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반전(反轉)에도 원칙이 있다.

    

1. 제대로 된 반전의 조건

요즘에는 반전 없는 영화는 앙꼬없는 찐빵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개나 소나 반전을 집어넣는다고 난리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많은 자칭 반전 영화 중에 쓸만한 반전의 짜릿함을 건네주는 넘을 찾기란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이건 아마도 영화 만드는 이들이 반전 원칙을 숙지하지 못한 탓이리라 사료된다.
 
이에 이러한 작태를 짜증스레 여겨 제대로 된 반전의 기본 조건을 풀어놓으니 모든 영화제작자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제발 반전 같지도 아니한 반전을 만든다고 삽질 좀 그만 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반전의 기본 구성은 아래와 같다. 이건 제멋대로 만든 게 아니라 Incongruity-Resolution Theory (번역하면 ‘부조화 해소 이론’쯤 된다)의 기본 도해이다.
 

이 도식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우선 모든 이야기(혹은 사건)에는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요소들을 포함하는 초기설정이 존재한다.
② 관객들은 이 초기설정을 근거로 나름대로 이야기의 결말을 예측한다.
③ 만약 이야기의 결말이 관객의 예측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면, 관객은 그 이야기에서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보통 말하는 “뻔한 스토리”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④ 그러나 이야기의 결말이 관객의 예측을 벗어난다면 관객은 우선 놀라움을 경험한다.
⑤ 그리고 관객은 이야기의 초기설정에서 어떻게 그런 결말이 도출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탐색해 본다.
⑥ 만약 관객이 초기설정 속에서 문제의 예측 밖의 결말의 근거나 규칙을 찾지 못한다면, 역시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쉽게 말해 그 이야기는 “황당한 스토리”가 된다.
⑦ 그러나 만약 관객이 초기설정 속에서 문제의 예측 밖의 결말의 근거나 규칙을 찾아낸다면, 관객은 비로소 제대로 된 즐거움을 경험한다.

예상외의 반전으로 유명한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센스』를 예로 들어보자.
만약 『유주얼 서스펙트』를 처음 보았던 관객이 이 영화의 결말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면, 이 영화는 폭삭 망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 성공의 첫 번째 조건은 관객의 예측을 벗어난 결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결말이 뜻밖이었다 하더라도, 영화 속에 절름발이가 무서운 악당일 개연성이 전혀 심어져 있지 않았다면, 역시 이 영화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관객들은 뜻밖의 결말에 놀랐지만, 돌이켜보니 그거야말로 가장 그럴듯한 결말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재미를 느낀 것이다.

이는 영화 『식스센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 결말의 단서는 이미 영화의 도입부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처음에 시치미를 떼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따라간다. 왜 주인공이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것처럼 구는지, 처음에는 그냥 이 넘 충격이 컸었구나 정도로 생각하던 관객들은 영화 마지막의 반전을 통해 그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단순히 ‘외로운 심리치료사의 설정’ 정도로 봐주기에는 2% 부족하던 사소한 사건들(왜 마누라는 주인공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는지, 왜 주인공은 애 말고 다른 사람과는 한마디도 대화를 하지 않았는지, 왜 이 인간은 맨날 똑같은 옷을 입고 나오는지…)도 완전히 설명된다. 이게 반전의 파괴력이다.

여러분도 다들 알 듯이 이런 단서들을 복선이라고 부른다. 복선이 얼마나 치밀하게 반전과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황당한 영화와 짜릿한 영화의 갈림길이 나눠지는 것이다.

물론 어디에나 개인차는 있다. 『식스센스』를 보면서 영화 초반부터 무슨 반전이 있을지 예측해버린 관객이 있는가 하면,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을 못하는 관객도 있다.

두 번째 경우는 어쩔 수 없다고 치고(이건 지능의 문제니까), 첫 번째 같은 영악한 관객들을 위한 대책은 있다. 이들은 애초부터 기막힌 반전을 기대하지 않고 영화관에 들어선다. 대부분 영화의 기본 공식에 빠삭하기 때문에 앞에 돌아가는 몇몇 에피소드만 봐도 다음에 예상되는 수준이라 별로 짜릿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객들이 바라는 것은 반전이 아니라 상식을 벗어나지 않고 영화 기본 공식을 지켜가되 보다 창의적인 변주를 하는 장르 영화다. 사실상 영화의 기본은 “말이 되는 이야기”다. 그게 갖추어진 다음에야 반전이고 뭐고 찾을 수 있는 것이다.

