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을 가진 사나이”, 무릇 짬뽕에는 물을 타지 말지어다

 

 


 


 



 


 


 


철권을 가진 사나이 (The Man With The Iron Fists, 2011)


 


아빠의 복수를 위해 길을 떠나는 아들내미, 업소에 일하는 여친을 빼내려고 닥치는대로 돈되는 일을 받았다가 두 팔이 잘려나가는 대장장이, 중국 술집에서 음탕하게 놀고있는 정체모를 배 나온 유럽 아저씨.


 


이들 삼인방이 펼치는 정의와 복수의 액션 활극. 과장된 액션, 피와 살이 난무하는 B급 취향이 흘러 넘쳐 강을 이루고 있는 지극히 타란티노 형님스런 영화다. 그런데 감독, 각본, 조연까지 RZA라는게 소소한 함정이라는 거.


 


못하는 게 없는 힙합 용사 르자(RZA)와 더불어 루시 리우, 러셀 크로우, 몸짱 레슬러 형님 바티스타 등 화려한 출연진은 나름 눈을 즐겁게 하지만 정작 영화는 긴장감도, 시원함도 없이 왠지 고무줄 늘어난 빤스처럼 축축 처지기만 한다. 등장 인물들의 갈등을 한껏 부풀려서 마지막에 한방에 터트리는 풍선장치 역시 시원찮기는 마찬가지.


 


 


 





사무라이와 힙합이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를 성공적으로 비벼놓은 명작


 


 





너무 젊은 나이에 하늘로 올라가신 누자베스 형님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앞서 일본 애니메이션 ‘사무라이 참프루’에서 선보였던 걸작 힙합활극이 있기에 이러한 아쉬움이 더 커진다.


 


힙합 프로듀서 누자베스가 참여했던 ‘사무라이 참프루’는 사무라이에 힙합을 접목시키며 매우 독특하고 역동적인 작품을 창조해내었다. 특히 감독은 누자베스의 음악을 그냥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는데 힙합의 비트와 합을 이루는 액션은 눈과 귀를 동시에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마찬가지로 ‘철권을 가진 사나이’에서도 힙합 프로듀서이자 가수인 르자가 참여했지만 안타깝게도 ‘사무라이 참프루’에서와 같은 효과는 발휘하지 못한 채 힙합의 비트는 허공으로 휘발되어 버린다.


 


타란티노가 어떤 생각으로 르자를 참여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배경음악 곳곳에 힙합을 깔아놓은 것을 보니 분명 무협 영화에 힙합적인 요소를 첨가한 하이브리드 짬뽕밥을 만들려 했던 것 같지만 그 결과물은 물 탄 짬뽕마냥 밍밍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래도,


 


 


 




 






 

 

포스터는 정말 주옥같구나~!


영진공 self_fish


 


 


 


 


 


 


 


 


 


 


 


 


 


 


 


 


 


 


 


 


 


 


 


 


 


 


 


 


 


 


 


 


 


 


디카프리오는 BB총으로 테러리스트를 잡는다???

 

-= IMAGE 1 =-


조만간 개봉할 영화 <바디 오브 라이즈>,
레오나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이고 러셀 크로가 조연, 그리고 감독은 리들리 스콧..
딴거 볼 필요 없이 위의 이름들 만으로도 저 같은 총덕들은 꼭 봐야 할 영화죠.
요즘 지하철 무가지들마다 이 영화에 대한 홍보 기사들이 넘쳐나는데
함께 실린 포스터를 “유심히”(-_-) 보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일단 포스터부터 보시죠.

네, 저 같은 인간들은 여기서 특히 디카프리오가 들고 있는 바로 그것!!!!! 에 주목한답니다.


바로 그것 !!!


클로즈업 !!!

