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대왕”, 죽음을 부르는 사회의 자화상

 

 

 

 

동급생에게 집단폭행 당한, 인천의 한 중학생 정신과 치료 2013.06.17

인천의 한 중학생이 학교에서 동급생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한 뒤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치료를 받고 있다. 지난 4월 3일 인천청라중학교 1학년 강모(13)군이 체육시간에 남의 옷을 밟았다는 이유로 운동장에서 동급생 5명에게 집단폭행 당했다. 강 군은 땅에 떨어진 옷을 실수로 밟은 점을 사과했지만 이들은 다음날 더 많은 학생들을 교실로 데려와 강 군을 때리는 등 모두 20여차례에 걸쳐 폭행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가해 학생들은 여학생들까지 데려와 강 군이 맞는 모습을 구경하도록 하는가 하면 음식쓰레기를 강제로 입에 넣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10대 5명이 여중생 집단폭행…경찰 조사 2013.05.16

경기 의정부경찰서는 또래 여중생을 집단 폭행한 혐의로 16살 전 모 군과 16살 김 모 양 등 10대 5명을 붙잡아 조사하고 있습니다.  전 군 등은 지난 11일 오후 6시쯤 의정부동의 한 골목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중학교 2학년 14살 김모양을 집단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행인이 112에 신고한 것을 눈치채고 달아났다가 출동한 경찰관들의 수색 끝에 붙잡혔습니다. 조사 결과 이들 중 일부는 이틀 전인 9일에도 포천의 한 다리 밑에서 김 양을 폭행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김 양을 강제추행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촬영했다는 주장이 학교 자체조사에서 제기돼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사할 계획입니다. 김 양은 코뼈 등을 크게 다쳐 수술을 받고 현재 입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작년부터 올해까지 제 머릿 속을 지배하는 단어는 <전체주의 사회>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지메의 구조”라는 책을 보면서 깜짝 놀란 부분이 있었는데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전체주의 사회화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에서는 이런 구조를 <중간 집단 전체주의 사회>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전쟁과 같은 특수한  때 일반적 시민법이 통하지 않는 소규모 집단에게 자치를 하도록 내버려두면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가장 대표적인 영화로는 “파리 대왕”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시민법이 통하지 않는 자치적 사회의 특징은 <심리적 거리를 둘 수 없는 환경>이 제일 큰 문제라고 하더군요. 마치 우리나라의 학교나 군대처럼 말이죠.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함께 억지로 친근해질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결국 보스-추종자-평민-노예 그룹으로 나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왕따를 괴롭히는 “그들만의 축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말이죠.

 

내부의 법이나 규칙도 외부와 달라서 학교는 학교법이 군대는 군법이 일반 헌법이나 시민법보다 우위에 있게 됩니다. 금 “정봉주의 전국구” 듣다가 경악한 게 군대 내의 사법체계에서는 사단장이 판결까지도 바꿀 수 있답니다.

 

 

 

 

 

대개 폭력이나 괴롭힘의 양상은 아래와 같더군요.

1. 분노하는 신 (폭력으로 약자를 눌러버람) – 무자비한 폭행

2. 주인 노예 (언제든 굽신거리며 주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함)

   – 심부름, 셔틀, 무엇이든 하도록 시키는 짓

3. 장난치는 신(치약먹이기, 바퀴벌레먹이기, 이상한 짓 시키기)

   – 윤일병에게 한 짓들, 학교에서 왕따에게 이상한 짓 시키기등

 

결국 이 비정상적인 환경을 제거하지 않거나,  일반 시민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 이상 학교와 군대에서는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내면까지 변화시킨다는 얘기였고, 그 사회 바깥으로 나오면 자기가 거기에서 왜 그런 짓을 하고 살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주부터 이번주까지 내내 군 자살 사건, 사망사건이 끊이지를 않는걸 보면 그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2013년 6월 17일의 기사를 보면 자신의 지위를 알리기 위해 다른 반 애들에게 구경까지 시키면서 저렇게 하고 있었답니다.