2. 반전과 속임수의 차이

이렇게 반전 얘기를 푸는 이유는 사실, 영화 『연인』을 보면서 경험했던 충격 때문이다.  이런 류의 영화를 보면서, 그놈의 어줍쟎은 반전 집착이 영화를 얼마나 쒯스럽게 만들고, 관객을 도탄에 빠트리는지를 뼈속 깊이 느끼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소위 반전이랍시고 내놓은 것들은 모조리 관객을 허탈하게 만드는데 기여할 뿐이다.

스포일러 있다능 …  주의하라능 …

첫 번째 반전, “”장쯔이”가 사실은 장님이 아니다”를 보자.
이 반전이 제대로 먹히려면, 얘가 장님 같지만 장님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 ‘콩따라 북치기’ 가 그런 거였다고? 무협영화의 공식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그 퍼포먼스는 장쯔이가 얼마나 대단한 장님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지, 결코 두 눈 멀쩡한 애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두 눈 멀쩡하고 팔다리 멀쩡해도 고수가 아니면 결코 그런 고난도 퍼포먼스는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장면 뿐만 아니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던 목욕탕 결투 장면에서도 장쯔이는 초지일관 소리에만 집중한다.  장님이 아니라면 뭐하러 그런 짓을 하느냔 말이다.  이렇게 아무런 단서도 없다가 갑자기 또릿또릿 바라보며 말하는 장쯔이를 보는 관객들의 심정은 금성무보다 더 허탈하다.  이게 도대체 뭐다냐… 반전이 주는 짜릿함은커녕, 전반부에 쌓아왔던 모든 이야기의 무게가 그냥 날아가 버리는 거다.

두 번째 반전, “”유덕화”가 사실은 첩자였다” (그래서 이 영화는 무협판 “무간도4″다)도 마찬가지다.

역시 문제의 목욕탕 결투. 여기에서 유덕화는 장쯔이를 정말로 작살내버린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 말이다.  둘이 애인이고 같은 편이라면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감독이 이 둘의 결투를 아주 중요한 사건인 것처럼 슬로모션으로 보여준다는 게 문제다. 그 느린 화면 어디에도 이 둘이 짜고 친다는 단서는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둘이 같은편이었네~ 하면 반전이 되나?  관객들이 느끼는 건 배신감 뿐이다.

이 같쟎은 반전의 행진을 보며 갑자기 장예모는 혹시 반전을 속임수와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여기서 반전은 그냥 속임수다. “장쯔이”의 속임수, “유덕화”의 속임수, 그리고 감독의 속임수… 뭐 유주얼서스펙트 같은 영화에서야 속임수가 반전이었지만, 식스센스의 서늘한 반전은 속임수가 아니었는데…

3. 말이 되는 이야기

그러면 이야기 자체는 말이 되느냐 … 솔직히 이 영화가 어떻게 흥행에 성공하였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아무리 이성의 세기인 20세기가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왜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영화가 흥했했던 것일까? 예전 영화들 중에도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성공한 적이 있던가? 그렇지는 않은거 같은데 … 갑자기 관객들이 비이성적이 되기로 결심한건가? 아니면 사람들은 애초부터 논리 같은건 따지지 않았던 걸까?

그래 뭐 “유덕화”는 무간도에서 처럼 완벽한 내부첩자였다고 치자. 그리고 “장쯔이”는 아직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서 서로 뻔히 아는 “유덕화”와 싸울 때 조차도 장님행세쇼를 했다고 치자. (뭐 주변에 관객들도 있었나부지) 중국의 기후가 워낙 개떡같아서 한가을 날씨가 순식간에 한겨울로 바뀔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거 까지는 말 된다고 믿어주자…

아무리 그래도 “비도문” 진영까지 와서 벌어진 일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비도문 두목은 새대가린가? “유덕화”가 왜 그동안 비도문에 충성해왔는지 두목은 진정 몰랐단 말인가? 둘의 대화는 듣지 못하고 몸싸움만 봤냐?
“장쯔이”의 배신을 비참하게 인정하고 돌아가게 만들면 “유덕화”가 조직에 얼마나 위험한 존재가 될지 두목은 몰랐단 말인가?

