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원작의 무게에 눌려 범작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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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눈먼 자들의 도시>는, 영화의 제작과 홍보에는 원작의 유명세가 많은 도움이 되었겠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발목을 잡힐 수 밖에 없는, 즉 ‘문학 작품을 영화화’할 때 빠질 수 밖에 없는 흔한 딜레마를 반복합니다. 사건의 인과관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이도 그 중간 과정에서 인물들의 사고와 감정의 변화를 통해 충분한 자극을 줄 수 있는 문학과 달리 영화는 시청각적으로 인지되는 내용들을 우선시하면서 적당한 논리적 설명을 요구하는 장르(그게 아니라면 충분한 감정적 이입이라도 필요하죠)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이 때문에 영화가 원작 소설 만큼 성공적이거나 그 이상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대부분 적지 않은 각색을 필요로 합니다. 때로는 에피소드의 생략과 추가, 주요 등장인물의 비중이나 캐릭터의 변화가 필요하고 심지어 결말을 바꿔버려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죠. 그렇게 과감한 각색을 했음에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작품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 또한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는 데에 따른 어려움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원작은 캐스팅과 펀딩을 용이하게 해줍니다. 일단 판권 계약에 성공하면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배우와 감독들은 생판 모르는 작가의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자들이 뛰어다니는 경우에 비해 훨씬 많을 수 밖에 없겠죠. 그러나 정작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돌입하게 되면 앞에서 언급한 문학 작품과 영화 장르 간의 ‘화법 상의 괴리’ 때문에 연출자는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물론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존 그리샴 등과 같이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쓰는 대중 소설류는 상관 없겠지요) 원작을 그대로 따르자니 영화로 만들어져 보여졌을 때 아무래도 허전한 감을 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과감하게 뜯어고치자니 원작을 이미 읽은 관객들로부터의 맹비난이 두려운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우 ‘과감하게 뜯어고쳐야 한다’는 쪽입니다. 원작이 죽어야 영화가 산다고나 할까요. 원작과 조목조목 비교하며 ‘문학계의 걸작을 영화가 망쳤다’는 비난을 감수하며 소설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처음 접하는 더 많은 관객들을 위해 새로운 걸작을 탄생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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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눈먼 자들의 도시>는 원작에 좀 더 충실하기로 하는 길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한 편의 영화로서 <눈먼 자들의 도시>는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린다면?’이라는 간단한 아이디어와 거기에서 시작된 상상력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하는 작품입니다. 문학에서는 이런 간단한 아이디어도 훌륭한 작품으로 발전될 수 있는 시작점이 됩니다. 그러나 영화는 사건의 발생 원인과 인과관계 따위에 대한 좀 더 논리적인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지극히 아름답고 긍정적인 결말은 이런 영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더욱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결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문학 작품과 달리 2시간 분량의 영화는 ‘결말이 작품의 모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16부작 TV 미니시리즈라면 좀 다를 수 있겠습니다)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한 성공적인 영화라고 한다면 원작을 모르는 상태에서 보았을 때에도 그 자체로 높은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 되어 ‘원작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리하여 영화가 미처 다뤄주지 못한 디테일이나 원작과 다른 부분들을 발견하고 싶다’는 욕구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할텐데 안타깝게도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런 걸작들의 반열에는 오르기 힘든 또 한번의 ‘시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캐나다 출신의 배우이자 작가이기도 한 돈 맥켈러(영화 초반에 차를 훔치다가 자신도 눈이 멀게 되는 인물로 직접 출연도 했더군요)의 각색을 기초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눈 앞에 하얗게 되는 현상과 그 감정적인 상태를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기술적인 부분’에 역량을 집중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극악의 재난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 공동체의 광기와 절망, 그리고 희망을 남미 특유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데에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언제나처럼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줄리엣 무어와 마크 러팔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등의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무척 훌륭했고 이제는 그다지 스펙타클한 광경도 아닌 것이 되었지만 ‘폐허가 된 대도시의 풍경’들 역시 충분한 볼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역시 눈으로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플롯으로 승부하는 ‘2시간의 문법과 미학’의 장르라는 생각을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관객들을 사로잡는 고유의 방법론에서 실패하고 있는 영화가 뒤늦게 나레이션 등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등의 노력은 그저 안타깝게만 보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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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꿈을 가지려면 먼저 세상을 보아야한다.”



어릴 적엔 떠나고 싶었고, 세상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달랑 배낭 하나 짊어지고 혼자서, 아님 친구 몇과 함께 여행을 했던 기억들.
그리고 직접 눈으로 보며 배웠던 이 땅, 그리고 사람들.

외국에도 많이 다녀보았다.
미국, 캐나다, 이태리, 스위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멕시코, 태국, 싱가폴, 일본 …
그렇게 돌아 다니면서 다른 풍광과 다른 언어, 그리고 다른 생활과 다른 관습들을 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건 세상 어디를 가나 똑 같다는 걸 알았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이 영화 속엔 혁명가, 게릴라 전사가 없다.
그저 순진하고 착한 그리고 세상을 눈으로 보고 배우고 싶어하는 평범한 청년이 나올 뿐.

