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종 (Wild Seed, 1980)”, 4천년된 마초 길들이기 프로젝트


 

저자: 옥타비아 버틀러
역자: 이수영
펴냄: 오멜라스

웅진의 SF전문 임프린트인 오멜라스에서 이번에 출간한 책은 우리나라에는 생소한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흑인 여성작가의 작품이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미국에선 상업적,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작가로 네뷸러상, 휴고상 등을 여러 차례 수상했으며 SF계의 그랜드 데임 grande dame으로 불린다고 한다. 이번에 국내에 출간된 ‘야생종’은 그녀의 네 권의 도안가Patternist시리즈의 프리퀄 격인 작품이다.

작품은 1690년부터 1840년 간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람의 몸을 옮겨다니며 4천년을 살아온 ‘도로’라는 남자는 노예무역 등을 통해 범상찮은 능력을 가진 이들을 모아 멘델이 완두콩으로 실험하듯 교배를 시키며 더 뛰어난 초능력을 가진 인류를 만들어내려 하는 인물이다.

이런 도로의 레이더에 잡힌 ‘아얀우’는 3백년을 살아온 아프리카의 흑인 여성으로 도로와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인물로 그려진다. 도로가 원조마초스럽고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반면 아얀우는 반항적이고 진취적이며 사람을 치유시키는, 도로와는 정 반대의 인물로 작품 전반에 걸쳐 도로와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이다.



말이 나온김에 … 이번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 재밌다!



이야기의 큰 그림은 마치 엑스맨을 떠올리게 한다. 기이한 능력을 가졌지만 마녀나 정신병자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그래서 생의 위협을 느껴 능력을 숨기고 살아야만 하는 돌연변이들의 억울한 사정은 엑스맨에서나 이 작품에서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엑스맨은 돌연변들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휘황찬란한 능력을 보여주는데 주력하였다면 야생종은 도로와 아얀우라는 두 인물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돌연변이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어떤 기묘한 능력을 가졌는지에 대한 언급이나 무더위를 한방에 날려줄 초능력을 이용한 화끈한 액션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청소년기에서 완두콩을 악몽으로 만들어버린 멘델.

도로는 멘델이 완두콩에게 저질렀던(?) 것처럼 돌연변이들을 이용, 
선택교배시켜 슈퍼 돌연변이를 만들려고 한다.

도로가 초능력자들을 이용한 선택교배와 유전자 조작의 윤리적 문제, 폭력적인 문명사회와 잔인했던 미국 노예무역의 실상을 이야기할 때 작품의 인문학적 무게에 힘이 실린다. 하지만 역시 이 작품의 핵심은 두 인물 도로와 아얀우다. 도로를 바꾸기 위해 사랑과 대립을 반복하는 아얀우의 모습을 흥미롭고 긴장감있게 서술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17세기 미국 노예무역의 역사를 초능력자들의 아메리카 이주의 역사로 바꿔버렸다는 역자의 말처럼 노예무역과 초능력자란 소재를 생물학과 인류학을 가미해 훌륭한 SF로 탄생시킨, 올 여름에 만난 독특한 작품이다.

덧붙여 ……


당시 노예무역은 비참하다는 말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잔혹했다. 아프리카 내륙에서 흑인들을 잡아 줄줄이 엮어 묶은 채 수 일 혹은 한 달이 넘게 걸어서 배를 정착해 놓은 해안까지 끌고갔다. 이동 중에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이동이 불가능한 이들은 나무에 묶어놓고 갔다. 즉 동물의 밥으로 던져놓은 것이다.

노예선에는 흑인들을 최대한 많이 싣기 위해 배의 갑판아래 겹쳐 뉘였고 흑인들은 그 안에서 똥오줌을 해결해야 했다. 아메리카에 도착하기 까지 자기의 배설물에서 뒹굴며 기아와 전염병, 폭력에 시달렸고 그래서 많은 수의 흑인들이 육지에 도착하기 전에 비참하게 죽어갔다. 이후 미국에서 노예무역을 금 지하고 해군을 동원해 노예선을 나포하자 노예선들은 해군에게 발각되면 증거를 없애기 위해 흑인들을 바다에 던지기도 하였다.





아프리카인들을 짐짝 실듯 차곡차곡 쑤셔 넣어 운반한 끔찍했던 노예선.
그들의 많은 수가  배 안에서 비참하고 괴롭게 죽어갔다.
 


