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이후의 이순신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은 이유

<허핑턴 포스트> 한국판의 8월 6일 기사, “‘명량’ 이전의 이순신 영화들 : 이순신 때문에 전 재산을 투자한 배우는 누굴까?” 에 따르면 우리나라 이순신 영화는

등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1977년 이후 제대로 된 이순신을 영화관에서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저위에 천군같은 뭐 이상한 코메디 영화들 말고 …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나타나듯이 한국에는 거의 하늘이 내린 기적과 같은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이란 인물을 제대로 표현만 하면 대박이 난다.

김훈의 소설(2001년)이 “명량”의 원작인데 당시 얼마나 세상이 뜨거웠는가를 생각해 보면 왜 13년이나 지난 지금 굳이 “명량”이 제작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칼의 노래”를 원작으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아주 잘 만든 TV드라마가 이미 그 분위기를 다 가져가 버리기는 했다.

그러다보니 “명량”에서의 해전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해전이 더 좋다는 사람도 많다.

어찌됐든 이순신 영화를 제대로 만들면 대박이 난다는 것은 거의 잘 알려진 수학공식과 같다. 게다가 “칼의 노래”라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시나리오도 이미 존재하고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 “명량”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해 보자면 그 원인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는데,

1. 제작비: 굉장히 많이 든다. 게다가 어설프게 돈쓰면 이건 죽도 밥도 안되기 때문에 엄청나게 써야 한다.

2. 배  우: 사실 이순신 장군 역할을 제대로 해 낼 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다. 김명민은 연기가 좋긴 하지만 너무 젊다.

3. 감  독: 마땅한 감독이 없었다. 사극을 잘 만든다는 감독이 있었지만 전쟁씬을 잘한다는 감독이 그동안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최종병기 활”이라는 조선식 액션영화가 나오고, 게다가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나름의 역사관이 표출된다. “조선은 백성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내 누이는 내가 구한다.” …

“명량”은 이 세 가지 측면이 해결되었을뿐만 아니라 “칼의 노래”에서 글로 보았던 이순신 장군을 영화관의 큰화면으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게 만든 사회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열망은 실로 대단했다. “소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말과 함께 명량해전으로 사실상 나라를 구원한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던 열망이 13년 만에 터져 나온 것이다. 게다가 최민식의 이순신 역할이었으니.

이건 이미 천 만 관객이 들 조건을 갖추고 시작한 것이다. 개봉 시 CGV가 상영관을 많이 깔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 만으로 천 만이 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 한국 역사에서 이순신은 거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인물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이 전쟁에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했던 짓은 절로 한숨 나고 몸둘바를 모를 정도이다.

사실상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조정은 정규군을 궤멸시키고 명나라 군대에게 나라를 되찾아 달라며 떼쓰는 것말고는 했거나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 와중에서 정규 군대가 왜를 물리친것은 이순신 장군의 전투 밖에는 없었다. 행주산성 전투는 실은 민초들이 힘겹게 싸워서 이긴 전공이고 말이다.

그러고도 조선은 과거의 잘못을 거울 삼아 발전은 커녕 극복조차 하지 못하고 다시 병자호란으로 또 한 방에 한양이 털리게 되고, 나중에는 전쟁조차 하지 않고 종이에 싸인하고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는 허망한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그런 역사 속에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거대한 자존심이고 가슴 벅차게 만드는 인물이기에 우리는 비록 극장 안에서나마 그에게 열광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명량”에서 이순신 영화는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량 이후 정유재란은 너무나도 비참했고 왜와 강화를 맺으려고만 하는 명나라와

임진왜란이 난지 7년이 다 되어서도 제대로 된 육군도 없는 조선이 명나라 뒤에서 찌질하게 구는 모습을 봐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적의 전투선 450여 척을 깨부순 노량해전이라지만 거기에서 이순신장군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영진공 기적

“가오갤”, 유쾌한 찌질이들이 은하계를 수호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Guardians of the Galaxy)라는 은하수호대는 이름이 너무 길어 그냥 가오갤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들의 활약을 보면서 어쩌면 시저도 못한 세계정복을 디즈니는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오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옹골차게 유머를 주입하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심지어 그 진지할 수밖에 없어야 할 클라이막스의 위기상황에서도 이들은 유쾌한 유머로 위기를 헤쳐나갑니다.

