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갤”, 유쾌한 찌질이들이 은하계를 수호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Guardians of the Galaxy)라는 은하수호대는 이름이 너무 길어 그냥 가오갤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들의 활약을 보면서 어쩌면 시저도 못한 세계정복을 디즈니는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오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옹골차게 유머를 주입하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심지어 그 진지할 수밖에 없어야 할 클라이막스의 위기상황에서도 이들은 유쾌한 유머로 위기를 헤쳐나갑니다.

 

그런점에선 정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위대한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캐릭터들의 특색이 황홀할 정도로 가지각색인 데다가 그 종류도 애정이 깊이 들만큼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레미제라블”과 “겨울왕국”을 강하게 이끌어줌으로써 흥행에 성공시킨 장점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도 가지고 있는데요.

 

그건 바로 음악입니다. 80년대의 히트곡들을 모아서 절묘하고 흥겹게 배치시켜 놓아서

가뜩이나 유머에 즐거워하던 관객들의 흥을 더욱더 돋게 만듭니다.

하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이 장점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안이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마블 코믹스가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고 있으며 발전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전혀 창의적인 발상이 없습니다. 스토리는 너무 밋밋하고 별 볼일 없으며 세계관의 확장으로만 이용됩니다. 그래서 화려한 영상은 단지 스토리의 부실함을 감추기 위한 겉치레로 전락해 버렸고 영상미마저 색이 바라게 됩니다. 

 

 

 

 

 

게다가 캐릭터들의 특색은 있지만 그 깊이가 너무 얕습니다. “어벤저스”는 그 영화를 위해 이전부터 캐릭터 고유의 영화를 억지로라도 만들어서 (그래도 그다지 깊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어벤져스 팀에 깊이를 부여했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전혀 아닙니다.

 

새로운 영웅들에게 새로운 활약을 위한 목적의식을 심어주기엔 그들은 너무 어중이떠중이들입니다. 우정타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우습구요. 결국,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연이은 흥행으로 인한 마블의 오만함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더도말고 덜도말고 오락블록버스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는 4D로 봤는데 영화 도중 얼굴에 물을 (기분나쁠정도로) 쏟아붓는 장면이 3개 정도가 있고 우주선의 움직임을 표현하느라 쓸데없이 움직여대는 의자에, 액션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격하게 움직여서 안경추스르느라 오히려 액션이 보이지 않았던 점은 정말 최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그저 여름을 잠시 잊게 할만한 오락영화 입니다. “윈터 솔져”를 기대하였지만 이 영화는 그저 유머감각이 좋아진 “트랜스포머”일 뿐이었습니다.

 

하나 더 아쉬웠던 점은 영화가 청소년 관람가라 그런지 등장인물의 몇몇 재미있을 드립을 직역해서 번역하여서 좀 더 찰지게 전달되지 못한 점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유머감각은 정말 최고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영화 중 최고의 드립

-지금 뭐하는 거지?

-댄스배틀!

 

 

영진공 샤인제이드

 

 

 

 

 

 

 

 

 

 

 

 

 

 

 

 

[근조] 로빈 윌리엄스

 

 

 

 

로빈 윌리엄스

Robin McLaurin Williams

1951. 7. 21. ~ 2014. 8. 11.

 

 

 

 

 

 

고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를 누르세요.

 

 

 


 

 

 

로빈 윌리엄스 영화 추천 목록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진공 일동

 

 

 

 

 

 

 

 

 

 

 

 

 

 

 

 

 

 

 

 

 

 

영화 “명량”과 “군도”에 대한 단상


 


 



 


 


영화 “명량”은 역사 매니아도 아니고 밀덕후도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 봐도 고증의 문제가 툭툭 걸립니다. 게다가 메이크업을 잔뜩 한 조총 스나이퍼 따위를 쓸 데 없이 만들어 넣는 등 영화의 매무새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충무공이 장계를 쓰는 장면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글을 쓰는 이순신의 상반신 샷으로 시작하면서 다음은 글을 쓰는 손을 클로즈업하고 그 다음은 손까지 포함한 전체 샷이 나옵니다.

