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감 유형의 차이, 세상의 차이: “친구”와 “말죽거리 잔혹사”


우리에게는 누구나 정체감(Identity)이 있다. 정체감이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남들과 어떻게 다른가? 나는 어디에 속해있는가? 내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가? 같은 질문도 역시 이 정체감에 관한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보통 내 이름은 누구이고, 나는 남자이고, 심리학자이며, 사람 구경하는 것과 만화와 게임과 영화를 좋아하고, 이기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을 싫어한다는 식으로 답한다. 이게 바로 내 정체성이다. 그런데 이 정체성을 찾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James Marcia라는 심리학자는 1969년과 1980년에 미국대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로 면담을 한 결과, 자기 정체성을 찾는 방법에는 크게 네가지가 있다고 분류했다.

첫 번째 방법은 사회나 주변 사람이 자기에게 부여한 역할이나 가치관을 그냥 그대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릴적부터 부모가 가라는 학교로 진학하고, 부모가 사귀라는 친구를 사귀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부모가 지정하는 직업을 택하고, 부모가 골라주거나 부모의 심사를 통과한 배우자와 사는 사람이다. 물론 그렇게 살면서도 아무런 의심이나 후회가 없어야 한다. 이런 경우를 정체감 유실(Identity forecloser)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 정체감을 형성하기 전에 이미 다 만들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회나 주변에서 원하는 대로 아무 의심이나 후회없이 열심히 살지도 않는 방법이다.

주변에서 바라는 대로 살기에는 자기 생각이 너무 많지만, 그렇다고 주변의 기대를 뒤집어 엎고 자기 원하는대로 살기엔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젊은 시절에는 꿈이 있었으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다보니 결국 꿈을 접고 하찮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은 모두 이 유형이다. 이런 경우를 정체감 확산(Identity difused)이라고 부른다. 정체감이 한군데에 정리되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있다는 뜻이다. 즉 자기의 꿈과 실제 삶이 다른 사람들이다.

세 번째 방법은 결정하거나 어디에 속하기를 미루고 이것저것 탐색을 하는 방법이다.

학교를 휴학하고 여행을 간다거나, 여기저기에 파트타임으로만 일을 하고(단 자기가 원해서) 정규직을 갖기를 피한다거나, 연애는 여러번 하는데 누구와 정착하기는 미룬다거나 하는 사람들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이것도 정체감 유형중의 하나로 정체감 유예(Moratorium)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이건 결국 뭐든 일단 미루고 보겠다는 방식이다.

마지막 방법은 사회나 주변사람의 기대를 배신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버리고 스스로 인생의 가치를 찾고 갈 길을 추구하는 유형이다.

이런 유형을 정체감 성취(Identity Achieved)라고 부른다. 가장 이상적인 유형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남들 하지 않는 짓을 하는 모난 돌에 해당하기 때문에 정을 많이 맞는다. 즉 고난이 많다는 거다. 그래서 스트레스도 많고, 알콜중독도 많고 속버리고 심장이 고장난 사람도 많다. 물론 용기와 능력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이 중 어떤 방법이 정체감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그 대답은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만약 우리가 사는 사회의 질서와 가치체계가 한동안 계속 유지된다면, 정체감 유실이 최선이다. 부모가 살았던 시대와 내가 살았던 시대가 같은 규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이미 한번 살아본 부모의 말을 듣는게 최선이란 말이다.

뭐, 꼴에 사춘기라고 생각이 너무 많아서 시키는대로 하기엔 마음이 따라주지 못하는 사람은 최소한 정체감 유실이라도 해주는게 편하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더라도 몸은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정체감 성취가 제일 좋을 것 같지만 그건 이론적으로나 그럴 뿐이다.

하지만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서 10년이나 20년 후에는 전혀 다른 식으로 사는 사람이 더 성공한다면, 정체감 유실이나 확산은 최악의 선택이다. 왜냐하면 부모나 선배들의 생각은 가장 현실성이 떨어지게 되니까.

