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대왕”, 죽음을 부르는 사회의 자화상

 

 

 

 

동급생에게 집단폭행 당한, 인천의 한 중학생 정신과 치료 2013.06.17

인천의 한 중학생이 학교에서 동급생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한 뒤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치료를 받고 있다. 지난 4월 3일 인천청라중학교 1학년 강모(13)군이 체육시간에 남의 옷을 밟았다는 이유로 운동장에서 동급생 5명에게 집단폭행 당했다. 강 군은 땅에 떨어진 옷을 실수로 밟은 점을 사과했지만 이들은 다음날 더 많은 학생들을 교실로 데려와 강 군을 때리는 등 모두 20여차례에 걸쳐 폭행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가해 학생들은 여학생들까지 데려와 강 군이 맞는 모습을 구경하도록 하는가 하면 음식쓰레기를 강제로 입에 넣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10대 5명이 여중생 집단폭행…경찰 조사 2013.05.16

경기 의정부경찰서는 또래 여중생을 집단 폭행한 혐의로 16살 전 모 군과 16살 김 모 양 등 10대 5명을 붙잡아 조사하고 있습니다.  전 군 등은 지난 11일 오후 6시쯤 의정부동의 한 골목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중학교 2학년 14살 김모양을 집단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행인이 112에 신고한 것을 눈치채고 달아났다가 출동한 경찰관들의 수색 끝에 붙잡혔습니다. 조사 결과 이들 중 일부는 이틀 전인 9일에도 포천의 한 다리 밑에서 김 양을 폭행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김 양을 강제추행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촬영했다는 주장이 학교 자체조사에서 제기돼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사할 계획입니다. 김 양은 코뼈 등을 크게 다쳐 수술을 받고 현재 입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작년부터 올해까지 제 머릿 속을 지배하는 단어는 <전체주의 사회>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지메의 구조”라는 책을 보면서 깜짝 놀란 부분이 있었는데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전체주의 사회화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에서는 이런 구조를 <중간 집단 전체주의 사회>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전쟁과 같은 특수한  때 일반적 시민법이 통하지 않는 소규모 집단에게 자치를 하도록 내버려두면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가장 대표적인 영화로는 “파리 대왕”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시민법이 통하지 않는 자치적 사회의 특징은 <심리적 거리를 둘 수 없는 환경>이 제일 큰 문제라고 하더군요. 마치 우리나라의 학교나 군대처럼 말이죠.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함께 억지로 친근해질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결국 보스-추종자-평민-노예 그룹으로 나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왕따를 괴롭히는 “그들만의 축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말이죠.

 

내부의 법이나 규칙도 외부와 달라서 학교는 학교법이 군대는 군법이 일반 헌법이나 시민법보다 우위에 있게 됩니다. 금 “정봉주의 전국구” 듣다가 경악한 게 군대 내의 사법체계에서는 사단장이 판결까지도 바꿀 수 있답니다.

 

 

 

 

 

대개 폭력이나 괴롭힘의 양상은 아래와 같더군요.

1. 분노하는 신 (폭력으로 약자를 눌러버람) – 무자비한 폭행

2. 주인 노예 (언제든 굽신거리며 주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함)

   – 심부름, 셔틀, 무엇이든 하도록 시키는 짓

3. 장난치는 신(치약먹이기, 바퀴벌레먹이기, 이상한 짓 시키기)

   – 윤일병에게 한 짓들, 학교에서 왕따에게 이상한 짓 시키기등

 

결국 이 비정상적인 환경을 제거하지 않거나,  일반 시민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 이상 학교와 군대에서는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내면까지 변화시킨다는 얘기였고, 그 사회 바깥으로 나오면 자기가 거기에서 왜 그런 짓을 하고 살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주부터 이번주까지 내내 군 자살 사건, 사망사건이 끊이지를 않는걸 보면 그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2013년 6월 17일의 기사를 보면 자신의 지위를 알리기 위해 다른 반 애들에게 구경까지 시키면서 저렇게 하고 있었답니다.