하지만 전체샷으로 넘어올 때 꼿꼿했던 충무공의 허리가 숙여져 있습니다. 첫 샷에서는 손이 안 잡히니 글은 쓰는 척만 하면서 허리를 꼿꼿하게 폈을 테고 마지막 샷에서는 손까지 잡히니 신경써서 글을 써야 하는 터라 허리를 숙였겠지요. 허나 샷의 연결이 껄끄러울 정도로 튑니다.

그리고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에서 충무공이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올려 베는 모습을 정면에서 잡고 다음 샷에서 카메라는 적장의 등 뒤에 가 있는데, 이순신의 칼이 왼쪽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오른쪽 아래에 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뭔가 깔끔하지 않다는 것을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다 느끼게 되고 이 정도면 NG컷이라 할 만 합니다. 문제는 이런 컷들이 꽤나 많아서 매무새가 조악합니다. 아무리 쌈마이 헐리웃 영화라고 하더라도 이런 컷들은 보기 힘듭니다.

정작 문제는 배우 최민식의 존재입니다. 자신없는 감독은 최민식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될듯 보입니다. 최민식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하지만 최민식 연기가 정말 잘 나올 때는 극 안 캐릭터의 개성이 매우 강할 때입니다. “파이란”에서의 강재,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장경철처럼 말입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취화선 동행취재기를 씨네21에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과의 인터뷰를 인용하겠습니다.


 


 


-임권택 감독님과의 해석상의 차이가 있습니까.

=근본적인 차이는 없죠. 그러면 큰일나게요. (웃음) 다만 지금 초상화냐, 풍경화냐, 라는 점은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전 굵은 붓으로 죽죽 그리고 싶은데, 그럴 때 감독님이 아니다, 굵은 붓으로 그리다가 가는 붓으로 바꿔라, 하시면 내가 성이 안 차는 부분이 생깁니다. (웃음) 자꾸만 내것이 나오니까 괴롭죠. 내 것을 버리고 감독님 것을 취해야 하는데, 나를 죽여야 하는데, 자꾸만 내 분석대로, 내 방식대로 몸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목표를 가는 거니까요.

다음은 임권택 감독 인터뷰 중에서 발췌입니다.

=장승업이 김병문 집에 담 넘어가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서 최민식씨가 눈물을 흘려서 NG를 내셨다면서요.

– 그것도 기품과 관련될지도 몰라요. 물론 울 수도 있는 거요. 그러나 사소한 감정을 드러내는 쪽으로 장승업이를 찍어오지 않았다고. 거기서 느닷없이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안에는 깊은 사랑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살아내는 놈인데, 여기 와서 울고 있으면 그게 맞겠냐고. 삐끗삐끗 감정이 튀어나오면 수렁을 밟는 거죠.


 



최민식은 이런 배우입니다. 영화는 여러 파트가 한 데 어우러져야 하는 장르인데 그는 연기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자신의 캐릭터만 살아나고 나머지는 죽어버린다는 것이죠. 저는 이 절정이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최민식은 과거처럼 자신의 연기로만 영화를 다 뒤덮진 않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이나 “신세계”에서는 많이 절제하는 연기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최민식은 최민식이죠. “명량”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은 모든 대사, 모든 표정에 감정이 뚝뚝 묻어납니다. 아들과 밥을 먹으면서 하는 간단한 대사 “같이 먹으니까 좋구나” 이 아홉 글자에도 목소리의 톤과 인토네이션을 써서 감정을 묻혀내죠. 그로써 최민식의 이순신은 끊임없이 얘기합니다. 나는 힘들어, 나는 괴로워, 나는 어려워 ……

그런데 과연 이순신이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마구 쏟아내는 인물이었을까요?
“난중일기”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병신년 이월 열 나흘 – 밤에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은 대낮처럼 밝고 물결 위에 비친 빛은 비단결 같은데, 혼자서 수루 위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수선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을미년 칠월 초 하루 –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갑오년 이월 열 엿새 – 홍양 현감이 암행어사 밀계 초본을 가지고 왔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두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나 나라가 평정될 리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물론 아들이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격정적으로 비통함을 드러내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힘들고, 괴롭고, 어렵고, 외로울 때에도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뒤척거리고, 천장만 올려다보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


 


 



 


 


