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키친”, 대중적인 화법으로 풀어낸 작가적 개성


헤아려보니 굉장히 오랜만에 본 유럽영화가 됐다. 작년 11월 말에 본 <더 콘서트>(2009) 이후 거의 넉 달 만인 것 같다. 그나마 전작들을 봐왔던 파티 아킨 감독의 작품이 아니었으면 굳이 볼 생각도 못했을 거란 생각을 한다. 전반적으로 많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상황이 못되는 탓도 있긴 하지만 그런 와중에 한국 영화와 영미권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일본 영화의 관람 빈도가 높고 그외 국가에서 다른 언어로 만들어진 영화들은 갈수록 만나기가 어려워지는 느낌이다.

종종 예술 영화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유럽 영화 – 이역만리 떨어진 대한민국에서 정식 개봉까지 하는 유럽계 영화들이란 대체로 완성도가 높고 수상 이력도 화려한 편이긴 하다 – 라고 해서 반드시 챙겨봐야 할 의무감을 가질 필요까지야 없는 일이겠지만 영화 편식증에 대한 습관적인 경계심을 오래 간직했던 이력 때문에 이렇게 오랜 기간 영화 감상의 지역 안배(?)가 잘 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 괜한 미안함마저 갖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나의 지난 4개월 간의 유럽 영화 무감상 이력에 종지부를 찍어준 <소울 키친>은 <미치고 싶을 때>(2004)와 <천국의 가장자리>(2007)에 이어 세번째로 국내 개봉된 파티 아킨 감독의 작품 –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체적으로는 6편째 장편 극영화 – 이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미치고 싶을 때>가 베를린에서 황금곰상을, 그리고 <천국의 가장자리>가 깐느에서 각본상을 받았었던 이력을 감안하면, 베니스에서 <소울 키친>의 수상은 파티 아킨 감독의 최근 작품들이 유럽이 자랑하는 3대 영화제를 모두 인정받는, 트리플 크라운의 완성에 좀 더 의미를 부여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 유럽 내에서 파티 아킨 감독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이와이 슈운지를 모르는 일본인이 많았듯이 파티 아킨을 모르는 유럽인들이 아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많을 것 같다 – 유럽 영화계에서 고른 지지와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뛰어난 재능이라는 점 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울 키친>은 감독의 고향인 함부르크를 배경으로, 요리사이자 레스토랑의 사장이기도 한 지노스(아담 부스코스)의 청춘 스케치와도 같은 작품이다. 터키의 정치 현실까지 건드리고 나섰던 전작 <천국의 가장자리>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소울 키친>은 좀 더 가벼운 청춘 코미디 영화의 포맷을 취했으며 주인공도 터키가 아닌 그리스계 독일인으로 설정되었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등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대한 오마쥬인 것인지, 주인공의 이름이 지노스 카잔차키스라서 괜한 친근감을 자극하기도 한다. 지노스 역을 맡은 아담 보스도코스는 파티 아킨 감독과 같은 함부르크 출신이기도 한데, 북부 독일의 을씨년스러운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소울 키친>은 공동 각본가로서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는 두 사람의 합작품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 싶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여느 청춘 코미디물의 그것과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어떤 분위기의 영화로 연출할 것인가는 제작자와 감독이 상의해서 결정할 일이긴 하지만 주인공 지노스(아담 보스도코스)가 엄청 무거운 그리스산 식기세척기를 억지로 옮기려다가 허리병을 얻게 되면서 영화는 전반적으로 코미디로 보일 수 밖에 없는 장면들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부동산 업자가 된 동창 녀석이 호시탐탐 레스토랑을 헐값에 넘겨받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와중에도 지노스는 중국으로 떠난 애인 곁으로 가고 싶어 레스토랑을 누군가에게 맡기려고 하지만 – 이 레스토랑을 어떻게 해서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민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적 유산과 같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자기 뜻대로 풀리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일은 풀려가고 또 새로운 사랑도 찾게 된다는 얘기다.

