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1부]

 


 

 


 


 


 





애벗 핸더슨 세이어(Abbott H. Thayer, 1849~1921)


 


 

일찍부터 그림에 눈을 떠 무려 열여덟 살에 화가생활을 시작한 뉴잉글랜드 출신의 화가 세이어는 여느 남자들이 그렇듯 여자에 참 관심이 많았다. 그는 많은 여학생과 여조교들에 둘러쌓여 있었고 사실주의적인 화풍으로 신비하고 영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는 여성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리고 1887년 자신의 딸 메리의 초상화를 그리며 천사의 날개를 그려 넣은 것을 계기로 여성의 등에 천사의 날개를 그려 넣기 시작하였다. 

 


 

  




Abbott Handerson Thayer (18491921), Angel.




 


 

그러나 세이어는 자나깨나 머릿속에 여자생각만으로 꽉 차있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여자 말고도 또 하나의 관심사가 있었다. 그것은 술도 아니고, 축구도 아니었다. 바로 ‘자연’이었다.

 

 




Abbott Handerson Thayer (18491921), Monadnock in Winter.




 


 

세이어는 어린 시절 뉴햄프셔의 깡촌에서 자연에 푹 빠져서 지냈으며 오듀본의 [아메리카의 새 Bird of America]를 탐독하는 등 자연친화적 환경에서 자랐다. 그랬기에 그는 여자도 좋아했지만 자연도 즐겨 그리곤 하였다.

 


그런 세이어에겐 언제부턴가 야생동물들을 그리면서 자꾸 뭔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많은 동물들이 등은 짙은 색이고 배는 흰색이나 옅은 색으로 되어있는데, 햇볕 아래서는 등이 무슨 색깔이든 간에 털이 빛을 반사시켜 하얗게 빛나고, 반대로 배는 그늘이 지면서 본래의 보다 더 짙은 색을 띄었다. 이러한 효과로 인해 동물들은 보다 평평하게 보이며 윤곽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웠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동물들이 평평하게 보인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찌되었든 세이어의 눈에는 이것이 유독 더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나 보다. 세이어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동물들의 이러한 배색과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몰두하였고 1896년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정리하여 [오크 The Auk]라는 자연사 잡지에 [보호색의 기본 법칙 The law which underlies protective coloration]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동물들의 배가 밀가루라도 바른 듯 하얗색을 띄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 방어피음 원리


 


 



동물들은 그늘이 지는 배 쪽의 색깔은 밝게 하고, 어두운 색의 등은 빛을 반사시켜 새하얗게 함으로써 빛이 비칠 때 대비효과를 줄인다. 그 결과 배경과 더 구분이 되지 않고 상쇄시키는 배색을 띄도록 진화한 것이다. 이런 동물들의 배색을 방어피음(防禦被陰, countershading)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생물학자는 세이어의 방어피음 개념을 환영했고, 세이어의 이론은 1902년에 [네이처]를 통해 영국 대중에게도 전해졌다.



 


 


 


“자연은 하늘의 빛을 가장 많이 받는 경향이 있는 부위는 가장 검게 하고 그 반대쪽은 가장 희게 하는 식으로 동물을 칠한다.” (Thayer, 1909)


 


 


세이어는 회화와 생물학이라는 은하 두세 개는 너끈히 들어갈 법한 학문 간의 거리를 꿰뚫으며 화가로서 생물학적 성찰을 이룬 것이었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평생을 연구에 매달려도 과학법칙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는 것에 비해, 그는 화가의 신분으로 ‘세이어의 은폐색 법칙’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붙어있는 과학법칙을 가지게 되었다.

 


본업이 아닌 이들이 본업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성과를 이루는 이런 뭐같은 상황은 정말 마주하기 싫은 현실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상황을 외면하기 위해서 일명 ‘신은 공평하다’라는 회피기제를 보인다. 이쁜 애들은 머리가 나쁘다던가 저 잘생긴 놈은 분명 발냄새가 고약할것이라는 편견을 만들어내어 심신의 안정을 찾으려는 생존본능 말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런 편견들은 일정부분 들어맞는다. 완벽한 사람이란 신조차 용서하기 힘든 존재였던 것이다. 그럼 세이어는 어땠을까? 암내가 심했을까? 성격이 심한 무좀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니면 인정하기 싫지만 그림도 잘그리고 머리도 좋은 외계인이었을까?


