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이후의 이순신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은 이유

<허핑턴 포스트> 한국판의 8월 6일 기사, “‘명량’ 이전의 이순신 영화들 : 이순신 때문에 전 재산을 투자한 배우는 누굴까?” 에 따르면 우리나라 이순신 영화는

등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1977년 이후 제대로 된 이순신을 영화관에서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저위에 천군같은 뭐 이상한 코메디 영화들 말고 …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나타나듯이 한국에는 거의 하늘이 내린 기적과 같은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이란 인물을 제대로 표현만 하면 대박이 난다.

김훈의 소설(2001년)이 “명량”의 원작인데 당시 얼마나 세상이 뜨거웠는가를 생각해 보면 왜 13년이나 지난 지금 굳이 “명량”이 제작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칼의 노래”를 원작으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아주 잘 만든 TV드라마가 이미 그 분위기를 다 가져가 버리기는 했다.

그러다보니 “명량”에서의 해전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해전이 더 좋다는 사람도 많다.

어찌됐든 이순신 영화를 제대로 만들면 대박이 난다는 것은 거의 잘 알려진 수학공식과 같다. 게다가 “칼의 노래”라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시나리오도 이미 존재하고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 “명량”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해 보자면 그 원인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는데,

1. 제작비: 굉장히 많이 든다. 게다가 어설프게 돈쓰면 이건 죽도 밥도 안되기 때문에 엄청나게 써야 한다.

2. 배  우: 사실 이순신 장군 역할을 제대로 해 낼 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다. 김명민은 연기가 좋긴 하지만 너무 젊다.

3. 감  독: 마땅한 감독이 없었다. 사극을 잘 만든다는 감독이 있었지만 전쟁씬을 잘한다는 감독이 그동안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최종병기 활”이라는 조선식 액션영화가 나오고, 게다가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나름의 역사관이 표출된다. “조선은 백성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내 누이는 내가 구한다.” …

“명량”은 이 세 가지 측면이 해결되었을뿐만 아니라 “칼의 노래”에서 글로 보았던 이순신 장군을 영화관의 큰화면으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게 만든 사회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열망은 실로 대단했다. “소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말과 함께 명량해전으로 사실상 나라를 구원한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던 열망이 13년 만에 터져 나온 것이다. 게다가 최민식의 이순신 역할이었으니.

이건 이미 천 만 관객이 들 조건을 갖추고 시작한 것이다. 개봉 시 CGV가 상영관을 많이 깔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 만으로 천 만이 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 한국 역사에서 이순신은 거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인물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이 전쟁에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했던 짓은 절로 한숨 나고 몸둘바를 모를 정도이다.

사실상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조정은 정규군을 궤멸시키고 명나라 군대에게 나라를 되찾아 달라며 떼쓰는 것말고는 했거나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 와중에서 정규 군대가 왜를 물리친것은 이순신 장군의 전투 밖에는 없었다. 행주산성 전투는 실은 민초들이 힘겹게 싸워서 이긴 전공이고 말이다.

그러고도 조선은 과거의 잘못을 거울 삼아 발전은 커녕 극복조차 하지 못하고 다시 병자호란으로 또 한 방에 한양이 털리게 되고, 나중에는 전쟁조차 하지 않고 종이에 싸인하고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는 허망한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그런 역사 속에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거대한 자존심이고 가슴 벅차게 만드는 인물이기에 우리는 비록 극장 안에서나마 그에게 열광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명량”에서 이순신 영화는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량 이후 정유재란은 너무나도 비참했고 왜와 강화를 맺으려고만 하는 명나라와

임진왜란이 난지 7년이 다 되어서도 제대로 된 육군도 없는 조선이 명나라 뒤에서 찌질하게 구는 모습을 봐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적의 전투선 450여 척을 깨부순 노량해전이라지만 거기에서 이순신장군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영진공 기적

“가오갤”, 유쾌한 찌질이들이 은하계를 수호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Guardians of the Galaxy)라는 은하수호대는 이름이 너무 길어 그냥 가오갤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들의 활약을 보면서 어쩌면 시저도 못한 세계정복을 디즈니는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오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옹골차게 유머를 주입하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심지어 그 진지할 수밖에 없어야 할 클라이막스의 위기상황에서도 이들은 유쾌한 유머로 위기를 헤쳐나갑니다.

