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부활한 레슬러라는 이름의 슈퍼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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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에 대해서는 많은 좋은 글이 있지만 한 가지 언급되지 않은 것이 있어 첨언할 생각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들었던 의문인데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왜 <더 레슬러>를 차기작으로 선택했냐 하는 점이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파이>(1998)와 <레퀴엠>(2000)을 비롯하여 <천년을 흐르는 사랑>(2006)에 이르기까지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가장 현대적인 소재를 기교에 매몰되지 않는 스타일리쉬한 영상으로 연출해 첨단영화의 선두에 섰던 감독이었다. 그런데 <더 레슬러>는 그런 감독의 취향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영화로 보인다. 한물간 레슬러를 주인공으로 앞세운 구닥다리 소재에, 80년대 향수에 기댄 스타일, 결정적으로! 가슴과 눈물에 호소하는 휴먼드라마라니. 벤자민 버튼처럼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시간은 거꾸로 가기 시작한 건가.

잘 알려졌듯, 아로노프스키에게는 <레퀴엠>과 <천년을 흐르는 사랑> 사이 무려 6년이라는 공백기가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배트맨 이어 원>과 <왓치맨> 연출권을 따내려고 무진장 용을 썼는데 각각의 프로젝트는 크리스토퍼 놀란과 잭 스나이더에게 돌아가며 그는 장기간 슬럼프에 빠졌더랬다. 그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만든 <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흥행에서 재앙을 맞이했고 절치부심하며 선택한 영화가 바로 <더 레슬러>다. 그런 과정 때문일까, 개인적으로는 그가 히어로 영화에 대한 욕망을 <더 레슬러>를 통해 대리만족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것도 ‘예수’라는 텍스트를 빗대어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로노프스키는 극중 인물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의 입을 빌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를 언급하며 레슬러 랜디(미키 루크)를 현대판 예수에 빗댄다. 예수가 유대인에게 모함당해 골고다 언덕에서 로마 병사에게 수난 당하는 순간의 자기희생적 면모가 링 안에서의 처지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연출과 연기가 필요한 프로레슬링은 엔터테인먼트적인 성격상 관중을 자극하기 위해 자해에 가까운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랜디의 이름 램(ram)이 희생양을 뜻하는 양(lamb)과 발음이 흡사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면도날로 이마를 그어 피를 내거나 온 몸에 스테이플을 박아 넣는 등 몸을 학대해 관중의 환호성을 불러내는 순간의 이미지는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의 고난 장면과 닮았다.

다만 예수의 희생이 쇼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듯 랜디를 링 위에 서게 만드는 현실 역시 쇼가 아니다. 1980년대 한 때 미국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최고 스타였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현실에서의 그의 삶은 녹록치 않다. 집세를 내지 못해 차에서 잠을 청하고 외로움을 참지 못해 찾아간 딸은 문전박대하기 일쑤다. (유일하게 랜디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캐시디인데 직업이 스트리퍼라는 사실에 비춰 막달아 마리아와 처한 상황이 유사하다) 그래서 랜디가 탈출구로 삼는 공간은, 쇼로 이뤄진 허구의 세계이지만 챔피언으로 군림할 수 있는 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랜디에게서 슈퍼히어로의 면모를 본다. 평상시엔 어수룩한 신문기자이지만 지구가 위험에 빠지면 빨간 망토를 휘두르는 슈퍼맨처럼, 현실에선 집세도 내지 못하는 가난뱅이에 변변한 일거리도 얻지 못하는 백수신세지만 더 큰 책임감을 위해 거미줄을 쏘아대는 스파이더맨처럼, 랜디 역시 링 밖에선 보잘 것 없는 루저에 불과하지만 자신을 통제하고 무대를 휘어잡을 수 있는 링 위에서 대중의 우상으로 군림하며 존재의미를 찾는다. 미국에서 탄생한 슈퍼히어로물은 결국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WWE’로 상징되는 프로레슬링이야말로 가장 미국적인 소재인 만큼 레슬러 랜디는 슈퍼히어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라캉은 욕망이론에서 인간의 존재는 결핍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결핍을 메우려는 인간의 욕망은 환영을 쫓는다고 보았다. 미국에서 슈퍼히어로가 나오게 된 배경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슈퍼히어로의 출현 자체가 힘의 결핍을 담보하는데 미국은 그 대상에 욕망을 투사한다. 슈퍼히어로가 미국의 힘에 대한 결핍을 채워줄 것이라 믿는 까닭이다. 문제는 이들의 욕망이 9.11을 통해 산산조각 났다는 것. 바로 이때부터 할리우드는 예수를 소환해(?) 슈퍼히어로 장르에 환영을 덧씌운다. 9.11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경찰국가로 군림하고 싶은 욕망은 힘의 부활이라는 예수 재림의 상징성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단적인 예가 브라이언 싱어의 <수퍼맨 리턴즈>(2006) 이 영화에서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활약했던 수퍼맨은 21세기에 부활한 예수가 된다. (극중에서 수퍼맨은 렉스 루터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시 살아난다!)