이런 이순신의 모습과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의 모습은 격차가 큽니다. 아마 연출자가 이를 알고 최민식의 연기를 더 죽이려 해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둘 사이의 “짬밥” 차이가 얼만데 ……


 
오히려 류승룡이 이순신을 맡고 최민식이 구르지마를 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외에도 소위 과도한 ‘국뽕’이나 텔레파시와 치마 시그널 등 무리한 설정이 있는데도 “명량”은 흥행가도를 힘차게 내달리고 있습니다. 리얼리즘을 정말 사랑하는 한국의 관객들, 그리고 문단 독자들의 성원 덕분에 말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묘사하는 게 리얼리즘이라 한다면 한국의 대부분 흥행 영화는 모두 리얼리즘이 베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설국열차”가 좀 예외랄까? 실은 “괴물”도 리얼리즘이지요.

우리 관객이나 독자들이 왜 리얼리즘을 좋아하는지는 다른 차원의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영화 “군도”를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영화의 매무새, 그러니깐 만들어 놓은 모양은 “군도”가 “명량”보다 낫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군도는 현실의 이야기를 현실이 아닌 것처럼 묘사했고, 이는 관객에게 매우 불편한 접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현실의 이야기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면 모르겠는데,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이며 그 과거의 현실은 지금의 현실과 별로 다를 게 없죠. 그런데 그 현실이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촬영하고 음악을 깔고 편집을 해 놓으니 관객은 혼란스럽지요.

김구 선생이 절정 무술을 사용하며 일본인을 때려 잡는데 거기다가 무협 스타일 자막으로 “흑심패룡장의 고수 백범 김구”라고 깔고, 고속 촬영에다 웨스턴 음악 넣고 영화 “300”처럼 편집하면서 재해석하면 관객들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김구 선생이 몸 담았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이기에 이처럼 재해석하려는 사람은 없겠지만, 허나 “군도”가 보여주는  현실도 어쩌면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 백성은 현재와 흡사한 채권추심도 당합니다.


 
영화 속 현실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얘기하면서도 묘사는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누리끼리한 서부 영화 스타일 색보정, 음악과 무협 영화와 같은 캐릭터 구축과 샘 페킨파 같은 급격한 줌인 줌아웃 등을 써대니 당연히 언발란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군도”의 흥행이 주춤하는 것은 여타의 요인이 많겠지만 제 생각에는 “명량”과는 다르게 리얼리즘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영진공 철구


 


 


 


 


 


 


 


 


 


 


 


 


 


 


 


 


 


 


 


 


 


 


 


 

“슈퍼 히어로의 정치학”, “킥 애스”가 보여주는 시민의식


 

 

 

“보수”란 당대의 사회 시스템을 인정한다는 말이며 지배체제를 인정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옳다’, ‘그르다’로 재단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한 시스템은 적어도 그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한 질서의 유지 측면에서 이해되고, 이 ‘질서’는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의 안정성을 담보해주는 것이기에 큰 의미를 가집니다.

 

한국 사회에서 살인은 5년 이상 ~ 무기, 또는 사형의 처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살인을 최대한 꺼리게 되겠죠. 하지만 사회가 자신을 지속가능할 정도의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이런 규칙을 슬금슬금 어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회체계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회구성원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최대한 잘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보수는 과연 그럴까요? 대한민국 형법 31조는 살인교사를 살인 행위자와 같게 처벌할 것을 요구하지만, 20명 이상을 죽인 유영철은 잡힌 즉시 신속하게 사형 판결이 나온데 비해, 어떤 이들은 십 수 년이 지난 후에야 가까스로 사형을 언도받고 결국 사면받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나오는 것일까요?

 

 

 

 

국가가 자신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야만 합니다. 그 중 하나가 피치자들에게 권선징악의 이데올로기를 심어놓는 것이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착한 일을 한다고 꼭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한다고 꼭 벌을 받는 것도 아닌 게 현실입니다.

이 때 지배자가 등장합니다. 지배자는 “하늘을 대신하여” 처벌을 내립니다. “하늘을 대신”한다고는 하지만 까놓고 보면 이는 자신의 지배 시스템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죠.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늘을 대신한다”는 증명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죠. 이 때문에 지배자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냅니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하늘”에서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늘”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눈을 빌면, 그들에게는 모르는 것이 없겠죠.

