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허슬” 출연진 만큼이나 음악이 빵빵한 영화

출연진의 빠방함으로 이미 판단할 수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아도 안 되는 영화는 안 되죠. 그런 면에서 <아메리칸 허슬>은 좋은 예상이 더 좋은 결과로 나타난 영화입니다. 미국서는 2013년 개봉이지만, 한국서는 2014년 개봉이니, 개인적으로 올해의 영화 후보 0순위로 올려놓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에이미 아담스를 그냥 이쁜 여배우로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통해 최고의 여배우로 자신있게 꼽게 되었구요, 크리스천 베일의 변신과 연기도 환상이고, 정서 불안 역할에는 이제 여배우로 제니퍼 로렌스를 능가할 사람이 있을까 싶어집니다. 정서불안한 끝 간 데 없는 섹시함, 그리고 액션 히로인까지 … 안젤리나 졸리가 브란젤리카로 걍 셀러브리티가 되어 버린 지금 그 자리를 차근차근 다 차지하는 느낌입니다. 좀 측은하기도 한 또라이 역할의 끝장판입니다.

브래들리 쿠퍼, 제레미 레너, 깜짝 등장 로버트 드니로, 그 밖의 모든 배우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환상적인 연기를 펼쳐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197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1970년대의 정서가 진득하게 느껴지는 사운드트랙이 영화의 즐거움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거의 1970년대 미국 주류 팝계 총결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류 팝, 록, 디스코 장르를 널뛰며 환상적인 노래들이 영화 내내 흘러나옵니다. 더 흥미로운 건 이 노래들이 그냥 좋아서 나온 게 아니라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이나 느낌, 복선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음악감독은 대니 앨프먼입니다만, 대니 앨프먼이 각 등장인물들에게 부여한 테마보다 당대의 히트곡을 통해 생각하게 만드는 게 더 많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장면, 장면 삽입된 노래를 알면 두 배는 더 재밌는 작품이 됩니다. 그리고 그 노래들의 내용이나 약간의 스토리까지 알면 세 배는 더 재밌어 질 겁니다. 그래서 영화의 스포일러를 최소화 하면서 영화에 삽입된 노래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OST로 발매된 CD에는 15곡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데니 앨프먼이 작곡한 크리스천 베일이 연기한 어빙의 테마 곡도 있습니다. 즉 현재 발매된 OST에는 영화 크레딧에 명기된 29곡 중에 절반 정도밖에 확인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나 의미를 알면 훨씬 더 영화의 재미가 확대될 곡들도 꽤 있습니다. 29곡 모두를 훑어볼 순 없고, 주요한 곡들만 살펴보겠습니다. OST 수록곡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곡도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노래들이 아주 진득합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을 엮어주는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Jeep’s Blues”는 영화의 오프닝, 만남 씬, 크레딧에 모두 등장하죠. 두 남녀가 듀크 엘링턴에 극찬을 보내는데, 사실 그것도 되게 웃기는 겁니다. 듀크 엘링턴은 한국에서도 재즈 팬이라면 다 아실테고, 미국서는 스티비 원더가 “Sir Duke”로 경의를 표할만큼 1930년대 아프리칸 아메리칸 아티스트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재즈 아티스트 입니다.

거기에 1974년 사망과 함께 미국사회에서 재조명을 받았기에 1978년에 이미 사기업계에서 이름을 알린 두 남녀가 만난 시점 즈음에 이 둘이 듀크의 이름을 들어보고 음반 한 두 장 아는 건 당연할 겁니다.