그리고, “장쯔이”가 “금성무”에게 어떤 감정인지 대강이라도 짐작 못했나? 그걸 알면서도 “장쯔이”에게 “금성무” 처치를 맡겨놓고 둘이 들판에서 한바탕 질펀하게 놀수 있도록 내비둔거냐? 혹시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내비뒀나? 둘이 같이 도망가라고?

그렇게 부하들의 마음을 모르고서도 두목 행세 할 수 있냐?

“금성무”, “장쯔이” 너네들도 그렇다. 아무리 서로 눈빛만 마주쳐도 불타오를 단계라지만 그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그럴 여유가 있던가?


아아… 이런거 따져서 무엇하리…

아무래도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포르노 비디오와 동일한 구조였던 모양이다.
포르노 영화에서 모든 사건은 결국 섹스장면을 위한 곁다리에 불과하듯, 이 영화에서도 모든 사건이나 모든 반전이나 모든 이야기(그렇게 불러줄 만한게 혹시라도 있다면)는 결국 뽀대나는 고속촬영장면을 위한 곁다리에 불과했던거다. 그래서 감독도, 관객도 지금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끄고 장쯔이의 우아한 춤사위나 몸놀림, 칼이나 화살의 비행을 고속촬영으로 감상하는 거에만 집중하기로 약속된 영화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약속이 있다는걸 관객에게 미리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고 본 나 같은 사람은 어쩌라고…


영진공 짱가

“멋진 하루”, 인생의 두가지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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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스위스의 아마추어 심리학자 모녀 마이어스Meyers와 브릭스Briggs가 칼 구스타프 융의 성격이론을 기초로 개발한 성격검사도구인 MBTI는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심리검사 중의 하나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중에도 이 MBTI를 해보신 분이 꽤나 많을 겁니다. 이 검사에서는 인간의 성격을 내향성(I)과 외향성(E), 감각형(S)과 직관형(N), 사고형(T)과 감정형(F), 그리고 판단형(J)과 인식형(P)으로 나눕니다. 이 검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kr.blog.yahoo.com/id_solution2006/2.html?p=1&pm=l&tc=4&tt=1222787717
http://www.mbti.co.kr/


마이어스와 브릭스여사, 그리고 융

그런데 제가 이 검사 도구에 대해서 배울 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의 3가지 축의 검사결과는 쉽게 바뀌지 않지만 마지막 축인 판단형과 인식형의 점수는 꽤나 쉽게 바뀐다는 겁니다. 똑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아 여가시간이 많거나 여러 가지로 삶에 여유가 있을 때는 인식형인 P점수가 높아지는 반면에, 바쁘게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빠듯하게 시간과 돈을 쪼개어가며 살 때는 판단형인 J점수가 높아진다는 거죠. 그래서 어떤 선생님은 이 점수는 일종의 스트레스 지수라고 할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J점수가 높을수록 스트레스에 몰려있다는 뜻이란 거죠.

왜 그럴까요? 이 검사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대충 답이 나옵니다.
인식형P과 판단형J 검사축은 그 자체가 생활방식 혹은 실천하는 방식을 의미하거든요.
그 중에서도 ‘인식형’의 모토는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해보자”입니다. 즉, 유연하게 주어진 상황에 맞춰서 모든 가능성을 다 찔러보고 그 결과를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태도죠. 인식형은 꼭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습니다. 처음에 목표가 있을지는 몰라도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고 포기할 수도 있죠.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내 경험입니다. 그러다 보니 늘 유유자적 느릿느릿 제멋대로입니다. 일을 미적미적 미루다가 마감일 직전에야 불이 붙어서 초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에 속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계획대로 해야 하는 일은 답답해하고 오히려 아무 계획 없이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더 실력발휘를 하는 경향이 있죠.

