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공 62호]정지영 사태의 본질

언론중재위원회
2006년 10월 25일

몇 년 전, 모 아나운서가 자신이 낳은 아들이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괴소문에 시달렸다. 그 아나운서는 줄기차게 친자감별을 주장했는데-희한하게도 남편이란 작자는 계속 검사에 불응했다-나중에 검사를 해보니 남편의 아들이 맞았고, 완전히는 아니지만 명예는 회복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괴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소송을 제기했다. 자신이 무고하다고 믿었기에 그녀는 시종일관 당당할 수 있었던 것.

마시멜로 이야기의 번역 파문이 일었을 때, 출판사는 ‘이중번역’이란 신조어를 만들면서 정지영 아나운서를 감싸기 바빴다. “정지영 씨 모르게 한 일이다, 정말 죄송하다” 이래가면서. 그럼에도 사람들은 채택이 되었든 안되었든 정씨가 번역을 했는지 안했는지를 궁금해했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정씨가 번역한 원고를 내보이면 되는 것. 원고만 있다면 정지영은 피해자가 되는 것이고, ‘이중번역’을 의뢰한 출판사가 모든 죄를 뒤집어써야 한다. 그리고 정씨는 자신에게 의혹을 제기했던 사람들을 찾아 소송을 제기하면 된다. 하지만 정씨는 시종일관 침묵했고, 일주일의 칩거가 끝난 뒤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발표했다.

“처음부터 꼼꼼하게 확인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저의 잘못을 충분히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시간을 겪으면서 저도 너무나 지치고 힘들었습니다.”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바보는 아님에도 난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번역을 했다는 걸까, 안했다는 걸까? 그녀가 정말로 번역을 했다면 번역료로 받은 8천만원을 ‘사회에 환원’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건대 난 정지영이 거의 번역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녀의 번역본이 존재한다면, 그녀 스스로 공개하지 않는다 해도 출판사에서 먼저 그걸 공개했으리라. 이메일이든 원고든 출판사에서 원본을 보관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신조어까지 만들며 정지영을 감쌌던 출판사에서는 ‘이중번역’ 사실은 인정했지만 정씨에게서 마땅히 받았어야 할 원고는 끝내 제시하지 못했다. 정씨가 시간을 끄는 건, 출판사에서 정씨를 위해 번역본을 새로 쓰고 있어서 그러는 걸까?

정씨를 옹호하는 네티즌들은 이 사태를 ‘마녀사냥’으로 규정하고 돈을 돌려주고 방송도 그만두었으니 그만하라고 한다. 말도 안되는 얘기다. 무고한 사람을 마녀로 몰아 화형시키는 게 마녀사냥이었다면, 사기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사람에게 “진실을 밝히라”고 하는 건 ‘미녀사냥’은 될지언정 마녀사냥은 아니다. 그들은 또 원 번역자가 계약을 위반하고 사실을 공표한 걸 원망하지만, 4차례의 사인회를 하고, “하루에 100쪽을 번역했다”고 떠들어댄 정씨의 경솔함이야말로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원인이다 (그 말에 열이 받은 전문번역가 권남희는 지난달 말 ‘번역하는 아나운서’라는 칼럼을 국민일보에 실었고, 그 이후 파문이 확산되었다).

이 사건의 진정한 원인은 뭘까. 바로 우리의 후진적인 독서풍토다. 유명 아나운서가 번역을 했다는 이유로 책이 팔리고, 지지도도 안높은 노무현이 탄핵 때 <칼의 노래>를 읽는다니 죄다 그 책을 읽고, 삼순이에 나왔다는 이유로 <모모>가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러니 출판사가 유명인 마케팅을 하고, 베스트셀러에 자사의 책을 올리기 위해 사재기 공세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아는 한 저자는 책이 나올 때마다 자신이 직접 교봉에 가서 사재기를 한다. 이름이 두글자다). 스스로 책을 고르기보단 책과 별반 상관도 없는 유명인에게 계속 휘둘린다면, 제2 제3의 정지영 사태가 일어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고 그때는, 당연한 얘기겠지만, 훨씬 더 정교한 방법으로 작업이 진행될 것이다.

독서풍토개선위, 언론 플레이를 공격하라!
서민(bbbenji@freechal.com)