오락실에서만 게임을 할 수 있던 시절을 경험한 부모가 프로게이머 같은 삶을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제작비 1억원 시대의 영화판 만을 경험한 사람들이 평균 제작비 30억원 이상의 영화판의 룰에 적응할 수 있겟는가. 이전과는 다른 룰이 지배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어쨌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남이 하지 않았던 길을 가는 것이 그나마 성공할 확률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누구에겐가 의지해서 남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고 싶어한다. 나 스스로 독립해서 험난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건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

영화 『친구』에서 상택이가 선택한 것도 결국 정체감 확산의 삶이었다.

이 영화에서 신기한 건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은 결국 상택(서태화) 이지만, 그 이야기 속에 상택이 자신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준석(유오성)이와 동수(장동건)다.

언제나 준석이가 뭘 했고, 동수가 뭘 했는지에 대해서만 말한다. 상택이 본인의 이야기는 그 인생을 갈라놓은 극장 사건 빼놓고는 거의 없다. 심지어 자기가 무슨 공부를 하러 유학을 가는지 돌아와서는 어떻게 되었는지 조차도 말하지 않는다.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상택이는 자신의 삶이 아니라 준석이와 동수의 삶을 꿈꾸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범생이 이야기꾼은 오직 마음 속에만 그런 꿈을 담아두고 몸은 부모와 주변에서 기대하는 학삐리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사실, 1960-70년대 당시를 살았던 세대는 거의다 이런 선택을 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저기 먼 곳에 파랑새가 날아다녀도 결국 꿀꿀하고 칙칙한 현실과 살아야 했다.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다른 삶을 살기는 두려웠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택이의 선택이 가장 옳았다. 준석이도 동수도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보라.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가업인 장의사도 버리고 부모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찾아갔던, 정체감 성취에 제일 가까웠던 동수는 수십방의 칼침을 맞고 죽어버린다. “좋건 싫건 시키는 대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크게 고생한다.” 그게 당시의 규칙이었다.

자아감 성취를 향하던 동수

그런데 한 10년 후를 배경으로 한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다른 정체감 유형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주인공인 현수(권상우)는 상택이처럼 우식(이정진)이의 행동을 관찰하고 부러워할 뿐이다. 현수는 반에서 우식이의 위치는 별로 원치 않지만 은주(한가인)를 차지하는 모습만은 뼈저리게 원한다. “내가 아주 힘들게 이루려 했던 걸, 녀석은 너무 쉽게 얻었다.” 라는 말은 현수의 심정을 정확하게 대변한다.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다음에 현수는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변신을 한다. 존재감 없는 범생이에서 학교 사상 최고의 폭력사건의 주인공으로 말이다.

그 변신이 너무 극적이라 설득력이 없다는 평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어쨌건 현수는 운동신경도 좋았고 집요한 열성파였기 때문이다. 그 집요함을 싸움 준비로 방향만 조금 바꾸면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현수의 정체감은 최소한 유실이나 확산의 유형을 벗어나 버렸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정체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반항했다. 그런 면에서 내가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의 주인공 중에서 범생이 출신으로 정체감 성취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녀석이 현수다. 나중에 정말 그가 정체감 성취를 이루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근데 현수의 이 반항은 『친구』에서처럼 처절한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저 퇴학을 당하고 재수를 하는 삶이 주어졌을 뿐이다.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인 세상에서 그 정도라면 처벌도 아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겨났을까?

그 이유는 결국 시대의 차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세상이 『친구』 시절보다는 조금 느슨해지고, 이전의 룰이 먹히지 않는 새로운 시대가 찾아왔기 때문에 현수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가야 할 삶인지도 모른다. 무조건 편안히 기댈 대상이나 가치관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삶 말이다. 그건 자유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아주 고달픈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대에도 자유가 무조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자유의 무게를 짊어지고 스스로 노력할 용기가 있는 자들에게만, 그것도 아주 가끔씩만 행복이 찾아올 뿐이다.