 

그런점에선 정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위대한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캐릭터들의 특색이 황홀할 정도로 가지각색인 데다가 그 종류도 애정이 깊이 들만큼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레미제라블”과 “겨울왕국”을 강하게 이끌어줌으로써 흥행에 성공시킨 장점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도 가지고 있는데요.

 

그건 바로 음악입니다. 80년대의 히트곡들을 모아서 절묘하고 흥겹게 배치시켜 놓아서

가뜩이나 유머에 즐거워하던 관객들의 흥을 더욱더 돋게 만듭니다.

하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이 장점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안이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마블 코믹스가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고 있으며 발전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전혀 창의적인 발상이 없습니다. 스토리는 너무 밋밋하고 별 볼일 없으며 세계관의 확장으로만 이용됩니다. 그래서 화려한 영상은 단지 스토리의 부실함을 감추기 위한 겉치레로 전락해 버렸고 영상미마저 색이 바라게 됩니다. 

 

 

 

 

 

게다가 캐릭터들의 특색은 있지만 그 깊이가 너무 얕습니다. “어벤저스”는 그 영화를 위해 이전부터 캐릭터 고유의 영화를 억지로라도 만들어서 (그래도 그다지 깊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어벤져스 팀에 깊이를 부여했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전혀 아닙니다.

 

새로운 영웅들에게 새로운 활약을 위한 목적의식을 심어주기엔 그들은 너무 어중이떠중이들입니다. 우정타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우습구요. 결국,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연이은 흥행으로 인한 마블의 오만함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더도말고 덜도말고 오락블록버스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는 4D로 봤는데 영화 도중 얼굴에 물을 (기분나쁠정도로) 쏟아붓는 장면이 3개 정도가 있고 우주선의 움직임을 표현하느라 쓸데없이 움직여대는 의자에, 액션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격하게 움직여서 안경추스르느라 오히려 액션이 보이지 않았던 점은 정말 최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그저 여름을 잠시 잊게 할만한 오락영화 입니다. “윈터 솔져”를 기대하였지만 이 영화는 그저 유머감각이 좋아진 “트랜스포머”일 뿐이었습니다.

 

하나 더 아쉬웠던 점은 영화가 청소년 관람가라 그런지 등장인물의 몇몇 재미있을 드립을 직역해서 번역하여서 좀 더 찰지게 전달되지 못한 점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유머감각은 정말 최고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영화 중 최고의 드립

-지금 뭐하는 거지?

-댄스배틀!

 

 

영진공 샤인제이드

 

 

 

 

 

 

 

 

 

 

 

 

 

 

 

 

“님포매니악”, 성애의 외피에 암시와 비유를 담은 영화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애호가 성애자와 함께 “님포매니악” 볼륨 1 마지막 상영날 볼륨 1만 보고 2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볼까 하는 마음으로 감상하였는데 … 딱 재미난 부분에서 볼륨 1이 끝나더군요! 마치 임성한 작가의 끊기 신공을 보는 듯한 신묘한 타이밍이었습니다. 동시에 머리를 움켜쥐고 악! 하는 짧은 비명을 토한 뒤 우리는 홀린듯이 볼륨 2를 예매했고 사이좋게 커피 하나씩 빨면서 도합 5시간동안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를 보러가기 전에 친구가 너무 겁을 줘서 지루할까봐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기덕같은 감독이라면서, 서사적인걸 별로 안좋아하면 엄청 지루할거라고 겁을 얼마나 주던지 … 그런데 실제로 영화를 보니 생각 이상으로 설명을 잘 해주는 아주 친절한 영화더군요.

 


그리고 김기덕과 비슷한 점을 저는 거의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서사적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할지 모르겠지만 … 소설로 치면 문체가 아예 다른건데, 그 둘을 비슷하다고 하거나 비교를 하거나 하는건 서로에게 실례가 아닐까 하여 친구놈 뒤통수 때려주려다 참았습니다. 아무튼 볼륨 1, 2를 통틀어서 인상깊었던 부분을 몇가지 꼽아보겠습니다.

