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소통과 공생의 땅을 향하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 률 감독의 영화에는 배경 음악이 없습니다. 음악은 영화 연출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부분과 전체의 리듬을 조율해주는 수단인 동시에 각 장면의 의도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매우 효율적인 장치입니다. 따라서 배경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영화란 관객들에게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울라는 건지 웃으라는 건지, 긴장하라는 건지 감동을 받으라는 건지를 미리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스스로 판단하며 영화를 감상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장 률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말이 별로 없습니다. 표정들도 하나 같이 무뚝뚝하기만 합니다. 등장 인물들 간에 대사가 많지 않고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법도 없으니 관객들로서는 이보다 피곤한 일이 따로 없습니다. 그들의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니 장면마다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다양한 사건 사고가 일어나 주는 것도 아닙니다. 카메라는 그저 멀치감치 떨어져서 인물들의 단답형 대사와 행동들을 우두커니 지켜볼 뿐입니다.

영화도 만들기에 따라서는 책 읽는 일 만큼이나 무척 고단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작가가 바로 장 률 감독입니다. 관객들도 그의 영화를 볼 때 만큼은 좀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움직이고 소리를 들려주는 영상물이긴 하지만 연출자가 관객의 손을 부여잡고 주변 사정을 설명해주며 처음부터 끝까지 찾아갈 길을 안내해주는 그런 경험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책을 읽거나 그림을 감상하듯이 관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만 합니다. 장 률 감독의 세번째 장편 <경계>도 일정 부분 관객의 노동을 필요로 하는 작품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데뷔작 <당시>(唐詩, 2004)에서 아파트 안에만 머물던 감독의 자아가 밖으로 나와 찾아간 곳은 중국의 변방 지대였습니다. 문화혁명 당시 아버지의 투옥으로 어머니와 단 둘이 타지를 떠돌아다녀야 했던 감독 자신의 실제 경험은 <망종>(芒種, 2005)의 조선족 모자 최순희(류연희)와 창호(김박)로 형상화되어 냉혹한 중국 대륙의 현재를 경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경계>에서 최순희 모자(서 정, 신동호)는 다시 한번 바깥 세상에 던져집니다. 탈북자인 젊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이번에는 중국 국경을 넘어 몽골 땅에 도착합니다.

중국 변방의 조선족이나 국경을 넘어 몽골에 도착한 탈북자나, 남편을 잃은 젊은 여인과 그의 어린 아들이란 필요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주변인이자 이방인입니다. 이들에게 주변 남성들의 존재는 잠재적인 보호자인 동시에 남편과 아버지의 지위를 차지하려 달려드는 위협이기도 합니다. <망종>과 <경계>가 보여주는 설정과 내러티브 상에서의 차이는 중국 남성과 몽골 남성 간의 차이(또는 감독에게 이들에게서 발견한 이미지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타인의 자식들을 친절하게 받아주는 몽골 남성들의 품성이 <경계>의 분위기를 조금은 긍정적으로 이끌어주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경계>의 최순희 모자는 고립된 섬과 같았던 <망종>에서와 달리 어디론가를 향해 이동하는 존재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들은 울란바토르의 한국 대사관을 통해 남한으로 보내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인 탈북자들입니다. 여기에 언어와 문화적 차이는 있지만 자신들을 받아주고 지켜주는 기러기 아빠 항가이(O. 바트을지)가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들이 함께 소통과 공생이라는 희망의 땅으로 나아가는 일은 여전히 쉽지가 않습니다. 그나마 바늘 같은 숨쉴 구멍 조차 허락하지 않으며 절망의 밑바닥을 박박 긁게 만들었던 전작과 달리 <경계>는 이제 저 앞에 다리 하나만 건너면 희망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으리라는 한줄기 빛을 보여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기덕 감독의 <섬>(1999)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 있던 서 정이 두번째 최순희를 연기했습니다. 단발 머리에 시선과 고개를 똑바로 쳐드는 법이 없고 특이한 종종 걸음을 걷곤 하던 <망종>의 최순희가 서 정의 연기를 통해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아들 창호는 <망종>을 보신 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실테지만 어쨌거나 <경계>에서는 좀 더 자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막연한 희망의 고난 길을 계속 걷기 보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아버지 곁에 머물기를 원하며 어머지 최순희와는 여전히 상반된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 심정이란 모자가 한결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국경 인근의 초원 지대에 사는 중년의 항가이는 몽골의 국민배우 O. 바트을지가 연기했습니다. 아픈 딸을 데리고 아내가 울란바토르로 간 사이 최순희 모자를 자기 집에 머물도록 허락해줍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그 곳 땅에 초원을 살리기 위한 묘목을 사다 심는 일입니다. 남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이사를 서두는 와중에 혼자 고집스럽게 희망의 나무를 심고 물을 퍼다 나르는 인물 항가이는 다름 아닌 장 률 감독의 또 다른 자아입니다. 어쩌면 감독의 새로운 자아가 전작에서의 자아와 만났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내는지를 지켜보는 일 또한 <경계>를 바라보는 관전 포인트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전작에서와 달리 <경계>의 카메라는 패닝을 자주 합니다. 먼 거리에서 인물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따라가며 좌우를 둘러보는 식입니다. 사람이 자리를 옮긴다고 해봤자 고개 한번 돌리면 금방 찾을 수 있다는 몽골의 초원, 그곳의 환경을 작품 속에 반영시킨 결과입니다. 이처럼 장 률 감독의 작품들은 언제나 감독 자신이 느낀 내면적 풍경을 작품 속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공간과 작가 사이의 변증법적 산출물이 바로 장 률 감독의 영화입니다. 이제 적막 속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 률 감독의 영화와 보다 적극적으로 영화를 읽어내려가는 관객들 사이의 정반합이 이루어질 차례입니다.

영진공 신어지

[가사 검열] 고엽(Les Feuilles Mortes)

불어로 Les Feuilles Mortes, 영어로 Autumn Leaves, 우리 말로는 고엽(枯葉) 으로 알려져 있는 노래.

