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수다떨기 (2), 잔인성에 대하여



Q. 지난 주에는 영화로 보는 ‘사랑’에 대한 심리, 다각도로 알아보면서 재미있는 시간 가졌는데요, 이번 주 주제는 ‘연쇄살인범의 초상’입니다. 그냥 살인범이 아니라 연쇄 살인범, 꼭 하나씩 하나씩 죽이는 게 더 잔인한데요?

– 많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에는 크게 대량살인과 연쇄살인이 있습니다.
대량살인은 미국에서 종종 벌어지는 총기난사 같은 경우입니다. 단 한 번에 많이 죽이는 거죠. 이런 대량살인은 극단적인 좌절과 분노가 폭발한 결과입니다. 자기감정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살인이라서 미리 예고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변 사람들이 그 감정을 알아주지 않으면 결국 터지는 거죠. 대량살인은 대개 한번으로 끝납니다. 사건과 함께 범인도 자살하는 경우가 많고요. 이건 비록 끔찍한 살인 범죄지만 어느 정도는 인지상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죠. 우리도 가끔 확 다 뒤집어엎고 싶을 때가 있쟎아요.

근데 연쇄살인은 대량살인과는 전혀 달라요. 연쇄살인자에게는 살인이 일종의 라이프 스타일이예요. 흡연자가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처럼 살인을 끊지 못하는 거죠. 살인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고, 초기에 잡지 못하면 은폐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지능적인 연쇄살인자로 발전하죠. 물론 절대 자살하지 않지만, 누군가 자기를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듯 단서를 남겨두거나 자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와는 아예 다른 종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간단히 말해 사람처럼 보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예요.

Q. 참 끊임없이 매력적인 영화 소재에요. 언제 어디서 어떤 이웃이 그 그물망에 들어올지 모른다는 점에서 공포감과 함께 스릴도 있는, 그리고 주로 실화여서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는, 그런 이야기라 영화의 소재가 되지 않나..하는데요, 끊임없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 이유, 뭐라고 보시나요?

–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 함께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연쇄살인자들이 포악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겁도 많고 차분하고 조심스러운데 사람 죽일 때만 무자비하거나, 명랑하고 쾌활한데 바로 그런 쾌활함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 왜 <추격자>에서도 살인자가 피해자에게 정과 망치를 들이대면서도 “괜찮아 괜찮아 …” 이러면서 달래잖아요. 전혀 살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인거죠.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도 그래요. 그는 무자비한 식인 살인마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양면성 때문에 인기를 얻었죠. 실제로 테드번디라는 미국의 어떤 유명한 연쇄살인자는 팬클럽까지 있었고 결혼하겠다는 여자들도 몇 명 있었어요.

Q. 연쇄 살인범에 관한 이야기, 저는 지금 떠오르는 건 <살인의 추억>과, <양들의 침묵>, <공공의 적> 등이 떠오르는데, 장박사님은 어떤 영화들 기억나나요?

저는 <행복했던 여자> 라는 영화가 기억납니다. 91년도 영화인데 코미디 배우로 유명한 골디 혼과 <나홀로 집에>의 자상한 아버지로 익숙한 존 허드라는 배우가 주연인데, 처음에는 이 남자가 정말 흠잡을데 없이 좋은 남편으로 나와요. 그러다가 갑자기 사고로 죽죠. 그래서 전 이 영화를 행복했던 여자가 남편을 잃고 고생하는 이야기인줄 알았거든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죽은줄 알았던 그 자상하던 남편이 사실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사회병질자였던거예요. 그런 줄 모르고 봐서 더 무서웠어요.


골디혼만 보고 방심하고 들어갔다가 벌벌 떨며 봤던 영화, “행복했던 여자”

Q. 연쇄살인범, 악취미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심리학적 관점에서 연쇄살인자의 심리,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 그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존재라고 생각해요. 존 더글라스 라고 프로파일링 기법을 창시한 FBI의 심리분석관이 쓴 <마인드 헌터>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연쇄살인자들은 공통적으로 어릴 적에 야뇨증, 동물학대, 방화 중 한 가지를 꼭 저질렀다고 하더라구요. 물론 이런 경험이 있다고 전부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이나 감정이 상식을 벗어나는 것은 분명해요.