근데, 이 권총의 정체가 모호합니다.
해머 없이 뒤가 각진슬라이드를 보면 글록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섬세이프티(엄지손가락으로 걸거나 해제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달려있군요.
글록은 방아쇠 빼고는 외부 안전장치가 전혀 없는 총인데 말입니다.
게다가 일반적인 권총치고는 덩치가 너무 큽니다.
뭐 데저트이글이나 그리즐리도 아닌데.
더욱이 가늠쇠는 슬라이드의 맨 뒤가 아니라 조금 앞에 있죠. 데토닉스처럼…
세상에 이런 권총이 있었나? 저 같은 총덕도 모르는 양산형 권총이라니…
그럼 이 녀석은 도대체 뭘까요?

여기서 다른 포스터를 한장 보시겠습니다.
외계인이든 뭐든 걸리면 전부 목을 꺾어버리시는 스티븐 시걸 옹께서 주연과 제작을 겸임하신 영화, <파이어 다운> (원제는 Fire down below) 입니다.
1997년에 개봉한 영화죠.

일단 이 순간에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지 않은 정석 그립을 보여주시는 시걸옹께 박수한번 치고, 스티븐 시걸이 쥐고서 인상쓰는 권총을 함 보세요. 아까 그 녀석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네, 사실은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같은 총입니다.

이 총은 실총도 아니고, 실총을 흉내낸 모형총도 아니며, 영화에 등장하는 SF건도 아닙니다. Marksman 이라는 이름의 미국에서 취미삼아 비비탄(미제 비비탄은 제가 알기론 납탄)이나 다트, 펠렛 같은 것을 쏘는 공기총이죠.


포스터에 등장한 총, 마크맨


섬세이프티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그림, 이걸 보면 정작 이 녀석에겐 이게 섬세이프티가 아닌듯.


비비탄은 여기다 넣습니다.

구형은 이미 단종되었고 요즘에는 약간 고쳐서 신형이라고 파는 듯…


국내에도 소장한 사람이 있습니다. 디시 총갤의 키튼님 사진…

왜 이 공기총이 영화 포스터에 등장하는지(그것도 10년 간격을 두고)는 모르겠습니다.
제 추측에는 두 영화 다 포스터 사진을 같은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 스튜디오에서는 뭔 총을 쥐어줄 지 애매한 경우에 이 총을 쥐어주는 모양이죠.
저 같은 일부 괴상한 관객을 제외하고는 이런 물건에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뭔가 큼직하니 있어보이는데다 대충 이총 저총 어설프게 닮은 이 녀석이라면
무난히 넘어갈 수 있을테니까요.


애먼 총 들고 사진찍느라 수고하신 디카프리오 군

만약 그렇다면 이 놈은 다른 영화 포스터에도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스튜디오를 거쳐간 포스터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죠.
혹시 다른 곳에서 이 녀석을 보신 분이 계시면 제보해주세요.

참고로, 본 영화에선 저런 괴상한 물건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디카프리오는 글록을 쓰는군요. 참 성능 좋은 총이죠…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글록, 크기로 보아 19나 23 같은 컴팩트 모델인듯…


영진공 짱가

덧1) 이 영화 미국에서 별로 흥행이 안되는 모양입니다.
요즘같은 경제위기 시대에는 총질보다는 판타지나 코미디가 나을지도 모르죠.

덧2) 국내 인터넷에 공개된 포스터에는 또 들고 있는 총이 다릅니다. 뒤에 해머도 보이고 총도 좀 작아졌죠.  아무래도 포샵질을 한 듯 … 사실 이런 식의 포샵질은 꽤 많습니다.  일단 주연배우 얼굴만 찍고 권총든 손 사진은 딴걸 가져다 붙이는 경우가 종종있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덧3) 시걸의 영화 <파이어다운>에는 미드 팬들에게 꽤나 익숙한 얼굴이 등장합니다.


엇, 이 얼굴은?