영진공 짱가

 

“망량의 상자”, 처연한 엽기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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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떤 인터뷰에서 요즘 읽은 책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책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이 책, <망량의 상자>라고 대답했다.

교코쿠 나쓰히코의 책은 처음에 <항설백물어>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꽤나 재미있었다. 일본의 설화와 기담을 활용해서 정의를 세우고 다니는 탐정 사기단 이야기다.
 
이들은 귀신을 믿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귀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믿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그 지식을 활용해서 범죄자를 처단하고 정의를 세운다. 처음에는 화자가 오락가락 하는 글쓰기 방식(아, 중간에는 이 말을 누가 하는 건지 정말 알 수 없더라고…)이나 난데없이 지팡이를 쿵 찍으며 뭐라 웅얼거리는 식의 불친절한 이야기 방식에 적응하기가 좀 힘든데, 이야기가 끝날 때가 되면 대충 합리적으로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그렇게 짜맞춘 전체적인 사건의 모양새가 꽤나 참신했다. 이성과 비이성이 적절히 뒤섞인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재미있었고.


<항설백물어> <속항설백물어> <광골의 꿈> 일본어판의 표지들 …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우부메의 여름>을 봤다. 이건 초반이 엄청나게 힘들다. 난삽하다고 해야 할지, 무겁다고 해야 할지 … 의식과 경험과 감각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석을 주요 등장인물인 ‘교고쿠도’의 입을 빌어 강의 형식으로 풀어내니 당연히 힘들다. 등장인물들도 꽤 많은데 이름들이 하나같이 다 그 이름이 그 이름같아서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가면 그동안 여기저기 널어놓은 괴담, 설화, 심리학(특히 정신분석학)적 단서들이 하나씩 연결되면서 속도가 붙는다. 교고쿠도네 헌책방으로 가는 길처럼 중간까지는 엄청 힘들다가 내리막 직전에 현기증이 나고 그 다음에는 일사천리 … 그 결과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아 … 엽기적이었지만 참신했다.

마침내 <망량의 상자>에 이르러서는 전작 <우부메의 여름>이 귀여워보일 정도다.

이제는 기담과 이상심리학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대사와 의학까지 곁들여지고, 벌어지는 범죄의 뒤엉킴도 한 3배쯤 복잡해지며 그 결과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
“처연한 엽기”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책의 뒷맛은 찜찜하고 애잔하면서 끔찍하고 기괴하기 그지없다. 한동안은 정신이 좀 이상해지는 느낌이었을 정도다.

사실은 아직도 나는 ‘호오~’의 잔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 … 그 ‘호오’ … 진짜 소름끼친다. 이 평도 사실 이렇게 글이라도 써 놓으면 그 망량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쓰는 것이다 -_-;;;


원판 소설은 표지가 이런 모양이다 …

이 책이 어떤 면에서 대단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미스테리로서는 결격사유가 많다.

원래 미스테리는 일종의 게임, 저자와 독자가 벌이는 머리싸움이다.
그래서 공평하게 게임을 전개하기 위해서 필요한 규칙이 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아는 것을 독자도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바로 나쓰히코의 미스터리는 바로 이 부분에서 애매하게 반칙을 한다.

<우부메의 여름>이 특히 그렇다.
이 이야기의 화자라는 인간(소설가 세키구치)이 어딘가 나사가 빠진 인간이라서 남들이라면 당연히 보았어야 할 것을 못본다. 만약 그가 제대로 보기만 했으면 이야기는 초반에 끝나버렸을 것이다. 결국 이 미스테리의 트릭은 화자의 눈이 삐꾸라는 점에 있었던 거다. 그러니 사실 이야기의 결말은 꽤나 허탈하고 싱거운 셈이다.