영진공 self_fish

“마지막 행성”(The Last Colony, 2007), 인류의 존망을 건 은하 농촌대전의 흥미진진한 결말


 

⊙ 저자: 존 스컬지
역자: 이수현
펴냄: 샘터

올해 들어서야 뒤늦게 접하게 된 존 스컬지의 두 작품 [노인의 전쟁][유령여단]을 읽고서 아직 출간되지 않은 마지막 권을 춘향이의 마음으로 기다리기를 3개월. 드디어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마지막 행성]이 택배 아저씨의 손에서 내게로 건네지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3부 [마지막 행성]은 앞선 [유령여단]에서 뿌려놓은 떡밥에서 예상하듯 콘클라베라는 범우주적인 외계인 동맹집단과 우주개척연맹의 한판 승부가 펼쳐진다. 상대의 규모가 규모이니 만큼 이야기는 그야말로 전 우주를 배경으로 한 폭풍같이 몰아치는 우주대전의 양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과 함께 그 정도의 스케일을 어떻게 한 권 분량으로 끝낼지에 대한 우려스러움이 있었다.

하지만 존 스컬지는 이런 나의 개밥에 도토리 같은 우려를 블랙홀로 던져버리고선 범우주적 스케일의 이야기를 작은 농촌행성의 전원일기스런 스케일로 축소시켜 놓는다.

이는 전 우주를 미친년 널뛰기 하듯 뛰어다니므로 해서 물을 너무 많이 탄 라면국물 마냥 싱거워졌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작은 개척행성에 알토란 같이 집중시킴으로 해서 진한 곰탕국물과 같은 구수한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덕분에 마지막 권은 그 거창한 이야기에도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한 권의 분량에 맞게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으면서 작가를 따라 우주 변두리까지 따라와준 독자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권에서 잠깐 자제했던 작가의 유머 본능은 마지막을 앞두고 찬란히 폭발하는 초신성처럼 이번 작품 곳곳에서 뻥뻥 터트리고 있다. 특히 주인공 존 페리와 그의 수양딸 조이가 주고받는 냉소 섞인 만담은 [은하영웅전설]에서의 양 웬리와 양아들 율리안의 만담을 떠오르게 한다.

게다가 대체 암내 나는 행성에서 벌어지는 인류의 운명을 건 싸움이라니. 주인공들을 암내 지옥으로 던져놓은 존 스컬지의 악취미에 경의를~


신을 엔진삼아 우주선을 움직이는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데 …


훌륭한 작품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준 존 스컬지의 새로운 작품들을 이후에도 국내에서 보았으면 하는 기대와 함께 이야기의 외전 격인 [조이의 이야기Zoe’s Tale]와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2009년작 [신의 엔진The God Engines]을 출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제발~

영진공 self_fish

“나는 전설이다”, 현존하는 모든 좀비 이미지의 원류


2007년 개봉 영화 “나는 전설이다 (I am legend)”의 원작은 리처드 매드슨의 동명소설이다. 1954년작인 이 책은 (그냥 일반적인 기대만 갖는다면) 당연히 지루하고 식상하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좀비상을 가지고 있고, 이 책은 그 모든 좀비 이미지의 원류이니까.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이 온갖 HR 공식에 익숙해진 현대 관객들에게 식상해 보이듯, 그러나 또다른 의미로 재발견되고 재해석되듯, [나는 전설이다]가 출판 당대에 좀비라는 새로운 존재 – 이물적 존재이면서도 모태는 인간인 – 의 매혹으로 어필하였지만, 현대독자인 나는 이 소설의 엔딩의 혁명성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분투하는 존재임은 수가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이나 새로이 급증하고 있는 좀비나 마찬가지. 여기엔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생존투쟁의 승리만이 유일한 선이 된다. 인간과 좀비 간 전쟁에서 마침내 좀비가 사회를 구성하고 살 방법을 찾기 시작했을 때 최후의 인간 생존자는 죽어서 전설의 영역으로 입장해야 할 운명만이 남는다.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방식으로 살아남았을진데, 호모 좀비쿠스 같은 이름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호모 사피엔스를 대체한다한들 ……

그러고 보면 수많은 호러영화들이 당연한 듯 인간의 승리로 막을 내렸던 것은 그 모든 좀비물의 조상인 이 소설에 대한 반역적인 퇴행, 혹은 퇴행적 반역인 건지도 모른다.

많은 인간들이 자본주의적 인간을 중세적 인간보다, 혹은 자본주의적 냉혈인간을 온정주의적/윤리적 인간보다 진화한 것으로 믿고 있는 세상에서, 평균수명을 늘린 대신 면역결핍과 신종질병에 시달리는 현대 인류가 과거 인류보다 진화한 것이라면, 좀비가 인간보다 ‘진화한’ 존재라고 말한들 과연 언어도단이 될까. 아니, 우리들 중 대부분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새에 이미 좀비가 됐는지도 모르는데. (이게 인간 특유의 자기합리화 방식 아니었던가.)

