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날의 애니메이션,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를 거쳐 현실세계로



백희나 작가의 베스트셀러 동화 “구름빵”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서 TV에서 하네요. 우연히 휴일에 채널을 돌리다가 KBS에서 하는 것을 보고 내용도 너무 좋아서 한참을 홀린듯이 들여다 보고 있었어요.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가족”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나온건가 하고 감탄했죠.

내 어린날의 디스토피아
전 아이가 “뽀로로”, “선물공룡 디보”같은 한국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라는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어요. 저의 어린 시절이 ‘모성결핍에 허덕이는 주인공’들만 가득한 일본애니메이션으로 추억되는게 정말 싫었거든요. 제목부터 아주 단적인 “엄마 찾아 삼만리”, 아이 두명이 엄마를 찾아다니는 “꼬마 자동차 붕붕”, 어른들이 도와줄 수 없는 4차원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상한 나라의 폴”, 모성이 부재한 디스토피아에서 유사모성의 부족한 사랑에 대해 부채의식을 느끼며 부재한 모성에의 대체재로써 ‘여신’을 옹립하려하는 ‘코난(부모 부재 상태에서 유사모성인 할아버지의 존재. ‘나나’를 모성대체의 여신으로 세우려고 하는 시도)’, ‘플랜더스의 개(부모 부재 상태에서 유사모성인 할아버지의 존재. 끝없는 부채의식 때문에 노동으로 할아버지께 갚으려고 하는 네로. ‘아로아’를 모성대체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는 시도)’를 유년시절에 보고 자랐다면, 청소년기에 본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나 ‘바람의 계곡의 나우시카’도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요. 일본 애니메이션들에서 주인공들은 세계를 바꿀 수 없는 무기력하고 작은 존재이면서, 이전 세대가 망쳐놓은 디스토피아에서 모성의 부재를 괴로워하며 헤매이죠.

아이의 어린날의 유토피아
그런데 한국 에니메이션들이 나오면서 판도가 달라져요 “뽀로로”나 “디보”같은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디스토피아 같은 세상은 온데간데 없고, 어른이 없는, 그래서 아이들만 있는 세상에서 그들 끼리 꼬뮨(Commune)을 이루고 유토피아적 삶을 추구하지요. 누구도 그들을 통제하지 않고, 누구도 그들을 가르치지 않아요. 서로 느끼고 행동하며 약자 (몇살 어린 연소자 크롱, 몸집이 작고 이방에서 이주해온 해리)에 대한 배려를 배우지요. 아이가 무의식 깊숙히 디스토피아를 인식하게 되는 것 보다 서로 배려하는 꼬뮨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 훨씬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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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엔 유토피아 같은 현실 세계가 들어오기를
그러다가 신선한 충격을 준것이 바로 프랑스 애니메이션 “호야네 집” (까이유, Caillou). 호야네 집에는 Standard한 가정이 나와요. 주인공 호야를 중심으로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동생도, 옆집 아줌마도, 친구도 나오지요. 뭔가 결핍과 단절이 일어나지 않으면 에니메이션이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서로 배려하는 유토피아로도 얘기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됨을 본 후에,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애니메이션의 주제가 될 수도 있음을 보고 정말 감탄했답니다. ‘어른과 아이의 관계 맺음’이 기본적으로 부재한 우리나라에서 전 정말 “호야네 집”을 배운다는 느낌으로 보았습니다. (치로와 친구들도 표준 5인가정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들 끼리의 꼬뮨이지 현실에서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그려지지는 않아요. 또 차이가 있다면 치로의 아빠는 TV를 보고 신문을 보며 멋진 말만 해대지만, 호야의 아빠는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며 호야에게 세탁기의 작동원리를 얘기해주죠)

구름빵 … 역시 엄마와 아빠의 성역할이 고정적으로 그려져 있고, 어른과 아이의 관계보다는 아이들끼리의 이야기가 주요 내용이 되지만, 어떻게 어른들이 효과적으로 아이의 삶을 지원하는지, 어떻게 아이의 삶을 아껴주는지가 나오는 것 같아요.