하지만 그 미스테리가 풀린 뒤에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이 워낙 상상을 뛰어넘게 엽기적이라 … 독자들도 그 반칙 트릭을 보고서도 (세키구치 처럼) 모르고 지나치는 일이 벌어진다.

<망량의 상자>는 또 다른 주변인 주인공 기바 형사가 주요 화자로 등장한다.
게다가 얼빠진 소설가 세키구치도 화자로 끼어들고 … 그 와중에 서로 다른 계열의 두 싸이코가 한데 만나서 정말 엽기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

소설의 중반쯤 되면 누군가가 유괴(?)되는데, 나도 그 사건의 트릭은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 내 상상의 수준을 한두단계쯤 뛰어넘고도 또 끝까지 아주 비릿한 엽기의 향취를 풍기며 끝낸다.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처음 책에 등장하는 소설에 담겨있다. 그걸 처음 읽을 때의 느낌과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었을때의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

망량의 상자에서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 중 하나는 특별한 범죄라고 해서 반드시 특별한 사람이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누구나 잠깐씩 망량의 손길이 닿는 순간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정신줄을 놓는 순간이다. 저자에 따르면 범죄는 악인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몇몇 상황의 겹쳐짐에 의해서 발생한다. 우리들 모두는 성장하면서 각자의 욕구를 축적해간다. 그 중에 일부는 몇몇 우연한 만남 탓에 그 욕구가 조금 특이한 방향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동안 축적한 욕구의 충족이 완벽하게 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어떤 순간이 마지막 방아쇠를 당긴다. 그것이 엽기적인 범죄가 되기도 하고, 행복의 완성이 되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는 둘 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망량의 상자에 등장하는 범죄는 모두 끔찍함의 엣지를 달린다. 하지만 알고보면 거기에 진짜 끔찍한 인물은 하나도 없다.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한, 알고보면 조금씩은 처연하고 조금씩은 안타까우며 조금씩은 공감이 가는 인물들이다.

특히 마지막까지 남은 범죄자의 경우가 더 그렇다. 그에겐 정말 별다른 죄가 없다. 그는 그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적응 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짧은 순간 그가 ‘이 세계’가 아니라 ‘저 세계’의 맛을 보면서 그는 엽기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교고쿠도가 말했듯, 행복해지는 방법은 간단했다. 인간이기를 그만두면 되는 거였다.


오른쪽이 저자 교고쿠 나쓰히코

이 책의 저자인 교고쿠 나쓰히코는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다. 미술디자인과 소설을 병행하는데, 공식석상에 손가락 없는 장갑을 끼고 기모노를 입고 나타난다. 거기에 일본의 고대 근대 역사와 각종 기담에 대한 해박한 지식, 거기에 정신분석학에 대한 나름의 깊은 이해까지 녹여냈다는 점에서 이 양반은 일본의 움베르토 에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사건의 구성은 에코보다 한 두 수 위다. 특히 엽기적인 면으로 … 일본에서는 아마도 A급과 B급을 두루 망라하는 문화계의 스타인듯 하다.


이 소설은 만화와 애니매이션, 그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엔 소설보다는 만화가 더 많이 알려진 모양이다.


검색하면 나오는게 이런 이미지들이니 …


하지만 기왕 읽으려면 소설을 읽으시길 추천한다.

영진공 짱가

지능검사의 역사 (2), 지능과 우생학을 연결시킨 프랜시스 갈톤

동식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전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는 팥이 나기 마련이다. 좋은 품종의 종마가 천문학적인 가격을 갖는 이유는 바로 그 말이 좋은 품종의 자손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요크셔테리어의 새끼는 요크셔테리어가 되고, 리트리버의 새끼는 리트리버가 되기 마련이다. 온순한 고양이의 자손은 온순하고, 까탈스러운 고양이의 자손은 역시 까탈스럽다.

동식물이 이러한데 사람인들 다를까? 바보의 자손은 바보이고 천재의 자손은 천재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데 최초로 이런 생각을 과학적으로 검증해보려고 시도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프랜시스 갈톤 경(Sir Francis Galton)이었다.
 