전반적으로 가벼운 톤을 유지하면서 흔히 하는 말로 ‘골 때리는’ 상황 전개를 무기로 삼고 있는 코미디이지만 파티 아킨 감독의 흡인력 좋은 연출 솜씨를 재확인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는 작품이었다.

수감 중인 지노스의 형 일리아스 역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가 출연하고 <미치고 싶을 때>의 비롤 위넬이 솜씨는 엄청 좋은데 성격이 괴팍한 요리사 샤인으로 출연하면서 반가움을 더해준다. 지노스가 찾은 새로운 사랑 안나 역으로 출연한 배우는 헝가리 출신의 도르카 그릴루스인데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해나가는 과정이 조금 더 나와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배우였던 것 같다.

파티 아킨 감독의 영화가 전유럽에서 크게 환영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최근 이 만큼 독특한 자기 색깔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대중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젊은 유럽 출신의 감독들이 그리 많지가 않기 때문이다.

유럽의 영화 시장이 어떻게 되어가는지에 대해서까지 걱정해줄 처지는 못되지만 아무쪼록 영미권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도 경쟁력 있는 작품들이 좀 더 많이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램 만큼은 이렇게 언급을 해두고 싶다.

파티 아킨 감독의 영화도 뭐 아주 대중적인 타입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정도의 재미와 작품성을 고루 갖춘 유럽계 영화를 최근에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게 된 점은 정말 아쉬울 따름이다.

영진공 신어지


 

“블랙 스완”, 무대 위의 삶 그리고 이중 자아


<블랙 스완>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는 사실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작년 말 미국 개봉 직후부터 영화가 아주 대단하다는 소문이 들려왔었고 마침내 때가 차매, 나탈리 포트만은 골든블로브에 이어 아카데미에서까지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국내 개봉 이후 영화를 보는 이들마다 “압도적”이라는 표현을 공통적으로 내놓고 있는 작품이니까.

영화를 보는 이들마다 관점과 그에 따른 반응이 다를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작품 자체로부터 압도 당한다는 경험은 일상 생활에서와는 달리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휴식 같은 영화 관람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경험이 될 수도 있긴 하겠지만 관객을 2시간 동안 압도할 수 있는 영화란 의외로 많지가 않고 그런 만큼 상당한 가치를 인정해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개인적으로 <블랙 스완>은 관람하는 동안 정서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까지 매우 힘들게 느껴졌던 작품이다. 상영 시간 내내 온 몸을 긴장시키며 보느라 다른 영화를 볼 때와는 다르게 고생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2시간 내내 롤러코스터를 탔다고 말하는 건 좀 과장인 것 같고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는 150km 안팎의 속도로 계속 운전하고 난 뒤의 피로감 같은 것이 급격하게 몰려왔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날카로워진 감각이 다시 가라앉기까지 두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전작 <더 레슬러>(2008)의 다소 느슨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관객들을 시종일관 초긴장하게 만드는 영화가 바로 <블랙 스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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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뉴욕 발레단의 젊은 무용수 니나(나탈리 포트먼)가 <백조의 호수>의 주연으로 발탁되고 마침내 성공적으로 초연을 마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문제는 겉에서 보기와는 달리 발레단 내부의 치열한 경쟁과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기 위한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그 중심에 선 인물의 내면 세계는 매우 복잡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니나의 경우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으로 새로운 솔리스트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지만 흑조(블랙 스완)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에 한계를 경험하면서 노이로제 증상을 일으키게 된다. <블랙 스완>은 결국 니나의 관점에서 경험하는 압박감과 신경증적 세계에 관한 작품이다.

<블랙 스완>은 언듯 90년대 초반에 한창 유행했던 사이코 스릴러의 내러티브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블랙 스완>에는 음모도 반전도 없이 오직 니나의 내면 세계와 그것이 바깥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만이 존재한다. 영화 속에 주인공과 직접적으로 갈등하는 타자 – 니나의 어머니(바바라 허쉬)나 릴리(밀라 쿠니스) 등이 유력한 후보이긴 하지만 – 가 부재한다는 사실은 대중 영화로서 뭔가 허전한 감을 남기게 되는 이유가 되는 반면, 영화의 작품성과 완성도를 한껏 끌어올리는 구조적인 이유가 된다.