전 세월호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내부 규칙이 시민법의 규칙보다 우위에 있는 집단-그게 바로 관피아겠죠. 정당 내부의 규칙 역시 여기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전 안철수나 김한길도 이 관점에서보면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즉 자기들의 규칙이 그 어떤 일반적 시민사회의 규칙보다 우선인 사회 말이죠.

 

 

 

 

 

저런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정에서도 자주 보입니다. 부모의 말도 안되는 규칙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많이 반복됩니다. 그 안에서는 평등한 시민사회의 규칙보다는 얼핏 보스와 노예같은 상태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다시 철저히 그런 사회로 편입되고, 군대에 가면 한번 더,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도 또 한번 더, 그 자신이 가정을 가지면 또 그렇게 하겠지요.

 

이러한 때에 싸워야 할 적은 뭘까요?

유교적 고정관념일까요? 아니면 폐쇄적인 가족주의의 병폐?

해답을 찾고 있지만 답이 잘 나오질 않네요 …

 

 

 


영진공 신샘

 

 

 

 

 

 

 

 

 

 

 

 

 

 

 

 

 

 

 

 

 

 

 

 

 


 

“고백”, 오히려 현실은 이 영화보다 더 무섭지 않을까?



서울의 모초등학교에 다니는 3학년 여학생C는 공부를 잘하는 얌전한 소녀다. 그녀는 초딩때부터 피해갈 수 없는, ‘한국학교’라는 공부지옥에서도 최상위권 학생이다. 다재다능을 요구하는 한국의 우수학생답게 다방면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고 그중에 초딩들의 필수항목, 독서골든벨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학기에 한번 있는 전교 독서골든벨 결전의 날, 벼르고 벼르던 C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교실에 들어섰고, 초반부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실력을 모르는 다른 반 선생님이 그 교실의 감독관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시험감독의 공정성을 위해, 각 반의 감독은 다른 반 선생님들이 했던 것이다.

드디어 각반의 대표를 뽑는 마지막 문제까지 몇 문제 안 남았던 순간, C가 순간의 착각으로 썼던 답을 지우고 다시 쓰기 시작한 순간 … 분명 자세나 행동이 어색했다. 그런 경우가 없다보니 더더욱 본인도 당황해서, 눈치도 보고, 지우고 다시 쓰는 행동도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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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그녀의 진가를 모르는 타 반 선생님은 커닝을 의심했다. 선생님은 그녀를 지적하고 탈락을 선고했다. 이제 겨우 초딩 3학년의 어리고 여린 소녀는 울먹이면서도 순순히 자리에 일어나서 탈락자 자리로 옮겼다. 그 아이의 실력을 아는 아이들은 놀랐고 무언가 조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상황은 결론났고, 모든 것은 그대로 진행됐다.

만약 담임이라면 다른 아이들이 그녀를 커닝하면 했지 그녀가 다른 아이를 커닝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을거다.하지만 늘 사건은 그렇게 이어가는 거 아니겠는가.

처음 다소 울먹이던 아이는 그칠줄 모르는 눈물에 어지러웠고, 돌아온 담임은 깜짝 놀랐다. 탈락과 울먹임 모두에. 그러나 누구에게 항변할 상황이 아니였다. 나름 공정했고, 그 학교에서 늘상 있는 수많은 시험중 하나였을 뿐이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이였다. 아이는 하루종일 울먹였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놀랐고, 사정이야길 듣고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아이가 말했다.
’그 선생님 죽이고 싶어.’ ….
엄마는 C가 너무도 가여웠다 ….

그 뒤에 조금 시끄러웠던 이야기는 그만두겠다.

난 그냥 그 아이의 무서운 생각과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엄마에게 집중했다. 그 뒤 사건은 그냥 사건이다.