보통 이 사진으로 알려져 있는 갈톤 경 (1822-1911)

갈톤은 1822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찰스 다윈(C.Darwin)의 사촌이기도 하다. 사실 그는 다윈보다도 더 “많은” 업적을 남긴 학자였다. 그는 탐험가로서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최초의 정밀 지도를 제작해서 영국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을 수상한 지리학였으며, 탐험의 경험을 기초로 아프리카 여행안내책자와 서바이벌 가이드를 써서 명성을 날린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영국각지에 사람을 보내서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기압과 날씨를 동시에 측정함으로써 세계최초의 기상도를 만들었으며, 고기압과 저기압이 어떻게 날씨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연구했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의 기상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과학수사에도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사람들마다 손가락의 지문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해서 런던 경찰청으로 하여금 세계 최초로 ‘지문 수사기법’을 도입하게 한 장본인이다. 지문 연구에서도 얼핏 알 수 있듯이 갈톤의 주된 관심사중 하나는 사람들 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차이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인지였다.
 



젊은 시절 갈톤의 모습


그의 사촌 찰스 다윈의 젊은 시절 모습, 나름 꽃미남 …


우리가 아는 찰스 다윈의 노년기 모습 …

갈톤은 당시 영국의 귀족들이 그렇듯, 경마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우생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우생학은 영국에서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학문이다. 영국은 오래 전부터 경마가 발달했는데 경마는 결국 얼마나 훌륭한 경주마를 키워내느냐에 달린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좋은 말을 키워내기 위한 오랜 노력의 결과, 영국 사람들은 일찍부터 좋은 경주마의 후손이 더 좋은 경주마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물의 경우 품종에 따라 여러 가지 특성이 유전되듯, 사람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갈톤은 이 예측을 실제로 확인해보고자 했다. 다시 말해 정말 천재는 천재를 낳고 바보는 바보를 낳는지를 알아보려한 것이다.

갈톤은 먼저 개개인의 지적 능력과 신체적 능력을 조사하기 위해서 세계최초로 설문조사지를 개발했다. 간단히 말해서 키와 성격, 취향 그리고 다양한 특성들(몸이 얼마나 날랜지, 숫자 계산을 잘 하는지, 시를 암송하는 능력 등등)에 대한 질문이 씌여진 종이를 대량 인쇄했다. 갈톤 이전에는 이렇게 같은 질문들을 여러장 인쇄해서 사람들에게 뿌린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없었다.

그의 설문 조사 대상자는 자기가 알고 지내는 친구나 친지, 고용인들이었다. 이들에게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자식에 대해서 각각 설문문항에 응답해서 반송해달라는 편지와 함께  설문지를 두 장씩 우편으로 보냈다. 이렇게 180여건의 아버지와 아들 쌍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는 아버지 세대와 자녀 세대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그래프로 그려봤다. 표기방식은 아주 간단했다. 2차원 그래프를 그리고 X축은 아버지 세대의 특성(키, 성격, 취향, 지능)을, Y축은 자녀 세대의 특성을 표기하는 것이었다. 만약 아버지 세대의 특성이 자녀 세대로 유전된다면, 이 그래프는 정확히 45도 각도로 그려져야 했다. 예를 들어, 키 큰 아버지가 똑같이 키 큰 아들을 낳고, 키 작은 아버지가 키 작은 아들을 낳는다고 치자. 그러면 그래프는 아래와 같은 식으로 그려져야 한다.
 



원칙적으로는 위너 아들은 위너, 루저 아들은 루저 …

그럼 조사 결과는 어땠을까? 그게 참 묘했다.