 


 


1. 어린 조와 친구 B, 유아의 성

 


저는 예전부터 유아~청소년의 성욕/ 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5~6살, 조숙한 아이들은 4~5살때부터 자위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게 단순히 문지르는 방식이든 압박 자위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건 그들이 성기를 통해 쾌감을 얻을 수 있다는걸 배운다는 거죠. 친구들과의 놀이나 자신의 몸을 스스로 만져보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게 되거든요.

 


 




그런데 어른들은 보통 유아의 성을 억압하고 통제하려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숫제 부정하는 반응을 보이죠. 왜냐하면 불편하니까요, 아이는 어디까지나 순수하고 예쁘게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벌써부터 발랑 까진(?) 더러운 것부터 배우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전 아이들이 순수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정상으로 보일 정도로 쾌감에 집착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아동의 수준에 적합한 올바른 성교육을 조금 일찍 실시해 성욕의 통제법이나 발산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게 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아무튼 각설하고 영화에서 짧게나마 유아의 성욕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충격적인 동시에 느끼한 치즈 피자먹다가 사이다마신 기분이 들더군요. 대단히 신선했습니다.


 


 


2. 위선과 본능의 첨예한 대립

침대에 앉아서 밀크티를 홀짝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조에게 샐리그먼은 때때로


상관없는 사족같은 이야기들을 하죠. 그것도 매우 공돌이스러운 이야기들요, 조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3 + 5 라는 숫자를 듣고 피보나치 수열 이야기를 아주 거창하게 한다던가, K의 이야기에서 매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등산 로프 이야기를 한다던가 하는 식이죠.

 




그리고 동방교회 서방교회,클래식 음악, 성화 등 다양한 장르의 지식을 뽐내는 굉장히 현학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한편, 조의 ‘니그로’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보이는 등 지극히 상식적인 모습과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인물이 마지막에 조에게 한 행동은 인간의 이성은 별로 쓸모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조는 샐리그먼과의 대화에서 자신은 위선을 아주 싫어한다고 했죠. 그리고 샐리그먼에게 조목조목 반박해주고 싶지만 피곤하다며 관둬버리고요. 그 대신 단 한발의 총성으로 모든 것을 명쾌하게 해결해버리죠.

 


 



조가 샐리그먼을 살해하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능을 상징하는 조가 위선과 이성을 대변하는 샐리그먼을 처단함으로써 인간의 이성과 위선이 얼마나 가증스러운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하나는 야한 영화라는 기대감을 품고 영화관을 찾은 뭇 남성들에게 … ‘짜샤, 이건 그딴 영화가 아니니까 냉수나 먹고 속이나 차려라!’ 하는 감독의 일침으로도 볼 수가 있겠죠.


 


사실 저 혼자 보러 갔다면 첫번째 의미로만 받아들였겠습니다만 같이 관람했던 남자사람 왈, ‘샐리그먼이 조를 겁탈하려다 사살당하는 장면에서 사실 엄청 뜨끔하고 부끄러웠다’고 하더군요. 자기의 조그마한 흑심이 다 까발려진 느낌이라나요.

 





3. 부녀관계와 에로티시즘




조는 아버지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아버지와의 산책, 물푸레 나무를 바라보던 추억, 영혼의 나무 이야기..마치 그 둘은 소울 메이트같은 느낌을 주죠. 어떻게보면 마치 연인같이 풀밭에 같이 누워 하늘을 보는 등 아주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반면 어머니와의 관계는 무미건조하다못해 차갑습니다. 조가 어머니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어머니는 계속 등을 돌리고 트럼프를 하는 옆얼굴 정도만 나올 뿐, 카메라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하는 장면은 안나오더군요. 심지어 어머니더러 COLD BITCH라고 하는 부분에서 조금 섬뜩할 정도로 냉담한 모녀 관계를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조와 아버지의 관계는 사실 전형적인 일렉트라 콤플렉스를 볼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많은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특히 아버지가 악몽에서 깨어나 조에게 매달리는 장면에서 흐르던 미묘한 성적 긴장감은 저만 느낀게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


 


 


4. 삼각관계 




P와 조의 관계는 시작부터 불안했던 관계였습니다. 애초에 자연스럽지 않은 인위적인 만남으로 시작되었으니까요. 조는 P에게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추억들을 고스란히 전달해주면서 P와 천천히 교감을 하게되죠. P 또한 의지할 곳 없던 자신에게 다가와준 조에게 신뢰를 보내면서 제법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는 아버지와 미묘한 성적 긴장감이 있었음에도 아버지를 끝까지 아버지로 대했죠. 하지만 P는 부모같은 존재였던 조와 육체 관계를 맺습니다. 저는 이게 조와 P의 차이를 보여준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롬과의 삼각 관계는 조의 가족들과 오버랩되는 감정구도를 형성하죠.