사용자 삽입 이미지Joseph Kosma, Jacques Prévert 작곡, 작사 / Johnny Mercer 영역인 이 노래는 1945년 경에 처음 나왔으리라고 추측되어진다. 그리고 Yves Montand의 노래로 널리 알려져 프랑스의 국민가요가 되었다.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가수와 연주자들에 의해 다시 불려지고 있고 …

오늘 왠지 그냥 이 노래가 듣고 싶어져서 준비 해 보았다.

첫 동영상은 Andrea Bocelli의 실황이고,
두 번째는 바로 Yves Montand의 모습이다.

그럼 모두들 즐감 … ^^

Les Feuilles Mortes
By Andrea Bocelli

The falling leaves drift by the window
The autumn leaves of red and gold
I see your lips, the summer kisses
The sun-burned hands I used to hold

떨어지는 낙엽이 창가를 떠도네,
붉기도 하고 황금색도 띄는 가을의 낙엽들,
거기에서 나는 당신의 입술을 보네, 그리고 여름의 키스를,
내가 항상 감싸안곤 하던, 햇볕에 그을린 당신의 손 같은 낙엽들,

Since you went away the days grow long
And soon I’ll hear old winter’s song
But I miss you most of all my darling
When autumn leaves start to fall

그대가 떠난 뒤 하루하루는 더뎌지기만 하네,
이제 곧 겨울의 노래를 듣게 되겠지,
가을의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내가 가장 그리워 하는 건, 내 사랑 당신,

C’est une chanson, qui nous ressemble
Toi tu m’aimais et je t’aimais
Nous vivions tous, les deux ensemble
Toi que m’aimais moi qui t’aimais

우리를 닮은 듯한 이 노래,
당신은 나를 좋아했고, 난 당신을 사랑했죠,
우리는 서로의 삶을 함께 살았고,
당신은 당신을 사랑한 나를 사랑했죠,

Mais la vie sépare ceux qui s’aiment
Tout doucement sans faire de bruit
Et la mer efface sur le sable les pas des amants désunis

하지만 세월은 우리를 갈라놓았죠,
아무런 소리도 남기지 않으면서,
그리고 바다의 파도는 모래 위에 새겨진 우리의 발자욱을 지워버렸어요,

Since you went away the days grow long
And soon I’ll hear old winter’s song
But I miss you most of all my darling
When autumn leaves start to fall

그대가 떠난 뒤 하루하루는 더뎌지기만 하네,
이제 곧 겨울의 노래를 듣게 되겠지,
가을의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내가 가장 그리워 하는 건, 내 사랑 당신,


영진공 이규훈

<로스트 라이언즈> – 바로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한 이야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킹덤>(2007)의 작가이기도 한 매튜 마이클 카나한이 자기가 써놓은 시나리오를 놓고 ‘근데 이런 걸 누가 영화화하겠다고 하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선댄스의 현인에게나 한번 보내보자’고 했다더군요. 애초에 씌여질 때부터 상업적인 고려라곤 별로 없었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그런 거 없이 만들었다가 대박이 난 영화들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잖아요.1) 로버트 레드포드가 <로스트 라이언즈>를 제작하고 직접 감독과 주연까지 하겠다고 나섰을 때에는 쫄딱 망해도 좋으니 무조건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겠지만(그는 우리가 아는 한 신념의 영화인들 가운데 한 명이니까요)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 ‘대선을 앞둔 지금 시점이라면 또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로스트 라이언즈>의 용기있는 제작 배경에 흠집을 내려는게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의도만 앞세운 듬성듬성한 영화’는 결코 아니란 점을 얘기하는 겁니다. 무미건조한 플롯의 프로파갠다 영화이긴 하지만 상황에 따라 대박이 났을 시에도 최소한 만듬새에 대한 부분에서 만큼은 흠결을 따질 수 없는 영화란 겁니다. 그런 덕에 관객들은 오직 이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내용 자체에 대해서만 마음 편히 집중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2)

등장 인물들의 대사가 무척 많고 빠르기까지 한 영화입니다. 자막으로 읽어야 하는 관객 입장에서는 화면 보랴 정신없이 지나가는 자막 읽으랴 정신이 없습니다. 미국 정치 드라마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영화 속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의 배경 설명에 그다지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행히 <로스트 라이언즈>는 부시 대통령과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도가 땅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라 다가올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이 계속 정권을 유지하기가 몹시 어려운 지금 시점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거 하나만 알면 영화 속 상황과 대화들을 따라가기에는 그다지 어려운 편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로스트 라이언즈>는 이렇다할 액션이나 스릴러를 제공하지도 않고 말 그대로 제한된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인물들 간의 대화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결코 재미있는 영화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영화적 재미와 상관없이 그 영화가 다루고 있는 내용의 중요성과 시급성 때문에 꼭 봐둬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직접 나서서 <로스트 라이언즈>를 만들게 된 이유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미니멀/흑백 취향이라 그런지 미국 현지 포스터가 참 근사해 보이네요.
포스터만 보면 세 명의 배우들이 마치 ‘나라를 지켜라 3총사’처럼 보입니다만
톰 크루즈의 경우 그 잘생긴 이미지를 역으로 이용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컷이 사용된 국내용 포스터가 영화 내용에 좀 더 유사합니다.
미국에서도 개봉일자가 11월 9일이었군요. 목표한 바를 과연 어느 정도까지
얻어낼 수 있을런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좀 더 일찍 했어야 할 일 아니냐는
아쉬움도 들지만 내용 자체가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늦은 것 같다고 안하는 것 보다는 백번 낫습니다.