<텍사스 전기톱 살인>의 모티브가 되었던 실제 연쇄살인자 에디 게인은 자기가 살해한 시신들을 마치 짐승 사냥한 것 처럼 해체해서 집안에 여기저기 걸어두었대요. 마치 사냥한 사슴이나 호랑이 머리를 벽에 걸어두는 것처럼 사람 얼굴을 걸어둔 거죠. 근데 또 그 사람이 붙잡혀서 감옥에 있을 때는 아주 착한 모범수였다고 하더라구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존재인거죠.


더글러스의 책을 기초로 만들어진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Q. 생각만해도 정말 끔찍한데요, 이미 그들에겐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이는 것이겠죠? 연쇄살인자의 동기도 그러고보면 딱히 원한이나 복수가 아닐 때가 많아요?

대부분의 상식적인 살인은 동기가 있죠. 원한이나 치정 같은 거요. 그래서 살인범죄의 7-80프로는 면식범의 소행이라고 해요. 이런 살인범은 정황증거나 원한관계를 뒤지다 보면 결국 잡혀요.. <살인의 추억>에서도 송강호가 그러쟎아요. 대한민국은 땅이 좁아서 열심히 발로 뛰어다니다 보면 결국 잡힌다고. 근데 연쇄살인범은 달라요. 이 작자들은 상식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거든요. 원한 같은 게 원인도 아니고요.

Q.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것에 비롯된 난국 영화 <추격자>에서도 잘 나타나죠. 이미, 범인은 밝혀졌는데, 여러 가지 정치적인 타이밍과 정확한 물증 확보 지연으로 피해자가 더 생겨요. 아주 안타까운 경우였어요.

관객들도 손에 땀을 쥐고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설정이죠. 따지고 보면 그런 설정이니까 영화가 성공한 거 아니겠어요? 초반에 딱 잡혀버리면 단편영화 되고 말쟎아요. 재미도 없고.

Q. 이런 류의 영화를 보다보면요, 물론 끝까지 살아남아야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영화 속 범인들, 머리가 아주 비상하거나 운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쇄살인범의 기질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초기에 잡힐 겁니다. 덕분에 그들은 연쇄살인자가 되지 못하는 거죠. 잡혔으니까.

근데 가끔 초기에 안 잡히는 인간들이 나와요. 머리가 좋거나, 운이 좋거나, 너무 외모가 멀끔해서 의심을 안 받거나… 등등의 이유 때문이죠. 이렇게 수사망을 빠져나간 인간들이 범죄를 반복할수록 기술이 늘고, 그러다 보면 갈수록 더 잡기 어려운 존재가 되는 거죠. 소질도 있고 기술도 늘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게다가 이들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존재들이라 상식에 의존한 수사로는 오히려 잡기가 힘들어요.

영화 <추격자>에서도 설마 집 마당에 시체를 파묻으랴 했지만, 정말로 집 마당에다 파 묻었잖아요. 머리가 대단히 좋아서가 아니라 상식을 벗어나니까 의도하지 않게 허를 찌르는 셈이죠.

Q. 영화 <추격자>의 독특함! 아마, 살인마 영민에게 관객의 연민을 부추길 만한 어떠한 살해동기도 부여하지 않는 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해요. 보통은 살인범에게도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어서 동기부여가 되잖아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편들지 않더라구요?

그렇죠. 영화를 보면 이 영화 감독이 연쇄살인범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게 드러나요. 영화에서 보면 경찰 조서에 범행동기가 없으니까 서장이 채워넣으라고 하잖아요. 근데 아까 말씀드렸듯 연쇄살인자들은 특별히 동기랄 게 없거든요. 동기 없는 범죄에 동기를 묻는 불합리를 지적한 거죠.

이렇게 억지로 동기가 뭐냐고 묻다 보면 “컴퓨터 게임 때문 이예요 … 호환마마처럼 나쁜 영화를 봐서요 … 어린 시절의 심리적인 충격 어쩌고 하는 식의 변명들이 나오는 거죠. 그럼 괜히 게임회사 폭탄 맞고 … 사람 죽인 걸로도 모자라 두루두루 폐를 끼치죠.


프라이멀 피어 …

Q. 그리고 보통, 형사들이 더 험악하고, 이들은 참 꽃미남인 경우가 많아요.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 씨나, <추격자>의 하정우 씨, <프라이멀 피어>의 에드워드 노튼, 모두 전혀 험악한 인상이 아니죠?