그래서 그들은 “하늘을 대신한 응징”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응징”은 일정 정도의 홍보효과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태고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처형은 하나의 축제, 혹은 구경거리와도 같은 성격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런 ‘일벌백계’를 통해 시스템의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런 관행을 수퍼맨과 배트맨에서 봅니다. 수퍼맨과 배트맨은 악당을 죽이기도 하지만, 피치못한 경우가 아니라면 악당을 경찰서나 교도소에(재판도 없이!) 쳐 넣습니다. 담벼락이나 기둥에 묶기도 하지요.(사실 제대로 그들을 넣었다 해도 현실이라면, 입증문제로 인해 영화에서처럼 간단하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군요. 비합법적 수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게 슈퍼 히어로 무비의 세계니까요.)

 

조용하게 해결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상징하는 코스튬과 온갖 퍼포먼스를 이용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홍보”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는 보이지 않지요. 그들의 정체는 ‘시스템’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최소화합니다.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그들의 탐지를 피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정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비난받을 일도 없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인데 수퍼맨은 뭐 하는 것이냐?”라는 푸념에도 클라크 켄트는 어디에도 없지요.

결국 수퍼히어로란 계몽주의의 산물인 셈입니다. 그들은 완벽하며 강하고 인간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진리가 되었죠. 마치 성서의 모든 문구가 진리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 논파의 방법에 불과합니다. 고대에는 국왕이 신의 아들임을 역설함으로써 지배이데올로기를 공고화했다면, 근대는 지식을 통해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형식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지배체제를 강화했습니다. “계몽”은 개인을 위한 것이기 전에 국가를 위한 것이었고, 이는 한글의 필요성과 용비어천가를 통해서도 매우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죠.

 

 

 

허나 아무리 영웅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한 사람의 영웅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수퍼맨이 지구를 사랑한 것은 지구가 그나마 그럭저럭 돌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시민사회의 단결이 흐트러지지 않은 세상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재미있는 히어로가 있는데 바로 “킥 애스”와 “스파이더맨”입니다.

스파이더맨 2편의 피터 파커는 지하철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정신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어린 아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하철의 시민들은 모두 그를 구하기 위해 모여들고, 심지어는 악당에게 도전하기도 합니다. 영화가 영화니만큼 폭력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킥애스라는 영화를 보면 얘기가 좀 달라지게 됩니다.

 

킥애스의 주인공은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냐”라는 탄식에서 별 능력도 없는 주제에 수퍼히어로 짓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진짜 수퍼히어로를 만나게 되죠. 하지만 세상을 바꾼 것은 힛걸 한 사람이 아니라, 수퍼히어로 모임이었습니다. 사회에서는 그저 평범한 혹은 평범 이하의 힘을 가진 Loser들이었지만, 그들이 힘을 모으자 그들은 더 강해졌습니다. 아픔과 피해도 있었지만, 승리를 쟁취한 것은 ‘시민들’이었죠.

 

 

 

 

이렇게 “연대의 승리”라는 면을 잘 보여준 게, “반지의 제왕” 2편입니다. 각 종족들은 처음에는 “나완 상관없다.”는 식으로 연대를 거부하지만, 이웃의 피해를 보고 그 피해가 자신들의 일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연대해서 승리하지요. 그래서 반지의 제왕은 멋진 정치 드라마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현실로 돌아와보면, 우리는 삶의 주체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주변부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엘리트도 중심부의 인물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주변인일까요? 주변인인가 아닌가는 주체가 서는 곳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나의 삶은 나에게 있어서 중심입니다. 아무리 ‘그들’의 수퍼웨펀이 나를 한순간에 제거할 수 있다 할 지라도, 내 삶의 주체는 결국 ‘나’이지요.

프랑스 혁명 이후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여러 부침을 거쳐 그들이 갖는 권위는 신분적 권위가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권위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주님’에게 절하는 사람들도 없고, ‘악수’를 거절하는 정치가도 없습니다. 사회의 자원을 많이 가진 자들에게는 오히려 의무만이 있을 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스템은 잘 굴러가며, 오히려 여러 국가들의 모범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그 동력이 ‘시민의식’에 있다고 봅니다. 그게 아주 대단한 것이 아닌, 규칙을 지키려 애쓰고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식하는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챙기는 의식이죠.