 


 


 




연기, 감독, 그림, 노래, 작사, 작곡 등 못하는게 없는 구켈란젤로 구혜선양. 

그녀는 외계인일까? 


 



 


 


다행(?)스럽게도 세이어가 중대한 과학법칙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는 과학자적인 기질과는 매우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그는 넘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상주의에 빠져있었고 심각한 열등감에 따른 자기과시와 자만심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자연계의 원리인 ‘방어피음’ 개념에 심취하여 자신이 고고한 식견을 가진 화가라는, 걸리면 약도 없다는 왕자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뿌듯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고 종종 망언을 내뱉고는 했다.


 


 


 


“물론 그런 모방을 판단하는 사람은 예술가이다. 따라서 나는 전문가로서 모방 여부를 판결한다.” (Thayer, 1911)


 


 


 


아들인 제럴드와 함께 쓴 대작 [동물계의 은폐색](1909)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때쯤, 그의 왕자병은 정점에 이르렀고 듣기에도 민망한 자화자찬이 이어졌다.


 


 


 


“우리 책은 이론이 아니라 라듐의 엑스선처럼 명백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계시를 전한다.” (Thayer, 1909)


 


 


 


세이어는 알다시피 화가다. 그는 다른 과학자들이 가지지 못한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내 글에 들어가는 그림을 직접 그려 넣듯이 세이어도 자신의 재능을 썩힐 리가 만무했다.

 


그는 생물들의 무늬는 오로지 은폐색 기능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그런 주장과는 달리 현실에선 그 동물들 대부분은 1킬로미터 밖에서도 뚜렷이 보였지만 말이다.


 


 



-발췌 및 편집-

피터 포브스 저, 이한음 역, [현혹과 기만], 까치, 2012

 




 

 


영진공 self_fish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조개화석 (2/2)

 



 


 


 


 


* 1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레스터 사본]은 주로 물의 성질, 모양, 그 쓰임에 대한 보고서이다. 그리고 화석의 성질과 일부 해양생물로 보이는 화석들이 높은 산의 지층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는 물과 화석의 무엇이 그렇게 궁금했던 것일까?


 




16세기 화석에 대한 생각은 오래된 생물의 사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암석 안에서 어떤 힘(형성력plastic forces)에 의해 저절로 만들어지거나 작은 입자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이런 특별한 모양의 돌맹이들이 별에서 왔으며, 자연의 여러 영역들인 동물, 식물, 광물 사이의 상징적 조화를 보여줄 목적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를 정확히 모사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높은 산에서 발견되는 해양 생물 모양의 화석들은 모두 높은 곳으로 이어지는 물줄기를 따라 운반되었거나 또는 노아의 홍수 같은 거센 물살을 따라 산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돌맹이일 뿐인 화석이 산꼭대기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굳이 연구할 가치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이런 생각이 맘에 들지 않았다. 화석이 광물이며 암석 안에서 자라난 것이라면 모든 지층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옛날에 바다였을 법한 여러 증거가 있는 곳에서만 화석이라는 돌맹이가 자라는 걸까? 그리고 화석이 돌맹이라면 왜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조개 껍질더미나 부스러기들 속에서 또는 호수나 연못의 침전된 층에서만 그렇게 자주 자라는걸까? 또한 조개껍질의 성장무늬가 드러나 있는 화석은 암석 안에서 자랐다는 것인데 어떻게 암석을 파손하지 않고서 그 안에서 자랄 수 있는 것일까?


 




레오나르도는 이처럼 당시의 화석에 관한 아리까리한 생각들을 논파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지구 이론을 지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화석을 관찰하고 연구하였다. 그럼 레오나르도가 화석을 통해 증명하고자 했던 그 지구이론은 어떤 것이었을까? 레오나르도는 지구 순환의 메커니즘을 인체에 비유하여 설명하고자 하였다. [레스터 사본]과 그 밖의 다른 문서들에서 이러한 그의 집념을 볼 수 있다.