영화에서야 대비효과나 관객을 헷갈리게 하려는 의도로 그런 캐스팅을 할테지만, 실제 세상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면, 얼굴 험악한 사람들이 의외로 순하고 착해요. 그 사람들은 얼굴만으로 이미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니까 성격까지 험해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연쇄살인자들은 정 반대죠. 실제로도 연쇄살인자들이 순하고 연약해보이거나 잘생긴 경우가 많아요. 피해자가 경계할 만큼 무서운 인상이면 오히려 연쇄살인을 저지르기 힘들쟎아요. 게다가 이 사람들은 양심이 없어서 죄책감도 없고, 그러니까 표정에 구김살이 없어요. 그래서 모르고 보면 좋은 집에서 고생 없이 자란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요.


그러니 꽃미남을 조심하라 …

Q. 그러면 이런 연쇄살인자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 할까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뇌의 작동방식 부터 조금 다르죠.

하지만 그들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냐 하면,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인류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념이나 국가나 종족, 혹은 신의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대량살인이 저질러져왔거든요. 즉, 우리의 마음 속에는 살인자의 본능이 있는 셈입니다. 그 본능은 언제 눈을 뜨냐 하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할 때입니다. 따지고 보면 연쇄살인자도 그렇잖아요. 연쇄살인자들은 공감능력이 없습니다. 남들과 자신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는 거예요. 사람도 짐승취급 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도 공감능력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연쇄살인자와 크게 차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반대로 공감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의 인간성 역시 확장될 겁니다.

불교를 아시는 분이라면 이걸 충분히 이해하실 거예요. 부처님은 세상 만물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귀중하게 여겼죠. 즉 그분이 위대한 것은 날벌레 한마리와도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종종 그런 마음을 가지곤 해요. 집에서 키우는 개와도 공감하고, 고양이나 새와도 공감할 수 있죠. TV나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인간인 겁니다.


이때 이야기를 기초로 쓴 추격자 평 -> http://kr.blog.yahoo.com/psy_jjanga/1460810

Q. 네, 오늘 이런저런 영화 속 심리학, 연쇄살인범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되었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구요, 다음에는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기다려볼까요?

초능력이 어떨까요? 최근에 개봉한 <점퍼> 라는 영화나 <데스 노트> 시리즈도 모두 초능력에 대한 것들인데, 이것도 우리의 심리를 드러내는 재미있는 주제거든요.



영진공 짱가

“프리다”, 그러나 내가 알던 프리다 칼로가 아니다

어떤 영화는 기특하게도 문장을 수정하는 일도 별로 없이 짧은 시간 내에 주루룩  리뷰를 잘도 쓰게 만든다. 그리고 어떤 영화는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함에 뭔가 주절주절 쓰고 싶은 생각을 아예 거둬가 버리기도 한다. 또 어떤 영화는 너무 많은 자극을 주는 바람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차마 짧은 끄적거림으론 감당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프리다”는 이도저도 아니게 영화를 본 당일은 글을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다시 지우면서 몇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엔 몇 가지 아이디어 마저 다 지워버리게 만드는 제 3의 경우, 가장 안좋은 경우다. 예전에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를 보고도 비슷한 난처함에 빠졌었는데 결국 무리를 해서 당일에 간단한 메모만 적어놓고 본편은 시작할 생각도 못하고 지나가 버린 기억이 있다. (아… 또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려니 또 같은 증상이 반복된다. 그래서 한바퀴만 더 돌아가기로 하겠다.)

프리다 칼로의 생을 다룬 이 전기영화는 근현대 미술 작품들에 관한 본격적인 관심을 쏟았던 내 대학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까미유 끌로델”이나 “바스키아”, 그리고 최근의 “폴락”과 같은 빼어난 전기영화들을 기억하게 만든다. 또한 실존했던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들을 다룬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부가적인 만족감에 관해 다소 시니컬한 목소리로, 물론 그런 영화들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나 자신의 속물 근성에 대한 자기 고백과 함께, 한차례 언급하고 싶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가뜩이나 미국내 대중문화 시장에서 차지하는 히스패닉계의 위상이 만만치가 않은데 “프리다”라는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그 상위 시장에까지 세력을 뻗쳐보려는 수많은 멕시코 출신 영화인들의 노력에 관해 비교적 너그러운 시선으로 몇마디 해주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아이디어들 가운데 어떠한 것도 “프리다”에 관한 나의 정확한 느낌을 전달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사실 영화 “프리다”를 통해 본 프리다 칼로는 이전부터 내가 알던 프리다 칼로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다. 그녀의 작품과 일화들에서 느껴지는, 저 심연의 밑바닥에서부터 울리는 고독과 아픔을 “프리다”는 너무 밝은 색조로만 채색해 버렸다는 생각이다. 샐마 헤이액의 한계가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위대한 제 3세계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한 여인의 생을 영화화하는 데에 너무 많은 스타들이 참여한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프리다 칼로를 모르던 이들에겐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좋은 참고 자료로서, 그리고 멕시코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를 전세계에 소개하는 데에 “프리다”는 매우 성공적일 수 밖에 없는 방향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적어도 처음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을 보고 받았던 그 충격적인 생경함과 두려움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영화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본 프리다 칼로의 전기영화에는 프리다 칼로가 보이지 않았다고.