바로 CSI의 캐서린 반장님이죠. 이 양반, 10년 전 모습이 더 나이들어보인다는…

<3:10 투 유마>, 두 남자의 멋진 아빠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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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전작들 가운데에는 안젤리나 졸리와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처음 만나는 자유>(1999), 멕 라이언과 휴 잭맨의 멜러 <케이트 & 레오폴드>(2001), 존 쿠잭의 스릴러 <아이덴티티>(2003), 호아퀸 피닉스와 리즈 위더스푼이 주연한 컨츄리 싱어 존 R. 캐쉬의 전기 영화 <앙코르>(2005)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나가는 타입이라기 보다는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화법으로 탄탄하게 영화를 만들어내는 젊은 장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10 투 유마> 역시 특별히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것은 발견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만 감상을 방해받는 일 없이 드라마를 잘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안정감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3:10 투 유마>의 안정적인 만듬새에 크게 기여하고 것은 역시 좋은 배우들입니다. 포스터를 양분하고 있는 러셀 크로우와 크리스챤 베일의 연기 대결이 볼만합니다.

엘모어 레오나드의 단편을 57년에 이어 두번째로 영화화한 <3:10 투 유마>는 삶의 터전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댄 에반스(크리스챤 베일)과 법이고 뭐고 나 하고 싶은 대로 산다는 냉혈한 벤 웨이드(러셀 크로우)의 짧은 대결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철도회사의 현금 수송 마차를 털고 난 뒤에 벤 웨이드가 체포되고 그를 유마행 3시 10분 열차를 태워보내 법정에 세우려는 호송대에 당장의 200달러가 아쉬운 댄 에반스가 자원합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산적 두목 벤 웨이드와 몇 명의 호송대의 모습은 마치 강아지 몇 마리가 덩치 큰 사자를 끌고 가는 듯 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벤 웨이드는 처음 체포될 때처럼 여유를 부리다가, 때로는 그의 목을 노리는 다른 이들 때문에 번번히 발목을 잡히곤 합니다. 그리고 하이에나 같이 영악하고 잔인한 벤 웨이드의 부하들이 이들을 뒤쫓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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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 무비의 총 싸움 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것은 벤 웨이드와 댄 에반스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들이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힘겨움과 남자들 간의 유대입니다. 영화는 급기야 메타 픽션의 단계로까지 진화하며 댄 에반스의 무모한 도전극에 벤 웨이드가 그래, 기분 좋게 한번 도와준다는 식이 되어갑니다. 이들의 목표는 한 가지. 댄 에반스가 의로운 방법으로 돈을 벌어 가족의 행복을 지키고 아들들에게 모범이 되는 훌륭한 아버지로 남을 수 있도록 해주는 일입니다. 벤 웨이드는 법 질서를 무시하고 사람 목숨 귀한 줄을 모르는 살인자이지만 그렇다고 죄없는 약자까지 못살게 굴지는 않는, 한 마디로 강한 남성상입니다. 그림도 그리고 성경 구절도 외우는 독특한 면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반면 댄 에반스는 돈 많고 힘 있는 자들에게 시달리고 급기야 자기 땅을 빼앗길 처지이면서도 정직한 삶을 고집하는 두 아이의 아빠입니다. <3:10 투 유마>는 결국 댄 웨이드가 훌륭한 아버지로 남고 싶어 하는 소망의 가치를 벤 웨이드가 지지해주기로 하면서 극적인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이 집권한 지난 8년간의 헐리웃 영화들은 9.11 사태의 후유증에 시달려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존경 받아야 할 아버지상을 자주 강조해왔습니다. 샘 멘데스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로드 투 퍼디션>(2002)에서의 낯간지러운 마지막 나레이션이 그렇고 심지어 클린스 이스트우드 감독, 숀 펜 주연의 <미스틱 리버>(2003)는 실수와 불법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버지를 지지해줘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습니다. <3:10 투 유마>는 이제 내년 초가 되면 민주당에게 정권을 내놓아야 할 처지에 놓인 미국 공화당과 보수층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마지막 호소문처럼 보입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후대를 위해 최선을 다한 당신의 아버지를 기억해달라고, 그런 아버지상을 계속 지킬 수 있게 지지해달라는 소리 같습니다. 단순히 두 주연급 배우의 연기 대결과 남자들 간의 우정을 그린 이색적인 서부극이라고만 보는 건 좀 재미가 없는 듯 합니다. 어쩌면 시종일관 세련된 화법으로 극을 잘 이끌고 가다가 충직한 부하들을 자기 손으로 몰살시키는 두목님의 마지막 모습이 다소 황당하게 느껴져서 이렇게 고까운 눈으로 다시 보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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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ps. 최후의 결전을 앞둔 댄 에반스가 아들을 붙들고 상당히 오바하는 장면이 상당히 오바스럽게 찍혔는데요 그 뒤에 이들을 지켜보던 벤 웨이드의 모습이 잡힙니다. 댄 에반스의 ‘멋진 아빠 만들기’에 벤 웨이드가 동참해주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이었던 거죠. 기차역까지 가는 험난한 과정 중에 이건 정말 아니구나 싶었던 벤 웨이드가 메타 픽션에 해당하는 대사를 날리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아들에게 좋은 모습 보이는 것도 충분히 했으니 이제 그만 하자”는 거였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맡은 댄 에반스와 악당/죄수의 역할을 맡은 벤 웨이드 간의 무대 뒤 이야기였던 겁니다. 착한 일 하는 거 버릇될까봐 싫어한다더니, 풋. 멋진 놈입니다. 각자의 역할과 입장을 잠시 떠나 같은 인간으로서 소통할 수 있다는 건 역시 보기 좋습니다. 이런 까뮈스러운 기회와 희망에 대한 믿음이 인생을 살만한 것으로 남겨주는 것 아닌가 싶어요.