반면에 ‘판단형’의 모토는 “계획대로 하자” 입니다. 판단형은 모든 것을 단계별로, 계획에 맞춰서 해나가기를 원합니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상황을 정리하고 계획부터 세워야 합니다. 물론 맹목적으로 한가지 계획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1차 계획이 여의치 않을 경우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이나 차차선책까지 치밀하게 세우니까요. 일단 계획을 세운 다음에는 모든 것이 그 계획대로 돌아가야 마음이 놓이죠. 정해진 계획이라는 뚜렷한 기준이 있으니 되는 일과 안되는 일이 분명히 나뉩니다. 이 유형에게 이것저것 찔러보는 일 따위는 낭비죠. 인식형이 막판에 몰려서 갑자기 일을 끝내는 반면에 판단형은 시간에 맞춰서 하나하나씩 차근차근 일을 해결해나갑니다.
어떤 성격심리학자는 이 둘의 차이가 불안감에 대한 내성의 차이라고도 합니다. 판단형인 사람들은 목표만 있고 달성이 안 된 상태가 주는 불안감에 매우 약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해감으로써 불안감을 줄여나간다는 거죠. 하지만 인식형인 사람들은 불안감에 대한 내성이 매우 강합니다. 그들은 단지 내성이 강한 정도가 아니라 불안감이 어느 게이지 이상 높아지지 않으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불안감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유형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기 보다는 그냥 영화 <멋진하루>를 보시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병운(하정우)과 희수(전도연)이 인식형과 판단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이 화상…

병운이는 인식형의 화신입니다. 뼈 속까지 지독한 인식형이죠. 이 인간은 사업하다가 부모재산 날려먹고 집도 날리고 마누라도 떠나보낸 와중에도 여유롭게 경마장에서 남의 훈수를 두고 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희수의 빌려간 돈 내놓으라는 독촉에도 느릿느릿 여유를 잃지 않네요. 영화는 병운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대충 설명을 해줍니다만, 아마 병운이는 원래부터 인식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돈을 받자!!

반면에 희수는 판단형의 화신이죠. 영화에서는 비록 희수가 갑자기 나타나 빌려간 돈을 찾아야겠다고 우기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 희수의 주장은 바로 그날 정해진 것이 아닐 겁니다. 희수 입장에서는 벌써 며칠 혹은 몇주전부터 결정된 일이겠죠. 그 동안 희수는 단계별로 차근차근 병운이의 거처를 수소문해서 최종 위치를 확인해 D-day를 정했을 것이고, 그 날이 바로 D-day였던 것이죠. 희수는 불안합니다. 주차할 때마다 네비게이션을 글로브박스에 집어넣는 희수의 행동도 바로 그 불안감의 결과죠. 희수가 병운이를 찾아온 것도 사실 지금 당장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일단 받아낼 돈을 받아놓자는 불안감의 결과물일 겁니다. 희수의 입장에서 이 세상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곳이거든요. 희수가 결혼을 하지 못한 것도 결국은 그 불안감 때문이었죠.

처음에 희수의 눈에 보이는 병운이는 한심무인지경의 인간입니다.(아, 대부분의 관객들이 보기에도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서서히 의외의 모습들이 나타나며 영화는 흥미로워집니다. 어쨌든 이 영화 <멋진하루>는 인식형과 판단형의 화신이 만나 한쪽은 으르렁대고 한쪽은 능청맞게 얼러대며 벌이는 화학작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러던 희수가


이러더니…


이렇게 변해가는…

왜 이 둘의 만남이 ‘끔찍한 하루’가 아니라 ‘멋진 하루’일 수 있냐면, 우리는 인식형의 태도로만 세상을 살 수도 없고(만약 그렇다면 병운이처럼 빵꾸 인생이 되겠죠), 그렇다고 판단형의 태도로만 세상을 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식형은 판단형을, 판단형은 인식형을 필요로 하지요. 그래서 인생이 오묘하고 멋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래는 스포일러..(읽고 싶으시면 긁어내리삼)

결론을 살짝 말씀드리자면, 시간이 흐르면서 희수는 병운이의 여유를 조금 얻습니다.
아마 희수가 마지막에 남긴 돈 20만원은 그 여유의 댓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여, 혹시 이 영화에 관해서 Film2.0에 쓴 글과 전혀 분위기가 다르지 않느냐고 질책하신다면,
이번에는 병운이 입장으로 모드를 바꿔서 써봤다고 변명을 해보렵니다.