채 세상 물정을 알 나이가 안 된 두 청년은 너무도 무모하게,
낡은 오토바이에 배낭 몇 개만 싣고 남미 대륙 여행에 나선다.
그나마 그 오토바이도 중간에 망가져버리고.

그런 그의 모습이 책으로 읽던, 이야기로 전해듣던 모습보다 훨씬 더 따뜻했고 더 많이 친근하였다.

착하고 순수해서 그래서 나중엔 혁명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청년.
여행 속에서 보고 접하고 느낀 세상과 사람들,
그 과정에서 차곡차곡 쌓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그리고 모두 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싶다는 소박하고 단순한 소망.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종내에는 변혁운동과 혁명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그 젊은이.



“본명은 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 6. 14 아르헨티나 로사리오~1967. 10 볼리비아.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에서 귀족의 후손인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와 어머니 세실리아 데 라 세르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르네스토가 두 살 때 천식에 걸려 고생을 한 이후 그의 가족은 모두 코르도바(근처의 알타그라시아)로 이사를 갔다.
천식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 에르네스토는 이 경험 때문에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의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1952년에는 같은 의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스와 둘이서 10개월에 걸쳐 모터사이클로 여행을 했다. 칠레에서 바이크가 고장이 나자 페루의 마츄피츄까지 도보로 여행하였다. 한동안은 상 파울로의 나환자촌에서 환자들과 생활하기도 했다. 그후 아마존강을 횡단하여 콜롬비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의 친구는 카리카스에 남고, 에르네스토는 비행기로 마이애미까지 갔다. 특히 상 파울로 나환자촌에서의 노동을 통해 “인간들의 사랑과 유대감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다”는 진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비행기의 출발이 지연되어 마이애미에서 1개월간 더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미국의 실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8월에 귀국한 후, 의학공부에 몰입하여 1953년 3월,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과테말라와 볼리비아를 거쳐 1955년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F.카스트로[피델 카스트로]와 사귀어 쿠바혁명에 참가하였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쿠바 시민이 되어 라카바니아요새 사령관,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하여 ‘쿠바의 두뇌’라 불렀다.
그러나 1965년 3월부터 소식이 끊겨 사망설이 파다하였으나, 카스트로에게 작별의 편지를 남기고 새로운 전쟁터로 달려갔다는 사실이 그해 10월 밝혀졌다. 그는 볼리비아의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 1967년 10월 볼리비아 산중에서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부상을 당하고 사로잡힌 후에 총살당하였다.”


천식을 앓던, 그래서 군대도 안 갔던 순둥이 의대생이,
어찌하여 그리도 열정적으로 혁명의 꿈을 품에 안을 수 있었는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그냥 의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그 젊은이가,
어떻게 온 세상을 변혁하자며 무장투쟁에 나서게 되었는지를,
영화 속의 그는 잔잔한 눈빛으로 어떤 책 어떤 평전보다 더 편안하고 더 절실하게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 사는 건 다 같다는 걸,
사람은 모두 차별 없이 살아야 한다는 걸,
하지만 그런 삶이 거저 얻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 쯤에서는 영화를 보시라는 말 말고는 더 이상 덧붙일 게 없다.

대신 그를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그가 1964년 12월 11일 UN에서 한 연설 중 일부를 첨부해 본다.
영어 번역문을 실으려 했으나 그건 링크로 처리하고 그에 관한 평전 중 하나에서 관련 내용을 아래에 인용하니 참고하시라.

* 영어 번역문을 보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그 말의 뜻은 결국 소련의 공산주의는 더 이상 순수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후 모든 아메리카 혁명 노선은 체게바라의 주장대로 소련식 공산주의가 아닌 마르크스주의가 되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의 냉전대립에서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사회주의 국가를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또한 미국이나 유럽의 자본주의 열강들이 그러하듯이 소련 역시 자국의 이해 관례를 위해서 불평등한 교환을 통해서 착취를 행하고 있었다. 체게바라가 보기에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은 소련의 보호 우산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당시 공산주의 혹은 공산당은 소련의 전류물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운동은 공산주의 혁명이 아닌,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민중 해방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체 게바라의 머릿속에서 확고하게 형성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소련의 속국이 되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제3세계 국가의 블록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체게바라의 이런 신념은 1964년 12월 11일, 뉴욕의 유엔 회의에서 쿠바 대표의 자격으로 행한 한 연설에서 표출되었다. 연설의 대부분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침략행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는 소련의 불순함을 꼬집거나 소련식 공산주의와는 다른 사회주의의 건설이 라틴 아메리카 해방 운동의 목표라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은근히 소련의 비위를 거스르게 하였다.”

[“아름다운 혁명가 체 게바라 청소년 평전 05” (박영욱 지음, 이룸 펴냄) 에서 인용]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