<블랙 스완>은 얼토당토 않는 스릴러적인 재미의 구축에 힘을 쓰기 보다 니나를 중심으로 한 발레리나의 세계와 <백조의 호수>라는 텍스트가 갖고 있는 메타포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은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재능과 함께 나탈리 포트먼의 헌신적인 연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블랙 스완>이 남다른 완성도의 영화가 될 수 있었던 부분 중에 하나 – 그러나 가장 중요한 – 는 전문 무용수에 버금가는 주연 배우들의 동작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탈리 포트먼의 경우 투자가 결정되기도 전인 촬영 1년 전부터 자비로 훈련을 시작했다고 하니 이런 열정이 마침내 좋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영화 초반에 니나가 <백조의 호수>의 솔리스트로 뽑히고 나서 화장실에 들어가 엄마에게 전화로 그 사실을 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나탈리 포트먼의 표정 연기는 이미 주연상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스펙타클하다. 물론 영화 전체의 하이라이트는 마침내 무대 위에서 완전한 블랙 스완으로 변모하여 관중들의 찬사를 받게 되는 니나의 모습이겠지만.



대략 10년 정도 숙성된 시나리오였다고 하는데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애초에 <더 레슬러>를 만들 당시 퇴물 레슬러와 발레리나의 만남으로 이야기를 꾸밀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에 모두 담기에는 너무 많다는 판단하에 지금의 <더 레슬러>와 <블랙 스완>, 두 편의 영화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 하니 두 작품 간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두 말할 나위가 없을 듯 하다.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무대’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인물들의 이중 자아에 대해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그리고 두 주인공 모두 각자 자신의 마지막(?) 무대를 성공적으로 완성해내는 결말도 유사하다.


영진공 신어지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 고전적 주제의 재해석





다니엘 데이-루이스의 부인이 아서 밀러의 딸이라는 얘기는 예전에도 언뜻 접했었던 것 같은데, 그가 영화 감독이라는 사실은 이번 네 번째 연출작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네요.

레베카 밀러 감독과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처음 만난 건 1996년 영화 <크루서블>의 주연 배우로서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원작자 아서 밀러의 집을 방문했을 때라고 하는군요. 당시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자벨 아자니와 몇 년 간의 동거 끝에 아들까지 둔 상태였고, 레베카 밀러는 몇 년 간의 배우 생활을 마감하고 연출 데뷔작 <안젤라>(1995)를 완성한 직후였지요.




어쨌든 대중들에게는 항참 낯설기만 한 여성 감독의 새 영화를 위해 브래드 피트가 제작자로 나서고, 이토록 많은 주연급 배우들을 조·단역에 캐스팅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거죠. 대중적인 영향력은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커플이 최강이겠지만 미국 내 문화·예술계 내부적으로 다니엘 데이-루이스와 레베카 밀러 감독 커플 만큼 영향력이 강한 집안도 찾아보기란 그리 쉬운 편은 아닐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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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의 주인공 피파 피(로빈 라이트)는 작가 출신으로 출판 사업에 뛰어들어 크게 성공을 거둔 허브 리(앨런 아킨)의 나이 차 많은 부인입니다. 영화는 피파 리의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면서 중년 여성의 자아 찾기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요. 유명한 희곡 작가의 딸로서 성장했고, 유명한 배우의 아내로서 살고 있는 레베카 밀러 감독 본인의 자전적 경험이 적잖게 투영된 작품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젊은 시절 목표 없이 표류하던 피파 리(블레이크 라이블리)가 허브 리와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정착지를 발견하게 되었던 그 순간, 유부남이었던 허브 리의 부인 지지 리(모니카 벨루치)가 눈 앞에서 권총 자살을 했고 그 이후 피파 리의 결혼 생활에 대한 상당한 압박감으로 작용해왔다는 부분은 그야말로 내밀한 고해성사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스토리텔링 방식 자체가 기승전결을 잘 짜맞춘 방식이라기 보다는 생각나는 데로 자유롭게 기술해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산만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적은 시간 내에 꽤 많은 이야기와 느낌들을 담아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고 평가를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저처럼 로빈 라이트 – 작년에 숀 펜과 이혼하면서 더이상 로빈 라이트 펜이 아니로군요 – 를 평소에 좋아하셨던 분들이라면 로빈 라이트 연기 경력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실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젊은 시절의 피파 리로 출연한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얼마 전 <타운>을 통해 처음 알게된 배우인데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그외 키아누 리브스, 위노나 라이더, 줄리안 무어, 모니카 벨루치, 마리아 벨로 등이 배역의 비중에 상관 없이 적재적소에 등장하며 반가움을 –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 더해주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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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상하이”, 외화내빈의 글로벌 프로젝트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외화내빈의 영화다.
못만든 영화가 분명 아닌데 다른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다행히 제작비는 불과 5천만 달러 수준으로, 세계의 미래가 될 도시 상하이의 1941년을 배경으로 찍는 이 글로벌 프로젝트에 유명 배우들께서 적은 개런티를 감수하며 흔쾌히 출연해주셨던 덕분인 것 같다. 배우들의 개런티가 적은 편이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단순히 총액 규모가 작기 때문만은 아니고, 영화 속에 당시 상하이의 모습이 꽤 충실하게 재현되어 세트 비용이 상당했을 거라는 짐작을 하기 때문이다.