역설적이게도 나는 “프리다”를 두시간 동안 재미있게 보았다. 참 잘 만든 영화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애쉴리 저드, 에드워드 노튼, 제프리 러쉬, 그리고 알프레드 몰리나까지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에 대한 내 오랜 기억이 이 영화에 대해 알듯 모를듯한 이상한 표정을 삐쭉거린다. 따라서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불평일 뿐이지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참고하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듯도 싶다.

영진공 신어지

인크레더블 헐크 (The Incredible Hulk), “속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노튼의 헐크, 잘 어울린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이안 감독의 2003년작 <헐크>의 속편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오프닝 크레딧이 흐를 동안 2003년작 <헐크>의 줄거리를 매우 빠른 컷들을 통해 제시하지만, 이 컷들에서 보이는 브루스 배너와 베티 로스는 에릭 바나와 제니퍼 코넬리가 아닌 에드워드 노튼과 리브 타일러다. 오프닝 크레딧이 끝나고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공간적 배경은 <헐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릭 바나의 브루스 배너가 머물고 있던 곳, 브라질이지만 이후 영화의 성격은 <헐크>와 다른 길을 간다. 분명 <인크레더블 헐크>는 <헐크>가 가지 않았던 길을 향해 가는 블록버스터이다. 그러나 <헐크>가 이전에 쌓아놓았던 성과를 굳이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않은 채 심지어 일정 부분을 계승하기까지 한다.


2003년 개봉했을 당시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는 다소 유보적인 평가를 받았고 일각에서는 저주에 가까운 혹평을 들었던 <헐크>에 대한 논의를 되짚어보면, 블록버스터라는 장르(블록버스터를 ‘장르’라 부를 수 있다면)가 새삼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확인할 수 있다. 저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는 말은 참 복잡한 여러 가지 뜻을 전제하고 있다. 다른 지점에서 성취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진지한 평론가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블록버스터에 대해 내용이 없다는 둥 플롯이 단순하다는 둥 의례히 회의적인 태도를 갖기 마련한 사람들도 정작 복잡하고 진지한 내용이 담긴 블록버스터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다른 기준을 갖다댄다는 것이다. 블록버스터는 다소 단순하고 쉬우며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과연 당시 <헐크>에 대한 평을 보면 미국사회에 대한 은유라는 둥, 고전적인 희랍비극의 틀을 가져온다는 등의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블록버스터들, 특히 슈퍼히어로나 안티히어로의 이야기 중 신화적 요소가 없는 작품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체로 모든 블록버스터들은 평범한 / 유약하던 주인공이 힘을 갖게 되거나 뜻밖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권위있는’ 악당과 싸우게 되는데, 저 권위있는 악당이란 곧 ‘아버지 세대’ 혹은 기득권의 비유가 아니던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외디푸스의 신화는 변용되기 마련이고, <헐크>는 그걸 좀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뿐이다. 브루스 배너의 적은 자신의 아버지(‘매드 사이언티스트’ 타입)일 뿐만 아니라 베티의 아버지, 즉 썬더볼트 장군이기도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좀더 섬세하고 감성적인 브루스 배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좀더 지적이고 불쌍한 브루스 배너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가지 극단적 인격이라는 측면에서 보통 ‘지킬과 하이드’ 모티브로 주로 해석되는 헐크의 이야기에, 이안이 강력하게 가미한 것은 ‘미녀와 야수’ 모티브이며, 소위 ‘문명화’라는 과정을 통해 야수성을 억압 혹은 거세당한 현대 남성에 대한 은유이기도 했다. 네바다 사막에서 탱크와 장갑차와 헬기를 장난감처럼 때려부수던 헐크는 베티 로스에게 향하는 먼 길을 돌아오면서 그녀 앞에서 비로소 진정을 찾고 브루스 배너로 돌아온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에서 이안 감독은 DVD 코멘터리를 통해 “누가 뭐래도 이 영화는 사랑 영화죠.”라며 능청을 떤다. 이것이 비극적인 것은 가정으로의 귀환 본능, 혹은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를 브루스 배너가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그는 그녀와(혹은 그 누구와도) 결코 가정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는, 레이건 시대의 강력하고 권위적인 우파 아버지 세대로부터 억압당한 클린턴 시대의 유약한 그러나 더 능력있는 리버럴한 젊은 세대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이안 감독은 그가 헐리웃에서 영화를 만들 때 견지하는 예의 그 태도, 즉 ‘카메라를 든 인류학자’로서 꼼꼼하게 인간과 사회의 본성을 통찰하고 기록하는 태도를 이 영화에서도 드러낸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실은 철저하게 미국 안으로 들어갔던 다른 블록버스터와 달리 이 영화가 오히려 미국 바깥에서 마치 지구인을 관찰하는 화성인 과학자처럼 코믹스 문화와 슈퍼히어로를 대하는 미국 대중들의 관심과 호감을 문화인류학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는 태도가 헐크라는 안티 히어로와 충돌하는 지점을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충돌이 과연 ‘서로 융합되지 못한 채 따로 노는’ 어색함일까? 아니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매우 ‘생산적인 균열’인 것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키스 한 번 하지 않는 커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하는 커플