 

최근의 영웅물 중 이 ‘시민사회’ 부활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라면 저는 “스파이더 맨”과 “킥 애스”를 꼽습니다. 옳지 않은 자들에게 옳은 자들의 연대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의 수퍼히어로가 가지는 의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슈퍼 히어로가 대개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존재임에도 인기가 있는 이유는 매우 당연하게도 그들이 “제대로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강하지만 자신의 힘을 타인을 억압한다거나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남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자칭 타칭 “보수”라 불리는 이들의 모습은 과연 어떤가요?

 

 

 

영진공 바보아찌

 

 

 

 

 

 

 

 

 

 

 

 

 

 

 

 

 

 

 

 

 

“님포매니악”, 성애의 외피에 암시와 비유를 담은 영화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애호가 성애자와 함께 “님포매니악” 볼륨 1 마지막 상영날 볼륨 1만 보고 2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볼까 하는 마음으로 감상하였는데 … 딱 재미난 부분에서 볼륨 1이 끝나더군요! 마치 임성한 작가의 끊기 신공을 보는 듯한 신묘한 타이밍이었습니다. 동시에 머리를 움켜쥐고 악! 하는 짧은 비명을 토한 뒤 우리는 홀린듯이 볼륨 2를 예매했고 사이좋게 커피 하나씩 빨면서 도합 5시간동안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를 보러가기 전에 친구가 너무 겁을 줘서 지루할까봐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기덕같은 감독이라면서, 서사적인걸 별로 안좋아하면 엄청 지루할거라고 겁을 얼마나 주던지 … 그런데 실제로 영화를 보니 생각 이상으로 설명을 잘 해주는 아주 친절한 영화더군요.

 


그리고 김기덕과 비슷한 점을 저는 거의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서사적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할지 모르겠지만 … 소설로 치면 문체가 아예 다른건데, 그 둘을 비슷하다고 하거나 비교를 하거나 하는건 서로에게 실례가 아닐까 하여 친구놈 뒤통수 때려주려다 참았습니다. 아무튼 볼륨 1, 2를 통틀어서 인상깊었던 부분을 몇가지 꼽아보겠습니다.

 


 


1. 어린 조와 친구 B, 유아의 성

 


저는 예전부터 유아~청소년의 성욕/ 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5~6살, 조숙한 아이들은 4~5살때부터 자위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게 단순히 문지르는 방식이든 압박 자위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건 그들이 성기를 통해 쾌감을 얻을 수 있다는걸 배운다는 거죠. 친구들과의 놀이나 자신의 몸을 스스로 만져보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게 되거든요.

 


 




그런데 어른들은 보통 유아의 성을 억압하고 통제하려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숫제 부정하는 반응을 보이죠. 왜냐하면 불편하니까요, 아이는 어디까지나 순수하고 예쁘게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벌써부터 발랑 까진(?) 더러운 것부터 배우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전 아이들이 순수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정상으로 보일 정도로 쾌감에 집착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아동의 수준에 적합한 올바른 성교육을 조금 일찍 실시해 성욕의 통제법이나 발산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게 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아무튼 각설하고 영화에서 짧게나마 유아의 성욕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충격적인 동시에 느끼한 치즈 피자먹다가 사이다마신 기분이 들더군요. 대단히 신선했습니다.


 


 


2. 위선과 본능의 첨예한 대립

침대에 앉아서 밀크티를 홀짝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조에게 샐리그먼은 때때로


상관없는 사족같은 이야기들을 하죠. 그것도 매우 공돌이스러운 이야기들요, 조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3 + 5 라는 숫자를 듣고 피보나치 수열 이야기를 아주 거창하게 한다던가, K의 이야기에서 매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등산 로프 이야기를 한다던가 하는 식이죠.