 



친밀한 딸과 아버지, 그리고 냉담한 어머니 VS 조의 연인이자 딸인 P와 옛 연인 제롬, 그리고 조의 구도. P가 제롬의 집으로 수금을 하러 다니는 동안 느닷없이 트럼프를 시작하는 조의 모습을 보면 제롬과 P, 조의 삼각관계와 조의 가족들이 대치되는 구도로 느껴집니다.


 



조 = p

아버지 = 제롬

어머니 = 조


 

조금 오버스럽게 해석하자면 조가 트럼프를 시작하는 장면은 조가 어머니를 딸로서 조금쯤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표현한 장면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기에는 조와 어머니의 관계 묘사가 너무 생략되어 있어서 확실하게 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러닝타임이 각 두시간 반쯤 되는 아주 긴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화면에서 쏟아지는 여러가지 암시와 함축된 비유들을 읽어내기만도 버거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볼륨 1은 대부분의 극장에서 이미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기회가 되면 꼭 두 편을 연달아 관람하시길 권합니다. 1만 보신다면 저처럼 머리를 감싸쥐고 비명을 지르실 거고, 2편만 보신다면 전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하실 거니까요.

 


 



 


 


 


영진공 내개인듯내개아닌내개같은너


 


 


 


 


 


 


 


 


 


 


 


 


 


 


 


 


 


 


 


 


 


 

“왕좌의 게임”, 너희들은 주인공이 아니야!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또는 “불과 얼음의 노래(A Song of Ice Fire)” 저자인 조지 쌍알(R. R.) 마틴을 소개하자면 이 할배는 1948년 미국 뉴저지주 베이욘의 빈민가 출신으로 어머니는 아일랜드인, 아버지는 이탈리아 혼혈이었답니다. 처음 만든 이야기가 자기가 기르는 거북이들이 자꾸 죽는 걸 보고 거북이들 사이에 흉흉한 음모와 모략이 펼쳐지는 이야기였다니 참으로 꾸준한 양반입니다. 마블코믹스 광팬으로 출판사에 독자투고로 시작해서 미국버전 동인지 작가로 글쓰기를 시작하여 이후 SF 단편소설로 등단했고 휴고상, 네뷸러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범상치 않았는데 주로 판타지와 호러를 섞은 SF를 썻고, <환상특급> <맥스 헤드룸>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이 왕좌의 게임에도 거대 장벽과 그 장벽에서 작동하는 기계들 같은 SF적 요소가 많이 나오죠. 

왕좌의 게임을 요약하자면 “복잡한 스토리라인 속에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만들어놓고 이들이 멋진 대사를 치게 하고는 죽여 버리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쌍알 마틴 옹이 “나한테 잘해. 안 그러면 다음은 티리온 차례가 될거야. (Be Nice To Me Or Tyrion Is Next)” 라는 팻말을 들고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되었는데, 정말 그러고도 남을 인간입니다. “나한테 다음 권이 언제 나오냐고 누가 물어볼 때마다 스타크家 애 하나씩 죽일거야”라고 협박하는 사진도 있고요.

 

 

 

“이번엔 내 차례인가?”

 

 