<더 레슬러> 역시 수퍼맨 텍스트와 궤를 함께 한다. 프로레슬링과 헤비메탈, 즉 하드 바디의 시대였던 1980년대는 랜디의 전성기였다. 빨간 망토를 두르지 않았지만 쫄쫄이 유니폼을 입고 링 위를 날아다니며 아랍의 기수 아야톨라(어네스트 밀러)를 무찌른 그는 미국 대중이 열광하는 프로레슬링계의 수퍼맨이었다. 코믹스의 수퍼맨이 부활했으니 랜디 역시 다시 살아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일까, 흥미롭게도 랜디의 주무기는 일명 ‘랜디 럼’ 두 팔을 벌려 공중으로 날아올라 상대방을 가격하는 기술이다. 흡사 십자가에 몸을 매단 듯한 이 동작은 부활 모티브를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영화는 랜디 럼을 위해 공중으로 뛰어오른 랜디의 모습을 보여주며 대미를 장식한다. 그것은 1980년대 스타 랜디가 2008년 다시금 히어로의 위치에 올라서는 영광의 순간이자 동시에 <레퀴엠>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던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이력이 부활하는 도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이 영화로 2008년 베니스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더 레슬러>는 이야기만 봐서는 구식의 스포츠 영화지만 이면에 깔린 의미를 이해하면 굉장히 현대적인 텍스트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선택할만한 소재였던 것이다. 이렇게 <배트맨>과 <왓치맨>에 대한 아쉬움을 <더 레슬러>를 통해 달랜 아로노프스키는 차기작으로 <로보캅> 리메이크를 선택했다. <로보캅> 또한 예수 부활 코드가 포함된 작품인데 <더 레슬러>로 예열한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이번만큼은 정통 슈퍼히어로물로 제대로 다룰 생각인가 보다.

영진공 나뭉

[굿바이 칠드런], 나찌는 어디에나 어느 시대에나 있다.



영화 “굿바이 칠드런(Goodbye Children)”의 원제는 “Au Revoir Les Enfants”이고 프랑스 출신 감독 루이 말(Louie Malle)의 1987년 작품이다.  이 영화는 루이 말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87년 베니스 영화제 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목에 있는 Au revoir는 불어로 헤어질 때 서로 나누는 말인데, 영어로 Goodbye라고 쓰긴 하지만 실은 “다시 보자”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신부님과 아이들이 이 인사를 서로에게 건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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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감독이 유년시절에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나래이션을 루이 말 자신이 직접 하였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2차 세계대전 시 독일의 점령 하에 있던 프랑스의 어느 시골에 있는 사립기숙학교에 전학생이 한 명 온다.  그 소년은 프랑스 사람인 쟝 보네라고 하였지만 실은 유태인 쟝 키펠스타인이었다.  나찌의 유태인 학살을 피해 이름을 감추고 프랑스 부유층 자제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피신을 온 그 소년은 줄리앙 쿠엔틴의 옆 침대에 짐을 풀게 된다.  쿠엔틴(소년 시절의 루이 말)과 보네는 여느 소년들이 그러하듯 서로 투닥거리면서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그렇게 둘의 우정이 깊어가던 어느 날 …

