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 교육감이 사퇴하면 안되는 이유




이번 곽노현 교육감 금품제공 건의 사실관계는 단순합니다.

당선자가 당시 경쟁후보자였던 이에게 선거 이후에 금품을 제공했다는 것.

이게 답니다.

여기서 문제는 “왜” 주었는냐인데 이 또한 단순합니다.

1. 지인의 곤란한 사정이 딱해서 “선의”로 지원한 건지,

2. 사전에 어떤 약속이 있어서 후보포기의 대가로 준 건지,

이것만 규명하면 됩니다.

1.의 경우라면 미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닥 문제삼을만한 일이 아닙니다.
2.의 경우는 범법이므로, 사실로 밝혀진다면 당연 자격박탈이고 처벌이 뛰따릅니다.

이러한 사실관계와 실체규명에 있어서 “사퇴”라는 방식은 별 연관성도 없고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왜 이슈가 되고 있는지 좀 아리송합니다.



⊙ 지금 시점에서의 사
퇴는 범법 인정을 의미한다.

곽 교육감은 이미 금품을 준 사실을 인정했으며, 이는 선의에 의한 행동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퇴여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떳떳하기에 사퇴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사퇴를 한다? 그 사퇴의 변이 얼마나 진정성이 담긴 고뇌의 토로가 될지 몰라도 이는 곧 선의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으며 떳떳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떳떳하다면 사퇴하면 안될 일이며, 떳떳하지 못하다면 사퇴가 아니라 자백을 해야겠지요.

그리고 실체규명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과 자기 정파의 이익을 계산하여 사퇴를 압박하는 이들은 그에게 사퇴를 종용할 게 아니라 죄를 인정하라고 윽박질러야 맞는 표현이 될 겁니다.

사퇴의 시기는 지났다.

도덕적 견지라는 면에서라도 사퇴를 선택할 수 있는 시점은 지났습니다. 최초 금품을 준 사실을 인정하던 당시에 물의를 일으킨데 대한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여 사퇴를 선택하였다면 모를까, 이미 그런 명분을 취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젠 길고 힘든 과정이 되겠지만, 검찰 수사와 이어 있을지 모를 재판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선의”의 진정성을 밝히거나 또는 그와 반대로 대가성이 밝혀지든가 하는 것이 오히려 도의적 책임을 다하는 일이 되는 겁니다.

사퇴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교육정책이 표류하니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글쎄요, 금품을 준 사실을 인정한 시점부터 정책수행의 표류는 시작된 겁니다. 이 표류가 사퇴로 인해 되돌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퇴로 인해 그 정책의 당위성이나 정당성에 대한 평가가 더해지거나 덜해지지도 않습니다.

조직은 최고 책임자가 있어야 돌아갑니다. 정책은 그 책임자가 얼마나 성의있게 챙기느냐에 따라 진도가 결정됩니다. 그나마 책임자가 없으면 정책은 표류가 아니라 정지가 되고, 다른 성향의 책임자로 대체되면 아예 폐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 정책을 반대하는 측은 책임자가 빨리 사라져서 정책이 정지되고 속히 자신들의 정책으로 대체할 사람을 넣고 싶어할 것이며, 찬성하는 측은 그나마 책임자가 남아서 그 정책이 적어도 정지되는 것은 막고 싶어할 겁니다.

결국 상황이 변하는 건 없고 다만 손익계산서만 남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번 건에 있어서 사퇴라는 방식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혼란만 더 할 수 있습니다.

당사자가 “선의”를 주장하고 있고 상대방이 “대가”를 주장하는 상황에서는, 서울시 교육행정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를 가릴 수 있는 공권력에게 판단을 맡기는 게 가장 합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정파들은 이 건에 대해 지레 판단을 내리는 것을  자제하여 조속한 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조하여야 하고, 검찰은 늘상 하시던대로 공정한 수사를 진행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나름의 기준으로 판단하겠습니다.

영진공 이규훈

 

그대, 혹시 꿈을 죽이셨나요 …

 

“朝聞道 夕死可矣”
뜻인즉슨,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나 같은 필부야 아침에 도를 들어도 그게 뭔줄 알지 못하겠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도를 얻었으면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즐겨야지,
왜 죽어도 좋은 것이냔 말이다.

어렵사리 얻은 걸 잘 간직하고 가끔 꺼내어 보여주기도 하고 은근히 자랑도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의 즐거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그게 그런게 아닌가 보다.
난 도가 무슨 100평짜리 아파트나 현금 50억 쯤이나 되는 건 줄 안 건가 보다.
도는 깨우침이요, 살아가는 길인데 난 그걸 물질로 생각하여 소유하는 건줄 안 거다.
그러다 오히려 소유에 내가 노예가 되어버린 거다.

왜 그런 걸까.
왜 난 모든 걸 물질로, 소유로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가.
내 삶의 조건을 부유하게 그리고 편하게 해 줄 것에 얽매여,
도리어 스스로 거기에 삶을 종속시키는 우스꽝스러운 꼴을 자초하고 있느냔 말이다.