근데, amazing을 외치며, 어떻게 듀크는 이런 사운드를!를 외쳐대는 둘의 대화 자체가 두 사람이 사기꾼이라는 걸 증명합니다. 이 곡이 분명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작품이지만 실은 오케스트라의 핵심 멤버였던 색소포니스트 자니 호지스의 곡이기 때문이죠. 제목부터 자니 호지스의 별명이고, 듀크와 자니의 공동 작곡이며, 자니의 플레이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 베일이 충격의 올챙이 배를 보여준 후, 더 큰 쓰나미를 머리로 보여주시는 인트로에 흐르는 음악은 영국밴드 America의 첫 히트곡 “A Horse with No Name”. 이름 없는, 심지어 이름을 남길 수 없는, 그러나 열심히 달리는 말의 이미지는 영화 내내 반복되는 것이죠. 거기에 크리스천 베일, 에이미 아담스, 브래들리 쿠퍼가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며 자막이 흐르는 장면에는 OST에 수록되지 않은 스틸리 댄의 “Dirty Work”가 등장합니다. 제목과 가사 내용도 그렇고, 심지어 이 앨범이 수록된 스틸리 댄의 데뷔 음반 제목은 『Can’t Buy a Thrill』입니다. 앨범 제목에 곡명까지 영화 도입부에 영화가 하고픈 얘기가 다 드러나죠.

이 영화에는 ELO의 노래가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Electric Light Orchestra … 한때 한국의 FM에서도 이들의 음악을 자주 들을 수 있었지만 언제나 B급 냄새를 풍겼죠. 핑크 플로이드, 퀸, YES, 탐 패티 등의 밴드가 개척한 새로운 사운드의 세계를 쉬운 멜로디로 우려먹는 듯한 느낌이었달까요.

신념 있는 정치인의 현실적 한계를 표현하는 제레미 레너의 시장 역할 소개 장면에 흐르는 곡이 있습니다. OST에는 수록되지 않았는데요. Frank Sinatra의 “The Coffee Song”입니다. 그런데, 이 곡의 부제가 “They’ve Got An Awful Lot of Coffee In Brazil”입니다. 브라질은 아니지만 이 시장이 자신의 신념과 정치적 모든 것을 걸고 벌이는 도박도 역시 미국 밖 무엇이죠.

돈 많은 아랍 수장이 등장하는 파티 장면에서 저는 빵 떠질 수 밖에 없었는데요, Jefferson Airplane이 부른 사이키델릭 록의 명곡인 “White Rabbit”이 아랍어로 흘렀기 때문이지요. 최고의 킬러 출신 로버트 드 니로와 만난 힘 없는 하얀 토끼라니 … 거기에 아랍어라뇨. 물론 원작의 흰 토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 얘깁니다. 그러나 아랍어로 바꿨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저 초특급 킬러 앞의 토끼만 알면 되죠. 물론 이 노래를 몰라도 그냥 아랍어로 된 긴장감 넘치는 곡이라고 넘겨도 되긴 합니다. 여튼, 레바논계 미국인 여가수 Mayssa Karaa에게 이 곡을 다시 부르게 한 건 거의 신의 한 수였습니다.

크리스천 베일의 두 여인이 만났을 때 흐르는 비지스의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도 제목이 죽이죠. 비지스가 디스코의 제왕이 되기 전, 발라드 그룹으로 날리던 시절 곡이죠. 이 노래의 주인공인 에이미 아담스와 Paul McCartney & Wings의 “Live and Let Die”가 표상하는 제니퍼 로렌스의 대비가 환상이죠.

제니퍼 로렌스의 헤드 뱅잉이 돋보이는 이 “Live and Let Die”는 폴 매카트니가 비틀즈 해산 후, ‘존 레논 너만 마누라랑 음악 하는 줄 알아?’하면서 결성하신 윙즈의 노래죠. 영화 <007 죽느냐 사느냐>의 수록곡이기도 하구요. 하드록/메탈 팬이라면 Guns & Roses의 버전으로도 유명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지만 한 쪽은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한 쪽은 죽거나 살거나 내꺼만 외치는 대비도 좋고, 두 곡 제목은 두 사람의 미래이기도 하죠. 스포일러가 될테니 그 이상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2시간 20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푹 빠져서 본 영화였는데, 일부에선 한 방 없이 자잘한 얘기를 주욱 늘어놔서 잔재미만 있었다고 평하는 분도 있더군요. 역시 취향은 다양한 겁니다. OST도 그렇겠죠. 1970년대인데 이 노래를 빼먹었다면 무효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 정도면 최고의 곡들을 모아놓은 데다가 영화의 내용과 호흡이 딱이니 더 바랄게 없는 수준입니다. 연초부터 그 자체로도 좋고, 추억과 더해지면 금상첨화로 즐기실 수 있는 영화 한 편 만나서 기분이 좋습니다.