[나는 전설이다]의 엔딩은, 가상역사에서의 미래이자, 우리의 과거이기도 하다. 제우스가 새로운 신의 계보를 시작하며 신중의 신의 자리로 등극한 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속한 타이탄 족을 멸망시킨 이후이다.

[나는 전설이다]의 주인공 네빌은 결국 또다른 크로노스(제우스의 아버지, 타이탄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운명을 수긍하는 그의 모습은, ‘마지막 인간’으로서 전설의 주인공이 될 존재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영진공 노바리


 

 

 

When We Two Parted (1)




김씨는 경찰서 유치장에 있었다. 박기호 기자는 김씨의 이야기를 ‘정보 보고’ 했다.


 


<16일 오후 서대문구 파출소에서 김모씨(남,34) 난동 피움. 무단으로 경찰 업무용 컴퓨터를 사용하려다가 이를 제지하는 경찰을 구타함. 한 달 전 애인이 사라졌는데 주변 사람 누구도 자신의 애인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여자를 사귀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해 사라진 애인의 신원을 확인하고자 이 같은 일을 저지렀다는 경찰 설명. “나는 귀신과 사귄 게 아니다”라며 소리쳤다 함. 현재 공무집행 방해로 조사 중.> 



 


하지만 데스크는 관심이 없었다. 김씨의 이야기에 사실 박기호는 첫사랑을 생각했다. 박기호는 첫사랑과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이별하게 됐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굳이 기억하려 한다면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냥 바래지게 놔두고 살았다. 바래지자 첫사랑인지 뭔지도 희미해졌다. 그저 기억의 느낌만 남았다. 5월의 햇살이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거리 위에 벚꽃잎 몇 장이 나뒹굴었다. 분홍빛으로 만발해 지천을 물들이던 꽃이 이젠 얼룩처럼 몇 점 보도블럭 위에서 부대꼈다. 박기호에게 남은 첫사랑의 기억은 그런 것이었다. 박기호에게는 김씨의 이야기도 그런 것이었다. 김씨는 감성이 짙은 단어를 사용해 이야기했다.


 


여자는 외국에서 공부했어요. 영어 뿐 아니라 불어, 독어도 능통했어요. 하얀 팔뚝은 달빛 내린 뒷산마냥 눈부셨는데 그 팔에 들린 책들의 저자는 벤야민이나 들뤼즈 혹은 이정우였어요. 물론 저는 그들이 누군지 모르죠. 술을 먹고 돌아오는 새벽 길에서는 영어로 된 시를 읊어주기도 했어요. When we two parted in silence and tears, Half broken-hearted to sever for years. 물론 저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것이 사랑에 관한 시라는 사실은 단박에 알 수 있었어요. 술 기운이 도는 여자의 입술은 그녀의 속살처럼 부끄러워 했고,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싯구는 인적 드문 거리에 안개 젖은 강을 펼쳤으니까요. 저는 그 강을 군 시절에 봤어요. 강 건너편은 키 큰 억새가 넘실대고 그 위로 별들이 쏟아졌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 위에 쌓였던 별들이 사방으로 튕기며 복작거렸죠. 적은 그곳에서 온다고 중대장은 항상 말했어요. 그 억새가 소리를 내며 휘청일 때마다 적들의 발자국이 한 걸음씩 다가오는 것이라고 중대장은 항상 말했어요. 별을 뿜어대는 억새밭을 바라보며 적의 모습을 찾는 것이 저의 임무였지요. 그래서 저는 별이 쏟아지지 않는 흐린 날과 강 너머가 보이지 않는 안개 낀 날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여자의 시가 우리가 걷는 길 앞에 바로 그 강을, 안개 낀 그 강을 펼치곤 했지요. 저는 편안했어요. 그리고 언젠가 싯구의 뜻을 알고, 그 안개를 걷어내면 멀리 다시 별을 뿜어대는 억새가 찬란하게 넘실댈 것 같았지요.
 