 



16세기 유럽은 아랍에서 찾아낸 천 년도 넘게 묵어있던 그리스의 고전들을 붙잡고 해석하고 연구하던 것이 학문의 전부이던 시기였다. 레오나르도 또한 고대 그리스의 4원소설을 토대로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론을 믿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지구는 흙, 물, 공기, 불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흙, 그 위에는 물, 맨 꼭대기에는 공기, 그 주변에는 불로 각각 분리된 4가지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흙과 물은 무거운 원소이기 때문에 아래쪽으로 운동하려는 경향으로 인해 지구 가운데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원래 각 원소들의 성향에 따라 요렇게 생겼지만,
태양의 열이 원소들을 휘저어서 지금처럼 원소들이 뒤죽박죽 된 것이라고 하였다.





 


 


레오나르도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체도 이와 상응하는 4가지 요소(4체액설)들로 순환하며 유지되고 있음을 알았고 그렇다면 인체와 지구가 같은 순환 메커니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멋진 생각을 남들 앞에서 주장하려면 이러한 메커니즘이 실제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를 눈앞에 들이댈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이 멋진 생각을 말이 되게 설명하기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변을 보면 4원소들 중 가장 무거운 흙이 보다 가벼운 물 위로 솟아올라와 산이 되어 있다. 그리고 산 정상에서는 샘물이 솟아 나온다. 이것은 곧 흙과 물이 아래쪽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경향에 반하는 위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마치 혈액(물)이 다리에서 머리끝으로 순환하며 몸을 유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메커니즘을 찾기 위한 레오나르도의 절박한 노력이 [레스터 사본] 전체를 통해 중심 주제로 등장한다.


 



우리 체내에 있는 혈액이 생명체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처럼 지구 내부에서도 인체의 혈관에 해당하는 땅속 지류를 따라 물이 아래뿐만 아니라 위족으로도 움직인다. 높은 산 정상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은 바로 그와 같은 순환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 내부에 있는 어떤 힘이 아래로 흘러가려는 자연스런 경향을 막아 물이 육지를 통하여 위로 올라가도록 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 둘의 작용이 합쳐져 물이 순환한다고 보았다. 레오나르도는 이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발견한다면 인체와 지구 사이의 비유는 상당히 그럴듯한 이론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체 저 물은 어떻게 산 정상까지 올라간 걸까? 

 


 



처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씀에 힌트를 얻어 뜨거운 공기가 상승하는 것처럼 태양열에 의해 뜨거워진 물이 땅속 지류를 따라 위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알았다. 태양과 가까운 산 정상에 있는 물이 오히려 얼음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주장대로라면 가장 뜨거운 한여름에는 산위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의 양이 가장 많아야 하지만 실상은 오히려 가장 양이 적었다.


 
그래서 지구 내부에 있는 열로 눈을 돌렸다. 지구 내부의 열로 인해 땅속 동굴에 있던 물이 끓어 증기의 형태로 변해 산 내부를 뚫고 위로 올라와서 산 정상에서 액화하여 샘물이 되어 분출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주장 또한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증기가 발생한다면 동굴의 천정은 젖어 있어야 하지만 동굴 천정은 종종 바짝 마른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산을 스펀지에 비유했다. 산의 내부가 포화상태에 이르도록 물을 흡수한 뒤 꼭대기부터 찔끔찔끔 물이 흘러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를 기술적인 용어로 차곡차곡 설명할 수 없었다. 게다가 누군가가 짜내야만 물이 지표에서 빠져나와 흘러 나올텐데 산 정상에서는 아무도 산을 쥐어짜지 않는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물이 위로 움직이며 순환하는 메커니즘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레오나르도가 물이 증발될 때 위로 올라가고 이후 비의 형태로 변하여 산꼭대기로 떨어진다는 사실은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지구의 물이 인간의 몸에 있는 혈액처럼 땅속 지류를 따라 아래뿐만 아니라 위로도 물이 움직이는 원리가 필요했다. 혈액은 증발하지도 않으며, 우리 머리에서 비처럼 쏟아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비록 위로 솟아오르는 물에 관한 메커니즘을 찾을 수 없었지만 흙이 위로 솟아오르는 것에 관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액체인 물은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완벽한 공모양을 형성할 것이며 따라서 대양의 표면은 어느 곳에서나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을 것이다. 흙 역시 균일하게 분포해 있다면 지구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부드러운 공모양일 것이다. 그러나 지구의 내부는 균일하지 않다. 지구는 딱딱한 흙, 부드러운 흙, 암석, 동굴, 지류를 따라 흐르는 물 등 아주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흙이 균일하지 않게 분포하기 때문에 지구를 반으로 나누면 한쪽 반구는 다른 쪽 반구보다 무거울 것이다.그래서 지구는 기하학의 중심과는 질량의 중심이 다르다. 한쪽이 다른 쪽보다 무겁기 때문에 질량의 중심이 무거운 쪽의 반구로 치우쳐 기하 중심보다 아래에 위치하게 된다. 지구는 살아 있는 몸과 같기 때문에 균형을 찾기 위해 중력의 중심을 기하학의 중심 쪽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 틀림없다.