리들리 스콧, <아메리칸 갱스터> – 미국식 자본주의의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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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부터 간지 폭발.
(우리나라의 조폭영화들을 포함해) 갱스터 영화들은 그들이 속하고 있는 사회가 어떤 폭력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장르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수많은 ‘걸작’들이 갱스터 영화라는 틀을 이용해 그 사회의 폭력적 구조를 폭로했으며, 나아가 그 사회가 기반하고 있는 물적 토대의 원리(즉 자본주의)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또한 어떻게 인간을 비인간화하는지 고발하며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곤 했다. 특히 미국의 갱스터 영화들은 종종 미국이라는 거대 근대국가의 탄생부터가 철저히 폭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또한 지금의 ‘거대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얼마나 폭력적인 자본주의를 운용하는가를 고발하는 영화들이기도 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최근작 <아메리칸 갱스터> 역시 그러한 갱스터 영화의 미덕을 충실히 수행한다. 다만 이 영화가 새로워 보이는 것은 기존의 영화와 정반대의 전략을 취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갱스터 영화들이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부와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의 이면에 놓인 자본주의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면, 이 영화는 자본주의적 실천의 화신이라 할 만한 인물을 통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이것의 폭력성을 은유적으로 제시한다.


이른바 ‘기업 CEO 같은’ 갱을 보여주는 <아메리칸 갱스터>는 마약 시장이라는 일종의 불완전 경쟁 시장에 후발주자로 뛰어든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가 기존 갱들처럼 총과 칼에 의한 협박과 살인과 갈취가 아닌,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지극히 합리적인 ‘기업활동’으로서 마약의 제국을 건설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생산자 직거래와 대량 구매로 원가를 절감하고 운송비를 절약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고, 이로써 자신의 경쟁자들보다 훨씬 좋은 상품을 훨씬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이른바 ‘공급 경쟁’의 원칙을 구현해낸다. 이미 거대 기업의 체인망 확대와 대형화 등 후기 자본주의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던 60년대 후반의 뉴욕에서 루카스의 사업적(!) 스승인 범피 존슨(클레어런스 윌리엄스 3세, 이 캐릭터는 <코튼 클럽>과 <후드럼> 두 영화 모두에서 로렌스 피시번이 연기한 바 있다)은 이 후기 자본주의적 현상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지만, 루카스는 후기 자본주의 하에서 기업이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결국 이런 대량 유통을 통해 시장의 절대 지배력을 장악하고 독점 공급자의 위치에 오른다.