전 세월호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내부 규칙이 시민법의 규칙보다 우위에 있는 집단-그게 바로 관피아겠죠. 정당 내부의 규칙 역시 여기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전 안철수나 김한길도 이 관점에서보면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즉 자기들의 규칙이 그 어떤 일반적 시민사회의 규칙보다 우선인 사회 말이죠.

 

 

 

 

 

저런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정에서도 자주 보입니다. 부모의 말도 안되는 규칙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많이 반복됩니다. 그 안에서는 평등한 시민사회의 규칙보다는 얼핏 보스와 노예같은 상태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다시 철저히 그런 사회로 편입되고, 군대에 가면 한번 더,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도 또 한번 더, 그 자신이 가정을 가지면 또 그렇게 하겠지요.

 

이러한 때에 싸워야 할 적은 뭘까요?

유교적 고정관념일까요? 아니면 폐쇄적인 가족주의의 병폐?

해답을 찾고 있지만 답이 잘 나오질 않네요 …

 

 

 


영진공 신샘

 

 

 

 

 

 

 

 

 

 

 

 

 

 

 

 

 

 

 

 

 

 

 

 

 


 

스파이더맨의 심리를 분석해보자!

 

 


 


 



 


 


“스파이더맨”은 한 마디로 성장드라마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소위 철없는 청소년이 거대한 힘을 갖게 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심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스파이더맨은 ‘유전자 변이된 거미’라는 로또 복권에 당첨된 왕따 청소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청소년은 평소에 인기도 없고 집도 가난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말도 제대로 붙여본 적 없는 왕따였죠. 그는 그런 자기 모습이 아주 싫었을 겁니다. 그런데 거미에게 물린 덕분에 정말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거예요. 문제는 그 행운이 너무 거대하다는 겁니다. 마치 거액 복권당첨처럼 말이죠.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모릅니다. 로또 당첨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당첨된 사실을 알리자니 그것도 불안하고(여기저기서 도와달라 손을 벌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하겠지요), 그렇다고 숨기고 있자니 지금 처한 꿀꿀한 상황을 계속 참아내야 하고. 그래서 그는 어떻게 이 힘을 사용해야 할 지 고민에 빠집니다.


 


그런 상황에 놓여진 스파이더맨의 성격은 이상주의와 낙관성인데, 이것 역시 청소년기의 특성입니다. 청소년들은 대부분 마음 한구석에 이 세상에 정의는 살아있으며 모두가 조금씩 노력한다면 세상은 그 정의에 한걸음씩 가까워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그런 희망 때문에 그만큼 쉽게 좌절하고 환멸을 느끼기도 하지만요. 개인적으로는 조금 손해 보더라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은 기부나 자원봉사에 관심이 많고 직접 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모두들 마음속은 스파이더맨과 비슷한 것이죠.


 


 


 



 


 


 


스파이더맨이 처음 접하는 중압감은 막대한 힘에 따르는 책임감이 아닙니다. 우선은 자기에게 생긴 비밀이 주는 부담감이 먼저죠. 그는 부모처럼 지내던 삼촌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밝힐 수 없어요. 그런데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사춘기에 일어나는 신체적인 변화(이차성징)와 호르몬의 균형이 바뀌면서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나 욕망들이 떠오르는데 그런 것을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말할 수 없으니 혼자 간직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서서히 ‘나’라는 개인의 독특성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됩니다. 비로소 부모나 친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는 개인으로 태어나는 거죠. 루소가 말한 제2의 탄생이나 청년심리학자 ‘홀링워스’가 말하는 심리적 이유기인 것이죠.