왕좌의 게임이 인기 있는 이유도 사실 그 때문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늘 긴장해야 하죠, 누가 어느 순간 갑자기 죽을지 모르니까요. 원래 주인공은 안죽고, 죽더라도 뭔가 의미있게 죽는 게 대부분의 소설들의 불문율인데 여기선 안 그럽니다. 그냥 갑자기 그냥 막 뜬금없이 죽어요. 즉, 이 소설은 판타지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를 처참히 박살내는데, 그럼으로써 그 어떤 판타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현실감을 느끼게 합니다. 개x끼들이 권력을 잡고 다 질 것 같던 전쟁에서도 이기고 약자들은 죽고 배신자들이 떵떵거리고 잘 사는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정치판의 현실이 떠오르기도 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판타지물의 전형은 톨킨 옹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J.R.R. 톨킨이 북유럽의 옛 설화들을 수집하고 조립해서 새로 만들어낸 유럽설화의 집대성판인데요, 이 양반은 189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살다가 73년에 사망했으므로 19세기부터 20세기를 산 사람입니다. 1925년부터 195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헌학과 언어학 교수로 재직한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그가 만들어낸 호빗과 휴먼과 엘프와 드워프와 마법사, 그리고 드래곤과 오크와 기타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세계가 이후 모든 서양판타지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SF쪽으로 전환되어서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기본 틀이 되었고, 게임으로 전환되면서는 테이블 보드 게임에서 시작해서 “디아블로”나 “울티마 온라인”, “워크래프트”, 우리나라의 “리니지”의 바탕이 되었고요. <무협소설>이 중국문화권 사람들이 꿈꾸는 신화의 표현이라면, 이 반지의 제왕 속 판타지 세계는 영국미국 문화권 사람들이 공유하는 신화입니다.

 

 

 

“마이 프레셔어스으리~

 


사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북유럽의 옛 설화들과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으로 장식된 1, 2차 세계대전의 판타지적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영국은 인간들과 엘프, 드워프로 구성된 반지원정대를, 사우론은 히틀러를, 사루만은 그 꼬붕인 무솔리니쯤을 상징하는 셈이고요, 인간 같지 않은 오크들은 식민지 주민들이나 일본사람들 쯤을 상징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우리에겐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선포된 계기라서 꽤 그럴듯한 전쟁 같지만, 사실 따져보면 양쪽편 다 식민지들 더 많이 차지하려는 싸움질이었고요. 이건 2차 세계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식민지를 많이 갖고 있거나 더 이상 가질 필요 없는 나라(미국과 영국, 뒤늦게 소련) vs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해서 식민지를 마구마구 필요로 했던 나라들(독일, 일본, 이태리)간의 싸움이었던 거죠. 물론 2차 세계대전에서는 그놈의 히틀러와 나치가 인종청소라는 엽기적인 짓을 저지른 덕분에 선과 악의 전쟁처럼 보이지만 사실 미국이나 영국이 히틀러가 나쁜 놈이라서 전쟁을 한 건 아니었고, 히틀러를 죽였다고 해서 악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가 2차 대전 덕분에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그런 것을 제외하고 나면 1차 대전은 약 1천만 명이 죽었고, 2차 대전은 약 5천 만명이 죽어나간 비극일 뿐입니다. 사실 2차 대전 정리과정에서 지금의 중동 갈등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지금 테러가 난무하는 세상이 된 거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반지의 제왕”은 신화이지만, 동시에 역사에 대한 거대한 왜곡물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모든 신화들은 다 이런 속성이 있죠. 우리는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지면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합니다. 그 사건을 이야기 구조로 바꾸어서 기억하게되고 그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하는 어떤 의미나 교훈은 그런 과정에서 추출되는데, 예를 들자면 “사필귀정”, “역사는 정의의 편이다.” 뭐 이런 거 말이죠.

허나 “왕좌의 게임”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왕좌의 게임은 지금까지 판타지에 대해서 기대하던 것들을 하나씩 배반하는 이야기입니다. 드라마 속에서도 배반이 마구 벌어지지만 이야기 전체에서 의미나 교훈을 찾으려는 독자와 시청자들의 노력에 대한 배반은 그보다 더합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들: 정의, 원칙, 명예, 용기, 신의/성실, 심지어 지략이나 돈, 권력 조차도 소용이 없는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이 드라마의 모토는 “가차없는 세상”이지요.

