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이후의 이순신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은 이유

<허핑턴 포스트> 한국판의 8월 6일 기사, “‘명량’ 이전의 이순신 영화들 : 이순신 때문에 전 재산을 투자한 배우는 누굴까?” 에 따르면 우리나라 이순신 영화는

등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1977년 이후 제대로 된 이순신을 영화관에서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저위에 천군같은 뭐 이상한 코메디 영화들 말고 …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나타나듯이 한국에는 거의 하늘이 내린 기적과 같은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이란 인물을 제대로 표현만 하면 대박이 난다.

김훈의 소설(2001년)이 “명량”의 원작인데 당시 얼마나 세상이 뜨거웠는가를 생각해 보면 왜 13년이나 지난 지금 굳이 “명량”이 제작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칼의 노래”를 원작으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아주 잘 만든 TV드라마가 이미 그 분위기를 다 가져가 버리기는 했다.

그러다보니 “명량”에서의 해전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해전이 더 좋다는 사람도 많다.

어찌됐든 이순신 영화를 제대로 만들면 대박이 난다는 것은 거의 잘 알려진 수학공식과 같다. 게다가 “칼의 노래”라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시나리오도 이미 존재하고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 “명량”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해 보자면 그 원인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는데,

1. 제작비: 굉장히 많이 든다. 게다가 어설프게 돈쓰면 이건 죽도 밥도 안되기 때문에 엄청나게 써야 한다.

2. 배  우: 사실 이순신 장군 역할을 제대로 해 낼 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다. 김명민은 연기가 좋긴 하지만 너무 젊다.

3. 감  독: 마땅한 감독이 없었다. 사극을 잘 만든다는 감독이 있었지만 전쟁씬을 잘한다는 감독이 그동안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최종병기 활”이라는 조선식 액션영화가 나오고, 게다가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나름의 역사관이 표출된다. “조선은 백성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내 누이는 내가 구한다.” …

“명량”은 이 세 가지 측면이 해결되었을뿐만 아니라 “칼의 노래”에서 글로 보았던 이순신 장군을 영화관의 큰화면으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게 만든 사회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열망은 실로 대단했다. “소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말과 함께 명량해전으로 사실상 나라를 구원한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던 열망이 13년 만에 터져 나온 것이다. 게다가 최민식의 이순신 역할이었으니.

이건 이미 천 만 관객이 들 조건을 갖추고 시작한 것이다. 개봉 시 CGV가 상영관을 많이 깔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 만으로 천 만이 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 한국 역사에서 이순신은 거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인물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이 전쟁에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했던 짓은 절로 한숨 나고 몸둘바를 모를 정도이다.

사실상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조정은 정규군을 궤멸시키고 명나라 군대에게 나라를 되찾아 달라며 떼쓰는 것말고는 했거나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 와중에서 정규 군대가 왜를 물리친것은 이순신 장군의 전투 밖에는 없었다. 행주산성 전투는 실은 민초들이 힘겹게 싸워서 이긴 전공이고 말이다.

그러고도 조선은 과거의 잘못을 거울 삼아 발전은 커녕 극복조차 하지 못하고 다시 병자호란으로 또 한 방에 한양이 털리게 되고, 나중에는 전쟁조차 하지 않고 종이에 싸인하고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는 허망한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그런 역사 속에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거대한 자존심이고 가슴 벅차게 만드는 인물이기에 우리는 비록 극장 안에서나마 그에게 열광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명량”에서 이순신 영화는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량 이후 정유재란은 너무나도 비참했고 왜와 강화를 맺으려고만 하는 명나라와

임진왜란이 난지 7년이 다 되어서도 제대로 된 육군도 없는 조선이 명나라 뒤에서 찌질하게 구는 모습을 봐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적의 전투선 450여 척을 깨부순 노량해전이라지만 거기에서 이순신장군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영진공 기적

“파리 대왕”, 죽음을 부르는 사회의 자화상

 