 


그렇다면 심리적인 요인은 능력발휘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스트레스는 특히 중추신경계의 작용에 의존하는 여러 가지 섬세한 활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속도를 다루는 수영 경기나 섬세한 호흡에 의존하는 사격, 타이밍이나 타격점에 의해 좌우되는 골프, 야구 같은 경기에서 선수들의 능력도 스트레스에 의해서 오르락 내리락 하지요. 그런데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도, 너무 없어도 역시 경기력은 떨어집니다. 적당한 긴장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스트레스나 긴장이 경기력(혹은 여러 가지 수행performance)에 미치는 영향은 언제나 역 U자형 그래프를 그리죠. 이를 여키즈-도슨 법칙(Yerkes-Dodson law)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스파이더맨2 편에서 피터가 갑자기 능력을 잃어버리는 장면은 청소년기의 불안정함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청소년기에는 팔다리의 길이나 체중이 갑자기 늘어나기 때문에 예전에는 잘 하던 운동을 갑자기 못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키가 커버리면 오르내리던 계단에서 걸려 넘어지거나 굴러 떨어지는 일을 겪게 됩니다. 그제서야 자기가 평소에는 아무생각 없이 숨쉬는 것처럼 하던 일이 의외로 복잡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곤 하지요. 게다가 감정의 변화도 커서 어느 날은 우울하다가 갑자기 활기찬 모습을 보이고 화를 내다가 온순해지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불안정한 것이 청소년기입니다.


 


 


 



 


 


 


[뽀나스]


아이언맨은 우울증환자에 가깝습니다.


남자들은 대개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동굴로 기어들어가는데 아이언맨 수트는 최첨단 동굴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아이언맨이 어떤 상처를 입었냐고요? 토니 스타크의 상징 자체가 뻥뚫린 가슴 아닙니까. 텅빈 가슴을 기계심장으로 채워넣은 남자가 토니죠.


 


어쨌든 다른 수퍼영웅들은 나름의 트라우마가 있던가 태생이 다르던가, 혹은 사고가 있었던가 하는데 토니스타크는 그 좋은 머리와 엄청난 재산을 활용하여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아이언맨을 고집한다는 점에서 병이 매우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진공 짱가


 


 


 


 


 


 


 


 


 


 


 


 


 


 


 


 


 


 


 


 


 


 


 


 


 


 


 


 


 


 


 


 


 


 

“인크레더블”, 멍청하고 게으르고 착한 영화에서 벗어나기


나는 착하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통 우리가 착하게 굴 때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하게 행동하는 경우를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착하다는 건 멍청하다는 뜻이다.
착하다는 말에는 또 다른 뜻도 있다. 그건 자기와 주변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원칙을 강요한다는 뜻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악당의 간계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장금이에게 남을 탓하지 말고 네가 계속 참고 노력하라는 착한 요구를 하는 연생이 같은 경우다.

이 드라마에서는 연생이의 착한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좋게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만약 당신이 부당한 대우에 좌절하고 분노하는데 누가 친구랍시고 그 옆에 들러붙어 이따위 말을 지껄인다면 당신의 기분이 어떨지. 나는 그런 잔소리에 복장 터지느니 차라리 그를 친구로 간주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

정리하면, 착하다는 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에 대해서 섣부른 지식만이 있는 상태이거나 현실적으로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한 행동규범을 따르려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이 두 가지 증상이 함께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대안이나 규범을 내놓고 그걸 따르려는 거다.

디즈니의 영화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착하다.

첫째, 이들 영화에서 묘사되는 현실은 아주 단순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세상에 고통받는 무고한 사람들이나 동물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들을 괴롭히는 어떤 악당 때문이다. 혹은 돈이 많고 유능한 사람들은 그뿐만 아니라 착하고 성실하기까지 하고, 그들보다 덜떨어지고 불행한 사람들은 고약하고 게으르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보자. 이 영화 속 세상은 단순무식하기 그지없다. 주인공(“앤 해서웨이”)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들은 약간 경박하긴 하지만 순수한 선생님들이고 학생들 역시 눈에 띄지 않던 동료가 공주가 되어도 아무 생각 없는 순수한 학생들이다.