 

 

 

 

 

 

 

원래 판타지 영화의 원칙대로라면 스타크 가문이 주인공일테지요. 위에 언급한 가치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들이니까요. 하지만 이들이 작살나는 건 모두 바로 그 가치들 때문입니다. 네드 스타크가 죽은 건 명예와 정의,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죠. 케이틀린 스타크가 티리온을 체포할 때 역시 명예와 신의성실에 따라 협력했던 사람들도 다 잦되고요. “피의 결혼식”도 결국 불문율은 안 깨겠지 라는 순진한 기대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원작에서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오류 때문이었다던데 제이미 라니스터가 볼튼한테 스타크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한 말을 볼튼이 오해하면서 … 그렇다면 더 황당한 전개이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다고 지략과 돈과 권력까지 갖춘 라니스터 가문이 계속 떵떵거리고 잘 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더 놀라운 건 아직 본편인 얼음과 불의 전쟁은 시작도 안했는데 정작 그 본편에서는 인간이 주인공이 아닐 거 같다는 점입니다. 불의 마녀가 말했듯이 지금까지 다섯 왕의 전쟁은 그냥 몽매한 인간들이 벌이는 왕좌의 게임이었을 뿐, 진짜 전쟁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얼음괴물들과의 전쟁이고, 여기에는 남쪽에서 올라온 불뿜는 용들이 주인공이 될 듯합니다. 이 용들은 용 엄마 말도 잘 안듣는 애들인가 봐요. 

Margaret Mahler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우리의 자아가 발달하는 과정은 결국 나와 내가 아닌 것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봤습니다. 이걸 대상관계 이론이라고 하는데요, 말러에 따르면 우리는 처음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세상과 나의 구분이 없는 상태로부터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걸 정상적 자폐단계라고 하는데, 이때는 내 마음과 현실이 구분이 안되고요, 꿈꾸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꿈에서의 모든 사건들은 결국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인 것 처럼, 이때는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이 곧 나입니다. 그러다가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하면서 드디어 자아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죠.

 

내가 아닌 것은 뭐냐하면 결국 내 맘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들인데, 다시 말해서 세상이 내 맘과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사실, 즉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우리에게는 자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하고, 자아가 생기면 우리는 자아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게 됩니다. 자아의 영역을 넓힌다는 건 결국 내 자유를 늘리는 것인데, 3살 때쯤 이런 개념이 생기는데 그래서 그때 미운 세 살이 되는 것이랍니다. “싫어!” “안 해!”라는 말이 최초의 자유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다음에야 우리에게 지능이라는 것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지능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상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구석을 찾고 조작하는 능력입니다.

 

 

 

 

 

 

이 드라마도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이런 성장과정을 경험하게 합니다. 정의가 이기고 불의가 패퇴하는 사건이 당연히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때는 우리는 소설을 진짜 세계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과 구분하지 못하는 자폐 단계인 것입니다. 이러면 소설 속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게되죠.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기대한 대로 소설이 전개되지 않을 때,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한 애가 속절없이 댕강댕강 대가리가 잘려나갈 때, 이 세계가 나와 상관없이 내 외부에 존재하는 나와 독립적인 세계라는 걸 깨닫고 그제서야 이 세상의 작동에 대해서 진심으로 알려고 합니다. 물론 이 단계에서 자기 기대대로 드라마가 전개되지 않는다고 화내는 인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발달을 거부하는 것인데요, 소설을 자기 소망충족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죠. 마치 여자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연애를 포기하고 2D에 만족하는 오덕과 같은 상태라고나 할까요.

 

 

 

나는야 내 의지로 발달을 거부하지

 

 

사실 이 드라마를 제대로 즐기면 그런 깨달음을 경험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합니다. 네드 스타크가 죽은 건 그가 단지 명예와 정의와 원칙을 따라서만이 아닙니다. 힘이 생존을 위해서 작동하는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요. 바리스 경이 네드에게 “도대체 어쩌자는 생각으로 당신이 알게된 사실을 세르세이에게 말한 거요?” 라고 질문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롭도 마찬가지죠. 원칙을 따르다가 비극에 처합니다.

 

그런데 원칙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구현해냈을 때 의미가 생기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걸 통해 그 사람의 능력이 증명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걸 구현한 인간을 따르는 것이고요. 그러다 보면 그게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는 것인데 그러기 전까지 원칙이나 정의는 그저 누군가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정의가 이겨야 되고 그렇지 못하다면 세상이 불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 포기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정의는 언젠가 이길꺼야 따위 기대만 하며 손가락만 빨고있을 수만도 없습니다. 정의가 못이긴 건 그만큼 준비와 노력을 안했고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니 뭐가 어쨌든 일단 이겨놔야 정의든 뭐든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 가차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그저 겸손일 뿐이었습니다. 티리온 라니스터가 오래 사는 이유도 그것인 듯 보입니다. 그는 오만할 수 없는 존재죠. 제이미 라니스터도 겸손을 배우면서 오히려 쓸만한 인물이 되는 건지, 아닌 건지 …

 

 

 

영진공 짱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그 영화 그 노래] 탐 웨이츠(Tom Waits)를 아시나요?