 

 

 

동급생에게 집단폭행 당한, 인천의 한 중학생 정신과 치료 2013.06.17

인천의 한 중학생이 학교에서 동급생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한 뒤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치료를 받고 있다. 지난 4월 3일 인천청라중학교 1학년 강모(13)군이 체육시간에 남의 옷을 밟았다는 이유로 운동장에서 동급생 5명에게 집단폭행 당했다. 강 군은 땅에 떨어진 옷을 실수로 밟은 점을 사과했지만 이들은 다음날 더 많은 학생들을 교실로 데려와 강 군을 때리는 등 모두 20여차례에 걸쳐 폭행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가해 학생들은 여학생들까지 데려와 강 군이 맞는 모습을 구경하도록 하는가 하면 음식쓰레기를 강제로 입에 넣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10대 5명이 여중생 집단폭행…경찰 조사 2013.05.16

경기 의정부경찰서는 또래 여중생을 집단 폭행한 혐의로 16살 전 모 군과 16살 김 모 양 등 10대 5명을 붙잡아 조사하고 있습니다.  전 군 등은 지난 11일 오후 6시쯤 의정부동의 한 골목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중학교 2학년 14살 김모양을 집단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행인이 112에 신고한 것을 눈치채고 달아났다가 출동한 경찰관들의 수색 끝에 붙잡혔습니다. 조사 결과 이들 중 일부는 이틀 전인 9일에도 포천의 한 다리 밑에서 김 양을 폭행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김 양을 강제추행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촬영했다는 주장이 학교 자체조사에서 제기돼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사할 계획입니다. 김 양은 코뼈 등을 크게 다쳐 수술을 받고 현재 입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작년부터 올해까지 제 머릿 속을 지배하는 단어는 <전체주의 사회>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지메의 구조”라는 책을 보면서 깜짝 놀란 부분이 있었는데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전체주의 사회화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에서는 이런 구조를 <중간 집단 전체주의 사회>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전쟁과 같은 특수한  때 일반적 시민법이 통하지 않는 소규모 집단에게 자치를 하도록 내버려두면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가장 대표적인 영화로는 “파리 대왕”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시민법이 통하지 않는 자치적 사회의 특징은 <심리적 거리를 둘 수 없는 환경>이 제일 큰 문제라고 하더군요. 마치 우리나라의 학교나 군대처럼 말이죠.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함께 억지로 친근해질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결국 보스-추종자-평민-노예 그룹으로 나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왕따를 괴롭히는 “그들만의 축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말이죠.

 

내부의 법이나 규칙도 외부와 달라서 학교는 학교법이 군대는 군법이 일반 헌법이나 시민법보다 우위에 있게 됩니다. 금 “정봉주의 전국구” 듣다가 경악한 게 군대 내의 사법체계에서는 사단장이 판결까지도 바꿀 수 있답니다.

 

 

 

 

 

대개 폭력이나 괴롭힘의 양상은 아래와 같더군요.

1. 분노하는 신 (폭력으로 약자를 눌러버람) – 무자비한 폭행

2. 주인 노예 (언제든 굽신거리며 주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함)

   – 심부름, 셔틀, 무엇이든 하도록 시키는 짓

3. 장난치는 신(치약먹이기, 바퀴벌레먹이기, 이상한 짓 시키기)

   – 윤일병에게 한 짓들, 학교에서 왕따에게 이상한 짓 시키기등

 

결국 이 비정상적인 환경을 제거하지 않거나,  일반 시민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 이상 학교와 군대에서는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내면까지 변화시킨다는 얘기였고, 그 사회 바깥으로 나오면 자기가 거기에서 왜 그런 짓을 하고 살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주부터 이번주까지 내내 군 자살 사건, 사망사건이 끊이지를 않는걸 보면 그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2013년 6월 17일의 기사를 보면 자신의 지위를 알리기 위해 다른 반 애들에게 구경까지 시키면서 저렇게 하고 있었답니다.

