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TV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CES 2012에서는 다양한 신제품이 발표되었다. TV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OLED TV 였고 그 다음은 스마트 TV였다. 특히 전세계 TV 시장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성전자의 스마트 TV 플랫폼은 관심의 촛점이었다.


당장 인터넷상에서 볼 수 있는 국내외 평가를 종합해 보면 호의적인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상과는 달리 안드로이드 OS를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반응속도나 사용자 UI는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siri 만큼 똑똑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쓸만한 음성인식 기능에 동작인식까지 덤으로 갖췄고, 스마트폰과의 콘텐츠 공유 기능인 Allshare는 애플의 airplay보다 훨씬 더 쓸만해 보였다. 그리고 앵그리버드가 아무 문제 없이 휭휭 돌아가는 모습을 선보이는 장면에선 다들 감탄사를 내뱉었다, WoW!

하지만 궁금한 건 이거다. 내가 이걸 왜 사야 하는 거지? 50인치 대화면 TV에서 앵그리버드를 하려고?

아무래도 대부분의 스마트TV 기획자나 개발자들은 스마트폰(이라기보다는 아이폰)의 성공 공식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 즉,

1) 뛰어난 사용자 UX,
2) 오만가지 앱이 득시글거리는 앱스토어,
3) 인터넷과의 연동

이 스마트 TV를 성공시킬 열쇠라고 믿는 모양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스마트”란 단어를 공유한다 할지라도 폰은 폰, TV는 TV다. 둘의 성공 공식이 동일할 리 없다.

핸드폰은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누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걸 주목적으로 하는, 그 태생부터 굉장히 능동적인 기기다. 데이터 통신망을 이용해 웹브라우징을 하고, 짧은 문자 메시지를 긴 이메일로 확장시킨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게임은 이미 피쳐폰 시대부터 쏟아져 나왔다. 이런 기능을 제대로 쓰려면 편리한 UI를 갖춰야 하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거실 TV는 굉장히 수동적인 기기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무식한 게으름뱅이를 위한 바보상자이다. 쇼파에 반쯤 드러누운 자세로 귤을 까먹으며 아무 생각없이 드라마를 보다 말고 갑자기 TV 화면에 이메일을 띄우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거라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보는 편이 훨씬 빠를 텐데.

하지만 TV에서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기능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게 VOD(Video on Demand)다.

여기서 잠시 미국 시장으로 눈을 돌려보도록 하자. 미국은 TV소유 세대수의 약 8할이 케이블TV나 위성방송, IPTV를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2011년부터 이들 대형 케이블 TV업체들은 iPAD를 비롯한 타블렛 대상의 방송 서비스에 일제히 힘을 쏟기 시작했다.

타임워너 사의 조사에 따르면 2006년 당시 정시방송의 주당 시청 시간은 31.7시간이었지만 VOD(video on demand) 시청 시간은 주당 0.4시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2011년에는 VOD의 시청 시간이 주당 2.5시간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2.5시간이라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건 고연령층까지 포함한 평균치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스마트폰에 익숙한 젊은 세대만을 계산에 넣는다면 이 수치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 요즘은 내 주변에서도 셋탑 박스나 IPTV에서 필요할 때마다 영화를 사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꿋꿋하게 토렌트나 웹하드를 뒤지는 인간들의 숫자가 훨씬 많긴 하지만.

MP3 플레이어의 킬러 콘텐츠가 음악이고, 스마트폰의 킬러 콘텐츠가 앱이라면, 거실 TV의 킬러 콘텐츠는 영상일 수밖에 없다. 아이팟은 음악을 유통하는 뮤직 스토어를 통해 MP3 플레이어 시장을 평정하고, 아이폰은 앱을 유통하는 앱스토어를 선보이며 핸드폰 시장을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거실 TV가 스마트 TV로 진화하기 위한 열쇠는 자명하다. 그것은 영상물 유통의 혁신에 있다.

어느 나라든  TV 콘텐츠 시장에서 절대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주파수를 독점하고 있는 공중파 방송국이다. 그 다음은 지역별로 난립한 케이블 TV 회사들이다. 이들 방송에 비하면 DVD, 블루레이, VOD 등 홈비디오 시장의 비중은 굉장히 낮은 편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방송 시장의 총 매출 규모는 10조를 넘어가는 반면, 홈비디오 시장 규모는 기껏해야 3, 4백억 정도에 그칠 뿐이다.

지난 수십년간 TV는 브라운관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고, HD 해상도로 바뀌고, 아예 브라운관이 사라지고 PDP와 LCD로 바뀌는 등, 재탄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바뀐 건 물리적인 부분일 따름이었다. 실질적으로 콘텐츠를 틀어쥔 게 방송국이란 사실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가전회사는 주연이 아닌 조연에 불과했고, TV는 방송국이 일방적으로 송출하는 드라마나 뉴스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기 위한 깡통에 불과했다!




그런데 … 지금 가전회사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온 것이다. 방송국 눈치를 보지 않고, 직접 방송국에 맞먹는 플랫폼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말이다. 그것도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전세계를 상대로 장사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전세계 TV 시장에서 탑을 달리는 삼성전자의 작년 한 해 평판 TV 판매량은 대략 4300만대, 올해 목표는 5천만대라고 한다. 만일 삼성이 자사 TV 물량을 고스란히 스마트 TV로 전환한다면, 그리고 공중파 방송국에 준하는 콘텐츠 유통 플랫폼을 개발해 탑재시킨다면, 매년 대한민국 전체 인구에 필적하는 5천만명의 시청자를 기본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만한 숫자라면 VOD는 뒤로 미뤄놓고 광고만 팔아도 돈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가기 위해서 풀어야 할 숙제가 한둘이 아니다. 저작권자들과 지리한 협상을 통해 컨텐츠를 확보하고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인터넷 환경이 열악한 국가에선 어떤 식으로 컨텐츠를 공급할지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숙제는, 공중파나 케이블보다 더 쉽고 간단하고 편리하게 컨텐츠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공중파 방송은 안테나만 세우면 볼 수 있다. 케이블 TV에 전화 한 통만 넣으면 채널이 순식간에 백여 개로 늘어난다. 그렇다면 스마트 TV는 전원선만 꽂으면 즉각 수백 개의 채널을 저렴하게(또는 공짜로), 그리고 손쉽게 볼 수 있다는 걸 장점으로 내세워야 한다. 대체 어떤 식으로?

글쎄, 그걸 잘 모르겠다. 그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궁리해야 하는 건 삼성이나 LG같은 제조사들의 몫이다. 하지만 어느 쪽에서도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스마트 TV에 스마트폰의 기능을 우겨넣는데 급급한 것 같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TV를 파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국가의 방송국을 능가할 수도 있는 절대적인 방송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그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다니 말이다. 그리고 기껏 내놓은 스마트 TV라는 건 스마트폰의 화면을 가로세로로 뻥튀기한 물건에 불과하다.

하긴 뭐, 아이패드도 처음엔 아이폰의 뻥튀기판에 불과하단 비아냥을 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패드는 들고 다닐 수도 있고, 침대에 누워서 만지작거릴 수도 있고, 후장을 자극하는 치질의 고통과 맞서 싸우기 위해 화장실에 가져갈 수도 있다.
 

반면에 거실 TV는 …… 흠, 더 이상 구구절절 말할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당신은 그 리모컨조차도 맘대로 쓸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건 당신 게 아니라 사모님 거니까!


영진공 DJ 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