“파이터”, 영웅 아닌 평범한 인물들의 감동 실화


최근 헐리웃 영화의 한 가지 경향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실화”를 극영화로 재연하고 있는 작품들이 자주 눈에 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파이터>는 권투를 소재로 하는 평범한 스포츠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픽션이 아닌 실화이기 때문에 ‘최근의 경향’에 부합하는 작품이다.

이와 유사한 영화로 작년 4월에 국내 개봉했던 <블라인드 사이드>(2009)를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두 작품 모두가 실화이고 스포츠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가족 드라마이기도 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안에는 수퍼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감동의 메시지를 발굴해내려는 노력이 담겨있는데, 물론 노력의 이유는 최근에 이런 류의 이야기가 그 만큼 잘 팔리기 때문이렷다. 그리고 아마도 비교적 저렴한 예산으로도 꽤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평범한 인물들의 감동 실화’라는 건 전통적인 극장 상영용 영화의 영역이라기 보다 – 물론 보통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가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화는 아니었다 – <오프라 윈프리 쇼>와 같은 TV 프로그램의 영역이란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아침마당>이나 <인간시대> 같은 프로그램이고, 이런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실제 인물들의 사연과 그 안의 감동 코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최근에 왜 이런 이야기들을 더욱 부지런히 발굴하고 또 영화화까지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 정말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검증과 함께 – 좀 더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따라서 <파이터>라는 작품이 그 자체로 유난한 영화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다루기에 따라서는 아침 대담 프로에 실제 인물들이 나와서 진행자와 함께 50분 정도 채워주는 정도만으로도 제 역할을 충분할 수도 있을 법한데, 그 중에 <파이터> – 니키 에클런드와 미키 워드 형제와 그 가족들 – 의 이야기가 유독 각별하게 받아들여지고야 마는 이유란 결국 이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의 힘인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을 통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그외 여러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전부 쓸어모으며 만장일치의 지지를 이끌어낸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는 2000년작 <머시니스트>를 통해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만큼의, 기대할 수 있었던 것 이상의 경지를 보여준다.

더군다나 우리는 이 배우가 최근에 다시 만들어져서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수퍼히어로물과 SF 블럭버스터에서도 주연 배우로 활약 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크리스찬 베일과 달리 마크 월버그는 어느 작품에 나오건 똑같은 마크 월버그만 보여주다가 마는 편이지만 – 마크 월버그가 별로인 것이 아니라 크리스찬 베일이 워낙 연기의 지존이라 이런 식으로 비교가 되는 것일 뿐! – 이번 <파이터>에서는 직접 제작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나서면서 평소에 하던 그 이상의 몫을 해냈다고 생각된다.

나탈리 포트먼이 <블랙 스완>(2010)을 위해 1년 전부터 발레 훈련을 해왔다는 대목에서 가점을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파이터>를 위해 무려 4년 전부터 몸 만들기와 권투 훈련을 했다는 마크 월버그의 열정에 대해서는 – 그러면서도 자신의 출연료는 한푼도 챙기지 않았다는군요. 크리스찬 베일은 전체 제작비의 1% 수준인 25만불을 받았다고 합니다 – 도대체 뭐라고 칭찬을 해줘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다. 마크 월버크도 이제 그만 아이돌 가수 출신 배우라는 딱지를 떼고 뭔가 다른 전기를 마련하고 싶어하는 듯 한데 아쉽게도 그런 전환점이 그리 쉽게 주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디키(크리스찬 베일)와 미키(마크 월버그)의 인터뷰 장면은 각본에 미리 짜여졌던 장면이 아니라 데이비드 O. 러셀 감독과 세 명이서 즉흥적으로 촬영한 것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순간에 크리스찬 베일이 살짝 울컥하려다 마는 연기를 보여준 부분이 참 좋았다.

어찌 보면 이 장면은 영화 전체적으로 감동을 강요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해서 관객들에게 무언가 감정적인 방향성을 잡아주기 위한 부가적인 연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과하지도 않았고, 이런 정도의 개입은 극영화에서는 오히려 바람직한 편이라 생각한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