 의사소통 이상의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때 말하는 의사소통은 ‘정보의 교환’이다. 내가 가진 정보를 상대방에게 주고, 상대방이 가진 정보를 내가 받는 과정이 의사소통인 거다. 우리나라 기업체들이 기대하는 의사소통도 그런 것 같다. 우리가 가진 정보를 기업체에게 주고, 기업체는 그 대가로 우리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보를 교환하는 게 목적이라면 거두절미하고 결론만 전달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교환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건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걸 공유하는 과정 전체를 말한다. 이해하려면 설명을 들어야 한다.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상대방의 결론뿐만 아니라 그런 결론을 도출한 사고의 틀을 볼 수 있게 된다. 그게 바로 ‘이해’다. 그리고 사고의 틀을 이해하게 되면 나중에는 주어진 결론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전혀 다른 문제해결방식을 찾아낼 수도 있게 된다. 결론보다는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훨씬 영양가가 높다는 거다.

결론만 듣다 보면 계속 누군가를 시켜서 결론을 내오게 하는 수준에 머문다. 하지만 틀을 이해하다 보면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뭐 그래도 시간은 없고 돈은 많으니 계속 결론만 내려달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좋다. 하지만 결론만을 원하는 정보 교환적 의사소통의 문제는 단순히 사고력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부작용도 있다는 점이다.

보통 우리는 남들과 의사소통을 할 때 먼저 내 생각을 ‘전달’하려고 한다. 이게 바로 일상적인 정보교환식 의사소통이다. 그런데 아무리 전달을 잘 해도 상대방으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전달은 소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전달도 메시지가 오가는 것이므로 전달받는 사람과 전달하는 사람 사이에 뭔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지만, 그건 힘에 의한 강제에 가깝다. 쉽게 말해서 보통 전달이라고 말하는 의사소통은 실제로는 ‘지시’와 ‘결과보고’다. 물론 가끔씩 ‘현황보고’도 있고 ‘불평’ 이나 ‘요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시와 복종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처럼 수직적인 구조에서 벗어나서 팀 단위의 협업을 추구한다면 문제다. 팀 단위에서는 이전에 비해서 명확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없다. 팀장도 결국 팀원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권력이 주어지지 않은 자가 이런 일방적인 전달을 시도하자면 문제가 생긴다.

연산의 유일한 소통대상 녹수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이 신하들의 직언에 오히려 폭군이 되는 것으로 반응한 이유도 그것이다. 그때까지 연산이 경험한 것은 일방적인 전달이었다. 선왕은 그에게 왕의 풍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신하들은 그에게 선왕을 본받으라는 메시지만을 전달했다.

그런데 문제는 권력이 신하가 아니라 왕에게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신하들의 ‘충언’이 받아들여질 리 없다. 연산에게 열려진 유일한 소통의 창구는 장녹수 뿐이었다. 녹수와 연산은 최소한 서로의 욕구를 교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연산은 녹수에게 억눌린 감정을 해소할 출구를 찾았고 그 대신에 녹수에겐 지위를 선사했다. 녹수는 연산이 필요로 했지만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응석을 받아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제공했고 그 대신 확고한 위치를 얻었다.

그러니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보자면 연산군과 장녹수의 연대는 팀원들이 그나마 팀장보다는 같은 동료들끼리 친해지는 거나 마찬가지의 결과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 정보의 교환 혹은 가치의 교환에 머무르는 의사소통이었다.

사람을 더 즐겁게 하는 소통은 교환이 아니라 공유에서 나온다.

광대패는 청중과 놀이판을
공유한다. 그들은 상대에게 어떤 정보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 당연히 설교나 교훈도 없다. 그저 같이 느끼고 같이 즐길 뿐이다. 청중이 공연자들의 마음에 반응하고 공연을 함께 공유할 때, 그 공연의 힘은 점점 더 커진다. 공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마술이 그렇지 않던가. 공연장에서 서로 주고 받는 대사와 역할은 실제로는 서로가 공유하는 대본을 전제로 한다.


광대놀이 같은 즉흥극에도 어떤 대본이 있다. 그 대본은 글이라기 보다는 관객들이 마음 속 깊이 담고 있었지만 서로 공유하지 못했던 어떤 심정에 가깝다. 성공하는 공연은 그 정서적인 대본, 그 관객들의 공통된 심정을 건드리는 공연이다. 이럴 때 관객들은 공연에 함께 섞여 들어가서 서로의 마음을 공유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맨날 풍악을 울리며 춤을 추는 그저 보여주는 공연만을 경험했던 연산은 즉흥적으로 서로의 합을 맞추는 광대들의 공연을 통해서 생전 처음으로 ‘공유하는 경험’을 한다. 그게 얼마나 즐거웠던지 체통도 잊고 파안대소하고 만다.