주인공의 친구(“헤더 마타라조”)도 공주가 된 주인공이 자기 프로그램의 출연약속을 어겼을 때 실망하지만, 금방 마음을 풀고 화해하는 순수한 친구이다. 뭐 아버지의 결혼을 반대했다던 여왕(“줄리 앤드루스”) 역시 손녀를 사랑하는 착하고 순수하기 그지없는 할머니라서 손녀의 복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여기에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는 오로지 성질 고약한 친구(“맨디 무어”)와 매스미디어, 그리고 이 미디어를 이용해 잠깐 좀 유명해져 보려던 학교 킹카 뿐이다. 영화에 따르면 그저 저런 잡것들만 없으면 우리의 주인공 공주님은 아무 걱정 없이 공주생활로 입문하실 수 있을 터였다.

순수하고 착하기 그지없는 친구와 미소만 봐도 착하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 여왕님, 그리고 그 자태부터 싹수가 노란 맨디무어 ...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성질 고약하게 굴던 친구는 그저 성질이 고약해서 주인공을 괴롭혔을 뿐일까? 주인공이 공주임이 밝혀진 다음 그 고약한 친구의 마음 속에는 아무런 놀라움이나 고민이나 갈등이 없었을까? 공주님의 마음 속에 생겨난 갈등은 그저 유명인으로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뿐이었을까? 자기가 공주가 된 다음, 유명인으로서의 권력을 누리고픈 마음은 없었을까?

‘평범한 아이가 공주 되네’ 라는 컨셉 자체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가 가진 어떤 희망의 핵심을 건드리는 아주 좋은 아이디어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발전시켜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착한 것만으론 부족하단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똑같은 컨셉을 다룬 1956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영화 『시집가는 날(일명, 맹진사댁 경사)』보다 훨씬 게으르고 무사 안일한 영화였다. 물론 관객들은 이런 게 다 빠졌어도 그저 안경 벗으면 미인 되어버리는 공주 이야기의 환상에 젖어 행복해 했겠지만 말이다.

둘째, 이들 디즈니 영화들은 비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가르치려고 든다.

착하지만은 않으려 노력한, 퀸카로 살아남는 법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나름대로 이전의 그 단순무지한 세계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원 제목부터 ‘썅년들(Mean Girls)’ 이라니, 착해지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은 제작진의 마음이 보인다. 이를 위해 아프리카 정글의 법칙을 습득했다는 주인공(“린지 로한”)을 등장시켜서 나름대로 미국 고등학교 세계를 생태학적으로 분석해보려고 한다.

주인공의 비주류 친구들이 보여주는 고등학교 학생식당의 자리 배치도는 이런 가상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악당과 싸우다 보니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악당이 되어버리더라 하는 니체의 아이러니도 묘사한다. 악당 역시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고 아주 영악한 복수 방법을 생각해내는 놀라움도 보여준다.

그런데 그 디즈니의 착함은 결국 마무리에 가서 본색을 드러낸다. 주인공과 이전 퀸카 사이의 세력전쟁의 후폭풍으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학교를 다잡기 위해 교장선생님이하 교사들이 선택한 방법은 학생들을 학교체육관에 모아놓고 집단상담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집단상담을 통해서 학생들이 서로 각자 반성하고(!) 그 결과 학교는 다시 평온을 되찾아버린다는 결말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런 혼란이 생기면 결국 각자 반성하고 잘못을 고치도록 노력하면 된다고 가르친 거다.

나름대로 참신했던, 학생식당 생태계

나 역시 심리학자로서 집단상담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는 수퍼울트라 상담가라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다. 사실 심리학적 접근이 종종 비판받는 이유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켜버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아이가 있다. 그러면 심리학자들은 왕따 당하는 아이에게 문제가 있거나, 왕따시키고 학대하는 가해자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왕따 당하는 아이에게는 왕따 당하지 않는 법(예를 들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나 기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사교기술)을 가르치고, 왕따시킨 아이들에게는 도덕교육이나 공격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감정표현 기술 같은 걸 가르친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거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왕따는 아이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누군가 왕따 당하는 이유는 그 아이가 머리가 나쁘거나 사회성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남들과 지나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잘생겼다는 이유로, 어떤경우에는 지나치게 선생님에게 주목받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한다.