<인크레더블 헐크>가 <헐크>를 계승하는 지점은 역시 미녀와 야수 모티브를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줬다는 것, 그래서 심지어 <킹콩>을 닮은 장면마저 등장한다는 점이다. 억눌린 현대 남성의 폭발이라는 측면은 오히려 <헐크>의 근육질 에릭 바나보다 <인크레더블 헐크>의 비쩍 마른 에드워드 노튼에게 더 잘 어울린다. 안 그래도 얼굴이 날카롭고 턱이 뾰족해 어딘가 불쌍해 보이는 노튼이다. 노튼이 각본을 매만진 <인크레더블 헐크>는 노튼의 이 왜소한 몸매를 이용한 유머가 여러 번 등장한다.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온 뒤 늘어나고 찢어진 바지 허리춤을 붙잡고 다 찢어진 엉덩이와 허벅지를 노출하며 그토록 불쌍한 거지꼴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장면은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브루스가 헐크가 됐을 때 벌이는 파괴는 <헐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헐크와 에밀 블론스키(어보미네이션), 두 번째 대결 (<인크레더블 헐크>)


나는 이안의 <헐크>를 매우 좋아하지만(나중에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DVD를 비싼 값을 주고 샀을 정도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헐크> 식의 장중하고 품위있는 이야기의 무게를 뺀 대신 <헐크>에서 약했던 쾌감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유머와 타격감이다. 우리가 ‘헐크’라는 녹색괴물을 둘러싸고 종종 킬킬대며 주고받는 농담이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아주 유효적절하게 들어가 있다. 아무리 해도 찢어지지 않는 헐크의 바지는 <헐크>에서도 농담거리이긴 했지만, <인크레더블 헐크>에선 좀더 노골적인 농담으로 여러 번 드러난다. 브루스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허리가 늘어나는 바지를 선호하며 심지어 뚱뚱한 아주머니의 널찍한 엉덩이에 바지를 대보기까지 한다. 고무줄 몬뻬 ‘보라색’ 바지에 대한 농담은 또 어떤가. 심지어 헐크를 둘러싸고 차마 대놓고 하지 못했던 성적인 농담마저도 영화에서 유머로 등장한다. 그토록 사랑하지만 베티와 브루스가 섹스할 수 없는 이유를 대놓고 묘사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게다가 타격감. 헐크가 어보미네이션과 싸우는 장면뿐만이 아니라, 그가 경찰차를 둘러 찢어 무기처럼 사용한달지 하는 장면에서 주는 타격감과 파괴감의 쾌감이 아주 크다. 건물을 부수고 도로를 엉망으로 만드는 장면들이 <헐크>에선 다소 만화처럼 가벼운 무게감으로 묘사된 반면, <인크레더블 헐크>에선 육중한 무게감과 둔한 타격감을 자랑하며 파괴의 쾌감이 더 크게 전달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금 보면 역시 ‘그림’스럽다. (이안의 <헐크>)