이 정도만 들어도 어느 정도 감이 오시겠지만 이 영화는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성장영화이고 나찌의 유태인 학살을 비판하는 영화이다.  그런 주제와 이야기를 차분한 시선과 익숙한 톤으로 화면에 담고 있기에 이 영화는 온 가족이 함께 관람하기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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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른쪽이 루이 말 감독

사실 나찌의 유태인 학살과 인종청소 만행의 실상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영화는 아주 많다.  퍼뜩 떠오른 것만 적어도 “안네의 일기” “홀로코스트” “소피의 선택” “뮤직박스” 그리고 “쉰들러 리스트” 등등.  아시아 문화권에 살고있는 내가 느끼기에 이 정도면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많다.
 

소피의 선택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니다, 많은 게 아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추악한 범죄 중의 하나인 인종청소에 대한 고발과 경고는 아무리 많아도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그 다양한 경고와 각성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범죄가 모양만 바꿔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걸 보면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해보자.  히틀러는 죽었다.  그를 추종하던 나찌들도 대부분 죽거나 사라졌다.  그런데 왜 그들의 범죄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발생하고 있을까?  코소보, 체첸, 티베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할 것 없이 나찌가 저질렀던 범죄가 왜 자꾸 다시 발생하는 것일까?

희대의 범죄자 히틀러
그건 나찌의 범죄가 히틀러의 광기에서 비롯된 게 아니며 당시 독일에 모여있던 미치광이들의 공모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범죄는 인류의 순결성과 자기 민족의 고결성을 지키겠다고 저지르는 미친 짓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범죄는 주동자와 동조자들이 남들보다 이익을 더 챙기고 나아가 남의 것을 모두 빼앗아 독점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확신 속에 저지르는 조직범죄인 것이다.  내세우는 명분이 무어든 이 범죄는 탐욕만이 유일한 동기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 범죄는 어디에서고 어느 때고 계속 발생하는 것이다.  나찌와 유태민족간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서도 생길 개연성이 항상 존재하는 범죄인 것이다.  히틀러를, 챠우세스쿠를, 밀로셰비치를 처형해도 이 범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탐욕이 정당하다고 욕심이 미덕이라고 미화되는한 우리의 아이들은 계속 사라질 것이고 고통받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서나 그랬듯이 이 영화에서도 밀고자가 등장을 한다.  그런데 이 밀고자를 어떻게 봐야 할까.  그도 결국 남들이 다 그러듯 그의 이익을 추구한 것 뿐인데 말이다.

안다.  이런 논리가 바로 이 땅 친일파들의 더러운 변명과 맞닿아 있음을.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밀고자를 이해할 순 있어도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죄값을 치르게 해야 하고 이를 받고 난 뒤에야 비로소 용서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제대로 단죄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불행이 닥쳐온다.  단죄되지 않은 그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어떠한 형태로 추구해도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음을 경험하게 되어, 차후 어느 시대가 되어도 자신의 이익과 이를 획득하기 가장 좋은 위치인 권력을 잡으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대부분 잠시라도 그걸 이루게 된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너무나 자주 있어왔다.   

      
이 영화는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듯이 온 가족이 휴일을 맞아 모처럼 함께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이다.  불행한 역사의 한 시기가 배경이다보니 결말이 해피엔딩일 순 없으나, 화면에 그려지는 것은 분노와 절망이 아니라 담담한 심경으로 전하는 이야기이다.

실없이 깔깔대는 영화나 무작정 까고 부수는 영화가 꺼려지는 분들에게 한 번 보시라고 추천해 본다.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