 

그런점에선 정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위대한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캐릭터들의 특색이 황홀할 정도로 가지각색인 데다가 그 종류도 애정이 깊이 들만큼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레미제라블”과 “겨울왕국”을 강하게 이끌어줌으로써 흥행에 성공시킨 장점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도 가지고 있는데요.

 

그건 바로 음악입니다. 80년대의 히트곡들을 모아서 절묘하고 흥겹게 배치시켜 놓아서

가뜩이나 유머에 즐거워하던 관객들의 흥을 더욱더 돋게 만듭니다.

하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이 장점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안이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마블 코믹스가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고 있으며 발전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전혀 창의적인 발상이 없습니다. 스토리는 너무 밋밋하고 별 볼일 없으며 세계관의 확장으로만 이용됩니다. 그래서 화려한 영상은 단지 스토리의 부실함을 감추기 위한 겉치레로 전락해 버렸고 영상미마저 색이 바라게 됩니다. 

 

 

 

 

 

게다가 캐릭터들의 특색은 있지만 그 깊이가 너무 얕습니다. “어벤저스”는 그 영화를 위해 이전부터 캐릭터 고유의 영화를 억지로라도 만들어서 (그래도 그다지 깊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어벤져스 팀에 깊이를 부여했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전혀 아닙니다.

 

새로운 영웅들에게 새로운 활약을 위한 목적의식을 심어주기엔 그들은 너무 어중이떠중이들입니다. 우정타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우습구요. 결국,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연이은 흥행으로 인한 마블의 오만함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더도말고 덜도말고 오락블록버스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는 4D로 봤는데 영화 도중 얼굴에 물을 (기분나쁠정도로) 쏟아붓는 장면이 3개 정도가 있고 우주선의 움직임을 표현하느라 쓸데없이 움직여대는 의자에, 액션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격하게 움직여서 안경추스르느라 오히려 액션이 보이지 않았던 점은 정말 최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그저 여름을 잠시 잊게 할만한 오락영화 입니다. “윈터 솔져”를 기대하였지만 이 영화는 그저 유머감각이 좋아진 “트랜스포머”일 뿐이었습니다.

 

하나 더 아쉬웠던 점은 영화가 청소년 관람가라 그런지 등장인물의 몇몇 재미있을 드립을 직역해서 번역하여서 좀 더 찰지게 전달되지 못한 점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유머감각은 정말 최고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영화 중 최고의 드립

-지금 뭐하는 거지?

-댄스배틀!

 

 

영진공 샤인제이드

 

 

 

 

 

 

 

 

 

 

 

 

 

 

 

 

영화 “명량”과 “군도”에 대한 단상


 


 



 


 


영화 “명량”은 역사 매니아도 아니고 밀덕후도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 봐도 고증의 문제가 툭툭 걸립니다. 게다가 메이크업을 잔뜩 한 조총 스나이퍼 따위를 쓸 데 없이 만들어 넣는 등 영화의 매무새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충무공이 장계를 쓰는 장면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글을 쓰는 이순신의 상반신 샷으로 시작하면서 다음은 글을 쓰는 손을 클로즈업하고 그 다음은 손까지 포함한 전체 샷이 나옵니다.

하지만 전체샷으로 넘어올 때 꼿꼿했던 충무공의 허리가 숙여져 있습니다. 첫 샷에서는 손이 안 잡히니 글은 쓰는 척만 하면서 허리를 꼿꼿하게 폈을 테고 마지막 샷에서는 손까지 잡히니 신경써서 글을 써야 하는 터라 허리를 숙였겠지요. 허나 샷의 연결이 껄끄러울 정도로 튑니다.