전 세월호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내부 규칙이 시민법의 규칙보다 우위에 있는 집단-그게 바로 관피아겠죠. 정당 내부의 규칙 역시 여기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전 안철수나 김한길도 이 관점에서보면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즉 자기들의 규칙이 그 어떤 일반적 시민사회의 규칙보다 우선인 사회 말이죠.

 

 

 

 

 

저런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정에서도 자주 보입니다. 부모의 말도 안되는 규칙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많이 반복됩니다. 그 안에서는 평등한 시민사회의 규칙보다는 얼핏 보스와 노예같은 상태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다시 철저히 그런 사회로 편입되고, 군대에 가면 한번 더,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도 또 한번 더, 그 자신이 가정을 가지면 또 그렇게 하겠지요.

 

이러한 때에 싸워야 할 적은 뭘까요?

유교적 고정관념일까요? 아니면 폐쇄적인 가족주의의 병폐?

해답을 찾고 있지만 답이 잘 나오질 않네요 …

 

 

 


영진공 신샘

 

 

 

 

 

 

 

 

 

 

 

 

 

 

 

 

 

 

 

 

 

 

 

 

 


 

“슈퍼 히어로의 정치학”, “킥 애스”가 보여주는 시민의식


 

 

 

“보수”란 당대의 사회 시스템을 인정한다는 말이며 지배체제를 인정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옳다’, ‘그르다’로 재단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한 시스템은 적어도 그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한 질서의 유지 측면에서 이해되고, 이 ‘질서’는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의 안정성을 담보해주는 것이기에 큰 의미를 가집니다.

 

한국 사회에서 살인은 5년 이상 ~ 무기, 또는 사형의 처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살인을 최대한 꺼리게 되겠죠. 하지만 사회가 자신을 지속가능할 정도의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이런 규칙을 슬금슬금 어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회체계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회구성원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최대한 잘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보수는 과연 그럴까요? 대한민국 형법 31조는 살인교사를 살인 행위자와 같게 처벌할 것을 요구하지만, 20명 이상을 죽인 유영철은 잡힌 즉시 신속하게 사형 판결이 나온데 비해, 어떤 이들은 십 수 년이 지난 후에야 가까스로 사형을 언도받고 결국 사면받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나오는 것일까요?

 

 

 

 

국가가 자신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야만 합니다. 그 중 하나가 피치자들에게 권선징악의 이데올로기를 심어놓는 것이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착한 일을 한다고 꼭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한다고 꼭 벌을 받는 것도 아닌 게 현실입니다.

이 때 지배자가 등장합니다. 지배자는 “하늘을 대신하여” 처벌을 내립니다. “하늘을 대신”한다고는 하지만 까놓고 보면 이는 자신의 지배 시스템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죠.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늘을 대신한다”는 증명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죠. 이 때문에 지배자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냅니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하늘”에서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늘”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눈을 빌면, 그들에게는 모르는 것이 없겠죠.

그래서 그들은 “하늘을 대신한 응징”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응징”은 일정 정도의 홍보효과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태고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처형은 하나의 축제, 혹은 구경거리와도 같은 성격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런 ‘일벌백계’를 통해 시스템의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런 관행을 수퍼맨과 배트맨에서 봅니다. 수퍼맨과 배트맨은 악당을 죽이기도 하지만, 피치못한 경우가 아니라면 악당을 경찰서나 교도소에(재판도 없이!) 쳐 넣습니다. 담벼락이나 기둥에 묶기도 하지요.(사실 제대로 그들을 넣었다 해도 현실이라면, 입증문제로 인해 영화에서처럼 간단하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군요. 비합법적 수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게 슈퍼 히어로 무비의 세계니까요.)