같은 시각, 영화는 세 개의 다른 장소와 인물들로 시작합니다. 먼저 이라크. 미군들이 새로운 작전 명령을 전달받습니다. 이라크 내의 고지들을 점령해서 좀 더 확실한 군사적 지배력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이에 따라 군인들이 헬기를 타고 눈발이 흩날리는 산 정상으로 이동합니다. 그러나 매복해있던 반군들의 공격에 작전은 실패합니다. 히스패닉계 군인 하나가 헬기에서 떨어지고 그를 구하기 위해 흑인 병사가 자기 몸을 허공으로 던집니다. 눈이 많이 쌓인 산 정상에서 두 병사가 치명상을 입은 채 다가오는 이라크 반군들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됩니다. 작전 본부에서는 전투기를 출격시켜 반군들을 폭격합니다. <로스트 라이언즈>에서 대화 보다 액션에 치중하는 부분이 여깁니다. 물론 두 병사도 대화를 하긴 합니다만,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음에도 이들이 과연 살아남을 것이냐 죽을 것이냐가 관객의 궁금증을 붙잡아 맵니다.

또 한 곳은 워싱턴 D.C.에 있는 재스퍼 어빙 상원의원(톰 크루즈) 집무실입니다. 부시, 라이스, 파웰 등과 찍은 어빙의 사진들이 방 안에 가득하네요. 베트남전 당시 대학 학보사 기자였던 베테랑 언론인 제닌 로스(메릴 스트립)가 방문합니다. 톰 크루즈 특유의 매력적인 웃음과 함께, 10년 전 어빙이 공화당의 새로운 희망이라고 써주었던 호의적인 일화를 시작으로 한 시간에 걸친 대담이 시작됩니다. 어빙이 정부의 새로운 군사 전략을 설명하며 특종으로 다뤄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라크 현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모한 군사 전략과 그로 인해 위기에 처하게 된 두 병사가 바로 이 전략의 결과물입니다. 영화의 원제목인 Lions For Lambs는 2차 대전 당시 어느 독일 장교가 영국군을 놓고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멍청한 양들이 지휘하기 때문에 사자들만 떼죽음을 당한다는 거죠. <로스트 라이언즈>에서 어빙 상원위원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수 만 명의 미국인 청년들을 사지로 내몰았고 지금도 여전히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공화당의 정치 엘리트들을 대변합니다. 그 외양은 톰 크루즈의 얼굴을 하고 조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눈시울을 붉히기까지 하지만 그 알맹이를 똑바로 봐야한다며 영화 미학이고 뭐고 관객 눈 앞에 노골적으로 들이밀고 있는 영화가 <로스트 라이언즈>입니다.

마지막으로 정치 일번지와 이역만리 전쟁터로부터 한참 떨어져있는 대학 캠퍼스의 스티븐 맬리(로버트 레드포드) 교수실입니다. 최근 출석률이 좋지 않은 정치학 전공 학생과 맬리 교수 간의 또 다른 면담이 시작됩니다. 뺀질뺀질하던 그 학생은 현실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중이었고 이라크 전쟁터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두 병사는 맬리 교수의 제자들입니다. <로스트 라이언즈>가 관객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직접적인 언술이 맬리 교수이 입을 통해 펼쳐집니다. 바꾸려면 참여해야 한다. 해보지도 않고 비판하는 건 도피일 뿐이다. 정치 혐오증을 불러일으켜서 등돌리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정치 전략가들의 의도다. 그러므로 젊은 유권자들이여, 강의실 토론이건 그 무엇이건 참여하라! 참여하라! 참여하라! 일반적으로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등장 인물의 대사를 통해 직접 전달하는 건 가장 낮은 수준의 표현 방식으로 간주됩니다. 가르치려 드는 영화는 반감만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더더욱 좋지 않습니다. <로스트 라이언즈>는 그런 고려 사항들을 내팽개친 정치 찌라시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적혀있는 정치 구호에 동의할 수 있다면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두 손 번쩍 들어 환영할 수가 있습니다. 흥행 리스크와 미학적 비판을 무릅쓴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영화’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서 저도 영화 이야기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고자 합니다. 네, 영화 관객으로서 쓰는 글이 아니라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 쓰는 겁니다. <로스트 라이언즈>가 목표로 하는 건 다가오는 미 대선입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찬반 투표라 할 수 있는 대선에 젊은 영화 관객층을 끌어들이려는 겁니다. 이슈를 불러일으켜 더 많은 사회적 담론을 창출하고 참여시키고자 함입니다. <로스트 라이언스>가 전해주는 메시지와 그 의미는 미국에만 국한된 내용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대선을 불과 40 여 일 밖에 남겨두지 않은 우리 자신들에게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야기입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한지 오래인 노땅 정치인이 3수를 하겠다고 전격 출마 선언을 한 것이 가장 최근의 뉴스입니다. 한마디로 쪽대본에 코미디 정국이 따로 없습니다. 다음 주에는 또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10년간 일궈온 변화들 앞에 도돌이표를 찍으려는 쪽과 그 반대편의 구획이 좀 더 명확해졌다는 것입니다. 부패와 반부패의 대결이 됐든 다른 무엇 간의 대결이 됐든 어느 편이 과거의 것이고 어느 쪽이 미래를 위한 것인지는 이제 덜 헷갈리게 되었습니다.