그리고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에서 충무공이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올려 베는 모습을 정면에서 잡고 다음 샷에서 카메라는 적장의 등 뒤에 가 있는데, 이순신의 칼이 왼쪽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오른쪽 아래에 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뭔가 깔끔하지 않다는 것을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다 느끼게 되고 이 정도면 NG컷이라 할 만 합니다. 문제는 이런 컷들이 꽤나 많아서 매무새가 조악합니다. 아무리 쌈마이 헐리웃 영화라고 하더라도 이런 컷들은 보기 힘듭니다.

정작 문제는 배우 최민식의 존재입니다. 자신없는 감독은 최민식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될듯 보입니다. 최민식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하지만 최민식 연기가 정말 잘 나올 때는 극 안 캐릭터의 개성이 매우 강할 때입니다. “파이란”에서의 강재,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장경철처럼 말입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취화선 동행취재기를 씨네21에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과의 인터뷰를 인용하겠습니다.


 


 


-임권택 감독님과의 해석상의 차이가 있습니까.

=근본적인 차이는 없죠. 그러면 큰일나게요. (웃음) 다만 지금 초상화냐, 풍경화냐, 라는 점은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전 굵은 붓으로 죽죽 그리고 싶은데, 그럴 때 감독님이 아니다, 굵은 붓으로 그리다가 가는 붓으로 바꿔라, 하시면 내가 성이 안 차는 부분이 생깁니다. (웃음) 자꾸만 내것이 나오니까 괴롭죠. 내 것을 버리고 감독님 것을 취해야 하는데, 나를 죽여야 하는데, 자꾸만 내 분석대로, 내 방식대로 몸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목표를 가는 거니까요.

다음은 임권택 감독 인터뷰 중에서 발췌입니다.

=장승업이 김병문 집에 담 넘어가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서 최민식씨가 눈물을 흘려서 NG를 내셨다면서요.

– 그것도 기품과 관련될지도 몰라요. 물론 울 수도 있는 거요. 그러나 사소한 감정을 드러내는 쪽으로 장승업이를 찍어오지 않았다고. 거기서 느닷없이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안에는 깊은 사랑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살아내는 놈인데, 여기 와서 울고 있으면 그게 맞겠냐고. 삐끗삐끗 감정이 튀어나오면 수렁을 밟는 거죠.


 



최민식은 이런 배우입니다. 영화는 여러 파트가 한 데 어우러져야 하는 장르인데 그는 연기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자신의 캐릭터만 살아나고 나머지는 죽어버린다는 것이죠. 저는 이 절정이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최민식은 과거처럼 자신의 연기로만 영화를 다 뒤덮진 않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이나 “신세계”에서는 많이 절제하는 연기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최민식은 최민식이죠. “명량”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은 모든 대사, 모든 표정에 감정이 뚝뚝 묻어납니다. 아들과 밥을 먹으면서 하는 간단한 대사 “같이 먹으니까 좋구나” 이 아홉 글자에도 목소리의 톤과 인토네이션을 써서 감정을 묻혀내죠. 그로써 최민식의 이순신은 끊임없이 얘기합니다. 나는 힘들어, 나는 괴로워, 나는 어려워 ……

그런데 과연 이순신이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마구 쏟아내는 인물이었을까요?
“난중일기”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병신년 이월 열 나흘 – 밤에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은 대낮처럼 밝고 물결 위에 비친 빛은 비단결 같은데, 혼자서 수루 위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수선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을미년 칠월 초 하루 –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갑오년 이월 열 엿새 – 홍양 현감이 암행어사 밀계 초본을 가지고 왔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두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나 나라가 평정될 리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물론 아들이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격정적으로 비통함을 드러내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힘들고, 괴롭고, 어렵고, 외로울 때에도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뒤척거리고, 천장만 올려다보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


 


 



 


 