이렇게 튀는 아이를 왕따 시킴으로써 뭘 얻을까? 집단적 자기 정체성(이걸 집단정체성:Group Identity이라고 한다)을 확인한다. 쉽게 말해서 왕따 당하는 아이와 나머지 아이들은 명확하게 구분이 된다. 이 명확한 구분을 통해서 나머지 아이들은 자기가 최소한 저 왕따 당하는 애처럼 건방지거나, 분위기 파악 못하거나, 함부로 나대거나, 잘난 척 하는 아이는 아니라는 확인을 받는 거다.

나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부족한 청소년기에는 그런 확인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결국 아이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의할 필요를 느끼는 한, 어디에서나 왕따 현상은 나타난다. 집단상담으로 아이들을 모두 착하게 만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란 거다.

요약하면, 디즈니 영화는 문제의 원인을 선과 악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분법으로 보여주고, 그 문제의 해결책도 결국 “악당을 없애고 나머지는 모두 착하게 마음먹으면 된다” 는 아주 단순한 교훈으로 정리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일단 문제가 단순해서 머릿속이 편하고, 해결책도 단순하면서 깔끔하게 끝나서 마음이 편하니까 좋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영화 속에서 끝날 때만 안전하다. 사실 나는 이 세상을 정말 위험하게 하는 영화가 있다면, 그건 난잡하고 폭력적인 영화가 아니라 바로 이런 착하디 착한 영화일거라고 생각한다.

예전 부시 같은 친구의 사고방식이 바로 이런 이분법이다. 그래서 그 친구와 추종자들은 이 세상의 테러리즘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하면 된다는 아주 단순 무식한 결론을 철석같이 믿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죽이는 전쟁이다.

아, 인크레더블...

그런 면에서 디즈니 영화인 『인크레더블』은 이런 디즈니 영화의 착한 한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선의로 똘똘 뭉친 착한 영웅이 있다고 해서 그 결과가 반드시 착하게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 결국 이 복잡하게 물려 돌아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수퍼 영웅은 그저 기물을 파괴하고 소송거리를 몰고 다니는 골칫덩이에 불과하다는 현실인식이 있다. 수퍼 영웅은 수퍼 악당이 있어야 그 존재 의미가 있다는 존재의 양면성은 이 현실인식의 덤으로 따라온다.

여러분들도 『마징가 제트』나 『에반게리온』을 보면서 왜 저 헬 박사 이하 악당들은 악당 로봇을 한 주에 한 마리씩만 보내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 있을 것이다. 한 두 달쯤 모아뒀다가 한꺼번에 보내면 마징가 제트 하나 쯤은 쉽게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들이 그래야 하는 이유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아주 간단하다. 매주 한 마리씩 보내야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악당 로봇이 있으니까 마징가제트도 에반겔리온도 존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대 로봇인 적이 없다면 거대로봇인 우리 편도 애물단지일 뿐이다. 그게 모든 나라의 정보기관이 적국의 힘을 과장하려는 이유이기도 하고, 주적이 있어야 안보가 성립할 것이라는 황당한 믿음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다양한 수퍼 영웅들이 어떻게 협력해야 더 신나는 얘기가 될 지에만 골몰한다. 이 영화의 감독은 수퍼 영웅이라는 단순한 설정을 가지고 뽑아낼 수 있는 가능성들을 아낌없이 뽑아낸다. 엄마가 보트가 되고 아들네미가 모터가 되는 장면 같은 것도 그렇고, 영웅을 위해 존재하는 맨 인 블랙에서부터, 영웅의 옷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 영웅 가족이 있다면 뭐가 문제가 될지 … 같은 기발한 상상은 그래서 나온다.

이렇게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의 기반은 수퍼 영웅이야기의 즐거움이 뭔지 알고 그 즐거움을 더 키우고 싶어하는 순수한 유희정신이다. 사실 앞서 얘기한 나름대로 치밀하게 현실적인 도입부 역시 바로 이 수퍼영웅 이야기의 온갖 가능성을 탐색한 결과에서 얻어진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은 착한데, 이들이 착한 이유는 원래 수퍼 영웅은 착하기 때문이지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니다.