 

조용하게 해결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상징하는 코스튬과 온갖 퍼포먼스를 이용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홍보”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는 보이지 않지요. 그들의 정체는 ‘시스템’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최소화합니다.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그들의 탐지를 피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정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비난받을 일도 없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인데 수퍼맨은 뭐 하는 것이냐?”라는 푸념에도 클라크 켄트는 어디에도 없지요.

결국 수퍼히어로란 계몽주의의 산물인 셈입니다. 그들은 완벽하며 강하고 인간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진리가 되었죠. 마치 성서의 모든 문구가 진리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 논파의 방법에 불과합니다. 고대에는 국왕이 신의 아들임을 역설함으로써 지배이데올로기를 공고화했다면, 근대는 지식을 통해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형식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지배체제를 강화했습니다. “계몽”은 개인을 위한 것이기 전에 국가를 위한 것이었고, 이는 한글의 필요성과 용비어천가를 통해서도 매우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죠.

 

 

 

허나 아무리 영웅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한 사람의 영웅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수퍼맨이 지구를 사랑한 것은 지구가 그나마 그럭저럭 돌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시민사회의 단결이 흐트러지지 않은 세상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재미있는 히어로가 있는데 바로 “킥 애스”와 “스파이더맨”입니다.

스파이더맨 2편의 피터 파커는 지하철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정신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어린 아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하철의 시민들은 모두 그를 구하기 위해 모여들고, 심지어는 악당에게 도전하기도 합니다. 영화가 영화니만큼 폭력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킥애스라는 영화를 보면 얘기가 좀 달라지게 됩니다.

 

킥애스의 주인공은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냐”라는 탄식에서 별 능력도 없는 주제에 수퍼히어로 짓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진짜 수퍼히어로를 만나게 되죠. 하지만 세상을 바꾼 것은 힛걸 한 사람이 아니라, 수퍼히어로 모임이었습니다. 사회에서는 그저 평범한 혹은 평범 이하의 힘을 가진 Loser들이었지만, 그들이 힘을 모으자 그들은 더 강해졌습니다. 아픔과 피해도 있었지만, 승리를 쟁취한 것은 ‘시민들’이었죠.

 

 

 

 

이렇게 “연대의 승리”라는 면을 잘 보여준 게, “반지의 제왕” 2편입니다. 각 종족들은 처음에는 “나완 상관없다.”는 식으로 연대를 거부하지만, 이웃의 피해를 보고 그 피해가 자신들의 일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연대해서 승리하지요. 그래서 반지의 제왕은 멋진 정치 드라마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현실로 돌아와보면, 우리는 삶의 주체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주변부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엘리트도 중심부의 인물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주변인일까요? 주변인인가 아닌가는 주체가 서는 곳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나의 삶은 나에게 있어서 중심입니다. 아무리 ‘그들’의 수퍼웨펀이 나를 한순간에 제거할 수 있다 할 지라도, 내 삶의 주체는 결국 ‘나’이지요.

프랑스 혁명 이후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여러 부침을 거쳐 그들이 갖는 권위는 신분적 권위가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권위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주님’에게 절하는 사람들도 없고, ‘악수’를 거절하는 정치가도 없습니다. 사회의 자원을 많이 가진 자들에게는 오히려 의무만이 있을 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스템은 잘 굴러가며, 오히려 여러 국가들의 모범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그 동력이 ‘시민의식’에 있다고 봅니다. 그게 아주 대단한 것이 아닌, 규칙을 지키려 애쓰고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식하는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챙기는 의식이죠.

 

최근의 영웅물 중 이 ‘시민사회’ 부활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라면 저는 “스파이더 맨”과 “킥 애스”를 꼽습니다. 옳지 않은 자들에게 옳은 자들의 연대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의 수퍼히어로가 가지는 의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슈퍼 히어로가 대개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존재임에도 인기가 있는 이유는 매우 당연하게도 그들이 “제대로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강하지만 자신의 힘을 타인을 억압한다거나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남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자칭 타칭 “보수”라 불리는 이들의 모습은 과연 어떤가요?

 

 

 

영진공 바보아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