현 정부가 그간 잘 했다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는 좀 더 잘 할 수 있을 거란 얘기는 아닙니다. 전쟁 지속이냐 중단이냐를 다투는 미 대선과 우리 대선의 핵심 이슈는 분명히 다른 맥락입니다. <로스트 라이언즈>로부터 있는 그대로 이끌어올 수 있는 내용은 오직 ‘참여하라’는 한 가지입니다. 다 아는 얘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천 번, 만 번을 반복해도 모자름이 없는 대목입니다. 선거를 통한 참정은 가장 기초적인 참여의 방식이고 참여를 하지 않으면 하지 않은 그 만큼 상대방에게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내가 참여하지 않으면 막걸리 한 사발과 꽃장식 공약 앞에 표를 내주던 과거의 이력을 반복하게 됩니다. 어느 쪽에 표를 던질 것인가는 각자의 판단이지만 어디로든 반드시 ‘표를 던져야 한다’는 건 변치않은 진리입니다. 나라가 살기 좋아지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별 차이가 없어지고 투표율도 자연히 떨어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아닙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 그 길을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리더쉽을 필요로 합니다. 리더쉽이 시원치 않으면 그때 다른 방식으로 참여해서 바로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던 길을 반대 방향으로 바꾸게 되면 그땐 정말 힘든 상황이 됩니다. 지금 되돌아 가기엔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이 아깝습니다. 지난 10년 보다 더 이전에 그들이 과연 어떠했었는지 기억을 되살려야 할 시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너무 직설적이고 투박한 구성의 영화임에도 목표 달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영화가 <로스트 라이언즈>입니다. 현 집권 여당인 공화당의 위선을 고발하고 그들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했던 상업화된 언론을 꼬집습니다. 더이상 속아서는 안된다며 격한 감정을 드러내고 이라크 전쟁에서 희생된 수많은 전사자들의 실제 무덤들을 보여줍니다. 궁극적으로 영화는 정치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특히 젊은 유권자들을 돌이켜 세우고자 합니다. 전장에 고립된 두 명의 병사들, 즉 탁상공론으로만 끝내지 않고 ‘바꾸기 위해 먼저 참여한’ 교수의 제자들이 꼭 죽는 것으로 끝내야만 했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그게 이라크 전을 통해 벌어진 현실, 욕심 많은 양들로 인해 미래의 사자들이 개죽음을 당한 사회적 손실과 안타까움에 좀 더 가까운 것이 사실입니다.

마지막 장면은 <로스트 라이언즈>가 선전 선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젊은 관객들을 정면으로 겨냥합니다. 맬리 교수와 면담을 마친 학생이 기숙사로 돌아오고 TV에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빗댄 듯한 가십 뉴스가 화면을 메우고 있습니다. 결국 어빙 상원의원의 의도대로 새로운 이라크 전략이 ‘성공리에’ 전개되고 있다는 자막 뉴스가 가십 뉴스 화면 밑에 깔려 지나갑니다. 학생의 흔들리는 눈빛을 담으며 영화는 끝납니다. 학생의 변화를 직접 보여주는 것 보다 훨씬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선택은 각자의 몫이기도 하지만 만일 그 학생까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새로운 결심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면 영화적으로는 통쾌할 수도 있겠지만 <로스트 라이언즈>가 목표한 바는 이루기 힘들었을 겁니다. 이미 할 얘기는 충분히 전달했으니 남은 부분을 관객의 가슴과 머리 속에 남겨주는 방식입니다. 영화가 의도했던 바를 스크린 속에 박제해버리지 않고 관객들이 극장 밖으로 들고나갈 수 있게 하는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 멜 깁슨이 연출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그 정도로 흥행하고 논란을 불러일으키리라 예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멜 깁슨 자신도 상당히 당황스러워 했을 정도였죠.

2) 만듬새부터가 듬성듬성해서는 특히나 이런 내용의 영화는 대박내기가 어렵습니다. 돈을 많이 번다는 의미가 아니라 프로파갠다 영화가 애초에 지향했던 사회적인 파장과 공명을 불러일으키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방법론을 공격함으로써 내용의 핵심을 가리며 소모전이 되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전술 전략이니 만큼, 그런 여지를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ps. 의도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2)에서 언급한 ‘방법론 공격으로 핵심 논의를 빗겨나가기’의 유사 사례가 있어 링크를 걸어둡니다. 오! 로버트, 당신은 어쩌자고 이런 영화를? [오마이뉴스]


영진공 신어지

<스카우트>, 웃음과 재치 속에 비극을 담는 하나의 전범

스포일러를 잔뜩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Y대학 야구부 직원인 호창(임창정)이 고3 괴물투수 선동열 스카웃이라는 막대한 사명을 띠고 광주에 출장을 간다. 모처에서 비밀훈련을 한다는 선동열의 자취를 좇고, 그의 부모를 찾아가 조르는 한편, 그는 7년 전 갑자기 결별을 선언하고 사라져버린 옛사랑 세영(엄지원)과 재회한다. 한 축으로는 선동열이 가기로 예정한 K대학 야구부 직원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선동열을 뒤쫓는 모험, 그리고 또 한 축으로는 세영을 마음에 둔 주먹 출신 곤태(박철민)의 견제 속에서도 마음 깊이 미진하게 남은 세영과의 지지부진한 관계. 이 둘은 영화의 초반을 평범하고 다소 도식적인 코미디로 끌어간다.


이 두 축이 만나는 지점은 광주항쟁 ‘직전’의 대규모 시위이다. 마침내 선동열의 아버지가 호창에게 마음이 기울었을 무렵, 그는 세영이 자신을 왜 떠났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그 자신도 지우고자 했던 기억, 그래서 실제로 잊어버리고 있던 어떤 사건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호창이 이 사건을 떠올리고는 세영을 찾아 헤매는 모험인데, 여기에 시대적 비극이 직접적으로 얽히면서 영화는 긴박감을 띄게 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는 초반에 내세웠던 유머와 코미디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대적 비극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다. 영화의 비극적 코드는 웃음 속에 대충 끼워넣는 휴머니즘 코드로서가 아닌, 그 웃음과 적절히 조응함으로써 더욱 배가되는 비극성, 그럼에도 ‘웃으며 피눈물을 쏟아내는’ 비극성을 표현해낸다.