같은 또래의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 이야기는 전율이었다. 쇼크로 잠시 멍할 정도였다. 왜냐? 현실이니까. 무서운 이야기인가? 10살짜리의 ‘殺意’에 대해 엄마는 별다른 가르침을 주지못하고, 그저 가엽고 불쌍해서 같이 분노했다. 세상과 엄마는 그 열 살 총명한 아이에게 진정으로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 엄마역시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걸 누가 욕하랴. 요즘같은 세상에서 어느것이 진짜 가르침인지 누가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 세상은 그렇게 모두를 경쟁으로 몰아가고있고, 남을 짓밟아 이겨냄으로 승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닥달하고, 분노를 참지 말라고 타이르고있다. 변해버린 세상에서, 그녀는 욕할 수 없는 엄마고, 또 그런식으로 살아남도록 훈련받은 아이다. 우리의 왕따와 일본의 이지메는 그렇게 훈련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결과일 뿐이다.


영화 “고백”을 보았다. 혹여 이 영화가 오버스럽다고 느낀 분이 계시다면, 난 역시’다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오는 오해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넓고 크고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의 현실을 세련되게 그리고 있다.

자신의 사랑스런 어린 딸을 살해한 두 명의 제자에게 가하는 복수는 좀 ‘오버’지만, 이해못 할 바가 아니다. 나역시 그랬을것이다. 아니 좀 더 잔인한 방법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이쯤되면 오버가 아니다. (일본 ‘실사영화’의 오버스러움은 아마도 우리와 다름이지, 틀렸음이 아닐것이다. 생각하려한다.)

범인B군의 어머니는 죽은 선생님의 딸이 아니라 자기 자식B가 가엽다. 친절하고 착한 아이가 이렇게 험한 일을 겪었다는 게(?저질렀다는게) 너무도 가슴아프다. 아마도 범죄는 맨 처음 그렇게 시작됐을 것이다. A군의 엄마가 A를 버린 것 역시 마찬가지다. A와 B가 선생님의 딸이 아닌 다른 이를 살해했다면, 혹시 남편이나 심지어 선생님의 부모를 살해했어도, 선생님은 이런 복수를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모든 엄마가 가해자가 되고, 모든 아이가 희생자다. 가슴아픈 현실이 됐다.

“고백”은 여러 사람의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그 여러 사람이 바라보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각각의 입장에 따른 차이가 없다. 흔히들 취하는 방식의 ‘시각 차’내지 ‘입장 차’가 없다. 얼음같이 차가운 이야기가, 후반부의 (한국인이 보기에) 다소 오버스러움을 제외한다면 그대로 얼음같이 흘러간다.

스타일리쉬한 비주얼은 볼만하다. 소재는 나름 자극적이지만 적나라하게 풀어가진 않는다. 작가의 감각도 인정할만하고 절제력도 적절하다 하겠다. ‘고백’은 사랑하는 사람들 관계와 그 단절을 이렇게 잔인하게 그렸다. 가족의 이야기를 이렇게 부담스럽게 묘사하는 그 잔인한 상상력(어쩌면 현실감)에 경탄한다.

일본여행 중, 다가서는 여러 사람의 친절함에 감동감탄하면서 여러 곳을 다녔다. 이렇게 깨끗하고 살기좋은 곳이 있을까? … 그리고 우연히 들어가게 된 전철 화장실에서, 벽에 붙어있던 실종 여학생의 전단지를 본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어쩌면 그건 그 순간 이전까지 환상이었을거다. 그건 뉴스로, TV로, 영화로만 보던 일본, 바로 상상속의 일본이다. 그러나 그게 진실이다. 한국의 상황이 그 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거짓말은 그만하자. 제발.

“고백”은 영화가 보편적으로 가졌으면 … 하는 덕목을 대단히 훌륭히 갖추고 있다. 그래서 모두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다만 그 영화가 주는 교훈 역시 재미 못지않게 대단하지만 그 교훈을 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딱 꼬집어 얘기하기도 쉽지 않다. 그게 아쉽다.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가족의 문제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문제고, 더불어 사회가 가지는 책임의 문제다. 소재는 낯설지 않지만 이야기는 독특하고, 이야기는 독특하지만 이해가 된다. 이해가 되서 무섭다.

ps. 우린 오래전부터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는 영화들을 봐왔다. 참 오랬동안 많이 그랬다. 이제 자식의 원수를 갚는 영화에 감정적으로 더 공감한다. 그렇게 많은 영화들이 나오고 있고, 그렇게 또 세상은 변해있나 보다.



영진공 버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