파안 대소하더니 ...

심지어 연산은 무대로 들어와 놀랍게도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관을 내놓으며 공연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연산에겐 일방적인 전달만이 오가는 임금 자리 보다는 느낌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광대패의 공연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춤도 같이 추고

북도 같이 치고 ...

왕이 공길을 불러 계속 졸라대던 ‘놀자’도 그 뒤엔 동성애적 의미도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한번 공유해보자’는 뜻을 담고 있었다. 공유는 상대를 설득시키는데도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연산이 자신의 외로움을 공길에게 전한 방식도 그림자놀이라는 공연이었고, 공길이 연산에게 장생의 무고함을 전달한 방식도 인형극이었다.

공길을 불러서도, 우리 놀자!!!


공유란 실제로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진 소통방법이다. 성공하는 회사는 직원들이 회사의 비전을 공유하며, 화목한 커플은 연인과 서로의 생각과 각자의 역할을 공유한다. 이심전심은 상대방을 명확하게 파악해서 가능하다기 보다는 자기들이 어떤 판에서 놀고 있는지, 그 판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뭐고 각자의 역할이 어떤 건지를 그 대본을 이해하고 공유하는데서 나온다. 

영화의 성공도 결국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공유에 더 크게 좌우된다. 이전에 영화인들이 헐리우드 영화에 경쟁이 안되는 이유로 내건 것들은 대체로 그 정보에 관한 변명이었다. 엄청난 물량, 놀라운 특수효과를 담은 헐리우드 영화의 정보량이 우리나라 영화의 그것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딸린다는 거였다. 그래서 고작 내놓은 대안이 안으로는 출연배우의 숫자를 늘리거나 선정적인 장면의 수위를 높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공유의 관점에서 보자면 바다건너 미국에서 만든 영화보다는 같은 땅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만든 영화가 훨씬 유리하기 마련이다. 사실 우리나라 영화가 죽을 쑨 이유는 물량이 뒤져서라기보다는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예전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동시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내놓지 못했던 데에 있었다. 동시대의 이야기를 동시대의 감성으로 담아내는 영화가 연이어 나오게 되면서 비로소 우리나라 영화가 ‘잘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진공 짱가

“빌리 엘리어트”, 어른들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




아이들이 부모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 것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을 4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 부모나 다른 어른들이 부여한 정체성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체감 유실(identity forecloser) 유형이다. 이 유형은 부모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잘 들어서 부모님의 가치관을 그대로 닮은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이 확고한데다 별로 고민이나 갈등을 하지 않고 열심히 주어진 길을 간다. 성실한 가장, 참한 주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부모가 부여한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확고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고민하는 정체감 확산(identity diffused) 유형이다. 부모님의 기대만을 따르기엔 뭔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자기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자기 길을 갈만한 자신감이나 용기도 없다. 이들은 겉으로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도 하고 시험 준비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꿈과 현실이 다른 곳에 존재하는, 그렇지만 현실에 굴복하여 안주하는 사람들이다. 부모님 말씀만을 따르기엔 너무 생각이 복잡한 지식인들이 보통 이 유형에 해당한다.

세 번째, 일단 부모 말을 따르길 거부하고 보는 유형이다. 하지만 아직 대책은 없다. 단지 지금 당장 뭘 결정하진 않겠다.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주장하는 유형이다. 그래서 정체감 유예(identity moratorium) 유형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최대한 많은 실험과 탐색을 하고 싶어 한다. 이들 중에는 어학연수도 가고, 다른 전공을 부전공으로 이수해보기도 하고, 학교를 휴학하고 임시로 취직해보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탐색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저 판단을 미루고 칩거하는 경우도 있다.

네 번째로 정체감 성취(identity achieved)가 있다. 이들은 부모나 주변에서 부여한 삶의 목표나 정체성에서 벗어나서 자기만의 삶을 찾아낸 사람들이다. 독자적이면서도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4가지 유형 중에서 어떤 유형이 제일 행복하게 살까?