선의가 반드시 선의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천하무적 수퍼 영웅 가족은 그 나름의 애환이 있다.

수퍼 액션의 조화

수퍼 디자이너...최고!!


인크레더블을 본 어떤 관객들은 이 영화가 뻔한 얘기를 하면서 아무런 결론도 없다는 점이 불만인 거 같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미덕이다. 이 영화는 뻔한 이야기가 가진 가능성을 즐거운 마음으로 탐색하고 발전시켰으며, 뭘 가르치려 들지 않고 오로지 즐기자는 정신에 투철했던 것이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착한 마음보다는 즐기는 마음이 이 세상을 더 밝게 만들며 그리고 착하게 살려는 마음보다는 삶을 즐기려는 태도가 이 세상을 훨씬 현명하게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영진공 짱가

“고백”, 오히려 현실은 이 영화보다 더 무섭지 않을까?



서울의 모초등학교에 다니는 3학년 여학생C는 공부를 잘하는 얌전한 소녀다. 그녀는 초딩때부터 피해갈 수 없는, ‘한국학교’라는 공부지옥에서도 최상위권 학생이다. 다재다능을 요구하는 한국의 우수학생답게 다방면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고 그중에 초딩들의 필수항목, 독서골든벨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학기에 한번 있는 전교 독서골든벨 결전의 날, 벼르고 벼르던 C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교실에 들어섰고, 초반부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실력을 모르는 다른 반 선생님이 그 교실의 감독관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시험감독의 공정성을 위해, 각 반의 감독은 다른 반 선생님들이 했던 것이다.

드디어 각반의 대표를 뽑는 마지막 문제까지 몇 문제 안 남았던 순간, C가 순간의 착각으로 썼던 답을 지우고 다시 쓰기 시작한 순간 … 분명 자세나 행동이 어색했다. 그런 경우가 없다보니 더더욱 본인도 당황해서, 눈치도 보고, 지우고 다시 쓰는 행동도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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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그녀의 진가를 모르는 타 반 선생님은 커닝을 의심했다. 선생님은 그녀를 지적하고 탈락을 선고했다. 이제 겨우 초딩 3학년의 어리고 여린 소녀는 울먹이면서도 순순히 자리에 일어나서 탈락자 자리로 옮겼다. 그 아이의 실력을 아는 아이들은 놀랐고 무언가 조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상황은 결론났고, 모든 것은 그대로 진행됐다.

만약 담임이라면 다른 아이들이 그녀를 커닝하면 했지 그녀가 다른 아이를 커닝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을거다.하지만 늘 사건은 그렇게 이어가는 거 아니겠는가.

처음 다소 울먹이던 아이는 그칠줄 모르는 눈물에 어지러웠고, 돌아온 담임은 깜짝 놀랐다. 탈락과 울먹임 모두에. 그러나 누구에게 항변할 상황이 아니였다. 나름 공정했고, 그 학교에서 늘상 있는 수많은 시험중 하나였을 뿐이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이였다. 아이는 하루종일 울먹였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놀랐고, 사정이야길 듣고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아이가 말했다.
’그 선생님 죽이고 싶어.’ ….
엄마는 C가 너무도 가여웠다 ….

그 뒤에 조금 시끄러웠던 이야기는 그만두겠다.

난 그냥 그 아이의 무서운 생각과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엄마에게 집중했다. 그 뒤 사건은 그냥 사건이다.

같은 또래의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 이야기는 전율이었다. 쇼크로 잠시 멍할 정도였다. 왜냐? 현실이니까. 무서운 이야기인가? 10살짜리의 ‘殺意’에 대해 엄마는 별다른 가르침을 주지못하고, 그저 가엽고 불쌍해서 같이 분노했다. 세상과 엄마는 그 열 살 총명한 아이에게 진정으로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 엄마역시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걸 누가 욕하랴. 요즘같은 세상에서 어느것이 진짜 가르침인지 누가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 세상은 그렇게 모두를 경쟁으로 몰아가고있고, 남을 짓밟아 이겨냄으로 승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닥달하고, 분노를 참지 말라고 타이르고있다. 변해버린 세상에서, 그녀는 욕할 수 없는 엄마고, 또 그런식으로 살아남도록 훈련받은 아이다. 우리의 왕따와 일본의 이지메는 그렇게 훈련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결과일 뿐이다.