그래서 영어를 공부했어요. 아침 일곱시 반에 현장에 나가면 오야지는 공구리 판넬 좀 옮기라고 말했어요. 밤새 영어책을 들췄던 제가 판넬이 아니라 패널이라고 대답하면 오야지는 데모도 자리도 못 구해서 데마찌 하고 싶냐고 되물었어요. 기리빠리와 사보로꾸와 시하찌와 각종 세끼다를 옮기다 보면 전날 공부한 영어 단어들은 머릿속에서 흩어지곤 했지요. 저는 데마찡으로 먹고사는 하루살이 노가다였어요. 일을 끝내면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죠. 허름한 다세대 주택의 페인트 떨어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늦은 저녁을 혼자 차려 먹고, 아무렇게나 설거지를 팽개치고, TV를 켠 채로 담배를 피우다, 무거운 엉덩이를 떼 욕실에 들어, 땀에 절은 몸을 씻고, 벌써 서너 번은 썼을 법한 수건을 빨래통에 던지고, 느릿느릿 방에 들어오면 여자는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빛을 받으며 창가 의자에 앉아 있곤 했어요. 봉지 커피를 나눠 마시며 오늘 하루 일을 이야기하고, 어제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 지난 달 일을 재차 이야기하고, 이번 달 여자의 벌이와 저의 벌이를 합쳐 생활비를 계산하다 보면 여자는 갓 따온 복숭아처럼 붉어졌지요. 여자의 솜털 사이로 바람이 불고 입 안에서는 향기가 났어요. 목울대 너머에서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는데 그때마다 여자의 눈동자 아래로 깊은 우물이 생겼어요. 그 어떤 빛도 탈출하지 못할 만큼 우물은 안으로 안으로 어둠이었고, 그 어둠의 끝은 알 수도 없지만 알아도 제가 이해하지 못할 수많은 것들로 고요했어요. 여자의 울대 안에서 요동치는 말발굽 소리와 여자의 눈동자 안으로 가라앉는 고요에 안겨 저는 매일 잠들었어요. 그때 여자는 또 시를 읊곤 했지요. A shudder comes o’er me, Why wert thou so dear? They know not I knew thee, Who knew thee too well. Long, long shall I rue thee, Too deeply to tell. 물론 저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육 개월을 들었으면 외울 만하잖아요. 







<계속>



영진공 철구


“7년의 밤”. 독자라서 행복한, 스티븐킹보다 서늘한, 그러나 뜨거운 소설


독자라서 행복한,
독자라서 행복한 소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라면 상상도 못할 주제, 나라면 상상도 못할 스케일, 나라면 상상도 못할 디테일, 나라면 엄두도 못 낼 전개. 그런 것들을 읽어나가는 기쁨을 선사하는 소설 말이다. 독자에게 최악인 소설이라면 그 반대의 것일 것이다. ‘이런 소설 나도 쓰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 실제로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 사실 여부와는 관련 없이 그 만큼 도무지 신선한 것도 압도적인 것도 없는 소설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스티븐 킹 보다 서늘한,
내 독서량이 일천하기 때문에 아무 소설이이나 함부로 연상하고 색깔을 입히는 것은 안될일이다. 하지만 처음 소설을 잡고부터 이런 저런 소설들에서 스타일이 겹치는 부분이 없는 지를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7년의 밤’을 손에 잡고 정신 없이 읽어 나가다가 문득 생각해 보면 얼른 떠오르는 한국 소설은 없다. 내가 장르 문학을 많이 읽지 않아서인 탓도 있겠지만, 추리, 공포, 범죄 소설의 느낌을 그려내는 본격 문학 주류 작가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 일천한 독서력(讀書歷)에 떠올린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티븐 킹이다. 배경에 대한 세밀한 포석, 분/초 단위의 촘촘한 사건관계 구성, 불우한 주인공(?) 등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떠올리게 했으며, 인간 내면에 존재한 불안감과 공포. 그 불안감과 공포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느냐에 따라 그 자신이 괴물이 될수도, 혹은 괴물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음을 그려낸 세세한 내면묘사와, ‘인간 집단’자체가 얼마나 비이성적인 괴물이며 무자비한 폭력을 행하는지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스티븐 킹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뜨거운 소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키븐 킹의 소설과 다른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7년의 밤’이 뜨겁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간혹 ‘따뜻한 것’은 있으되- 내 영혼의 아틸란티스, 사다리의 마지막 칸 등- ‘뜨거운 것’은 없었던 듯 하다. 스티븐 킹 소설에서 따스함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련한 회한이랄까.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7년의 밤에는 ‘현재 진행 중인 것’에 대해 잃지 않으려는 뜨거움이 있다. 무자비한 폭력의 사이에서도 냉소와 허무와 자기 부정으로 상황을 등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 붙고 물고 늘어지는 그 뜨거움. 그 어떤 기법적인 장점보다, 그 뜨거움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영진공 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