가끔 영화 속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한 옛 도시의 모습을 보곤 하는데 <상하이>에서 재현된 당시의 모습은 그 보다 훨씬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듯 하다. 상하이에서 촬영을 하지 못하게 되자 방콕에서 로케이션을 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당시의 상하이를 재현한 광경 전체가 거대한 세트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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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레이션을 통해 소개가 되듯이 1941년의 상하이는 중국 내에서 유일하게 일본이 강점하지 못하고 있던 도시였고, 그 이유는 미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세계 열강들이 상하이에서 만큼은 쉽게 물러나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미국의 스파이 한 명이 암살을 당하게 되고,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폴 솜즈(존 쿠삭)가 사건의 경위를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일본군에게 붙들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험악한 상황을 기본 배경으로 영화는 점차 모든 미스테리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 일본인 이중 스파이 스미코(키쿠치 린코)를 신변을 확보하는 일에 집중된다.정확히 왜 스미코가 중요한 인물인 것인지를 파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건만 설상가상으로 스미코는 찾자마자 이내 죽어버리고, 그 앞에서 일본 군부의 대표선수 다나카(와타나베 켄)는 스미코와의 삼각관계 때문에 주인공의 친구를 죽였던 것이라고 고백을 한다 – 이쯤 되면 <황해>에 이은 난감함과 허무함 시리즈의 훌륭한 속편이 될 자격을 갖춘 셈이다.


1941년에 이루어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의 막후 배경이 상하이를 배경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발견에 대한 기대와 달리, <상하이>에서 1941년의 사건이란 등장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의 입을 통해 전혀지는 놀라운 소식에 불과하다.

상하이 내에서 만큼은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되고 있었던 국제 관계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영화의 후반부는 상하이에서 급히 철수하는 미국인들 틈바구니에 끼는 데에 성공하는 주인공들을 비출 따름이다. 주인공의 친구가 죽지 않았다면 스미코가 다나카를 통해 빼돌린 정보가 미국에 알려져서 진주만 공습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길 하고 싶었던 걸까? 본래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관객들에게 그런 식으로는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미국과 일본, 중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스타들은 자신들의 유명세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모자라지 않는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스웨덴 출신의 미카엘 하프스트롬 감독의 연출 역시 우려했던 것에 비해 훨씬 안정된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맥락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산만하기만 하다는 데에 있다.

누구나 한번쯤 알고 넘어가야 할 역사적 사건을 직접 다루는 것도 아니오, 숨막히는 첨보 액션이거나 그 안에서 피어나는 한 떨기 멜로물을 제대로 피워보는 것도 아닌 <상하이>를 도대체 왜 만든 거냐고 물어보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 그것 하나만 확실하다.