우선 아버지 세대의 특성이 자녀 세대에게 나타나는 경향은 분명했다. 아버지의 키가 클수록 아들의 키도 크고, 아버지의 키가 작을수록 아들의 키도 작았으며, 아버지가 명민하면 아들도 명민했고, 아버지가 멍청하면 아들도 멍청했다. 아버지의 특성과 아들의 특성을 교차한 점들을 하나로 묶어보면 거의 일직선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 각도는 45도가 아니었다. 특성에 따라 각도가 다 달랐지만 대략 30-40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즉, 키 큰 아버지가 키 큰 아들을 낳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 아들의 키는 아버지보다는 조금 작은 경향이 있었다. 반대로 키 작은 아버지의 아들은 키가 작기는 해도 아버지 만큼 작지는 않았다. 지능도 마찬가지였다. 멍청이의 아들은 조금 덜 멍청했고, 천재의 아들은 조금은 덜 명민했다. 그러니까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조금 더 평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실제는 위너 아들은 덜 위너, 루저 아들도 덜 루저 …

첫 번째 현상, 즉 아버지 세대의 키가 아들 세대의 키와 관계가 있는지를 통계적으로 보여주려는 방법은 상관관계(correlation) 분석이라는 통계기법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현상, 세대가 교체될수록 어떤 특성은 점차 평균에 가까워지는 현상은 평균으로의 회귀현상(regression effect)이라고 불린다.

평균으로의 회귀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야구 선수들을 예로 들어보자. 시즌 평균타율이 2할인 선수가 어떤 경기에서 4타수 2안타로 2할 5푼의 타율을 기록했다면, 그는 다음 경기에는 자기 평균 타율보다 낮은 성적, 즉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이전 경기에서 자기의 시즌 평균 타율에 비해 낮은 성적을 올린 선수라면 그 다음 경기에는 펄펄 날 가능성이 더 높다.

학업 성적도 비슷한데, 어떤 시험에서 갑자기 평소보다 높은 성적을 받은 학생은 (그가 특별히 효과적인 공부 방법을 새로 발견했거나 갑자기 엄청나게 학습의욕이 높아지지 않은 한) 그 다음 시험에서는 평소보다 오히려 더 낮은 성적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것들은 모두 평균으로의 회귀 현상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엄청난 노력을 해서 실제 실력이 나아졌다고 확신할 수 없다면, 일시적으로 성적이 좋아졌다고 희희낙락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다음에 찾아올 평균으로의 회귀 현상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갈톤의 연구는 이후 현대 심리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변인간의 상관관계 분석’과 ‘개인차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우선 현대 심리학 논문의 대부분은 서로 다른 둘 이상의 변인이 얼마나 관계가 깊은지를 분석하는 연구로 채워져 있다.

예를 들어, 부모의 양육방식이라는 변인이 자녀의 성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컴퓨터 게임을 하는 시간과 학업 성적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와 같은 식이다. 이런 둘 이상의 변인간의 관계를 통계적으로 확인하는 연구방법은 모두 갈톤이 발견한 상관관계와 회귀법칙에 그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다.

두 번째로 현대 심리학은 개인차에 관한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심리학의 주요 연구주제인 지능, 성격, 기질, 가치관 등 모두 사람들 간의 차이를 다룬다. 그리고 갈톤은 이런 개인차를 유전으로 설명해보려고 시도한 거의 최초의 학자였다. 그의 연구 뿐만 아니라 이종사촌지간인 다윈과 갈톤이 모두 뛰어난 학자였다는 사실 자체가 증명하듯, 지능에는 유전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오로지 이것에만 집착하면 문제가 생긴다. 실제로 지능의 유전, 지능의 우생학에 대한 믿음은 나중에 미국 이민국의 한 꼴통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 덕분에 지능검사는 매우 괴상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했다.

영진공 짱가

부모가 귀찮은 일을 많이 할수록 아이는 올바르게 성장한다.


아기를 키우다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다른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걷고 뛰고 먹는 등 자기 몸 하나는 가누는
것에 비해 아기는 도대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똥오줌도 못 가리고 엄마 젖 빠는 것도 서투르며 걷기는커녕 자기
머리조차 가누질 못한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수 없는 존재로 이 세상에 떡하니 나온 것이니 배짱 하나는 두둑하다.