애초에 지역 판매에 만족하고자 했던 그가 일종의 ‘전국 유통 대행’에 해당하는 계약을 맺고 판매처를 전국으로 확장한 것은 꼭 그의 사업적 야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시장 독점을 형성하게 된 것에 대해 기존의 마약 도매상들과 마찰을 빚고 있었고(여기에 그의 피부색은 더욱 반발감을 가져왔다), 그는 이것을 돈 카타노가 이끄는 이탈리아 갱과의 제휴를 통해 어느 정도 완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굳이 마르크스의 탁월한 예견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후기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독과점, 혹은 대형화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브랜드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상표권 분쟁’도 겪는다. 애초 이 영화의 모태가 된 마크 제이콥슨의 기사 ‘거물의 귀환(The Return of Superfly)’를 읽어보면, 당시 헤로인은 루카스가 팔았던 블루매직 뿐만 아니라 다종다양한 ‘브랜드’를 달고 거리에서 팔리고 있었다고 하며, 마크 제이콥슨이 열거하는 브랜드만 해도 얼추 열 개가 넘는다. 다만 자신의 상표를 도용한 니키 반즈(큐바 구딩 주니어)를 찾아가 항의하는 프랭크 루카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다소 ‘나이브’한 인식을 갖고 있던 당시의 다른 이들과 달리 그가 현대적인 의미의 브랜드 마케팅에 있어서도 매우 선구적인 안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는데, 사실 그가 10년이 훨씬 넘게 뉴욕의 뒷골목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본주의의 원칙, 특히나 미국에서 1960년대에 발흥한 신자유주의의 기본 원칙을 충분히 인식하고 충실하게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 추종자들이 ‘자본주의의 승리’라며 칭송할 만도 했던 이 모범적이고 능력있는 사업가 프랭크 루카스에게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그가 취급한 상품이 ‘마약’이었다는 사실뿐이다. 만약 그가 마약이 아닌 다른 합법적인 상품을 취급했더라면 흑인 최초의 거대기업의 CEO가 될 수 도 있었겠지만, 그가 범죄의 세계에서 마약왕이 된 것은 시대가 그의 인식을 뒤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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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형 갱스터 - 현대 미국 자본주의의 모습.