회사 편에서 노조를 깨뜨리고 파업을 깽판놓던 구사대의 학교 버전, 구교대는 실제로 학교에 존재했다. 그네들이라고 좋아서 데모하는 다른 애들을 두들겨 팼겠냐만, 운동으로 학교에 스카웃된 학생들과 소위 시험쳐서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높은 장벽이 분명히 존재했고, 때로 끼어드는 적대심에는 분명 구교대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위하는 학생들을 깽판놓기 위해 운동부 학생들을 동원할 때 학교는 한마디로 “너희들 불러다 공부시켜주고 운동시켜주는 게 누군데.”였던 건데, 이것은 영화에서도 “니들이 공짜로 운동해?”였나, 하는 대사 한 마디로 압축되어 표현된다. 결국 시위하던 학생들과 운동부 학생들의 싸움이 일어나는데, 이 장면의 비극성은, 우리가 매일 보는, 거리에서 벌어지는 시위에서 충돌하는 시위대와 전경의 모습 그대로이기도 하고, 혹은 광주에서 대치했을 시위대와 군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세영이 왜 자기를 떠났는지를 깨달았을 때, 그것을 돌이키기 위해 그가 취했던 액션.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숨기고 있던 비장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돌이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했고, 경찰서에 잡혀있는 세영을 드디어 구출해낸 후 그녀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과거의 과오를 대하는 가장 올바른 방식이 아니겠는가. 호창은 참으로 용기있는 사람이고, 이것이야말로 소시민 호창의 위대한 영웅의 승리이기도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장면은 두 주연배우의 연기가 너무나 빛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원래 가장 훌륭한 코미디가 ‘슬픈’ 코미디인 것은, 코미디라는 장르의 전통 중 하나가 삶의 ‘비극’을 뒤트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현석 감독은 임창정이란 배우가 가진 장기, 즉 ‘처절한 웃음’을 표현해 낼 줄 아는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 표현한다. 역사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소시민이 처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상황, 그리고 너무나 거대한 비극 사이에 껴 있는 소소한 비극이기에 자연스럽게 희극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희비극적 상황을, 임창정은 특유의 우직한 성실함과 넉살로 돌파한다. 그가 미친 듯이 세영을 향해 뛰어가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관객이 있을까? 광주에 대해 여전히 ‘사태’라 생각하든 ‘항쟁’이라 생각하든, 그 장면에서의 임창정의 진심에 감동하지 않을 관객이 있을까? 이 장면에서 임창정이 호창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울음은 가슴을 찢어놓는 통한의 울음이다. 한편 착잡하고 비밀을 가진 듯한 세영의 모습은 호창의 회상 속에서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했다가(이것이 연애의 ‘회상’이기에 더욱 그렇겠지만), 호창이 그 사건을 기억해내는 장면에서 그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모습 때문에 그녀의 상처와 경악과 슬픔이 더욱 비극성이 배가되어 표현된다. 이 장면에서 엄지원의 연기 역시 그 고통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의 마지막, 호창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가운데, ‘현재’ 시재에서 TV에 등장한 선동열을 보며 세영은 회상에 젖는다. 평범한 가정의 어머니이자 아내로, 그리고 40대 중년의 소시민이 되어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호창 역시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었고, 역사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걸, <스카우트>는 웃음 속에서 넌지시 보여주고, 넌지시 이들에게 찬가를 바친다. 영웅이 아니기에 진정한 영웅인 사람들의 모습을, <스카우트>는 너무나 훌륭히 그려내었다. 상업영화, 특히 ‘코미디영화’의 틀 안에서, <스카우트>는 자칫 무겁고 경직될 수 있는 비극을 매우 모범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면서도 그 비극성에 함몰되지 않는 지혜를 보여준다. 그것이 쉽지 않음을 알기에, <스카우트>가, 김현석 감독이, 그리고 임창정과 엄지원이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럽다.


영진공 노바리

양조위, 그의 치명적인 이(易).

사용자 삽입 이미지미리 말해두자면 저는 양조위를 배우로써 정말정말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광빠모드로 그의 브로마이드를 사들이고, 그의 팬싸인회를 따라다니고, 하는 등 인간 자체의 양조위를 따라잡기 위해서 난리를 친건 아니었지만, 영화배우로써 제 가슴을 떨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제게 있어선 양조위가 유일합니다.

3대 7명으로 구성된 가족 전체가 영웅문 1,2,3부를 가장 추천 윤독도서로 읽어대는 집안에서 자란 관계로 ‘칠구에서 피를 흘렸다.’ ‘혈도를 짚어 마비를 시켰다’ 등의 문장을 읽으며 한글을 익혔고, 저의 가슴을 콩딱 콩딱 뛰게 했던 가상의 인물들은 아더왕도, 신데렐라도, 왕자님도 아닌 곽정, 양과, 소용녀, 사손, 장무기, 이런 인물들이 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지요.

그런데 그 후 몇년이 지나 당시 중학생이던 오빠가 빌려온 의천도룡기 시리즈 한편으로 소설 속의 장무기는 ‘양조위’의 얼굴을 입고 현실이 되었습니다. TV에 나와서 연기하는 ‘배우’라는 직업이 있다는 개념이 생긴 이후, 제가 등장인물의 이름이 아닌 배우의 이름을 따로 외웠던 것도 양조위가 처음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제가 나이가 들어갊에 따라 양조위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흐뭇한 매력을 점점 더해가면서 여전히 저의 과거가 아닌 현재를 지키고 있습니다. 참 행복한 일입니다.


사실 이 영화만 놓고 보자면 단연 압도적인 매력을 발휘하는 배우는 탕웨이입니다. 스틸사진에서 보여주는 통통하고 평범한 동양아가씨인 이 배우는 영화에서 엄청나게 입체적이고 독특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양조위라는 배우도 이(易)의 캐릭터와 완벽한 조화를 보이고 있지만, 신인 탕웨이 또한 그러합니다. 장치아즈-막부인이라는 1인 2역에 가까운 그 캐릭터 자체도 너무나 멋졌습니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그녀의 연기는 아! 정말 너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이(易)’가 얘기하는 것 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눈이지요. 그리고 그 두려움 없음은 순수함에서 기인합니다. 알수 없음. 지적인 매력. 그리고 그 안에 깊숙히 자리잡은 깨어나지 않은 색끼. 그리고 그녀가 가진 농염함이란 그 안에서 교태와 천박함은 완벽히 지워내고 도도함과 순진함을 채워 넣은 것입니다. 게다가 ‘젊음’이라는 그 자체의 매력을 최대화 합니다. 한마디로 농염하면서도 풋풋하지요. (탕웨이라는 배우에게 하는 개인적인 바램입니다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절대 성형수술 하지 말아주세요. 그 아름다운 얼굴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나이가 든다해도 매력이 쇠할 스타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양조위 처럼 우리 곁에서 오래오래 연기해 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틸 사진으로는 이 배우의 매력이 설명이 안됩니다.