영화 “고백”을 보았다. 혹여 이 영화가 오버스럽다고 느낀 분이 계시다면, 난 역시’다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오는 오해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넓고 크고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의 현실을 세련되게 그리고 있다.

자신의 사랑스런 어린 딸을 살해한 두 명의 제자에게 가하는 복수는 좀 ‘오버’지만, 이해못 할 바가 아니다. 나역시 그랬을것이다. 아니 좀 더 잔인한 방법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이쯤되면 오버가 아니다. (일본 ‘실사영화’의 오버스러움은 아마도 우리와 다름이지, 틀렸음이 아닐것이다. 생각하려한다.)

범인B군의 어머니는 죽은 선생님의 딸이 아니라 자기 자식B가 가엽다. 친절하고 착한 아이가 이렇게 험한 일을 겪었다는 게(?저질렀다는게) 너무도 가슴아프다. 아마도 범죄는 맨 처음 그렇게 시작됐을 것이다. A군의 엄마가 A를 버린 것 역시 마찬가지다. A와 B가 선생님의 딸이 아닌 다른 이를 살해했다면, 혹시 남편이나 심지어 선생님의 부모를 살해했어도, 선생님은 이런 복수를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모든 엄마가 가해자가 되고, 모든 아이가 희생자다. 가슴아픈 현실이 됐다.

“고백”은 여러 사람의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그 여러 사람이 바라보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각각의 입장에 따른 차이가 없다. 흔히들 취하는 방식의 ‘시각 차’내지 ‘입장 차’가 없다. 얼음같이 차가운 이야기가, 후반부의 (한국인이 보기에) 다소 오버스러움을 제외한다면 그대로 얼음같이 흘러간다.

스타일리쉬한 비주얼은 볼만하다. 소재는 나름 자극적이지만 적나라하게 풀어가진 않는다. 작가의 감각도 인정할만하고 절제력도 적절하다 하겠다. ‘고백’은 사랑하는 사람들 관계와 그 단절을 이렇게 잔인하게 그렸다. 가족의 이야기를 이렇게 부담스럽게 묘사하는 그 잔인한 상상력(어쩌면 현실감)에 경탄한다.

일본여행 중, 다가서는 여러 사람의 친절함에 감동감탄하면서 여러 곳을 다녔다. 이렇게 깨끗하고 살기좋은 곳이 있을까? … 그리고 우연히 들어가게 된 전철 화장실에서, 벽에 붙어있던 실종 여학생의 전단지를 본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어쩌면 그건 그 순간 이전까지 환상이었을거다. 그건 뉴스로, TV로, 영화로만 보던 일본, 바로 상상속의 일본이다. 그러나 그게 진실이다. 한국의 상황이 그 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거짓말은 그만하자. 제발.

“고백”은 영화가 보편적으로 가졌으면 … 하는 덕목을 대단히 훌륭히 갖추고 있다. 그래서 모두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다만 그 영화가 주는 교훈 역시 재미 못지않게 대단하지만 그 교훈을 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딱 꼬집어 얘기하기도 쉽지 않다. 그게 아쉽다.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가족의 문제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문제고, 더불어 사회가 가지는 책임의 문제다. 소재는 낯설지 않지만 이야기는 독특하고, 이야기는 독특하지만 이해가 된다. 이해가 되서 무섭다.

ps. 우린 오래전부터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는 영화들을 봐왔다. 참 오랬동안 많이 그랬다. 이제 자식의 원수를 갚는 영화에 감정적으로 더 공감한다. 그렇게 많은 영화들이 나오고 있고, 그렇게 또 세상은 변해있나 보다.



영진공 버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