한편으로 그가 활동하던 시대가 60년대에서 70년대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 시기가 미국의 격동기였다는 사실은 프랭크 루카스를 좀더 전설적인 인물로 만들어준다. 이 시기는 베트남전과 이에 대한 반대의 시위가 들끓으며 히피 정신이 널리 퍼지는 한편 격렬한 시민권 투쟁의 시대이기도 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베트남전의 진짜 목적은 ‘석유, 고무, 주석’이었으며, 미국의 경제는 베트남전이 뜻밖에 장기화를 겪으면서 전쟁 전에 회복했던 경기와 전쟁 초기에 누렸던 유례없는 호황이 장기적인 침체로 이어지게 되는데, 당시 미국의 경제수치가 바닥을 치고 있었음에도 실제로 피부에 느껴지는 경기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면 이것은 프랭크 루카스를 위시해 갱들이 이끄는 지하 세계의 경제가 그만큼 활발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랭크 루카스가 이끌던 암흑 경제는 베트남 종전 후에 불어닥칠 급격한 경기침체를 어느 정도 완만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한마디로 표현해 ‘언제나 전쟁으로 먹고 살았던’ 미국의 경제는 베트남 전에 있어서도 꼭 석유, 고무, 주석을 위한 군수물자 뿐 아니라 (비록 미국 정부가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헤로인에 의한 경제가 되는 셈이기도 한데,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바로 ‘미국식 자본주의’, 나아가 ‘미국식 제국주의’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랭크 루카스가 그토록 오랫동안 미국의 암흑경제를 주름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마틴 루터 킹과 말콤엑스 등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시민권 투쟁은 한편으로 흑인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을 폐지하고 흑인 자신의 주체성과 자의식을 일깨우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편견과 차별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일시적으로는 반감에 의한 편견이 오히려 더 강화될 수 있다. 루카스의 경우 물론 그가 범피 존슨의 사업철학을 따라 워낙 할렘가를 잘 챙겼고 또 한편으로 불필요한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 옷차림과 행동거지에 있어 워낙 수수한 검소함을 이어나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의식을 찾기 시작한 흑인들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이러한 시민권 투쟁의 일련의 혜택을 입었을 뿐 아니라, 그가 흑인이기에 여전히 차별받는 바로 그 상황에서도 오히려 이득을 보았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마약왕으로 암흑경제의 주축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흑인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그 편견 덕이기도 했다. 그 역사적인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지어의 경기장에 그가 화려한 옷차림으로 가장 좋은 좌석에 앉아 비로소 리치 로버츠의 주목을 끌었을 때조차도, 리치 로버츠는 그가 암흑경제의 바로 그 ‘거물’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표적이 된 것은 리치 로버츠가 비로소 편견을 버리고 사건에 접근했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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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의 그림 뽑아내는 솜씨는 과연 예술.

아이리쉬 갱부터 이탈리아 갱(이른바 ‘마피아’), 그리고 흑인 할렘가의 마약왕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지하세계를 주름잡았던 갱의 계보에 수많은 전설적인 갱들이 있었음에도 프랭크 루카스의 이야기를 하면서 비로소 ‘미국의 갱스터’라는 보편 명사를 쓴 이유는, 아마도 프랭크 루카스가 보여준 행적이야말로 지극히 현대적인 미국의 후기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취급하는 상품의 윤리성을 따지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지금 미국이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영토는 프랭크 루카스 시절의 뉴욕 할렘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여기에서 한미 FTA를 들먹이는 건 분명 ‘오바’이지만, 영화의 제목에서 American의 n을 떼고 그 자리에 쉼표(,)를 붙여보는 장난을 쳤을 때 도출되는 새로운 의미에 새삼 한기를 느끼는 것은 그리 ‘오바’인 것 같지 않다.


영진공 노바리



ps1. ‘화목한 가정의 범죄자’와 ‘가정이 파탄난 형사’의 구도는 누아르 영화에서 꽤 오래된 농담(!)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한발 더 나간다. 추수감사절, 루카스네가 온 가족이 모여 풍성한 추수감사절 파티를 벌이는 장면 바로 뒤에, 콘플레이크를 뿌려 혼자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리치 로버츠의 모습이 붙는다. 그런데 더 가관인 건, 이 바로 뒤에 붙는 트루포 형사의 모습. 리치보다도 더 초라하게 혼자 밥을 먹던 그는 산 칠면조와 폭탄 선물까지 받는다.


ps2. 단순한 대화장면마저 박진감 넘치는 리들리 스콧씩 화면 짜기. 주인공 클로즈업만 잡았다 하면 화면이 썰렁해지는 한국영화들을 보다가 이 영화를 보니 눈이 다 맑게 씻기는 듯한 느낌이다. 두 사람의 대화 씬에서 액션-리액션-액션 씬으로 끊어지는 컷들을 잘 만들기 위해 한국 감독들과 배우들은 제발 이 영화의 대화 씬들을 면밀히 연구해 보시기 바란다.