영진공 신어지





 

“환상의 그대”, 홍상수 영화와 닮은 우디 앨런 영화





우디 앨런 감독의 신작 <환상의 그대>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참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준다. 이제껏 오랫동안 두 감독의 영화를 봐왔지만 이번처럼 비슷하게 느껴졌던 경우는 처음인지라 내심 놀랍다는 생각도 들고, 이게 이번 작품에서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전부터 두 감독의 영화가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인데 지금까지 눈에 띄게 드러나지를 않았던 것인지를 판가름해보게 된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와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처음부터 닮아있었다고 보는 건 아무래도 어렵다는 결론이다. 특히 우디 앨런 감독의 작품들이 내용과 스타일 면에서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되며 – 단순히 더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 그런 와중에 이번 <환상의 그대>를 통해서 우연찮게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무척 닮아있는 모습들을 보여주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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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그대>가 유난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생각나게 만드는 이유는 등장 인물 가운데 어느 누구도 기분 좋은 결말을 – 영화가 끝난 이후의 더 나은 미래를 – 맞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가 언제부터 이토록 삶에 대해 시니컬한 입장을 취했었던가 싶기도 하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라고 해서 항상 암담한 결말만을 그렸던 것도 아닐진데, 이를 통해 두 감독의 영화가 접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 그렇게 느껴졌다는 사실이 – 무척 흥미롭게만 느껴진다.

<환상의 그대>는 전지적 나레이션을 활용해서 – 홍상수 감독 역시 종종 나레이션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던가 – 씨퀀스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편인데, 그 중 영화의 시작과 함께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경구, “인생은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지만 결국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대주제가 되고 만다.




등장 인물들이 자기 삶의 현주소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 다른 곳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 그리고 그런 허영과 욕망의 추구가 하나 같이 낭패를 불러오고 만다는 점에서 – <환상의 그대>는 기존의 우디 앨런 영화와는 상당히 차별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극중에서 유일하게 해피엔딩을 맞는 인물은 남편 알피(안소니 홉킨스)에게서 버림을 받은 후 사이비 심령술사에게 푹 빠져 주변 사람들을 전부 열 받게 만들어버리던 헬레나(젬마 존스)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혼자서 외롭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모면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과연 잘 된 일이라고 해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이다.

이토록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으면서 결국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에서 그나마 답이 되어줄 수 있는 건 헬레나가 의존했던 바와 같은 맹목적인 믿음 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 식의 결론은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다.




영화의 원제목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는 우리가 삶에 대해 확실하게 예견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란 “(누구나 언젠가는) 저승사자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 로이(조쉬 브롤린)의 대사였지만, 이 말의 의미가 영화 초반에 언급된 셰익스피어의 냉소적인 경구와 맞물리면서 결국엔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적인 기조를 이루게 된다. 노년의 알피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창녀(루시 펀치)와 재혼까지 하지만 물질적인 능력에 의해 유지되던 알피의 허영은 결국 좌초를 하게 된다.

알피의 딸 샐리(나오미 왓츠)의 남편인 작가 로이는 건너편 아파트의 창문을 통해 흠모하던 “환상의 그대” 디아(프리다 핀토)의 마음을 얻는 데에 성공은 하지만 작가로서 자신의 무덤을 파는 짓을 하게 되면서 그 역시 인생의 바닥으로 완전히 침몰을 하고 만다. 큐레이터인 샐리 역시 갤러리의 사장 그렉(안토리오 반데라스)과의 연애에 헛물을 켠 데다가 어머니 헬레나가 예언을 핑계로 창업 자금 제공을 거부하자 몹시 분노를 하게 된다.



<환상의 그대>는 분명 우디 앨런의 최고작이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이 솜씨 좋고 지칠 줄도 모르는 시네아스트의 현재를 확인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세태 풍자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우스꽝스러운 해학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텐데,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혹시나 자신의 삶에도 그와 같이 허탈하고도 몹시 짜증스러운 일이 실제로 닥치지나 않을까 싶어 맘 놓고 웃지도 못하는 애매한 감정에 휩쌓이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희비극을 넘나드는 거장의 행보는 이처럼 현재진행형이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