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천둥의 신”, 근육바보 왕자의 오함마질이 너무해





감히 자신의 왕위 계승식에 맞춰 쳐들어온 얼음 괴물에 꼭지가 열린 근육바보 왕자를 두고 ‘그럼 경비를 강화하면 되지롱~’하며 아빠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얼마 되지도 않은 뇌마저 증발해 버릴 것 같은 왕자는 오함마를 치켜들고 바보 친구 4명과 함께 적의 행성(!)으로 불같이 쳐들어간다. 하지만 적들이 한 …… 30명? 정도 뛰쳐나오자 예상치 못한 적의 인구밀도에 놀라 후퇴를 하는데 ……

이렇게 처음부터 밀도있게 펼쳐지는 바보들의 향연과 무엇하나 진부하지 않은 것이 없는 영화를 보며 괴로움과 실망감 속에서 혹자는 정신줄마저 놓을지 모르지만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우리가 이 영화를 선택한 본연의 목적을 상기해 보자.

맞다. 우리가 이 영화를 택한 것은 100만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감동적인 이야기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반전을 기대해서가 아닐 것이다. 나이트 부킹에서 얼굴만 이쁘면 장땡이듯 우리가 마음졸이며 이 영화를 기다렸던 것은 눈을 즐겁게 해 줄 호쾌한 액션과 현란한 영상이아니던가.

감독 역시 니들 마음 다 안다는 듯 비록 과정이야 말이 되든 안되든 간에 근육바보 일당들을 무작정 적의 행성에 떨궈놓고 멋들어진 액션을 보여주며 ‘스토리는 좀 병맛이지만 멋있지?’라며 관객들의 기대감을 만족시켜 준다.



그러나 그마저도 잠시. 병맛 스토리에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때깔나는 화면을 보며 지었던 흡족한 미소는 이내 급 궁색해진 셋트장과 액션으로 인해 바람처럼 사라지고 만다.

옆의 우주 용사 벡터맨 세트장에서 빌려온 듯한 갑옷들과 흥미를 반감시키는 그저그런 얼음괴물들의 디자인이야 순수함을 잃어버린 아저씨 취향 탓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멕시코 허허벌판에 자리잡고 있는 시골 동네의 좁디좁은 공간적 배경 안에서 영화의 절반을 찍고 있음은 물론 전우주의 평화와 운명을 건 일전마저 구식 자동차 몇 대와 판자집 몇 채 만을 허락하고 있는 궁색함은 12명의 자식과 단칸방에서 지내야 했던 흥부의 궁색함 따위 오함마로 내려칠 기세다.


원작의 아우라가, 마니아들만 알 수 있는 잔재미와 함께 얼마나 맛깔나게 흩뿌려 놓여있지는 모르겠지만 지가 숨은그림찾기도 아니고 영화의 탈을 뒤집어쓰고 나왔다면 거기에 맞는 기본소양은 갖춰서 나와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던가.

아이언맨2에 이어서 분노와 실망의 2연타를 날리고 있는 마벨표 영화는 자꾸 영화된 도리를 잊고 과거의 영광과 마니아들의 호주머니에만 기대려한다면 조간만 피해야할 영화를 알려주는 인식표가 되지 않을까 한다.



영진공 self_fish

브이 포 벤데타, V For Victory, 승리의 V를 위해

 

2008년의 대한민국에 이 영화가 과연 무슨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공포와 증오

공포는 복종을 낳고 복종은 방조로 이어진다.
하지만 복종과 방조의 아래 어디쯤 어두운 곳에서는 증오가 함께 자란다.
공포의 원천에 대한 증오와 나에 대한 증오 그리고 공포 속에서 안주하는 다른 이들에 대한 증오가 뒤섞여,
정체와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질기게 자라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오는 어두운 곳에서 자라는지라 빛을 모른다.
빛을 모르니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줄도 모른다.
다만 그 증오는 터져버릴 때까지 차곡차곡 쌓이기만 할 뿐이다.