한국 가족에 … 볕들날 있는 거겠죠?


영진공 라이



소녀시대 성희롱? 누가??

TV에 안티를 몰고다니는 쩌리짱이 있다면,
인터넷에는 안티를 몰고다니는 윤서인의 조이라이드가 있다.

이 양반 만화는 종종 논란을 일으키고, 그 논란만큼 주목을 받는다.

조이라이드가 까이는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그 근저의 원인은 하나다.

이 양반이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검열을 별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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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이 없으니 아무 생각없이 삼성 찬양도 하고,
땅박이 찬양도 하고, 그러다가도 주식 떨어지면 또 삐지기도 하고,
생각없이 일본 좋다고 했다고 돌맞고,
생각없이 기독교에 문제제기 했다가 돌 맞고 …
계속 그런 식이다.

일반적으로 초딩은 자기 생각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니까 그만큼 솔직하지 않던가.

당사자에겐 미안한 말일지 몰라도, 이 양반 만화를 볼때면 딱 그런 기분이다.
그림 세련되게 그리는 초딩의 만화를 보는 느낌 …

사실 이 양반의 진짜 장점은 그림이 깔끔하고 섹시하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그 생각들이 상당히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그렇게 걸러지지 않은 생각이 사람들에게 매우 잘 전달되니, 그만큼 그 반향도 크다.

이번에 소녀시대 만화도 딱 그런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은 초딩스러운 농담의 결과물이다.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00118190517291h9&linkid=4&newssetid=1352

문제는 그게 왜 문제냐는 거다.
<소녀시대>를 포함한 걸그룹이 대중에게 소비되는 방식에는 분명히 윤서인이 지적한 면이 있거든. 소녀시대를 순수하게 귀여운 아이들로만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남자가 있으면 나는 피식 웃을거다.
 
거기에 선정적인 요소가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지.

윤서인의 만화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조금씩은 들어있는,
하지만 별로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끄집어내서 신경쓰이고 거슬리게 만드는 만화다.

나는 그래서 이 양반의 만화가 재미있다.
그리고 이 양반이 좋다고 하는 것들은 정말 (그 양반식으로 보기엔) 좋을 거라고 믿는다. 전에 칭찬한 치약 같은 거는 정말 사보고 싶더라는.

어쨌든, 나는 윤서인의 조이라이드를 지지한다.

이 양반이 대단한 인격자여서도 아니고,
이 양반의 만화가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그저 이 양반이 정치가도 아니고, 공직자도 아니고 그냥 만화가이기 때문이다.

만화든 글이든 우리 문화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고 생각대로 쓰고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만화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은 할 수 있지만,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비판하는 건 좀 그렇다.
저 만화를 보고 “소녀시대 능욕”이라고 이름붙이는 거야말로 정말 오바 아닐까?
저 제목의 기사 찾으려 보니까 그런 제목의 야소설만 잔뜩 뜨더만 …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요즘 대중문화계를 보면 저런 식으로 찔러보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던가? 적어도 그건 이해되지 않느냔 말이다.

벌거벗은 임금님도 자기 부끄러운 줄은 알았는데,
왜 사람들은 화만 내는 걸까?

영진공 짱가

바쿠만(bakuman), 리얼리티 만빵의 만화작가 입문서



바쿠만(bakuman)