이런
인류가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고 오히려 번성하고 있으니 정말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뭔가 초월적인 존재가 뒤를 봐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너무도 불완전하게 태어나는 아기를 보면 어떻게 이런 존재가 자연을 정복하고 우주의 기원을 밝히며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립자를
찾아내는 등 고도의 지능을 가진 완전체로 자랄 수 있는지 신기하다. 과연 인류의 어떤 능력이 이런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요즘에도 종종 신문에는 늑대라던가 원숭이 등 동물들에 의해 길러진 아이가 발견됐다는 기사가 실리곤 한다. 이런 아이들은 대부분
인간의 특성을 잃어버린 채 동물과 같은 행동을 한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그렇다면 과연 인류의 특성은 환경에 의한 것인지 유전에
의한 것인지 궁금해 졌다.


1927
년 심리학자였던 윈스럽 캘로그는 이것을 밝히기 위해 침팬지를 인간의 가정에서 아기와 함께 키우기로 한다. 사실 아기를 침팬지들
사이에서 키우고 싶었지만 그런 미친 짓을 과학계와 사회가 승낙할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팬지와 함께 키우게 된 아기는 놀랍게도
10개월 된 자신의 아기였다. 물론 캘로그의 아내는 개념을 원숭이에게 팔아버린 남편의 제안에 적극 반대하였지만 결국 남편 이기는
아내 없다고 이 실험은 행하여진다.


침팬지 구아(Gua)와 인상파 도널드



캘로그 부부는 항상 침팬지 구아(Gua)를 사람의 아이로 다루었고 그들의 아이인 도널드와 같은 애정을 쏟고 똑같이 가르쳤다. 똑같이
포옹해주고 뽀뽀해주고 산책을 시키고 수저사용법과 변기사용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 실험은 불현듯 9개월 만에 중단된다.

캘로그는 이 실험이 왜 중단하였는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후 심리학자 루디 벤저민이란 사람이 이 실험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실험 결과 침팬지 구아는 예상을 뛰어넘어 인간의 환경에 훨씬 잘 적응하였다.

도널드보다 말을 더 잘 들었고, 똥도 먼저 가렸다.
여러 가지 모습에는 도널드보다 더 나았던 것이다. 하지만 도널드는 한 가지 점에서 만큼은 구아보다 우월했다. 그건 바로
모방이었다.


구아는 모든 면에서 도널드보다 나았다. 

영화 혹성탈출은 결코 허구가 아니었다!


도널드는 구아의 행동과 말을 그대로 따라했다. 구아가 장난감 놀이를 하면 그것을 그대로 따라했으며 구아가 먹이를 달라고 할 때
내는 소리도 완벽하게 따라했다. 실험이 끝났을 때 19개월이었던 도널드는 단 세 개의 낱말만을 알고 있었다. 즉 윈스럽 켈로그는
침팬지를 인간으로 키우려 했지만, 거꾸로 인간을 침팬지로 키우고 말았던 것이다.


많은 교육 전문가들과 육아서는 부모가 아이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고 침을 흩뿌리며 이야기한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려면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다정한 아이로 키우려면 부부사이에 항상 다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단다. 다 지 잘되라고
시키는 것인데 그걸 내가 또 몸소 보여야 하다니 참으로 언행일치란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실험에서 보았듯이 이제는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가 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였고 인류 부흥의 원동력이었다. 부모가 귀찮은 일을 많이 할수록 아이는
그만큼 올바르게 성장하며 지구의 평화는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 이미지 출처

 http://www.psy.fsu.edu/history/wnk/ape.html입니다.

이 사이트에서 당시 촬영했던 동영상과 함께 실험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참고서적 

매드 사이언스 북, 레토 슈나이더, 뿌리와 이파리, 2008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