하지만 저는 양조위, 그리고 그가 연기한 이(易)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제가 오랜동안 좋아하는 배우고, 또한 좋아하고, 가슴 떨려 하면서도 속으로 ‘저 좁아 터진 어깨가 뭐가 좋다고.’ ,’저 알고보면 비겁한 캐릭터가 뭐가 좋다고’하면서 왜 좋은지 스스로도 의문을 가졌던 배우이기 때문에, 이(易)라는 엄청난 캐릭터를 통해서 저 스스로 양조위의 매력을 정리해 보고 싶은 건지도 모릅니다.



아….정말 이(易).라는 캐릭터는 양조위에게 알파요 오메가인 캐릭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양조위가 가진 그 오만가지 복잡미묘한 매력들을 이(易)라는 캐릭터에 모조리 녹여 넣음으로써 그 매력을 극대화시킨다고나 할까요. 영화 홍보자료에는 양조위가 그간 선한 역할만 맡아왔기 때문에 이안 감독이 캐스팅을 망설였다거나, 양조위가 “이제껏 스크린에서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양조위를 창조해줄 것”을 주문 받고 완전히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냈다는 얘기가 나와있지만, 사실 오랜 팬인 저로써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양조위가 그간 선한 역할을 맡아왔다는 것에 별로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성룡이라면 몰라도요.) 장무기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중경삼림의 순경은 좀 우울해 보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였고, 왕정문에게 좀 치졸해 보였습니다. 화양연화의 차우 또한 그닥 선하다기 보다는 모호한 인물에 가깝습니다. 해피투게더에서, 또 2046은 어떻고, 최근의 무간도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는 충분히 나쁜놈이거나 최소한 나쁜놈이 될 가능성이 있는 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 모호함의 매력을 더해 주는 숨겨진 이유일 수도 있겠지요. 영화 영웅은 제가 영화 자체는 안 좋아합니다마는 그 옷색깔을 신호등처럼 바뀌입고 나오면서 양조의 매력을 색깔의 다양함을 다소 원색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易)가 양조위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캐릭터라기 보다는, 제가 보기에는 그 동안 양조위가 보여준 모든 매력들을 총망라하여 종합판으로 펼쳐 보여주는 매력의 결정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이 매력은 대단히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얘가 선한 캐릭터인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퇴폐미가 양조위 매력의 핵심


경고!!!이 아래부터는 영화 안 보신 분들은 읽지 마세요. 거의 줄거리 요약에 가깝습니다.


[#M_ 계속 읽기.. | 닫기.. |易라는 캐릭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말 이(易)라는 놈은 대단히 치명적인 놈입니다. 팜므파탈(femme fatale)이 자신의 치명적 매력을 이용해 권력에 개입하고, 남자를 파괴한다면, 易는 (팜므파탈의 대척점으로 옴므파탈(homme fatal) 이라는 말이 성립한다면) 그 자신이 원래 권력은 가지고 있는데다가, 자신의 치명적인 매력으로 여성과 그 주변을 파멸로 몰아 넣고, 끝끝내는 자신은 자신의 모든 것과, 그 여성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지켜냅니다. 그런데도 심지어 그 여성으로부터도 전혀 원망을 듣지 않지요. 오히려 그녀의 가슴 속에 살아있을 겁니다. 정말 치명적인 놈이에요.

이(易)가 어떻게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왕치아즈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단계별로 짚어보겠습니다. 네, 물론 제 가슴이 무너졌던 부분을 재 구성한것입니다.



1. 나도 평범한 인간일 뿐이야.
사실 이 치명적임의 시작은 그의 얼굴입니다. 양조위의 얼굴은 상당히 귀여운 스타일이면서 고독하고, 나약해 보이는 데가 있습니다. 바로 가장 치사하거나 가장 사악하게 변할 수도 있는 얼굴이기도 하지요. 이건 젊을 때 부터 그랬습니다. 장무기를 연기하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그 천진한 얼굴은 그 엄청난 내공을 가진 남자가 저렇게 천진하다는 이유로 더 위험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그 천진함은 약간의 고독함과 포기할 수 없는 그만의 세계가 내재된 얼굴로 변했지요. 왕 치아즈가 처음 보는 이(易)의 얼굴은 그저 일상의 얼굴입니다. 그는 경호원에 둘러 싸여 있기는 해도 아내에게 ‘잘 놀다오라’고 말을 하며 차문을 닫아주는 사람입니다. 단지 그 행동만으로도 그 얼굴은 자상하지는 않지만 그저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처음부터 왕치아즈 마음의 무장을 풀게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왕치아즈는 그날 집에 돌아와 ‘생각과는 다르게 생겼어’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이 여자. 이미 넘어간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양조위는 사실 왜소한 범부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2.난 이런데 익숙치 않아.
인적이 드문 레스토랑에서의 첫 데이트에서. 그는 자기 주변사람들은 국가니 민족이니 그런 거창한 얘기만 한다고 얘기하면서, 난 일상적인 대화에 익숙치가 않다고 얘기 합니다. 아!! 이 얼마나 노련한 꼬실링 기법입니까. 얼마나 여자의 마음을 싸그리 앗아가는 말입니까. 저런 몇마디의 말로 그는 “나도 이런 점에서는 순진해”, “나에게 일상이란 없어.” “너와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잘 되질 않네.” “너는 (그런 거창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야. 너와 특별한 관계를 원해.”라는 엄청난 떡밥(?)들을 던지고 있다는 겁니다.
전작에서도 그는 늘 미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장무기는 순진했고, 해피투게더의 요휘는 보영을 사랑하지만 서툴러 보입니다. 화양연화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갖혀 있는 차우도, 2046의 폐인에 가까운 소설가도 선수처럼은 보이지 않습니다(마는 선수이지요).