무엇보다도 <인크레더블 헐크>가 <헐크>보다 뒤에 나왔기에 유리한 점은 바로 그 사이에도 눈부시게 발전한 CG의 덕을 톡톡히 봤다는 것.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는 브루스 배너가 헐크로 변하는 그 과정, 혹은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오는 과정의 신체적 변화를 바로 눈앞에서 재현시켜 준다. 이는 스턴스 박사를 찾아간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고소영, 정우성이 주연했던 <구미호>에서 “앞으로 CG 기술이 발전하면 묘사될 수 있는 장면”이라 상상되었던 바로 그 몰핑 기법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근육 하나하나, 힘줄 하나하나가 변화는 그 과정을 보는 건 매우 경이롭다. 대낮의 컬버대학 교정에서 장갑차와 헐크가 싸우는 장면은 어떤가. 비록 피부 표현에서 여전히 CG 티가 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빛의 방향과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명암의 변화가 아주 자신만만하게 눈앞에 표현된다. 정점은 바로 <킹콩>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밤에 번개가 치고 비가 퍼붓는 장면에서의 헐크가 묘사된 것이다. 비록 여기에서 킹콩의 피부는 시종일관 회색으로 표현되어 역시 그림같다는 느낌을 여전히 주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피부결이나 번개가 칠 때마다 근육질이 움직이는 방향이 매우 세심하게 표현된다.


역시 이야기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인크레더블 헐크>보다 <헐크>에서 좀더 은근하고 깊은 재미를 느끼는 게 사실이지만, <인크레더블 헐크>가 주는 말초적인 감각의 쾌락 역시 쉽게 폄하하지 못할 요소이다. <헐크>와는 다른 노튼 식의 유머 역시 점수를 높게 줄 수 있는 부분. 노튼 옵빠가 블록버스터에서 낭비될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브루스 배너에 이 정도의 멋진 숨결과 개성을 불어넣은 건 역시 노튼이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물론 나는 에릭 바나의 브루스 배너 역시 좋아하지만, 역시 노튼의 브루스 배너가 한 수 위였음은 부정할 수가 없겠다. 문제는 역시 연출인 게지. (이안 만세!)


영진공 노바리

ps1. 마지막 장면에서 녹색눈으로 씨익 웃는 노튼 오빠의 압도적인 표정. 꺄악~!

ps2.
팀 로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아저씨가 서른 아홉이란 건 좀 사기…

ps3.
컬버대학 교정에서 싸울 때 헬기에서 박격포를 쏘자 헐크가 자신의 온몸으로 베티를 화염으로부터 막아내는 장면, 이 장면은 두 번째 볼 때도 참 짠하면서 애절하더라.

ps4.
대놓고 레슬링 흉내라니. “Hulk Smashhhhhhh~!!”에서는 정말 눈앞에 만화 말풍선이 튀어나오는 듯했다. 게다가 역시 헐크는 미녀 앞에서 무지하고 순진한 바보 머슬이었… (귀여워!!)

ps5.
마지막에 깜짝 등장하는 토니 스타크는 어쩐지 <아이언맨> 때보다 더 사악한 악당으로 보인다.

“인크레더블 헐크”로 배우는 싸움의 법칙



감독: 루이스 레테리에


출연: 에드워드 노튼, 리브 타일러, 팀 로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싸움의 법칙 부록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첫째, 코피 나면 지는 거다.


둘째, 울면 지는 거다.


셋째, 먼저 흥분하면 지는 거다.




이는 한 번의 주먹질, 한 번의 발길질에 승부가 갈리는 냉혹한 싸움의 세계에서 순간의 마음의 흐트러짐이 곧 패배를 부른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게다. 영화 속 두 마리의 녹색 아드레날린 덩어리가 맞붙어 호각세를 이루던 이 승부의 갈림길에서도 어김없이 이 싸움의 법칙은 적용된다.
 


후욱~후욱~ 릴렉스…릴렉스…


헐크의 상대가 누구인가. 이미 산전, 수전, 공중전, 우주전까지 치른 백전노장 프로페셔널이 아니던가. 그가 뽕까지 맞음으로서 힘의 우위마저 무의미해진 상황. 헐크의 패배는 눈에 보듯 뻔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백전노장은 몸집만 컸지 싸움의 초짜배기인 헐크에게 무릎을 꿇는다. 어찌된 영문일까.

.
.
.
.
.
.
.
.
.
.
.
.
.
.


 




헐크씨~ 그딴 자식 한큐에 날려버려요!

 




너..너도…..여친 있었어? 부럽삼…..


넷째, 부러워하면 지는거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