삶을 소비로 알고, 물질의 많음을 권력으로 계산하는,
그래서 꿈을 욕구로 대체하는 걸 미덕이라 아는 지금 나의 모습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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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각 지방단위별로 교육감 선거를 치르고 있고, 서울에서는 내일(7월 30일) 투표를 한다.
그래서 여러 후보들이 저마다의 교육관을 내세우며 선출을 호소하고 있다.

그걸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교육이라? … 뭘 가르치는 걸까? … 누군가에게 뭘 가르친다는 게 과연 가능한 걸까? …”

‘이것이 옳으니 이리 하여야 한다’ 또는 ‘저것이 그르니 저리 하지 말거라’ 라고 제시하고 그대로 따르라는 건 강요나 주입이지 교육이 아닐 것이다.

사실을 보여주고 이를 해석하는 다양한 시각과 방법을 제시하면서 함께 토론하여 스스로의 판단과 방법론을 정립하도록 서로 돕는 활동,

그런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분석과 해석 그리고 전망을 할 수 있는 종합적 사고 능력이 발전되도록 하는 활동,

그게 교육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하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가 절대진리라 “배웠고”, 그리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인간’이 되라 “배웠다”.

자, 그건 그렇게 배웠으니 됐고 … 그리고는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남들보다 일점이라도 더 받고 남들보다 반발짝이라도 빠르게 세상에 적응하는 요령을 외우고 몸으로 익혔다.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학 공식을 외우고, 소설과 시의 의미를 외웠다.
그러면서 경쟁에서 앞서야 대우 받는다는 걸, 어떻게든 눈에 띄고 능력있어 보여야 무시 당하지 않는다는 걸 온 감각으로 체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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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다시 우리의 아이들이 배우고 겪게 하겠는가?
그걸 “교육”하겠는가?

돈 있으면 편하고, 성공하면 잘 나가고, 권력을 쥐면 무시 당하지 않는다 …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변치 않는 진리가 아니다.
강요하고  주입할 무엇이 아니라 각자가 선택할 여러 길 중 몇 가지일 뿐이다.

‘나라에 충성’함을 원한다면 스스로 그 당위성과 방식을 찾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부모에 효도’를 원한다면 복종과 고득점 고연봉 이외에도 많은 길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길을 찾고 어려우면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고집도 부리고 다툴줄 아는,  
그렇게 자기를 아끼고 남을 존중하는 이들이 실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대,
혹시 꿈을 죽이지 않았나 …
길 가 어느 한 켠에 스러진 꿈을 외면하고 욕망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는가 …

나 그리고 그대,
그걸 탓하지 말자.

허나 …
나의 욕망을 우리 아이들의 꿈에 억지로 우겨 넣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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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꿈은 그저 꿈일 뿐이지만, 함께 추구하는 하나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진다." 오노 요코


영진공 이규훈
 
 



그 소식 이제 듣게 됐어 크게 놀라진 않았지,
버려진 마음 구석 어느 벌판에 마치 벌레와 같이 비참히,
한때 친한 친구였던 내 꿈이 죽어있다고,


그 소식 이제 알게 됐어 눈물은 나지 않았지,
눈썹을 찌푸리고 아주 오래 전 모습 더듬어봐도 흐릿해,
한때 친한 친구였던 내 꿈이 죽었다는데,





도대체 난 그 언제부터 그를 버리고 살아온 건지,
숨가쁜 세상에 홀로 살아남으려 덤을 줄이고 싶었는지,
어떻게 난 그 오랫동안 꿈을 버리고 살아왔는지,


이제야 무서운 진실을 알게 됐어,
어쩜 내가 내 손으로 내 꿈을 죽였다는 걸,


어쩜 내가 내 손으로 내 꿈을 죽였다는 걸 …

[세상은 랄랄라] 인디아나 존스와 실용정부

 

언제나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막 돌아온
겨털 시사풍자 흠좀무 버라이어티
세상은 랄랄라
에피 26 인디아나 존스와 실용정부”

영진공

우리 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못해서 문제라고?

몇년 전에 우리나라에 온 하버드대 교육학과 교수인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의 영어 열풍은 미국의 다이어트 열풍이랑 비슷하다.
미국에서 다이어트 산업은 갈수록 커지고 다이어트에 쏟아붓는 비용도 갈수록 늘어남에도
오히려 비만인구 숫자는 더 늘어나는 것 처럼, 한국에서 영어교육에 열광하는데도 정작 영어 실력은 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간단히 말해서 영어를 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제 주변 사람들, 우리나라에서 몇년 지내면 서서히 영어 듣기 말하기가 약해진다고 말하더군요.
왜? 이유는 뻔하죠. 평소에 영어를 쓸 일이 없으니까요.