이런 이순신의 모습과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의 모습은 격차가 큽니다. 아마 연출자가 이를 알고 최민식의 연기를 더 죽이려 해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둘 사이의 “짬밥” 차이가 얼만데 ……


 
오히려 류승룡이 이순신을 맡고 최민식이 구르지마를 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외에도 소위 과도한 ‘국뽕’이나 텔레파시와 치마 시그널 등 무리한 설정이 있는데도 “명량”은 흥행가도를 힘차게 내달리고 있습니다. 리얼리즘을 정말 사랑하는 한국의 관객들, 그리고 문단 독자들의 성원 덕분에 말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묘사하는 게 리얼리즘이라 한다면 한국의 대부분 흥행 영화는 모두 리얼리즘이 베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설국열차”가 좀 예외랄까? 실은 “괴물”도 리얼리즘이지요.

우리 관객이나 독자들이 왜 리얼리즘을 좋아하는지는 다른 차원의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영화 “군도”를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영화의 매무새, 그러니깐 만들어 놓은 모양은 “군도”가 “명량”보다 낫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군도는 현실의 이야기를 현실이 아닌 것처럼 묘사했고, 이는 관객에게 매우 불편한 접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현실의 이야기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면 모르겠는데,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이며 그 과거의 현실은 지금의 현실과 별로 다를 게 없죠. 그런데 그 현실이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촬영하고 음악을 깔고 편집을 해 놓으니 관객은 혼란스럽지요.

김구 선생이 절정 무술을 사용하며 일본인을 때려 잡는데 거기다가 무협 스타일 자막으로 “흑심패룡장의 고수 백범 김구”라고 깔고, 고속 촬영에다 웨스턴 음악 넣고 영화 “300”처럼 편집하면서 재해석하면 관객들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김구 선생이 몸 담았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이기에 이처럼 재해석하려는 사람은 없겠지만, 허나 “군도”가 보여주는  현실도 어쩌면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 백성은 현재와 흡사한 채권추심도 당합니다.


 
영화 속 현실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얘기하면서도 묘사는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누리끼리한 서부 영화 스타일 색보정, 음악과 무협 영화와 같은 캐릭터 구축과 샘 페킨파 같은 급격한 줌인 줌아웃 등을 써대니 당연히 언발란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군도”의 흥행이 주춤하는 것은 여타의 요인이 많겠지만 제 생각에는 “명량”과는 다르게 리얼리즘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영진공 철구


 


 


 


 


 


 


 


 


 


 


 


 


 


 


 


 


 


 


 


 


 


 


 


 

“로보캅”, 기술은 발전해도 세상은 변한 게 없네



 


 


 



폴 버호벤의 로보캅은 SF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다. 그 영화에는 북유럽 특유의 냉정하고 건조하면서도 헐리웃과는 다른 방식으로 무자비한 정서를 통해 드러난 80년대 미국 대중문화의 본성이 담겨있다.


 


2014 년의 리메이크가 원작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리메이크작 역시 그 자체로 괜찮은 작품이다. 왜냐하면 감독은 이 영화를 단지 이전 걸작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질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걸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명해보자.


 


 


 



 


 


 


1. 기계가 인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


 


80년대의 로보캅이 머피의 육신(정확히는 그의 뇌)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당시에는 기계가 인간의 뇌를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도입부에 ED209가 저지른 사고를 보자. 그 온전한 로봇은 가상의 용의자가 무기를 버렸음에도 그를 실제로 처형해버린다. 인간이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사고다. 당시의 기계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는 능력도, 상황에 맞춰 유연한 판단을 하는 능력도 없다. 그저 프로그램된 대로 무지막지하게 작동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길거리의 법집행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머피의 뇌를 집어넣은 것이다. 즉, 당시 로보캅은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라 OCP사의 제품으로 대우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기계로는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등지능을 증명하는 존재였다.