     오바 츠구미

그림  오바타 타케시

펴냄  대원


‘데스노트’ 콤비의 컴백작 이라고 할 수 있는 당 작품은 만화가의 길을 걷는 소년들의 도전기를 그리고 있다. ‘만화’가 ‘만화가’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리얼리티는 말해봐야 입 아픈 것일테고 등단 방법과 만화 연재의 결정, 잡지사의 내부구조 등 만화계 전반의 프로세서가 어떠한지 이야기 중간중간 상세히 소개를 하며 일본 만화계의 입문서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유치찬란한 연애구도에 일부 팬들의 원성이 구천을 떠돌고 있지만 만화를 읽고 나서는 왜 그들이 이렇게라도 연애이야기를 쑤셔 넣어야 했는지가 수긍이 되니 ‘사실 그대로 보여준다!’는 책 표지에 박힌 문구가 맞긴 맞나보다.  (30%를 차지하는 소녀 팬들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 )



 

현재 한일 동시 연재를 하고 있으며 단행본은 2권까지 출간되었다. 만화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작가나 작가지망생 혹은 소싯적 만화가를 꿈꿨던 이들이라면 그 재미와 긴장이 3.5배 증가할 것이지만 그와 더불어 열심히 그리고 있지 않는 자아를 돌아보며 자폐증에 빠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길~ 아무튼 세상 어딜가나 제일 무서운 것은 재능있고 실력있는 어린 것들이다.

영진공 self_fish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죠.

 

많은 사람들에게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은 여전히 생소하다. 그래서 종종 낮선 사람들과의 소개 자리에서 ‘아..그 직업은 뭐하는 거죠?’ 라는 질문을 받아서 대화를 이어가는 좋은 수단이 되곤 한다. 프리랜서라는 것과 ‘일러스트레이터’라는 그럴듯한 직업명 때문에 가끔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뭐 어느 직업이나 그렇듯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건 마찬가지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문화 쪽으로 돈 벌어먹기가 참으로 힘들고 척박한 짓이기에 뭔가 놀면서 돈 벌겠다는 생각으로 이쪽 일을 준비한다면 돈은 커녕 손가락의 깊은 맛만 느끼기 쉽상이다.



귀염둥이 이케와키 치즈루가 나온다!!

도쿄에 사는 4명의 처자들의 홀로서기 고통과 아픔을 그린 일본 영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는 일본판 ‘고양이를 부탁해’로 소개되며 국내에서도 젊은 여성들의 공감과 호응을 이끌어낸 좋은 작품이다. 재밌는건 일러스트레이터로 나오는 ‘토오코’ 역에 본 영화의 원작 만화의 작가인 나나난 키리코가 직접 나와 연기를 펼쳤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종영했던 모 드라마에서의 헐랭이 일러스트레이터완 달리 당 영화 속 일러스트레이터의 모습은 꽤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작곡가나 소설가 등 창작직업이 그러하듯 일러스트 작업도 고독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는데 마감일 마저 다가오면 정신줄을 놓기 일쑤다.

일을 끝냈는데 그 다음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공황상태에 빠진다.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회사원인 치히로와 프리랜서인 토오코의 관계였다. 쳇바퀴 도는 일상과 비전없는 회사생활에 시달리며 그저 남자 한명 잘 꼬셔서 시집가려는 치히로와 프리랜서이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토오코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치히로는 그런 토오코를 부러워한다.

“토오코 넌 그래도 좋은 편이야.
돈도 많이 벌지, 이름도 꽤 알려졌지 …
네 의견도 눈치 안보고 말할 수 있고

너는 모를거야. 나 같은 사람이 고생하고 불안하게 사는걸 …

네가 정말 부러워.”



아마 프리랜서를 하는 이들이라면 위와 같은 치히로의 말을 쉽게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란게 어딨겠는가. (아. 국개의원 빼고.) 불안정한 수입과 모든 문제를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프리랜서들이 행복하고 여유있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회사생활 힘든데 프리랜서나 해볼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난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프리랜서로 하려는 일이 정말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시작하세요. 하지만 단지 회사가 싫고 돈을 더 많이 벌 것 같아서 시작하려는 거라면  하지마세요. 다니기 싫은 회사를 다닐 때는 회사만 벗어나면 천국이었지만 하기 싫은 일을 프리랜서로 한다면 일상이 지옥이 될 테니까요.’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