 





레스터 사본에 그려져 있는 시소타는 사람의 그림.
시소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선 무거운 사람이 받침대 가운데 쪽으로 움직여야 하고,
가벼운 사람은 더 뒤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지구는 시소를 타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균형을 잡기 위해 지구의 무거운 반구 쪽에 있는 딱딱한 덩어리들은 세계의 중심을 향해 침전해 내려가고, 반면 가벼운 반구 쪽의 암석들은 위로 올라와야 한다. 이렇게 해서 바다로부터 산이 융기되어 올라오게 된다. 따라서 해양 화석이 높은 언덕에 위치하는 것은 지구의 가벼운 쪽 반구가 융기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선 땅이 실제로 융기했다는 관찰 증거가 필요했다. 이것을 확증할 수 있는 최적의 증거들이 이미 고대 그리스 과학 이래 잘 알려져 있었으며 엄청난 논쟁을 촉발했던 높은 산의 지층에서 발견되는 해양생물의 화석이었던 것이다.


 



[레스터 사본]에서 보이는 고생물학적 관찰들은 이러한 이유에서 레오나르도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흔히 생각하듯 화석이 물 속에서 살던 것이기 때문에 물에 대해 다각적인 설명을 시도하고 있던 레오나르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 아니었다. 물의 운동을 설명하는데 실패한 것과 달리 화석들은 흙의 운동을 증명해줄 수 있으며, 지구가 인체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자활 가능한 살아있는 유기체임을 주장하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화석을 연구한 것이다.


 


그는 상세한 관찰력으로 이론의 증거를 수집했고 이 과정에서 고생태학에서 이루어지는 기본 규칙의 근간을 제공하였다. <끝>


* 참고 및 발췌:


   스티븐 제이 굴드, “레오나르도가 조개화석을 주운 날”, 세종서적


영진공 self_fish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조개화석 (1/2)


 


 


 


 










 


 


레오나르도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과 같은 세기의 걸작을 비롯하여 예술, 수학, 물리학, 해부학, 건축학, 공학, 광학, 천문학, 지질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넘나들던 호기심 대마왕이자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천재였다.


 


레오나르도가 사후에 남긴 것은 비교적 적은 15점의 회화 작품과 방대한 양의 소묘와 메모다. 그러나 당시 그의 육필 문서들은 매우 가까운 지인 외에는 동시대인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그의 유산을 상속한 프란체스코 멜치Francesco Melci가 회화에 관련된 문서를 선별해서 엮은 [회화론]을 내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1570년 멜치가 죽은 직후부터 다 빈치의 노트와 메모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서유럽 각지의 왕족, 귀족의 서고에 고이 쳐박히게 되었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꼬추 아이콘이 된 레오나르도의 스케치


 


 