ps3. 덴젤 워싱턴, 아주 신이 났더라. 하긴 그가 이제껏 지나치게 모범적인 이미지로만 나온 것도, 뒤늦게야 비로소 악당 역으로 선회하면서도 퍽 조심스러웠던 것도 그에게 ‘흑인 이미지 전체’에 대한 막중한 부담과 책임감이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야심이 있는 이라면 지독한 악당 역을 해보고 싶은 게 당연한 마음인데, 그간 덴젤 워싱턴이 그토록 모범적이고 반듯한 역할만 해오면서 ‘너무 모범생 이미지’ 소리 들었던 것도 결국은 흑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 때문이고, 배우 본인은 정작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했겠나 싶다. 이 영화에서 너무 신나서 완전 날아다니는 덴젤 워싱턴을 보노라니, 이 배우가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지 새삼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게 된다.

<아메리칸 갱스터>, 갱스터 영화의 선 굵은 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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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갱스터>는 60년대 말부터 70년대에 걸쳐 활동한 뉴욕 할렘의 마약왕 프랭크 루카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의 성공과 몰락을 그리는 전형적인 범죄물과 그를 체포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공직사회 전반에 만연해있던 마약 커넥션까지 소탕해낸 청렴한 형사 리치 로버츠(러셀 크로우)의 수사물을 병렬하며 진행됩니다. 프랭크 루카스의 이야기가 <스카페이스>(1983)를 연상시키는 갱스터 영화의 전형성을 보여준다면 리치 로버츠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비타협적이었던 나머지 파트너와 가족을 모두 잃어버리면서도 그런 강직함을 기반으로 ‘역사적인 전기’를 일궈내는 영웅담에 가깝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과 스티브 자일리언의 각본은 원안에서 비중이 적었었다고 알려진 리치 로버츠의 역할을 키우는 동시에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프랭크 루카스의 일대기와 병렬 배치시키는 방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갱스터 장르의 전형성을 답습하지도 않고 기존 걸작들의 꽁무니를 뒤쫓아가는 듯한 모습도 모두 피해나가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일 수 밖에 없는 두 인물이 어떤 점에서 교집합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마침내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두 인물의 이야기와 함께 제시되는 또 하나의 줄거리는 다름아닌 베트남전입니다. 태국과 베트남 밀림의 헤로인 생산지로부터의 직거래와 미군 수송기를 이용한 물류 라인의 확보, 순도 100%의 마약을 기존 제품 보다 싼 가격에 시장에 내놓으면서 성공을 일군 프랭크 루카스의 사업 방식 자체가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가능했었던 만큼 미국의 패전과 철수는 곧 프랭크 루카스의 몰락을 예고합니다. 이를 위해 영화는 TV 방송을 통해 전달되는 베트남전 관련 뉴스를 지속적으로 삽입합니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폭력성을 재확인시키기도 하지만 미국이 해외에서 벌이는 크고 작은 전쟁들과 첩보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갱스터 영화로서 미국 사회의 내면적 초상화를 그려내는 데에 성공했던 작품들은 많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미국의 전쟁 경력까지 건드려주는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이제 종전 단계로 치닫고 있는 이라크 전쟁에 관한 비판적 시각으로서도 충분히 유효성을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갱스터 영화는 처음이지만 리들리 스콧이 전쟁 영화를 자주 만들어왔고 현재의 미국에 대해 완곡하게나마 자기 목소리를 담아왔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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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갱스터>가 굉장히 잘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미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작품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남는데요, 그것은 프랭크 루카스와 리치 로버츠가 마침내 피의자와 기소인의 신분으로 대면했을 때 나온 리치 로버츠의 대사 때문입니다. “당신과 같이 성공한 흑인은 곧 진보를 의미한다. 진보(Progress)는 기득권층의 해체를 의미하지. 