영어를 쓸 일이 생기려면 자꾸 외국인들을 만나야 하고 같이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원치 않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외국 사람들과 같이 일하려면 지금 우리가 익숙한 시스템을 버려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우리가 익숙한 시스템은 폐쇄적인 학연 시스템입니다.
서울대학교의 세계 랭킹은 좋게 봐줘서 1백위 내외지만,
외국에서 훨씬 랭킹이 높은 대학에서 그만큼 더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이
국내에서는 서울대 출신에게 밀릴 수 있습니다. 실력만 있고 학연이 없다면 말입니다.

서울대의 저력은 대학 자체의 우수함이 아니라 서울대 졸업생들이 만들어놓은 네트워크의 힘에서 나옵니다.
이런 네트워크는 원래 폐쇄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들끼리의 기준을 사용하기에 기본적으로 외부와의 교류를 하면 그 내부기준들이 흔들립니다. 혼란이 생길 뿐이죠.

외국엔 이런 네트워크가 없냐고요?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만큼 심하진 않습니다.
일단 외국의 학계는 단 하나의 우수한 대학과 그 이하 대학으로 줄세우기가 쉽지 않죠.
그러니까 네트워크가 있어도 그 네트워크 자체가 다원적이라 폐쇄성이 어느 정도 상쇄됩니다.
물론 미국도 유럽도 어디쯤 부터는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지만, 우리나라는 그 리그가 거의 대부분을 점유한다는게 문제죠.
이런 시스템에서는 네트워크에 편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편입한 이후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합니다.
서울대 망국론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도 그겁니다.
네트워크에 의존하다보면 결국 우물안 개구리 그 자체가 되거든요.
여기서는 “폐쇄 네트워크 안에서만 최고인 인간들” 이 바로 그 우물 안 개구리죠.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서 영어에 목을 맬까요?
어차피 그 영어 잘하는 직원들 뽑아놓고 1년에 한 두번 외국과 전화통화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왜?

지금 우리나라에서 영어는 국제화 시대에 외국과 교류하기 위한 언어로서의 가치 보다는 일종의 거름망으로서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토플이나 토익은 21세기의 과거시험이 아닙니까.  그걸 가지고 사람들을 줄세우는 거죠.

그러니 지금 우리나라의 영어교육 열풍, 조기유학 열풍은
국내 학교에서 영어를 잘 가르치면(물론 잘 가르친다는 보장도 없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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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무슨 용가리 통뼈가 있어서 국내 공립학교에서 영어교육을 100% 확실하게 실시했다고 치죠.
그러면 정말 큰일나버립니다. 모두 비슷비슷한 수준으로 영어를 하고 비슷비슷한 수준의 토익 토플 점수를 받으면
차별성 지표로서 영어의 가치가 사라지거든요.
그럼 사교육과 학부모는 합심해서 다른 차별성 지표를 찾아나서야 됩니다.

수능을 갈수록 쉽게 내서 수능 상위권 점수자들의 비율이 갈수록 높아질수록 과외 열풍이 부는 이유랑 똑같습니다.  수능으로 차별을 못하니까 다른 차별 지표를 억지로 찾아내려다 보니 사교육이 커진거죠.

그럼 왜 차별을 해야 하나고요?
왜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너무 비슷비슷한데, 그 원하는 것은 얼마 없거든요.
그것은 바로 괜찮은 직업들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괜찮은 직업을 놓고 벌이는 제로섬 게임장입니다.

백명의 사람이 열개의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경쟁을 하면 결국 그 백명중 열명을 골라낼 방법이 필요해집니다.
지금 영어가 바로 그 기능을 하고 있죠. 영어가 아니라면 뭐든 상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괜찮은 직업이 열개로 고정되어 있는 한 계속 될 겁니다.

결국 미친 조기교육, 비대해진 사교육, 무너져내리는 공교육, 영어 열풍의 원인은
모두가 원하는 괜찮은 직업이 너무 적다는 절대적인 상황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기업이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 고용을 늘리고,
하청에 재하청에 재재하청을 줘가면서
정작 일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몫 보다는 중간에서 떼어먹는 몫이 더 큰 상황을 개선하고
대학이나 영어로 취득할 수 있는 괜찮은 직업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로로 괜찮은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길들이 열리면
미쳤다고 누가 영어 열풍에 동참하겠습니까.

근데, 새 정부는 이 문제를 아주 순진하고 아마추어 스럽게 접근하는군요.
(물론 사실은 사교육업체와의 결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악의적 해석은 한동안 참겠습니다.
아무나 지들 맘에 안들면 빨갱이라 주절대며 온갖 곡해를 일삼던 인간들과는 달라지고 싶거든요)

지금 인수위가 내놓은 아이디어의 골자는 우리나라 공교육 환경을 미국 학교처럼 바꾸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유학갈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거죠.

일단 우리나라 교사들이 영어 수업을 제대로 한다는 보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앞서 말했듯 혹시 만에 하나 성공한다고 해도 그게 문제 해결은 아닙니다.
다른 사교육의 탄생을 가져올 뿐이겠죠.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