V는 증오이고 복수이다.
V는 눈 먼 증오이고 복수이다.

사랑과 믿음

증오는 파괴를 부른다.
되 갚아 줘야 하기에 부셔버려야 하는 것이다.
공포의 원천과는 공존할 수 없기에 뿌리까지 다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포의 원천이 사라지면 증오도 함께 없어져야 한다.
증오가 새로운 세상을 대체할 수는 없다.
새로운 세상은 사랑과 믿음으로 새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공포와 방조에 짓눌려 감겨있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려,
나와 남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다시 싹 틔워,
너와 내가 처음부터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Evey는 사랑이고 믿음이다.
Evey는 힘겹고 어렵게 사랑과 믿음에 눈을 떠야 할 당신과 나이다.

V가 처음 모습을 보인 건 1981년 영국에서이다.

그 시절 영국은 1979년 총선거에서 보수당이 승리하면서 수상의 자리에 오른 마거릿 대처가 혹독한 밀어붙이기로 사회 전반을 휘몰아가던 중이었다.

그녀는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엄격한 도덕과 질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누진세를 폐지하여 긴축재정을 편성하면서 복지예산을 대폭 삭감하였고 거의 모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였다.

이러한 정책 실행에 따른 사회적 반발이 커지자 그녀는 1982년에 느닷없이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을 유발하여 국면 전환용으로 삼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노동조합과 끊임없이 대립하여 무력화 시켜나갔는데, 그녀의 재임기간 중 영국 내 최대 노조였던 석탄노조는 거의 해체에 이를 정도로 무참히 깨졌다.

경제부흥을 기치로 집권 11년 동안 공공분야에 대한 국고지원 대폭 삭감, 복지예산 대폭 축소, 공기업 민영화, 노조 무력화 등을 몰아붙이며 “철의 여인”이라 불렸던 그녀는 1990년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그녀에 대한 보수당 내의 강력한 반발로 물러나게 된다.

V는 대처의 집권 초기에 “대처리즘”의 음산하고 잔인한 내음을 감지한 Alan Moore와 Dave Lloyd의 만화를 통해 나타났다. 그리고 7년 동안 10권 분량의 작품 속에서 V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공포와 증오로 대체된 사회에 대한 복수(Vendetta: 복수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를 감행하였다.

V의 출현 배경에 대해 Alan Moore는 1988년 캐나다 판 “V for Vendetta”의 서문 속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It’s 1988 now. Margaret Thatcher is entering her third term of office and talking confidently of an unbroken Conservative leadership well into the next century. My Youngest daughter is seven and the tabloid press are circulating the idea of concentration camps for person with AIDS. The new riot police wear black visors, as do their horses, and their vans have rotating video cameras mounted on top. The government has expressed a desire to eradicate homosexuality, even as an abstract concept, and one can only speculate as to which minority will be the next legislated against. I’m thinking of taking my family and getting out of this country soon, sometime over the next couple of years. It’s cold and it’s mean-spirited and I don’t like it here anymore.”

“이제 1988년입니다. 마가릿 대처는 수상 3선 임기에 들어섰고 깨어지지 않을 보수의 리더십은 다음 세기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신념에 차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막내 딸은 일곱 살이 되었고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에이즈 환자 격리수용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기사화하고 있습니다. 새로 조직된 시위진압 경찰과 그들의 말은 검은 투구를 쓰게 되었고 그들의 차량 꼭대기에는 회전하는 비디오 카메라가 달리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비록 추상적 개념이긴 해도 동성애자를 근절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으며 다음 표적은 아마도 소수민족이 될 듯합니다. 나는 이, 삼 년 내에 우리 가족을 데리고 이 나라를 떠나려 생각 중입니다. 이 곳은 춥고 잔인한 기운이 가득하여 더 이상은 있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Alan Moore의 소회는 Evey가 살아가는 세상만큼이나 큰 공포와 증오가 짓누르고 있던 1980년대 당시 한국의 현실에 대입하여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 지금은 2008년. V는 1981년의 우리가 아닌 2008년의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1981년의 우리에게 V의 메시지가 공포를 이겨내는 증오의 힘과 공포의 원천에 대한 복수를 전하는 거라면, 2008년의 우리에게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믿음을 전하지 않을까.