 


이제 2014년의 로보캅을 보자. 여기서 더 이상 인간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기계가 인간보다 판단은 더 빠르고 정확하며, 두려움도 없고, 분노에 휩싸여 일을 그르치지도 않으며, 부패한 시스템에 매수되지도 않는다. 그네들을 이라크 전쟁터에 투입하면 인간 병사들과는 달리 PTSD도 없을 것이고, 불필요하게 포로를 학대하지도 않을 것이며, 쿠란을 불태우거나 오줌을 싸는 멍청한 짓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법이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냉정한 집행자를 필요로 한다면 이 영화속 로봇들이야 말로 그에 가장 적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에 머피를 집어넣은 이유는 명분 때문이다. 머피 탑재 로보캅은 인간이 아닌 기계에 의한 법집행이라는 아이디어가 대중들에게 거부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완화시킬 일종의 마케팅 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로보캅은 애초부터 OCP사의 제품이 아니라 치명적인 산재를 입었던 경찰관 머피의 재활프로그램으로 홍보된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명분일 뿐이다. 영화는 오로지 뇌와 안면, 그리고 허파와 심장만 남은 머피의 본체를 보여주며 OCP사의 대외적인 홍보, 즉 “머피의 재활”은 허상이며 그의 본질은 기계에 얹혀진 생체학적 장신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심지어 머피 탑재 로보캅이 순수한 기계 로보캅보다 수행능력이 떨어지자 데넷 박사는 기계가 머피의 뇌를 바이패스 하도록 개조한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내세우는 인간성은 허울좋은 명분일 뿐이라는 사실은 단지 대외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로보캅 자체 시스템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이 친구는 그냥 슈퍼 솔져 ...


 


 


2. 무엇이 변했나 


 


흥미로운 점은 80년대의 로보캅이나 2014년의 로보캅이나 머피의 본체 자체는 동일하다는 점이다. 87년의 로보캅에서는 표현기술의 제약이나 다른 이유로 그저 이를 보여주지 않았을 뿐, 그 기계속 머피 역시 뇌와 안면, 심장과 허파, 그리고 약간의 내장만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로보캅2 에서는 심지어 오로지 뇌와 척수만을 빼내서 새로운 로보캅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변하지 않았으나 기계들이 변했다. 80년대의 컴퓨터는 융통성이 부족한 기계였다. 다시 말해서 스마트하지 못했다. 그 당시 인공지능 이론에서는 ‘퍼지’라는 개념이 유행했었는데 이 단어는 어중간한 이라는 뜻이다. 0과 1로 구성된 흑백이 아닌 회색의 지점을 처리하는 능력, 그것이 당시 인공지능 분야의 최대 화두였다. 이 퍼지의 판단은 인간에게는 일상이고 숨을 쉬는 것 만큼이나 간단한 일이다. 당시의 인공지능은 그렇게 간단한 것 조차흉내내지 못하는 아둔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2014년의 로봇들은 인간보다 하등하지 않다. 그네들은 인간을 이미 능가해버렸다. 그들은 이제 신을 흉내내고 있다. 모두 네트워크 때문이다. 머피가 장착된 로봇에는 단지 자체 센서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 뿐만 아니라 유무선 정보통신네트워크를 통해서 전송되는 정보를 모두 저장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 인간의 뇌는 그 정보를 감당할 수 없음을 머피의 발작을 통해 보여준다. 그걸 감당하는 유일한 방법은 도파민수치를 최저로 낮춰서 인간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인간성은 기계의 효율적인 수행에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은 무적의 Skynet 마저 파괴하고 마는데 ...


 


 


두 영화 관람 체험의 질을 결정하는 건 그래서 결말이다. 87년의 로보캅은 적어도 결말에서는 명확하게 입장을 밝힌다. 처음에 머피는 기계의 부품으로 이식되었다. 하지만 그는 기계 신체를 통제하는 주인이므로 그는 OCP의 제품인 로보캅이 아니라 알렉스 머피인 것이다. 머피의 뇌가 아니었다면 그의 신체는 경직되고 아둔한 ED209와 다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2014년의 로보캅은 앞으로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데넷 박사가 설치한 바이패스 회로의 작동에도 불구하고 머피는 더 높은 차원에서 시스템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는 바이패스 시스템을 바이패스 한 셈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로보캅이 한 일들은 머피가 한 것일까, 아니면 신경망 시스템이 해낸 것일까에 대해 답하기는 애매하다. 머피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 과연 있을까? 그게 관객들 눈에도 보였을까?