 




그리고 동방교회 서방교회,클래식 음악, 성화 등 다양한 장르의 지식을 뽐내는 굉장히 현학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한편, 조의 ‘니그로’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보이는 등 지극히 상식적인 모습과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인물이 마지막에 조에게 한 행동은 인간의 이성은 별로 쓸모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조는 샐리그먼과의 대화에서 자신은 위선을 아주 싫어한다고 했죠. 그리고 샐리그먼에게 조목조목 반박해주고 싶지만 피곤하다며 관둬버리고요. 그 대신 단 한발의 총성으로 모든 것을 명쾌하게 해결해버리죠.

 


 



조가 샐리그먼을 살해하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능을 상징하는 조가 위선과 이성을 대변하는 샐리그먼을 처단함으로써 인간의 이성과 위선이 얼마나 가증스러운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하나는 야한 영화라는 기대감을 품고 영화관을 찾은 뭇 남성들에게 … ‘짜샤, 이건 그딴 영화가 아니니까 냉수나 먹고 속이나 차려라!’ 하는 감독의 일침으로도 볼 수가 있겠죠.


 


사실 저 혼자 보러 갔다면 첫번째 의미로만 받아들였겠습니다만 같이 관람했던 남자사람 왈, ‘샐리그먼이 조를 겁탈하려다 사살당하는 장면에서 사실 엄청 뜨끔하고 부끄러웠다’고 하더군요. 자기의 조그마한 흑심이 다 까발려진 느낌이라나요.

 





3. 부녀관계와 에로티시즘




조는 아버지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아버지와의 산책, 물푸레 나무를 바라보던 추억, 영혼의 나무 이야기..마치 그 둘은 소울 메이트같은 느낌을 주죠. 어떻게보면 마치 연인같이 풀밭에 같이 누워 하늘을 보는 등 아주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반면 어머니와의 관계는 무미건조하다못해 차갑습니다. 조가 어머니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어머니는 계속 등을 돌리고 트럼프를 하는 옆얼굴 정도만 나올 뿐, 카메라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하는 장면은 안나오더군요. 심지어 어머니더러 COLD BITCH라고 하는 부분에서 조금 섬뜩할 정도로 냉담한 모녀 관계를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조와 아버지의 관계는 사실 전형적인 일렉트라 콤플렉스를 볼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많은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특히 아버지가 악몽에서 깨어나 조에게 매달리는 장면에서 흐르던 미묘한 성적 긴장감은 저만 느낀게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


 


 


4. 삼각관계 




P와 조의 관계는 시작부터 불안했던 관계였습니다. 애초에 자연스럽지 않은 인위적인 만남으로 시작되었으니까요. 조는 P에게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추억들을 고스란히 전달해주면서 P와 천천히 교감을 하게되죠. P 또한 의지할 곳 없던 자신에게 다가와준 조에게 신뢰를 보내면서 제법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는 아버지와 미묘한 성적 긴장감이 있었음에도 아버지를 끝까지 아버지로 대했죠. 하지만 P는 부모같은 존재였던 조와 육체 관계를 맺습니다. 저는 이게 조와 P의 차이를 보여준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롬과의 삼각 관계는 조의 가족들과 오버랩되는 감정구도를 형성하죠.


 



친밀한 딸과 아버지, 그리고 냉담한 어머니 VS 조의 연인이자 딸인 P와 옛 연인 제롬, 그리고 조의 구도. P가 제롬의 집으로 수금을 하러 다니는 동안 느닷없이 트럼프를 시작하는 조의 모습을 보면 제롬과 P, 조의 삼각관계와 조의 가족들이 대치되는 구도로 느껴집니다.


 



조 = p

아버지 = 제롬

어머니 = 조


 

조금 오버스럽게 해석하자면 조가 트럼프를 시작하는 장면은 조가 어머니를 딸로서 조금쯤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표현한 장면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기에는 조와 어머니의 관계 묘사가 너무 생략되어 있어서 확실하게 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러닝타임이 각 두시간 반쯤 되는 아주 긴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화면에서 쏟아지는 여러가지 암시와 함축된 비유들을 읽어내기만도 버거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볼륨 1은 대부분의 극장에서 이미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기회가 되면 꼭 두 편을 연달아 관람하시길 권합니다. 1만 보신다면 저처럼 머리를 감싸쥐고 비명을 지르실 거고, 2편만 보신다면 전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하실 거니까요.

 


 



 


 


 


영진공 내개인듯내개아닌내개같은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