정체감 성취 유형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정체감 성취 유형인 사람들은 물론 아주 크게 성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세상과 끊임없이 투쟁을 해왔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몸과 마음이 황폐한 경우도 많았다. 우울증이나 약물중독자도 많았고 자살한 경우도 있었다. 가장 무난하게 잘 사는 유형은 정체감 유실이었고 그 다음이 정체감 확산이었다. 이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라고 부모하고 원수지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단지 마음은 정말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데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는 끼를 가지고 태어나서 도저히 사회의 틀에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은 원치 않더라도 정체감 성취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 『빌리 엘리어트』 속의 빌리가 바로 그런 경우다.
영국의 탄광촌에서 태어난 빌리에게 아버지는 광부로서의 인생을 기대한다. 광부들의 남성적인 힘을 키워주기 위해서 권투학원에도 보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권투학원에는 마땅히 연습할 곳이 없어 귀퉁이를 빌려 쓰는 발레학원도 있었다. 빌리는 아버지가 바란 권투가 아니라 발레에 빠지고 만다. 착한 빌리는 나름대로 아버지 말씀을 따르고 싶다. 하지만 어쩌랴, 그저 계속 발레에만 눈이 가고 몸은 춤을 추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을 ……

그래 권투는 이 샌드백을 열심히 치는 거지...

하지만 이건 싫어...

이게 좋아~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아버지가 일하던 탄광에 폐쇄 결정이 난 것이다. 만약에 탄광이 앞으로도 계속 운영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빌리의 소망을 무시하고 자신의 가치를 강요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추구해 왔고 빌리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삶이 눈앞에서 사라질 지경에 놓이자 그는 빌리의 선택을 실현시켜주기로 결심한다.

그 길은 사내 자식이 계집애처럼 춤을 춘다는 조롱뿐만 아니라, 동료를 배신하고 탄광에 출근한다는 도덕적인 비난을 아우르는 고난의 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 밖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아들은 결국 아무도 생각지 못한 그 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영화는 빌리가 남자들만 출연하는 세계적 발레극의 프리마돈나(?)로서 아버지 앞에서 공연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저 지원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짓바람에 가까운 ...


이게 정체감 성취자의 운명이다. 이들은 일종의 도박을 감행한다. 잘되면 대박, 안되면 쪽박일수도 있는 도박이다. 사회가 안정되어 있어서 변화의 가능성이 적은 세상에서는 정체감 성취자들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공은 별로 못하는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회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경우에는 정 반대다. 오히려 정체감 유실로 살던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낀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고작 그 결과가 이거냐는 울분이 그들의 몫이다. 하지만 자신의 끼를 못 이겨서, 혹은 주변 상황에 떠밀려서 정체감 성취의 길로 들어선 자들에게는 기회가 있다. 밑져야 본전이고 잘하면 대박인 것이다.

부모들의 세상이 자녀들의 세상으로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청소년 자녀에게 부모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요구해도 된다. 그게 그들을 위하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 세상이 10년 후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면, 자녀의 바람과 엉뚱한 소망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자녀들 하자는 대로 따르란 얘긴 아니다. 부모 세대의 지혜는 언제나 유효하니 말이다. 빌리 엘리엇이 성공한 이유는 결국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선택했기 때문인데, 그건 “능력있는 자는 노력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좋아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당하지 못한다”는 옛 말씀에서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결말 아닌가.

영진공 짱가

“괴물”과 “플란다스의 개”, 공통된 세계관의 다른 표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그의 첫 번째 상업영화 『플란다스의 개』와 기본적으로 같은 관점, 같은 구조의 영화다. 단지 첫 번째 영화에서 관점을 고르게 배분했던 것과는 달리 신작에서는 한쪽의 관점만을 드러냈고, 사건이 좀 더 극적이 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첫째, 두 영화는 모두 두 개의 사건으로 구성된다.


그 두 사건 중에서 첫 번째는 나머지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결국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두 번째 사건이고 첫 번째 사건은 그냥 지워지고 만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첫 번째 사건은 윤주(“이성재”)의 ‘개 유기 및 살해 사건’이다. 이로 인해 이후에 모든 일들이 벌어지지만, 결국 윤주의 이 범행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넘어간다. 『괴물』에서는 미군의관의 ‘포르말린 방류사건’이 여기에 해당한다. 괴물은 이로 인해 탄생하지만 역시 그 사건도 영화에서는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않고 지워지고 만다. (두 번째 사건은 물론 ‘윤주네 개(순이) 납치/도살기도 사건’과 ‘괴물의 출몰사건’이다.)


둘째, 사건이 둘인 만큼 범인도 둘이지만, 이 두 범인에 대한 처분은 극과 극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윤주(“이성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교수가 되는 데에 성공하며, 『괴물』의 미군 역시 실질적인 원인제공자이면서도 비난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계기로 생화학전 실험을 하는 기회를 얻는 이득을 본다.