 


무엇보다 현재의 그는 지극히 시스템 의존적이다. 최소한의 생체만 남긴 탓에 그는 24시간 마다 온갖 항생물질, 신경전달물질이 가미된 새 혈액으로의 교체를 받아야 한다. 만약 이런 그의 약점을 범죄조직이 알게 된다면, 그를 단지 24시간 이상 시스템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만으로도 그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과연 그는 무력화될까. 아니면 죽어버린 생체 속에 숨어있던 진정한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이런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들은 2014년의 로보캅을 보고서는 뭔가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이 남겨진 느낌으로 극장을 나선다.


 


 


 


 


209 와쩌염 뿌우~ ^으^


 


 


3. 자본과 자본가 


 


2014년의 로보캅에서 흥미로운 또 다른 존재는 OCP의 CEO인 레이몬드 셀라스(마이클 키튼)이다. 87년 로보캅의 회장, 올드맨은 지극히 가부장적인 꼰대였다. 반면에 셀라스는 훨씬 소탈하고 인간적이며, 대화가 통하는 존재다. 오히려 그는 적극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소통의 화신이다.


 


그가 데넷 노튼을 움직인 것도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상호호혜적인 관계에 기반한 합의를 통해서였다. 그는 전혀 무자비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기민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에 걸맞는 대안을 찾아내는데 있어서는 매우 유연하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말 그대로 진취적인 자본가로만 보인다.


 


그런데 그가 내리는 결정의 무자비함은 바로 그 특성들에서 나온다. 그는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그에 맞는 새로운 결정을 한다. 법적 제약으로 인해 자기네 제품이 미국시장을 뚫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머피에게 새 삶을 주면서 동시에 마케팅을 구현하는 윈윈전략을 선택했던 그는 상황이 시장 진출이 가능한 쪽으로 바뀌자 다시 유연하게 태도를 바꾼다.


 


 


 


그런데 그 회장의 전직이 배트맨 이라는 게 함정 ...


 


 


“머피를 꼭 살려야 한다”던 그가, “우리 아니었으면 어차피 죽었을 인간 이제 죽일 수도 있지”로 태도를 바꾸는 과정은 지극히 기민하다. 그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에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개인으로서의 그는 한국의 꼰대 기업가들보다는 여러 모로 더 나은 존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결정이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무자비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의 판단에는 쉽게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심정적으로 동의하기까지 하는 관객들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망량의 상자에 등장하는 카나코와 크게 다르지 않은 머피의 본체를 본 관객들이라면, 망량의 상자와 같은 결말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 않겠나. “그래 어차피 그 꼴로 사는 건 사는 것도 아닌데, 기능을 정지시킨다고 해서 더 나쁠 것이 있나?” 게다가 로봇 경찰이 그토록 유능하고 냉정하며 효율적이라면 또 그걸 도입한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이 영화가 제대로 결말을 맺으려 했다면, 순수 로봇 경찰시스템의 치명적인 결함이 명백히 드러나던가 아니면 머피의 우월성이 뚜렷했어야 했다. 만약 인간보다 더 효율적인 법집행자가 구현 가능하다면, 그런 경우에도 인간이 법을 집행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영화가 답해야 하는 질문은 이거였다.


 


그러나 영화는 이에 답하지 않는다. 그저 머피의 일시적인 승리만을 보여준다. 여전히 24시간 마다 혈액투석을 받아야 하는 그는 온전한 주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저 셀라스의 꼭두각시에서 데넷 노튼의 꼭두각시로 바뀌었을 뿐이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