당신이 법정에 서게 됨으로써 모든 것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거야.” 이 대사는 막대한 뇌물로 리치 로버츠를 회유하려던 프랭크 루카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이번에는 오히려 리치 로버츠가 프랭크 루카스를 회유해 마약 커넥션에 연루된 경찰 조직을 소탕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에 프랭크 루카스와 리치 로버츠의 양대 ‘똘끼’가 의기투합, 당시 미국 공직사회에 만연해있던 부패를 소탕하고 관객들에게는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진보는 기득권층의 해체를 의미한다”는 대사가 주는 울림1)은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그 자체로도 이미 훌륭한 작품이지만 프랭크 루카스의 등장으로 기존의 기득권층이 붕괴하고 반발하는 모습 만큼은 다소 피상적으로 다뤄진 것이 아니냐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프랭크 루카스는 자기 생존과 부귀영화를 위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폭력배이기도 하지만 선배 세대와는 다른 접근 방식으로 성공을 일궈낸 인물로 묘사됩니다. 15년간 모셨던 보스는 생산자 직거래를 앞세우고 가게 주인은 커녕 종업원 얼굴도 보일락말락 하는 대형 할인점의 득세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프랭크 루카스는 그와 같은 새로운 사업 방식을 마약 시장에 도입했습니다. 기존의 유통 방식을 깨고 거의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누렸기 때문에 기존의 마약 커넥션에 연루된 자들은 몰락하거나 일자리를 잃을 수 밖에 없었죠. <아메리칸 갱스터>는 프랭크 루카스과 그 일당의 폭력적인 측면 보다 개혁적인 경영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쪽에 비중을 두는 데다가 영화의 절반은 리치 로버츠의 이야기에 할애하느라 “진보와 개혁이 기존 질서를 허물고 기득권층과 갈등하는 양상”를 세부적으로 묘사하는 데에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런 부분은 <아메리칸 갱스터>의 흠결이라기 보다는 이후에 만들어질 또 다른 갱스터 영화들에게 남겨주는 숙제와 같은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 마에스트로로서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리들리 스콧의 연출이나 감독 보다는 각본에 출중한 재능을 보이는 스티븐 자일리언의 시나리오, 덴젤 워싱턴2)과 러셀 크로우를 비롯한 배우들의 흠잡을 데 없는 캐릭터 연기, 그리고 촬영과 배경 음악의 사용 등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은 <아메리칸 갱스터>는 다사다난했던 2007년의 마지막 개봉영화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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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여 정부가 갱스터 집단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집권을 하자마자 탄핵을 당하고 결국 이번 대선을 통해 빽도를 하게된 우리나라의 동시대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관점이란 생각에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저는 심장이 벌렁벌렁했더랬습니다. 스쳐지나가는 묘사나 대사로만 끝내지 말고 그런 갈등 상황을 좀 더 부각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럼에도 프랭크 루카스와 리치 로버츠 모두 기존 질서를 거부함으로써 성공과 어려움을 경험하고 마침내 두 인물이 의기투합하여 일견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냈다는 내러티브의 구성에는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습니다.

2) 9.11 테러 직후 사회 불안을 해소하는데 일조하고자 했던 헐리웃에 의해 <트레이닝 데이>(2001) 같은 작품으로 얼떨결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덴젤 워싱턴입니다. 그가 아카데미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충분한 배우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입증이 되었음에도 그와 같은 정치적 맥락 때문에 신통찮은 영화로 상을 받는 모습이 좀 껄끄러워 보였는데요 이번 <아메리칸 갱스터>는 흑인 배우로서 처음 2회 수상의 영광에 도전하기에 충분한 작품이고 또 그런 연기를 보여주었다고 생각됩니다. 남북 전쟁 당시의 흑인 부대의 이야기를 다룬 <영광의 깃발>(Glory, 1989)에서 처음 본 이후로 계속 좋아해왔던 배우였지만 최근엔 다소 매너리즘에 빠졌는가 싶었는데 이번 영화는 덴젤 워싱턴의 복귀라고 해도 충분한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너무 만족스러웠습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