레오나르도의 문서들은 20세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문서들에 담긴 내용이 호기심 닿는 대로 손댄 개별적 관찰이나 순간 떠오른 생각을 급히 휘갈겨 써 둔 메모에 불과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가 역학과 수학 분야에서 남긴 메모들 전부가 그의 독창적 사색의 결과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현재 판명되었다. 예술적인 부분과 건축의 일부분을 제외하면 레오나르도의 기술연구에서는 독창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학자들의 야박한 평가다. 그럼에도 탁월한 관찰력과 미대생도 부러워할 데생력 그리고 권위나 거창한 말 보다는 직접 손발로 실험해보는 솔선수범 장인 기질은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문서들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순간의 단편적인 아이디어들을 적어놓은 데다가 속어인 토스카나어를 좌우 반전시킨 독특한 문자를 사용해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쓰여 있으며 거울로 글자를 반사시켜야 읽을 수 있는 장치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만 아는 기호들을 사용하였기에 동시대의 이탈리아인이라 해도 간단히 읽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즉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노트가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관찰과 생각들을 수많은 메모로 남겼지만 그것들을 잘 정리해서 논문이나 책으로 완성시킨 적은 없다. 원래 레오나르도는 개개의 관찰력에선 무척 뛰어났지만, 이를 일반화하고 체계화하려는 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레오나르도의 연구가 자신을 위해서만 이뤄졌을 뿐, 널리 동시대인을 계몽시키려는 목적은 없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유명하긴 했지만 그가 행했던 과학과 기술의 연구가 동시대에 미친 영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암호 같은 문서들은 후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특이한 기계 장치들과 멋들어진 스케치, 암호와도 같은 글들은 소설의 소재로서 매우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레오나르도의 종교적 성향도 눈길을 끈다. 그는 ‘최후의 만찬’을 그린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예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자신의 종교적 성향을 과감하게도 작품에 몰래 표현해 놓았다.


 


 





레오나르도가 여러 메세지들을 숨겨놓은 ‘최후의 만찬’.


그는 세례 요한의 자리를 빼앗은(?) 예수를 싫어했다. 


 


 


2000년대 등장했던 댄 브라운의 소설 [다 빈치 코드]는 이러한 레오나르도의 특징들을 잘 활용하여 만든 작품이다. 작가의 치밀한 연구와 작품의 개연성으로 인해 일부 고지식한 기독교도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진실인가에 대한 해설서가 책과 영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면서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영화로도 대박을 친 다빈치 코드


 


 


이처럼 레오나르도는 그가 남긴 뛰어난 회화작품들과 데생들로 인해서 흔히 예술가나, 더 넓게는 독특한 기계장치 그림들을 그린 공학자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자연과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지질학과 화석연구에 있어서도 많은 관찰과 연구를 하였다.


 


레오나르도가 쓴 것 중 가장 주요한 노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레스터 사본Codex Leicester]은 그가 1506년에서 1510년 사이에 밀라노에서 작성한 72쪽짜리 공책으로 바위, 물, 화석에 대한 스케치와 해부학에 관한 글들로 채워져 있다. 1690년대에 세상에 알려졌으며 1717년에 레스터 경(卿)이 사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레스터 사본]으로 이름이 불려지게 되었다.


 


1994년 경매에 등장했을 때 [레스터 사본]에 군침을 흘린 대여섯 개의 유럽 국가들이 가격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빌 게이츠가 3080만달러(418억원)의 거액을 제시하여 ‘대여섯 개의 유럽 국가들’을 제치고 그 원고를 사들이는 재벌의 위엄을 보였다. 빌 게이츠는 해마다 [레스터 사본]의 전시를 원하는 곳에 대여해 주지만 책의 훼손을 막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까다로운 전시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은 대여를 신청했다가 조명시설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기도 하였다.


 


 





국가와 경매를 붙어도 절대 밀리지 않는 빌 형님


 


 


[레스터 사본]에서는 댄 브라운의 소설만큼이나 흥미로운 레오나르도의 지구순환 이론을 엿볼 수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레스터 사본]에서 드러나는 레오나르도의 지구이론을 그의 에세이에서 자세히 소개하였다.


 


 





이거슨 세상에서 제일 비싼 공책!


 


 


* 2부에서 계속 됩니다. *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