3. 난 신사야.
첫 데이트를 마치고 이는 왕치아즈를 집의 문앞까지 데려다 주지만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정말 첫 데이트에서 끝까지 젠틀한 모습을 잃지 않는데다가 ‘커피 한잔마시고’, ‘라면 먹고’ 혹은 ‘자고’가지 않음으로써 더 여자의 애간장을 태웁니다. 이날의 이(易)의 고무줄 기법(당겼다가 다시 느슨하게 놓아버리는)이 없었다면 왕치아즈 또한 그렇게 이(易)에게 집착하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팬이면서도 좀 악의적인 저는 2046의 치사한 젠틀맨십을 생각한 것도 사실이에요.


4. 여기가 호텔보다 안전할 거요.
3년만에 만난 그녀. 이제는 몰락해서 불쌍하게 밀수장사(우리나라 말로 차면 뭐냐. 바세린 아줌마? 미제장사 아줌마? 양품 아줌마? 암튼 )를 하고 있는 그녀를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면서 그가 권하는 말은 다름 아닌 여기가 호텔보다 ‘안전할’거라는 즉, 내가 널 지켜주겠다는 것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내의 동무가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일이 많고 바쁘고 사회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뿐, 원래는 가정적이고 부드러운 남자라는 걸 강조하는 거지요.



5. 난 아직 널 몰라.
첫 정사말이에요. 실로 충격적입니다. 하지만 곱씹어볼 수록 이해가 갑니다. 자신에게 미인계로 다가섰던 여성 3명을 죽인 경력. 한시도 몸에서 총을 풀어 놓을 수 없는 긴장감 속의 삶. (레옹처럼 항상 총을 차고 소파에서 앉아서만 잔 사람이 집 밖에서 정사를 벌인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갑니다.) 잠시나마 긴장의 끈을 놓았었던 여자와의 재회. 폭력에 물든 일상 아내와의 지극히 판에 박힌 대화 말고는 모든 의사소통을 폭력으로 해 왔던 자… 그런 행동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들이 수도 없이 떠오릅니다. 문제는 이해가 간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런 행동은 원래 이해를 해 주면 안되는 건데 이상하게 이(易)가 양조위가 하면 이해가 간다는 거지요. 왠지 그의 깊은 눈망울과 우울하면서도 차가운 눈빛을 보게 되면 끝없이 이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게 문제인것이지요. 그래서 양조위가, 이(易)가 치명적인 것입니다.


6. 난 피곤한 생존 속에 상처입은 한마리 짐승일 뿐이야.
그의 가장 놀라운 재능은 그가 폭력성을 보여줄 때, 그를 연민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어찌 치명적이지 않을 소냐. 관청 건물 앞에서 만나기로 한 날. 약속보다 늦게 나온 이(易)는 처음엔 그저 점잖게 ‘회의가 늦어졌다’고 말하다가 막부인이 추웠다고 투정하자 ‘피 튀기게 고문을 하고, 자백을 받아냈고, 고문을 하다보니 군사학교 동기’였다고 말합니다. 저항군을 타진했다고 말하면서 막부인을 폭력적으로 다루는 모습을 보면 막부인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다고 왕 치아즈를 협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이(易)가 가진 치명적인 매력은 그런 말과 행동조차 ‘난 인간적으로 너무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나의 일상은 견디기 힘들다고. 나는 생존에 피곤한 한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고’ 투정하며 파고드는 것으로 보이게 만듦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난 상처받은 짐승을 뿐. 고독할 뿐이야.


7. 난 네 앞에서 만큼은 다른 사람이 되어.
일본군 구역(?)의 한 술집에서 두 사람이 술을 나눠 마시고, 무릎을 베고, 또 막부인이 노래를 불러주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두 사람이 유일하게 ‘정상적인 연인’으로 보이는 순간이지요. 막부인의 노래를 듣고, 이(易)는 진심으로 웁니다. ‘난 네 앞에서 만큼은 다른 사람이 되어’라고 말없이 고백하는 장면이지요. 여자는 ‘내 앞에서 만큼은 여려지는 남자’를 ‘원래 여린 남자’보다 백오십만배쯤 좋아하는 법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공안부장관(?. 정확한 직책과 명칭은 모르겠어요)쯤 되는 놈을 가슴으로 품어야 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8. 널 지켜줄게.
다이아몬드반지를 찾으러 간 그 장면. 잔 말재주 안부리면서 은근히 여자마음 불태웠던 이(易)가 이번엔 정면으로 말재주를 부립니다. ‘반지는 잘 모르는데, 그 반지를 낀 당신 손’이 보고 싶었다거나, ‘내가 지켜줄께’라는 말까지. 아….정말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제 가슴까지 다 철렁했습니다. 저 또한 그런 분위기에서는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놈이 나를 향해 그런 눈빛을 보내며 아빠도, 흠모했던 친구도 한번도 지켜주지 못한 나를 지켜준다니요. 결국 그 말 때문에 왕치아즈는 5년간 준비했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동료들과 (그들을 동료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고 말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6캐럿 다이아에, 저 눈빛에 누가 안 넘어가.


9.내 진심이 버려졌고, 나또한 거대한 조직의 힘겨운 톱니였을 뿐이다.
결국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를 죽음에 이루게 하면서까지도 이(易)는 그 치명적인 간지 좔좔을 버리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바라보는 표정. 유일한 진심을 부정당한 남자의 눈빛.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한 사랑을 보이는 그 눈빛. 게다가 그 또한 일본군정으로 부터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순간 불쌍해 집니다. 거대 조직의 힘겨운 톱니로, 이용당하고 의심받는 존재. 아… 가슴이 아련해지는 순간. 번득! 하고 다시 정신을 차려봅시다. 이놈은 원래부터 나쁜 놈입니다. 원래 지 민족을 배신한 놈. 배신 한번한 놈이 두번 배신은 못합니까. 게다가 일본도 패망직전인데 이 기회주의자 놈은 언제 물타기 할지 모르는 놈입니다. 일본이 감시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건데, 그 눔의 눈빛을 보고 있다면 한없이 불쌍하고 가련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잃는 것 없이. 연인의 사랑과 동정까지 오롯이 얻게 되는 겁니다.