암울했던 시절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부정되던 공포를 이겨내고 증오의 힘을 모아 원천을 타격했던 동력이 Vendetta(복수)였다면, 이제 그 V는 사랑과 믿음을 원천으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내는 승리의 Victory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브이 포 벤데타의 엔딩,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


영진공 이규훈


잡담.
1.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Guy Fawkes는 실존인물이다. V가 쓰고있는 가면도 Guy Fawkes 가면이다. 그는 카톨릭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는 제임스 1세를 암살하고자 1605년 11월 5일에 의회 건물 지하에 폭약을 설치하고 도화선에 불을 붙이려 했으나 일당 중 밀고자의 밀고에 의해 현장에서 붙잡혔고 얼마 후 처형되었다.

2. 원작 속 Norsefire 집단의 구호는 “Strength Through Purity, Purity Thorough Faith(국가의 힘은 순결성에서, 순결성은 종교적 신념에서)” 이지만 영화에서는 “Strength Through Unity, Unity Through Faith(국가의 힘은 단합을 통해, 단합은 종교적 신념을 통해)”로 나온다.

<다즐링 주식회사> – 인생,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온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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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 감독의 다섯번째 장편 <다즐링 주식회사>는 2001년작 <로얄 테넌바움>에 이어 국내에서는 두번째로 정식 개봉된 작품입니다. 2004년작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은 빌 머레이가 주연을 맡으며 적잖은 기대를 모았었지만 결국 정식 개봉을 하지 못하고 DVD로만 출시된 바가 있습니다. 낯익은 유명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스 앤더슨의 작품들은 지극히 소수 취향의 영화로만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번 <다즐링 주식회사>도 오웬 윌슨, 애드리안 브로디와 같이 잘 알려진 배우들을 앞세운 작품임에도 모 멀티플렉스의 인디영화 전용관 3군데에서 지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상영될 뿐입니다.

그렇다고 웨스 앤더슨의 영화가 난해한 내용을 다루거나 지나치게 독특한 표현 방식을 사용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선호도에 따라 다소 지루한 감을 줄 수는 있으나 코미디와 가족 드라마의 범주를 결코 벗어나는 일이 없는 것이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입니다. 가족의 발견과 성장을 주제로 세련된 유머 감각을 구사하면서도 6 ~ 70년대 포크 음악과 슬로 모션을 적절히 사용하며 인상적인 ‘영화적 순간’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단순한 코미디 영화 그 이상의 뭔가가 더 있지 않겠냐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면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대중적인 감각으로부터 다소 거리가 먼 작품들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 웨스 앤더슨 영화의 딜레마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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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즐링 주식회사>은 Part 1으로 명명된 13분짜리 단편 <호텔 슈발리에>로 시작됩니다. 파리의 호텔방에 처박혀 한달째 머물고 있는 잭(제이슨 슈왈츠먼)이 헤어진 애인(나탈리 포트먼)과 재회하는 이야기입니다. 짧은 단편이지만 일찌기 <로얄 테넌바움>에서 선보였던 디테일과 극적인 감수성을 다시 한번 응축해서 보여주는 작품이 <호텔 슈발리에>라고 생각됩니다.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등장해 남자 여럿 잡아먹을 듯한 도발적인 매력을 선보이는 나탈리 포트먼도 이채롭지만 그 앞에서 자궁 회귀본능을 달래는 콧수염 기른 제이슨 슈왈츠먼은 <로얄 테넌바움>에서 얼굴의 털을 다 밀어버린 채 손목을 긋고 말았던 리치 테넌바움(루크 윌슨)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 합니다. 인도 출신의 영국 가수 피터 사르쉬테트(Peter Sarstedt)의 69년 히트곡 Where Do You Go To (My Lovely)를 들으며 호텔의 발코니로 이동하는 두 사람의 마지막 슬로 모션은 웨스 앤더슨 영화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전형적인 ‘영화적 순간’의 재현입니다.