 

 


 


 


탐 웨이츠(Tom Waits),


최후의 비트족이라 불리우는 1949년 생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이 가수의 이름을 들어본 이는 그리 많지 않을테지만, 그의 노래를 어떤 식으로든 들어본 사람은 의외로 많을 듯 하다. 왜냐하면 이 아저씨의 노래는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수 없이 많은 TV 프로그램과 영화에 삽입되었기 때문이다.


<참고: IMDb 사운드트랙 목록>


 


그의 노래가 삽입되어 있는 영화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를 들자면, “파이트 클럽” “12 몽키즈” “슈렉 2” 등이 있다.


 


 



영화 “파이트 클럽” 삽입곡, “Goin’ Out West”

 



 


 





영화 “슈렉 2” 삽입곡, “Little Drop Of Poison”

 


 


그리고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에 종종 출연하기도 하였다.


1984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코튼 클럽”,


1986년 짐 자무쉬의 “다운 바이 로”,


1992년 역시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


1993년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2010년 영화 “일라이”에 출연한 나름 중견연기자이다.


 


가수로서의 그의 경력을 보자면,


1973년 데뷔앨범 “Closing Time”을 시작으로 최근작인 “Bad As Me” (2011)까지 19개의 정규앨범, 3개의 라이브앨범, 2개의 영화사운드트랙 앨범을 발표하였고,


<참고: allmusic.com 디스코그라피>


 


여러 시상식에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거나 수상하기도한 매우 성공한 그리고 존경받고 있는 뮤지션 중의 하나이다.


 


 





탐 웨이츠의 곡 “Christmas card from a hooker in Minneapolis”,

Maria Tecce 커버 버전 

 


 


 


사실 그의 음악을 몇 개의 단어로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리 쉬운 건 아닌데,


칙칙하고 우울하고 울컥하고 냉소적이고 빈정대고 사회현상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그의 음악은 우리가 기꺼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런데 그보다 더 우리에게 그의 음악을 낯설어지게 하는 것은 바로 그의 노랫말 때문일 터이다. 풍자, 은유, 비어, 속어, 직설 등 그의 노랫말은 사실 그걸 그대로 우리말로 옮겨 놓기가 거의 불가할 정도로 미국 정서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아저씨는 자신의 곡이 무단으로 쓰여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한데,


직접 인용 또는 누군가에게 다시 부르게 한 경우까지 저작권 소송 관련 소송을 여러 차례 진행하기도 하여 대부분 승소하였고 합의금은 거의 자선단체에 기부하곤 하였다.


 


 





매니아 층을 형성하기도 했던 미국 드라마 “The Wire” 오프닝 테마,

오리지날은 탐 웨이츠의 노래 Way Down In The Hole”

다시 부른 이들은 The Five Blind Boys of Alabama


 


 


외모로만 보면 제 멋대로 살고 할 말 안 할 말 다하고 다닐 것 같은 이 아저씨,


그런데 은근히 정의감도 있고 제 할 일 착실히 잘 하면서 사는 분이다.


 


이 아저씨 노래 중에 그래도 나름 우리 정서에 슬쩍 걸쳐 볼만한 곡들을 추천하자면,


“Please call me, baby”,


“Tom Traubert’s Blues”,


“Christmas card from a hooker in Minneapolis”,


“The piano has been drinking”,


“Foreign affair” 등이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 들어보시길 권하는 바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탐 웨이츠의 음악으로 가득한 영화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1982년 개봉하였다가 2003년에 다시 리마스터 되었던 영화, “One From The Heart”.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이 영화가 “마음의 저편”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하였다고는 하는데 긴가민가하다.


 


어쨌든 탐 웨이츠의 탁성과 크리스탈 게일(Crystal Gayle)의 미성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노래들로 가득한 영화이니 한 번 쯤 찾아 감상하셔도 좋을 듯 하다.


 


그럼 즐감~ ^^


 


 



“마음의 저편” (One From The Heart) 2003년 판 예고편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