결국 이 치명적인 매력이란, 여자에게 ‘나는 물리적, 경제적으로 보호를 해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그리고 나는 ‘너에게 정서적으로 보호 받고 싶다.’라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암수 나뉘어져 있는 모든 동물들이 착각하고 꿈꾸는 짝짓기의 실체일 수도 있고, 동서 고금의 똑똑한 여자들이 불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래도 그한테는 내가 필요해.’라며 제 몸 상하는 지 모르고 자신을 내던지고 희생하며 행복하다 생각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내가 그를 정서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는 착각이 그의 정치적, 민족적 만행과 그의 비뚤어진 인간성 마저도 못 보도록 눈을 막아버립니다. 정말 치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양조위가 맡아온 역할들은 계속해서 그랬습니다. (제가 그의 모든 작품을 본 것이 아니고, 또 시간이 많이 흘러 기억이 가물가물 하기 때문에 좀 더 올바르게 얘기하자면 제가 매력을 느낀 캐릭터들은 다 그랬습니다.)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는 순진한 척 하고 어리버리 한척 하지만, 결국 자신을 사랑했던 여자들을 차례로 망칩니다. 호동왕자도 아닌데, 적국의 공주 조민을 이용하고, 주지약의 장문(아미파)를 위태롭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은 결국 명교의 교주가 되고, 주원장의 스승이 되지요. 화양연화의 차오는 아내의 외도로 괴로워하는 역할을 연기하지만, 결국 그 자신은 종국에 잃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앙코르와트에서 혼자말 한번 해 주는 것으로 간지좔좔 간지남이 되어버릴 뿐이지요. 2046의 양조위는 훨씬 더 악독합니다. 옆방의 바이링(장쯔이)과 육체적인 유희만을 즐길뿐 마음의 곁을 한치도 내주지 않지요. 춘광사설의 양조위도 다르지 않지요. 그를 떠나고 괴롭히는 것은 보영(장국영)인 것 같지만 그는 항상 사회적으로 생활력이 강한 쪽이고 그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보영 쪽이었습니다.그렇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상처받은 영혼과 위태로운 매력을 발산합니다. 이(易)는 그저 모호하게 나쁜 듯도 한 놈 이었던 양조위의 과거 캐릭터를 원래 나쁜놈인데 알아갈 수록 모호하게 나쁜 놈으로 발전된 캐릭터이며, 또한 이전의 캐릭터들에게 약간은 약했던 현실에서 물리적, 경제적 힘을 가진 권력자라는 매력까지 보충을 하게 됨으로써 그 내공이 강해진 놈입니다. 사실 이런 놈 그냥 두면 안됩니다. 정말 쌩 나쁜 놈이지요.하지만 이 순진무구, 고독하게 생긴 얼굴을 가진 +사실은 권력이 있는 놈의 + 네 앞에서만은 다른 나는 +사실은 상처받은 짐승이며 +위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 느물느물하지도, 서툴지도 않게 아주 노련하게 발산하는데 안 넘어가는 여자가 없는 겁니다.


색.계에서 이런 이(易) 혹은 양조위의 매력의 정확히 대척점을 이루는 것은 연극반 반장(?)인 광위민입니다. 그는 야심있는 젊은이의 오류를 전부,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 무모하고 –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을 죽이자고 공모하고, 2. 책임없고- 아마추어 활극을 벌이고도 뒷수습이란 없지요. 3.어설프고 – 지가 경험없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여자의 베드씬 연습을 머저리 같은 놈과 하게 하고, 4. 힘은 세지만 능력은 없고. -조직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5.무지하고 – 사랑하는 여자에게 언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 시점에서의 키스라니요. 왕치아즈의 마음이 이미 李에게 가 있기 때문에 ‘3년 전에 했었어야’라는 말로 끝났지 안 그랬으면 ‘따귀 맞고’, ‘그 여자는 모멸감에 떨게’했을 겁니다. 6.사랑하는 여자가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 그 잔혹한 첫 정사를 지켜보고 있었다니, 기둥서방에 다를바 아니지요. 왕치아즈의 분노와 배신감을 알만합니다. 6.게다가 쥐뿔도 없는 주제에 자신만만한척 스스로를 가려서 여자가 그를 연민할 기회도 주지 않지요. 8.자신도 얻는 것이 하나 없으면서 9.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까지 망쳐버립니다. 10.그녀의 진심을 한번도 알아주지 못한 채 말이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너 생긴건 잘생겼는데, 엄청 찌질하거든?

그러니까 말이지요. 아무리 이(易)가 나쁜 놈이어도.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때려 죽일 놈이어도. 젊고, 똑똑하고, 야심있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잘생긴 광위민보다는 이(易)가 훨씬 나은 겁니다. 그래요. 그 점이 바로 가장 치명적인 사실이에요. 아…. 정말 치명적이라는 말 밖에는 할말이 없네요.



현실에서 이(易)를 만난다면, 혹은 그 전작들에서 그가 보여준 그 매력에 빠져있다면. 우리들은 재빨리 그를 피해야 합니다. 그는 그 자신은 결코 다치지 않으면서도 그 순진한 얼굴을 하고, 그 애써 감춘 아픔을 그 눈빛으로 발산하며, 몇마디 되지 않는 말로 우리의 우리의 마음을 앗아가 버려 우리를 망칠 테니까요. 어쩌면, 내가 빠져버린 양조위가, 양조위의 매력이, 이(易)의 매력이 배우의 그리고 가상인물의 것이어서 다행입니다. 나는 그 매력에 빠져들기만 할 뿐. 다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_M#]


 


영진공 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