<다즐링 주식회사>의 본편은 아버지가 죽은 후 1년만에 만난 세 형제가 수녀가 된 어머니(안젤리카 휴스턴)를 찾아 인도를 여행하는 로드 무비입니다. 고용인이나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나 여성들과 자기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세 형제는 아직 미성숙한 소년들에 불과합니다. 이런 남자 주인공들의 면모는 웨스 앤더슨 영화에서 줄기차게 대물림되고 있는 공통 유전인자라고 할 수 있는데, 전작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노년이 되어서도 유소년의 내면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던 아버지들이 부재하다는 사실입니다. 그와 유사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빌 머레이의 출연이 첫 장면에서 다즐링행 열차에 탑승하지 못하고 이내 사라지는 것으로 처리됨으로써 <다즐링 주식회사>의 내러티브는 동세대의 인물들만을 남겨놓는 한층 축약적인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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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세 남자의 인도 여행은 어찌보면 세상살이의 진짜 쓴 맛이라곤 한번도 경험해본 일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법한 부잣집 철부지들의 성장담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명품 여행가방 풀세트를 들고 기차를 향해 뛰고 또 올라타는 우아한 슬로 모션의 반복이라니요. 거의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에 가깝던 주인공들이 열차 밖에서 극적인 경험을 하게 되고 과거의 공유된 기억을 떠올리며 관계를 복원하는 모습은 대부분의 로드 무비와 성장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장르적 컨벤션에 가깝습니다. 자신들을 버리고 왜 떠났느냐,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왜 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어머니는 대사가 아닌 보여주기1)를 통해 세 아들과 관객들에게 화답합니다. <다즐링 주식회사>는 웨스 앤더슨 영화의 기존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친숙하고 명확한 방식으로 주제를 앞뒤 딱 맞게 요약 정리하는 상당히 대중적인 화법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다지 새로울 건 없지만 불변의 가치를 지닌 보편적 깨우침을 전달하는 영화가 <다즐링 주식회사>입니다. 주연급 배우들이 조연으로서 대거 참여해왔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에는 애드리안 브로디만이 새로 참여해 오웬 윌슨이나 기타 단골 배우들과의 순도 높은 케미스트리를 선보입니다. 주요 등장 인물들의 숫자가 적절하고 내러티브 또한 전형적이라 할 만큼 기승전결이 맞아 떨어지는 대중친화적인 작품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이제껏 보여줘왔던 웨스 앤더슨 영화의 스타일 상의 개성은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참에 <다즐링 주식회사>를 출발점 삼아 웨스 앤더슨 영화들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도 썩 괜찮은 ‘웨스 앤더슨 월드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잡한 분석과 인용을 필요로 하는 소수 취향의 영화가 아니라 누구나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한 보편적인 요소들에 좀 더 집중해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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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소 장황할 수가 있는 대답을, 그리하여 작품 전체를 망쳐버릴 수도 있는 부분을 하나의 초현실적인 롱테이크로 펼쳐보이는 수법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차라리 침묵하라”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 ~ 1951)의 통찰을 떠올리게 합니다.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은 언어적 표현 대신 ‘보여주기’의 방법을 통해 전달이 가능하다고 했던 바, <다즐링 주식회사>의 이 장면이야 말로 형이상학적 주제를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삽입된 친절한 설명문이라 하겠습니다. 누구나 각자의 객실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지만 삶이란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나’가 되기 위한 하나의 여정이란 깨달음을 웨스 앤더슨은 이 한 장면으로 통해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논리적인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대중적인 소통의 한 방식이 아니던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