반면에 이들로 인해 발생한 두 번째 사건의 범인은 사람들의 눈에 문제의 핵심으로 부각되고 처벌당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노숙자(“김뢰하”)와 <괴물>에서 괴물이 바로 그 역할이다. 이들은 지극히 단순하고 본능에 충실할 뿐 특별히 악의가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도 매우 비슷하다. 즉, 만약 개고기 맛을 볼 기회나 포르말린으로 인한 유전자 변형이라는 사건만 없었더라면 이들은 그저 멍청한 노숙자로서, 한강의 물고기로서 단순한 삶을 마치고 말았을 존재들이다.

당구대에 비교하자면 이들은 적극적인 플레이어가 아니라 누군가가 친 공에 맞아서 그대로 굴러가는 공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어난 모든 문제의 가해자로 지목받고 처벌당한다. 지나친 처벌인 것이다.


세째, 언제나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자와 문제를 해결하는 자는 따로 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 유발자는 많이 배우고 사회적 지위가 높으며 권력을 가진 자이고, 문제
를 해결하는 자는 배운 것 없고 지위도 낮고 권력도 없는 자이다.

심리학 박사인 윤주는 자신이 개를 죽여 놓고서 정작 자기 자신의 개를 납치당하는 아이러니에 빠진다. 미군 역시 포르말린을 방류해 괴물을 만들어 놓고서는 그로 인해 애꿎은 사병 하나가 희생당한다. 그리고 그 이후, 윤주와 미군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제 문제는 이 사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쉽게 말해서 무고한 존재들이 짊어지고 해결하며 그로 인한 피해도 고스란히 그들이 다 뒤집어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로에 대한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그 무고한 인물은 현남(“배두나”)이고, 『괴물』에서는 강두(“송강호”)네 가족이다. 현남은 납치된 개를 찾아서 윤주에게 돌려주었으나 결국 자신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그토록 원하던 TV출연 마저 이루지 못한다. 강두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괴물을 처치했지만 큰 희생을 치렀을 뿐, 그로 인한 어떤 공치사도 받지 못한다. 뉴스와 신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일 벌린 넘들은 어디 가고...

덧붙여, 이런 이야기가 유지되기 위해서 영화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자는 언제나 나머지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만 받는다.

현남은 직장 상사로부터 맨날 할 일을 빼먹고 싸돌아다닌다고 비난받으며, 강두네 가족은 위험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로 도주한 위험인물들로 체포 대상이 된다.

고독한 현남을 응원하는 건 상상의 관중들과

현남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 뿐이다


게다가, 그 와중에 규칙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은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현남이 필사적으로 도망칠 때 비상구에 가득 쌓인 물건들과 닫힘 버튼을 눌러도 닫히지 않는 엘리베이터 문이나, 강두네 가족을 바이러스 보균자로 분류해 끌고와서는 아무 대책없이 다른 환자들과 의사들에게 노출시키는 병원시스템이 바로 그런 규칙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이다.

이런 일도 상당히 익숙하다

결국 이 두 영화에서 드러난 감독의 관점은,

이 세상은 사고치는 놈과 해결하는 놈이 따로 있으며, 좀 배우고 권력 있다는 놈 치고 제구실 하는 놈 없고, 오히려 그 빈틈은 못 배우고 권력 없는 민중이 대신 해결해온, 본말전도의 법칙에 따르는 세상이다.


영화 괴물에서 반미의식이 드러난다고 하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그의 관점은 반미라기 보다는 반권력, 반시스템, 반지식인 이다. 윗대가리들만 제대로 하면 벌어지지 않을 사건들로 인해서 무고한 시민들만 죽어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관점이 지나치지 않을까? 너무 비관적이고 급진적이지 않을까?
글쎄 … 경제위기, 4대강, 용산참사, 외환위기,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가스폭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등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위기와 참사들을 생각해봐도 이런 관점이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언제나 윗대가리들이 제대로 일을 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사건이고, 결국 그로 인한 피해는 무고한 민중들이 뒤집어써야 하지 않았던가. 경제위기, 외환위기 때 금융시스템을 비판하고 고치기는 커녕 엉뚱한 정책으로 일관하는 실제 정부의 행태나, 정작 괴물에는 신경쓰지 않고 엉뚱한 바이러스 공포만 퍼트리는 영화속 정부의 행태가 크게 다른가?

어쨌든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같은 정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다른 영화는 한국영화사의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이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