영진공 짱가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미신과 속설은 어떻게 생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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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가 원래 불편부당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제가 참여한 책을 소개합니다.
네, 이 글은 광고입니다. ^_^;;;;;;

사실 제가 이 책의 번역 작업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다른 한 명에 비해서 훨씬 작습니다. 그러니 제가 번역자를 대표해서 이 글을 쓰는 것도 바로 그 이유, 즉 제가 번역 과정에서 부족했던 참여를 대신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번역에 참여한 비중은 적지만 저는 이 책의 내용에 절절히 공감합니다.
한때 청소년들의 범죄나 비행이 모두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의 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혐의는 갑자기 만화로 옮겨갔죠. <일진회> 같은 만화 때문에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일진이라는 그룹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수많은 만화가들이 검열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90년대 말이 되자 다시 혐의는 인터넷에게 뒤집어씌워졌습니다. 당시 청소년 범죄와 자살이 증가했던 것은 인터넷 보다는 외환위기로 인한 사회불안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함에도 사람들은 인터넷을 탓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최근에는 다시 혐의가 컴퓨터 게임으로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매체와 청소년을 연구주제로 삼은 사람으로서 저는 영화, 만화, 혹은 인터넷이나 게임이 청소년들의 범죄율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득하고 증명하느라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논증도, 심지어 통계수치나 미국이나 유럽의 연구결과와 같은 명백한 증거들도 대단한 효과는 없었습니다. 그저 시간이 약이었을 뿐입니다. 문제의 그 매체가 너무도 당연해져서 주목을 덜 받게 되면 저절로 이 혐의는 사라지곤 했거든요.

즉, 어떤 매체건 처음에 소개되고 확산되기 시작하는 시기에는 많은 관심과 함께 다양한 혐의가 씌워집니다. 만약 처음에 부여된 혐의가 옳았다면 그 매체가 확산될수록 문제는 더 커져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매체가 완전히 사회에 뿌리내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알거나 사용하게 되면 그 혐의는 어느새 잊혀집니다. 사람들은 이런 잘못된 고발을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어리석어서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예측하려는 본능” 탓이라고 해야겠죠.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원인’과 ‘결과’로 구분해서 파악하고 이걸 통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과정을 예측하고 통제한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았거든요. 우리는 모두 구름을 보고 비가 올 것을 예측할 줄 알았던 선조의 후손들인 셈 아닙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나를 보고 열을 알아내는 인간의 위대한 능력이 부적절한 대상에 대해서 발휘 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우리를 지금까지 생존하고 번성해서 만물의 영장으로까지 만들어준 그 본능이 우리로 하여금 혈액형이 성격을 결정짓는다거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불치병도 낫는다는 등의 바보 같은 미신을 사실로 믿게 만드는 거죠.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오류들이 왜 오류인지를 아주 세세하게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는 비법도 알려줍니다. 간단히 말해서 역과 대우에 해당하는 경우를 고려해보라는 것인데 책의 후반부에 더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물론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 빠듯합니다. 그래서 진짜 중요한 판단을 할 때만 그 전략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정말 중요한 판단인지를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사실 저는 이 책을 읽어보기 전부터 이 책에서 지적한 미신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 미신이라는 주장에 반신반의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고, 심지어는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반신반의할 독자도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잘못된 추론에 대해서 반박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바라는 것은 그저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이 책의 전략을 고려해보시라는 겁니다.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영진공 짱가

* 제가 많이 하진 않았더라도 이 책의 번역에 대해서는 꽤 자신있습니다.
다른 언어 번역서와의 교차검증까지 거치며 다듬고, 검토 할만큼 한 책입니다.

** 원제보다 번역본의 제목이 더 그럴듯한 책은 보기 드문데, 이 책이 그렇네요. ^_^
원래 제목은
How We Know What Isn’t So 라는, 적확하지만 우리말로는 임팩트가 좀 약한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